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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막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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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강종수 목사 |
| 참고 : | 2014. 12. 14 주일 오전 설교 http://cafe.daum.net/st888 |
성경 : 막6:1-6
제목 : 예수는 촌사람인가?
막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아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놀랐지만 뭐 우리와 같이 자란 촌사람 정도로 비하하고 배척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나보다 문화적으로 좀 약하면 촌놈이라 말하는데 그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특히 예수에 대해 그런 식으로 비하하면 두 가지로 큰 손해를 봅니다. <예수는 촌사람인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예수를 일반 사람으로 알면 영생을 잃습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입니다(요6:40).
영생을 얻는 이 신앙은 마11:27에 하나님의 계시로 얻게 된다고 하셨고, 이 영생신앙은 한 번 믿게 되면 영원히 잃지 않는다고 요18:9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어떻게 알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직면할 수 없고 역사에 오신 그 아들을 보므로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에(요14:9) 예수님은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1)출신은 요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2)가문은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3)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요1:18,16:27),
4)인격은 성자하나님이 되신다고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451년 콘스탄틴노플에 가까운 칼케돈에서 신인양성 확증).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께서 제자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마16:14 ‘..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고들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오해를 하거나 잘못 가르쳐 영생도 복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1960년대 후반에 라틴아메리카에서 태동한 해방신학은 식민통치를 받는 나라와 산업화 속에 경제적 불평등으로 빈곤하게 사는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교회가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는 소위 정치신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란 말 대신 삶의 희망을 말하고 내세보다 현실에 대한 신학적 거론을 했지만 결국 공산주의와 흡사한 사상으로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 영향으로 1970년 초기에 한국에서는 서남동, 안병무 같은 분들에 의해 소위 민중신학이 발생했는데, 민중신학은 약자의 한을 풀어줄려는 의도를 표하여 마치 민중은 죄가 없고 구원은 문화적 구축으로 해석하는 유사 맑스주의의 사회운동으로 비판되고 있습니다.
*1966년에 상황윤리라는 책을 쓴 플레처(미. J. Fletcher)의 신학은 가령, 낙태에 관계해서, 낙태가 사람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결과라면 허용되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죄라 할 수 없다는 식입니다.
*한국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 교회도 물질주의로 변하면서 잘 사는 게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또한 먹고 살만하니까 순종이 없어지고 개인중심의 종교생활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지도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경계시의 말씀 권위를 상실하고 실용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문화적 번영을 위한 자로 인식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전에는 불신자도 예수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활용된 단어가 슐러의 ‘적극적 사고방식’과 그 뒤 조엘 오스틴의 ‘긍정주의’(긍정의 힘)인데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심리철학이고 은총을 하나님의 뜻대로 받으려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도 세상 잘 살아보자는 의도로만 생각하게 하는 방법이니 복음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죄를 논하고 회개를 요청하는 설교를 잘 들을 수 없습니다. 큰 교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사회인들이 교회를 보면서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혹시 믿으나 마나 하는 일반 땅의 교주와 같이 보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런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 할까요? 예수를 제대로 이해해야 영생을 얻고 복을 얻을 것인데 말입니다.
2. 진리의 생활 속에 은총을 주시는 예수의 능력을 믿어야
영생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계획(롬8:30)대로 선택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엡2:8). 사람이 편에서 애쓰고 기도해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롬9:15).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이 주실 은총은 믿고 구해야 하고 받을 만한 짓을 해야 합니다. 믿기도 하고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의 어릴 적부터 자라온 사정을 잘 안다면서(삼상16:7) 배척했습니다.
6절에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5절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고 했습니다(마13:58). 믿지 않겠다는데 굳이 계속하여 역사하시고 싶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요4:46절 이하에 보면 왕의 신하가 자기의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려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찾아와 고침 받기를 청했습니다. 예수께서 50절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믿고’ 갔더니 아들이 나았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의 제자도 아닙니다. 고위 관직에 속하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촌사람으로 보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으로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눅18:8 ‘..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과거보다 교회사회는 문화적 여건이 좋아졌고 신학이 풍성하고 복음의 전달 매체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과거처럼 간증할만한 은혜의 체험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살겠다니까 주님께서 믿음의 기적을 베푸실 기회가 없어진 것입니다. 성경진리를 버리고 스스로 가진 지혜로 살려니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기회가 없어지는 거지요.
딤후4:3-4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예수의 고향사람들처럼 교회 규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학벌이나 경제적 수준으로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는 세속적 가치로 구원과 은총을 논하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 바뀌어 간다고 진리가 주려는 언약과 그 사상을 잃어버리면 영생도 은총도 잃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시고, 지금도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믿고 구하고 체험하여 나누는 우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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