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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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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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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저자/주 승 중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설교와 예배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400년 전 종교개혁가들은 종교개혁을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의 내용 가운데서 예배의 개혁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천주교의 예배는 성직자들만의 예배였고, 회중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배는 형식화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예배는 회중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는 드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많은 의식과 예전으로 이루어진 로마 천주교의 예배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특별히 칼빈 같은 이는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런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을 이어받은 많은 개신교회는 그 동안 예배가 창조적이고 신선한 것이 되게 하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마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도 그 노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열린 예배 혹은 구도자의 예배라고 불리우는 예배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는 것 같다. 열린 예배가 전통적인 예배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리고 조금 어려운 표현을 하자면 그것이 예배 신학적으로 타당한 예배인가 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 글은 먼저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통해서 예배의 정의를 밝히고, 그 정의에 비추어 열린 예배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비판적인 면을 밝히고자 한다.
2. 몸 체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예배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여러 예배학자들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점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배란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폴 훈(Paul Hoon)은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에 대한 중심 개념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와 인간의 응답(response)에 있다. John Burkhart는 이렇게 말한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 Evelyn Underhill도 이렇게 말한다. “예배는 그것이 어떤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던지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 Franklin Segler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장복 교수도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예배의 정의들을 볼 때에, 거기에는 두 가지의 뚜렷한 특징들이 발견되는데, 하나는 예배가 기독론적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응답(response)과 만남(encounter)이라는 용어가 두드러지게 사용되어지고 있는 점이다. 즉 예배란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적인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교제 또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적인 은총이 주어지므로 죄인된 인간들이 구속의 은총 가운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경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의 백성들 가운데 현존해 계시며, 그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 하나님의 현존, 임재와 복내리심의 은총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하고 봉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서 예배의 현장에 임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와 있으며, 어떠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여기 서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에 예배자는 맹종의 신앙인이 되기 쉽고, 또 그러한 자세 속에서는 하나님과 깊은 의미에서의 만남을 이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오늘의 예배자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이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아무튼 지금까지 말한대로 예배란 하나님의 현존이 가장 뚜렷하며 백성들과의 만남의 역사가 발생되는 현장이다. 즉 예배는 바로 계시와 응답의 가장 실감나는 현장인 것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육의 사건과 구속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너무나 뚜렷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인간들로부터 감격적인 응답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이다. 이 응답의 대열에 나선 무리들은 언제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What God has done), 무엇을 하고 계시며(What God is doing),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What God will do) 분명히 깨닫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은총과 결부시키고, 그 인격적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룬 사람만이 참다운 예배의 정신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응답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이다(요한 4:23). 그렇다면 이제 열린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필자가 듣기에 열린 예배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 스타일”이라고 한다. 즉 열린 예배의 취지는 아직 신앙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친구의 권유 등에 의해 한번 교회에 나와본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해 거리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예배와 교회에 호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 예배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가능한 한 기존의 신자들만 아는 것들을 피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쓰고 음악도 시대에 뒤떨어져서 일반인들에게 이질감을 주는 것 보다는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열린 예배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면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즉 교회가 구도자 혹은 방문자들을 의식하고 선교적인 마음(Mission mind)을 가지고 고안한 것이 열린 예배라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필요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의 전통을 이미 19세기 미국에서 거의 모든 교파의 예배에 영향을 끼쳤던 변경예배(Frontier Worship)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열린 예배가 전적으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 보다는 전도집회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긍정하는 분의 글을 읽어보니, 불신자도 예배 드릴 수 있으며, 그들이 예배드릴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한다. 불신자들은 아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좋은 말로 구도자들(seekers)이나 교회에 친구 따라 “한번 나와 본”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지금도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을까?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은 아직 예배 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 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 예배학자는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제대로 드릴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예배드리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구도자의 예배라면, 이것은 차라리 예배라는 명칭보다는 전도집회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또 한가지 앞서 내린 예배의 정의와 열린 예배와의 관련속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배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 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무엇을 얻기 위해 예배에 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로버트 레이번이라고 하는 예배학자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갈 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그를 예배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어떤 종류의 기운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Seeker's Service"라는 말 자체에 벌써 예배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배의 기본 정신은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무엇을 받거나 무엇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목회와 신학”(97년 4월호)에 있는 글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열린 예배가 다분히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향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예배의 계획과 준비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자 내지는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계획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열린 예배는 예배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예배의 ‘겉모습’ 또는 ‘형식’에 비추어 하는 말이 아니다. 열린 예배의 본질과 그 방향성에 관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배는 결코 회중지향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점검할 때에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인가?”를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3. 나가는 말
마지막으로 필자가 구도자의 예배 또는 열린 예배의 출발지인 시카고 근교에 있는 Willow Creek Church에 가서 예배 드린 경험을 소개하고 이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찬양, 연극, 헤비 메탈을 사용한 귀가 찢어질 듯한 음악, 그리고 유색인종은 거의 보이지 않는 백인 일색의 회중 등, 한마디로 윌로우크릭 교회에서의 예배의 경험은 “백인문화”의 강렬함 그 자체였었다. 그렇다면 필자에게 떠오르는 한가지 질문은 그 백인문화의 결실이 “김치문화권”인 한국교회에 얼마나 잘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복음을 모르거나 새로 믿는 사람들을 좀 더 편안하고 친숙한 분위기에서 복음을 접하게 하기 위한 아름다운 선교 마인드로 시작하였다는 “열린 예배”(사실은 “열린집회” 혹은 “전도집회”라는 명칭이 예배학적으로는 적당한 표현일 것)를 계획하고 이끌어가는 분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의 상황과 한국인들의 문화와 심성을 고려하는 집회를 계획하고 이끌어 달라는 것이다.
저자/주 승 중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설교와 예배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400년 전 종교개혁가들은 종교개혁을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의 내용 가운데서 예배의 개혁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천주교의 예배는 성직자들만의 예배였고, 회중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배는 형식화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예배는 회중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는 드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많은 의식과 예전으로 이루어진 로마 천주교의 예배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특별히 칼빈 같은 이는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런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을 이어받은 많은 개신교회는 그 동안 예배가 창조적이고 신선한 것이 되게 하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마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도 그 노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열린 예배 혹은 구도자의 예배라고 불리우는 예배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는 것 같다. 열린 예배가 전통적인 예배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리고 조금 어려운 표현을 하자면 그것이 예배 신학적으로 타당한 예배인가 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 글은 먼저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통해서 예배의 정의를 밝히고, 그 정의에 비추어 열린 예배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비판적인 면을 밝히고자 한다.
2. 몸 체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예배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여러 예배학자들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점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배란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폴 훈(Paul Hoon)은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에 대한 중심 개념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와 인간의 응답(response)에 있다. John Burkhart는 이렇게 말한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 Evelyn Underhill도 이렇게 말한다. “예배는 그것이 어떤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던지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 Franklin Segler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장복 교수도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예배의 정의들을 볼 때에, 거기에는 두 가지의 뚜렷한 특징들이 발견되는데, 하나는 예배가 기독론적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응답(response)과 만남(encounter)이라는 용어가 두드러지게 사용되어지고 있는 점이다. 즉 예배란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적인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교제 또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적인 은총이 주어지므로 죄인된 인간들이 구속의 은총 가운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경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의 백성들 가운데 현존해 계시며, 그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 하나님의 현존, 임재와 복내리심의 은총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하고 봉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서 예배의 현장에 임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와 있으며, 어떠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여기 서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에 예배자는 맹종의 신앙인이 되기 쉽고, 또 그러한 자세 속에서는 하나님과 깊은 의미에서의 만남을 이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오늘의 예배자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이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아무튼 지금까지 말한대로 예배란 하나님의 현존이 가장 뚜렷하며 백성들과의 만남의 역사가 발생되는 현장이다. 즉 예배는 바로 계시와 응답의 가장 실감나는 현장인 것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육의 사건과 구속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너무나 뚜렷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인간들로부터 감격적인 응답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이다. 이 응답의 대열에 나선 무리들은 언제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What God has done), 무엇을 하고 계시며(What God is doing),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What God will do) 분명히 깨닫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은총과 결부시키고, 그 인격적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룬 사람만이 참다운 예배의 정신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응답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이다(요한 4:23). 그렇다면 이제 열린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필자가 듣기에 열린 예배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 스타일”이라고 한다. 즉 열린 예배의 취지는 아직 신앙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친구의 권유 등에 의해 한번 교회에 나와본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해 거리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예배와 교회에 호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 예배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가능한 한 기존의 신자들만 아는 것들을 피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쓰고 음악도 시대에 뒤떨어져서 일반인들에게 이질감을 주는 것 보다는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열린 예배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면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즉 교회가 구도자 혹은 방문자들을 의식하고 선교적인 마음(Mission mind)을 가지고 고안한 것이 열린 예배라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필요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의 전통을 이미 19세기 미국에서 거의 모든 교파의 예배에 영향을 끼쳤던 변경예배(Frontier Worship)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열린 예배가 전적으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 보다는 전도집회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긍정하는 분의 글을 읽어보니, 불신자도 예배 드릴 수 있으며, 그들이 예배드릴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한다. 불신자들은 아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좋은 말로 구도자들(seekers)이나 교회에 친구 따라 “한번 나와 본”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지금도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을까?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은 아직 예배 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 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 예배학자는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제대로 드릴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예배드리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구도자의 예배라면, 이것은 차라리 예배라는 명칭보다는 전도집회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또 한가지 앞서 내린 예배의 정의와 열린 예배와의 관련속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배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 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무엇을 얻기 위해 예배에 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로버트 레이번이라고 하는 예배학자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갈 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그를 예배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어떤 종류의 기운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Seeker's Service"라는 말 자체에 벌써 예배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배의 기본 정신은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무엇을 받거나 무엇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목회와 신학”(97년 4월호)에 있는 글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열린 예배가 다분히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향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예배의 계획과 준비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자 내지는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계획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열린 예배는 예배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예배의 ‘겉모습’ 또는 ‘형식’에 비추어 하는 말이 아니다. 열린 예배의 본질과 그 방향성에 관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배는 결코 회중지향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점검할 때에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인가?”를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3. 나가는 말
마지막으로 필자가 구도자의 예배 또는 열린 예배의 출발지인 시카고 근교에 있는 Willow Creek Church에 가서 예배 드린 경험을 소개하고 이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찬양, 연극, 헤비 메탈을 사용한 귀가 찢어질 듯한 음악, 그리고 유색인종은 거의 보이지 않는 백인 일색의 회중 등, 한마디로 윌로우크릭 교회에서의 예배의 경험은 “백인문화”의 강렬함 그 자체였었다. 그렇다면 필자에게 떠오르는 한가지 질문은 그 백인문화의 결실이 “김치문화권”인 한국교회에 얼마나 잘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복음을 모르거나 새로 믿는 사람들을 좀 더 편안하고 친숙한 분위기에서 복음을 접하게 하기 위한 아름다운 선교 마인드로 시작하였다는 “열린 예배”(사실은 “열린집회” 혹은 “전도집회”라는 명칭이 예배학적으로는 적당한 표현일 것)를 계획하고 이끌어가는 분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의 상황과 한국인들의 문화와 심성을 고려하는 집회를 계획하고 이끌어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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