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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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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처/
저자/ 주승중 (장신대 실천신학교수)

1. 들어가는 말

    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하는 공동체인가? 이 질문은 교회에 대한 정의를 묻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각도에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하신 사역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선택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신 구체적인 사역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9:35). 예수 님은 가르치시고, 설교하시고, 고치시는 사역을 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과 설교와 치유(고침과 싸매 주심)는 예수 님의 삼대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던 사역과 동일한 일을 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셨다.  예수 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 19-20)고 하셨다. 그는 천국복음을 전파 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가서 똑같은 복음을 외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셨으며, 질병을 치유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마태 10:1)

    그리고 이렇게 제자들을 부르시고 당신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탁하신 예수 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요 14:12)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이 가르치고, 전파하고, 싸매고 고치는 사역을 할 것을 격려하신다. 즉 예수 님은 오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해서 행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당신께서 행하셨던 역사를 오늘도 행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2. 고치시고 싸매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은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는 하나였고, 각각은 구원의 선포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이다 죤 터너, 김선도 역, 치유하는 교회 (서울: 도서출판 광림, 1990), 11.그런데 예수 님의 구원은 전인적인 차원의 구원이었다. 즉 예수 님은 인간을 전인의 차원에서 보신 것이다. 그는 인간을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기본적인 통합체로 보셨다. 영. 혼. 육을 분리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님은 인간을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치유하셨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 님의 구원 사역은 고치시고 싸매시는 치유의 사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복음서의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말씀이 치유에 관한 것임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절수로 보면 총 3779절 가운데 727절이 치유에 관한 말씀에 해당한다. 마크 A 피어슨, 윤수인 역, 치유의 은사를 베푸시는 하나님 (서울: 은성, 1995), 13.그 분은 죄악가운데 빠져있는 영적으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분은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육체적으로 병들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여 주심으로 그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예수 님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제대로 이루고 있지 못하며, 자기 자신과도 바른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병든 사람들을 완전한 인간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한마디로 전인을 치유하는 사역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님의 치유사역을 이해하기 위하여 치유에 대한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흔히 치유하면 대게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좁은 의미의 치유의 개념이다. 육체적인 치유는 치유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또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완전하게, 성공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말한다 죤 터너, op. cit., 9.그러므로 치유한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와 아울러 인간의 정신과 영이 건강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건강한 사람은 육체와 정신,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 기능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이루는 사람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글자 그대로 병든 것이다. Ibid., 9-10.

    예수 님은 이렇게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싸매시는 사역을 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일을 행하도록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요한 14:12)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만일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내가 행하던 것과 동일한 일들을 너희도 행할 것이다”라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이며, 또한 “너희가 나를 믿으면 너희가 행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약속이기도 하다 콜린 우르크하르트, 이광호 역, 치유함을 받으라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4), 290.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신 예수 님의 기대이며,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치시고 싸매시는 사역을 할 수 있고, 또 해야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성서를 보면 분명히 그리스도의 치유의 사역은 사도들을 통해서 초대교회로 계속 이어졌고,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치시고 싸매시는 치유와 권능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치유사역이 전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에서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며,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 치유의 사역을 이어받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오늘날도 일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에 맡겨진 이 치유의 은사가 많은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기도와 성례로써 육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모든 병을 고치는 치유의 능력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유에 대한 풍성한 증언도 없어져 버렸다 죤 터너, 치유하는 교회, 19그 동안 교회는 설교하고 가르치는 데는 신실했지만, 치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인 치유를 무시했기 때문에, 치유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키는 사이비 종교들이나 세속적인 집단들에 의해 치유가 주도되고 말았고 또 지금도 그런 형편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할 교회는 고치시고 싸매어서 치유하는 본연의 사명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즉 치유하는 일은 교회의 임무이며, 치유에 관심을 가진 교회의 몇몇 이상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1977년 영국 감리교회에서 개정된 교리적 선언에 보면 “교회는 끊임없고 전적인 치유를 배우고, 구하며 경험하는 공동체로 불린다. 치유의 영은 예배, 성례, 설교, 기도, 성도의 교제 등과 교회의 목회, 사회사역 등에 나타난다. 이것은 교회의 일상 활동이며, 모든 교회의 구성원은 여기에 포함된다”라고 되어 있다 죤 터너, 치유하는 교회 (서울: 도서출판 광림, 1990), 20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교회는 이 고치시고 싸매시는 치유의 사역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 갈 것인가? 교회가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사역을 가장 뚜렷하게 이루어 간 현장이 바로 예배의 현장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배를 통한 치유의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를 살펴보겠다.  

3. 레이투르기아와 고치시고 싸매시는 그리스도
     치유에 있어서 교회가 공헌한 것 중의 하나는 예배를 통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인들이 모인다는 것은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예배의식 속에는 누군가에게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만날 때, 그들의 외로움이 치유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새로운 희망이 마음속에 싹트고 그로 인하여 슬픔이 치유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깨달을 때 과거의 심각한 죄책감이 치유된다. 용서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실망한 영혼이 치유된다. 또한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재발견하게 되었을 때, 모든 내적인 공포, 갈등, 감정적 장애, 등을 치유 받게 된다 Ibid., 92.물론 우리가 예배를 이렇게 치유적인 면에서만 평가해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분명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신령한 예배를 통해서 많은 질병이 물러가며, 정신적, 영적인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며, 우리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진정 만나게 될 때에 그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가 무엇이기에 예배 가운데서 이런 고치시고 싸매시는 그리스도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인가?

  

1) 예배란 무엇인가?
     우리가 예배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의 접근을 통해서 할 수 있다. 하나는   예배학자들이 예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배를 나타내는 용어들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1)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
    먼저 많은 예배학자들이 예배에 대해 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Franklin Segler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Franklin Segler는 서남침례교 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을 가르쳤다.Franklin M. Segler, Christian Worship (Nashville: Broadman Press, 1967), 12.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대한 정성어린 응답의 행위라는 것이다. 유명한 장로교 예배 신학자인 Paul Hoon은 예배의 현장을 계시와 응답의 만나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Paul Hoon, Integrity of Worship (Nashville: Abingdon Press, 1971), 77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대화의 현장이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Ibid 그는 기독교 예배를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라는 두 가지의 중심개념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교 신학자 Peter Brunner 역시 예배란 “우리 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응답하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것은 행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제임스 F. 화이트, 정장복 역, 기독교예배학 입문 (서울: 엠마오, 1992), 16에서 재인용 인간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순종의 태도”로서의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그 분의 역사 하심에 올바로 응답하는 것이다 Ibid., 17.

    그 다음에 Evelyn Underhill은 성공회의 전통에 근거하여 “예배는 그것이 어떤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던지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라고 말한다. Evelyn Underhill, Worship (New York: Crossroad, 1989), 339. 그리고 기독교 예배는 다른 예배들과는 달리 “분명한 계시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포함한 “초자연적인 행동이며, 초자연적인 삶”이라고 주장한다. Ibid

    이렇게 우리가 지금까지의 여러 전통의 예배학자들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예배에서 두 가지의 중심적인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예배로 부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응답하고자 함께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이것이 바로 예배의 첫 번째 중요한 요소이다.

    그 다음에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즉 앞선 모든 예배의 정의를 보면 인간 편에서의 응답 또는 만남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두 번째 요소임을 알게 된다. 즉 예배란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적인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교제 또는 만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교회 예배학자인 John Burkhart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John E. Burkhart, Worship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2), 17."Worship is the celebrative response to what God has done, is doing and promises to do" 그리고 장신대의 정장복 교수도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행위”라고 정리한다.  

   그러므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예배란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고, 찾아주시며, 구원해 주시며, 고치시고 싸매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배의 용어들
    우리는 앞서서 예배의 신학적인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행위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예배를 나타내는 용어들을 몇 가지 살펴보는 가운데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먼저 구약에서 나타나고 있는 용어들을 보면, “에바드(       )”라는 단어이다“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게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사 19:21). 이 말의 뜻은 “봉사” 또는 “섬김”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샤하아(      )”라는 단어인데, 창 24:26; 출 4:31, 34:8; 대하 29:30 등 이 말은 “굴복한다” 또는 “자신을 엎드린다”는 뜻으로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어가 나타내고 있는 바 그 의미는 곧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순종의 생활이 예배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정 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5), 8.      

    그 다음 신약성경에도 예배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단어들이 있는바, 그 첫째는 “프로스퀴네인(             )”라는 단어이다. 마 4:10, 눅 4:8, 요 4:23, 계 5:14 등. 이 말은 “절하다” “굽어 엎드리다” “입맞추다”라는 뜻으로서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를 말해주고 있다. 그 다음은 “라트레이아(               )”인데, 그 의미는 종으로서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롬 9:4, 12:1; 히 9:9; 요 16:2; 빌 3:3 등 그래서 이 말은 흔히 Service 또는 Worship으로 번역이 된다. 또 한가지 중요한 단어는 “레이투르기아(               )”인데, 이 말은 노동(ergon)과 백성(laos)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롬 13:6, 15:16. 원래 이 단어는 고대 희랍에서 시나 국가의 전체 이익을 위하여 실시하는 공익사업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 말은 예배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 단어에 의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들이 하는 노동 내지는 봉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에 이 말은 특별히 기독교의 예전(liturgy)을 나타낼 때 사용하게 되었다. 즉 Liturgy는 신앙공동체가 그들의 신앙을 공중 예배를 통하여 표현하는, 근본적으로 외향적인 표현 형식을 나타내는 단어인 것이다 제임스 F. 화이트, 정장복 역, 기독교예배학 입문 (서울: 엠마오,1992), 25.

    그 외에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두 개의 단어가 있는데, 그것들은 “Gottesdienst”라는 독일어와 "Worship"이라는 영어 단어이다. 먼저 "Gottesdienst"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뜻과 사람이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김 충환, “기독교 예배란 무엇인가?”, 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555그러므로 이 단어 속에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하나님과(빌 2:7) 그러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섬김을 반영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Worship"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가치와 존중을 돌린다는 뜻이다. 즉 이 말에 의하면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 정 장복, 예배학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5), 9.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예배를 표현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역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예배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한 우리들의 봉사 내지는 응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이루셨기에, 우리들은 그 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면서, 그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가운데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사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오늘도 우리와 합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고, 그 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다시 한번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의 현장에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 만남 속에서 고치시고 싸매시는 그리스도의 치유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는 것이다.

  

2) 예배 가운데서 고치시고 싸매시는 그리스도의 역사
    그렇다면 이렇게 고치시고 싸매시는 치유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예배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예배의 현장 속에서 고치시고 싸매시는 그리스도의 치유의 사역을 체험하게 되는가? 우리는 앞서 한 교리적인 선언에서 “치유의 영은 예배, 성례, 설교, 기도, 성도의 교제 등과 교회의 목회 등에 나타난다”는 것을 들었다. 이 고백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여러 가지 의식 속에서 치유의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 하신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여러 가지 의식들(레이투르기아:Liturgy) 가운데 함께 하시며, 그 속에서 역사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가 특별히 예배의 현장가운데서 고치시고 싸매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려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잘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1) 믿음의 기도
     모든 치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람은 생명을 창조할 수도 없고 치유할 수도 없다. 치유하는 힘 자체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통해서 치유를 베풀어주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드리는 가운데 성도들이 서로 서로를 위하여 사랑으로 함께 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드리는 중에 육신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쓰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뱁을 집으며 모든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고치시고 싸매시는 치유의 에너지는 기도를 통해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말씀이다.

    근본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예배의 심장부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한 기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한 분 참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하고 진심으로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그것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치유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가운데 그의 존재하심과 그의 섭리와 지켜주시는 능력에 감사하면서 기도한다면, 또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세계가 필요한 것을 기억하고 기도한다면, 또 우리가 구함에 응답하여 주시는 은혜를 진정으로 사모한다면, 기도시간은 우리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세계를 위한 치유의 시간이 될 것이다. 죤 터너, 치유하는 교회, 94.

    특별히 오늘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치유의 사역을 예배가운데서 경험하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예배 가운데 침묵의 기도시간을 갖는 것이다. 오늘 현대인들은 물질세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무감각해져서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오는 치유를 놓친다 Ibid., 95.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므로 아버지의 뜻을 항상 붙잡고 계셨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침묵 속에서 생각하고 반성하고 기억할 시간을 가질 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통하여 온갖 세상의 것들로 가득찬 우리의 내면세계를 깨끗이 씻고, 그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하나님의 고치시고 싸매시는 능력이 우리를 온전히 사로잡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의식 속에서 침묵의 시간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에도 사용되어야 한다. 사실 서구의 많은 교회들이 침묵을 통한 교제에 의하여 예배시간에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교회에서는 주일 저녁예배 때에 많은 교인들의 잠시동안 집중된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치유를 경험하고 있다. 목사는 고침을 받아야 할 성도의 병의 성질에 대해서(그것이 육체적인 병이든, 영적인 병이든) 자세히 설명을 해주고 기도 요청을 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해 준다. 그리고 회중들로 하여금 잠시동안이나마 그들의 생각 속에 그 사람을 붙잡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그 교회는 많은 치유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Ibid., 96.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침묵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오늘 한국교회에서도 적용해 볼만한 시도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소리내어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약 5:13-15을 참고할 것.  미장로교회의 예를 들자면, 그들은 예배 도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주신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반드시 중보의 기도시간을 갖는다. 이 중보기도의 모습은 오늘 한국교회가 고려해 볼 만한 좋은 순서이다. 이 때 예배 인도자는 회중들에게 함께 중보기도를 드려줄 필요가 있는 사람의 이름을 묻는다. 그러면 간단한 기도의 제목과 함께 중보기도 대상자의 이름이 회중들에게서 나오게 되며, 예배 인도자는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제목과 함께 회중들이 제공한 기도대상자를 위하여 함께 중보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여기서 예배 인도자는 중보기도 대상자의 문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준 다음 회중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마음으로 그리게 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무장하고 마음의 눈으로 그 중보기도 대상자를 보면서 그들의 생각 속에 그 기도대상자를 붙잡도록 권면한다. 그리고 중보기도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의 약속을 선포한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2) 죄의 고백과 용서
    다윗이 경험한 것처럼 우리가 지은 여러 가지 죄는 때때로 우리의 심령을 병들게 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정신세계와 육신까지도 병들게 만든다. 다윗은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고”(시 32:3)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다”(시 38:3)고 고백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토설치 아니하였을 때에, 그 죄책으로 인하여 그는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죄책은 때때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병들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때에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요,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여러 가지 질병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죄와 관련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용서받지 못한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치유를 우리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은 그 자체로서 커다란 치유를 가져온다. 콜린 우르크하르트, 이광호 역, 치유함을 받으라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195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올바른 회개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들에게 죄의식으로 괴로워하거나 주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악이 있다면 예배드리는 가운데 반드시 그 모든 것들을 먼저 그분께 자백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고백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들을 마음에 품지 않으시거니와 기억조차 않으신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우리는 예배 시간에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하므로 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며, 바로 여기서부터 고치시고 싸매시는 주님의 진정한 치유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 시간에는 사죄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죄의 시간 후에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놓여 있다고 느껴지는 내적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도록 격려하는 침묵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용서에 대한 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죄의 고백과 침묵의 기도 그리고 용서의 선언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 개혁교회 예배의 아주 중요한 순서이기도 하다.

  

(3) 성도의 교제(평화의 인사)
    우리는 가정에서 사랑과 안정감을 얻게 된다. 사랑이 넘치는 가족은 서로의 흉허물을 받아들인다. 우리의 잘못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서로의 의견이 상치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실패와 성공을 함께 나눈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다른 가족들은 자신들이 줄 수 있는 도움은 무엇이나 주려고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정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정인 교회의 일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지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이면 충분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부여함을 느끼는데서 치유된다. 죤 터너, 치유하는 교회, 128-129 우리는 바로 예배의 현장에서 가장 확실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요, 교회공동체의 일원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정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예배드리러 모인 그 순간 가장 확실하게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서로를 사랑하는 표현을 하는 것이 바로 초대교인들이 하던 평화의 인사(kiss of peace)였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함께 모여 예배드릴 때마다 자신들이 교회공동체의 일원이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한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분명히 표현했는데 그것이 바로 평화의 인사인 것이다. 롬 16:16; 고전 16:20; 살전 5:26; 벧전 5:14 등.William D Maxwell, 정장복 역,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서울: 장신대 교회 커뮤니케이션 연구원, 1994), 18, 28 저들은 서로 간에 키스하면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체험하였고, 그 속에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내적 치유를 체험하였다.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과, 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소속감을 예배의 현장 속에서 분명히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속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치유함의 역사는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 속에서 모두를 따뜻하게 환영하는 가운데, 상처받은 심령들이 사랑 받고 인정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인격에 가치를 부여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내적 치유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예배 안에서 자신의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성도의 교제를 발견하게 된다면, 교회는 치유하는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예배에서 서로 인사하는 것도 어색하게 여길 만큼 일반적으로 예배에서 성도의 교제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호권면과 격려는 기독교적 교제의 예전적 표현이다 이 성휘, 미래목회 대예언 (서울: 규장, 1998), 75-76.그러므로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고치시고 싸매시는 그리스도의 치유의 역사를 체험하는데 있어서 또 한가지 회복되어져야 할 것은 바로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이다. 사랑 안에 참된 치유가 있기 때문이다.  

  

(4) 치유적인 설교(Therapeutic Preaching)
    예수 님은 때때로 선포된 말씀의 힘으로 치유하셨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치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한 예로 백부장의 종에 관한 기사가 있다(마 8:5-14, 눅 7:1-10, 요 4:46-54). 백부장은 부하에게 명령하면 그들은 순종했기에 말씀의 위력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도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이 낫게 하소서” 그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 그의 말씀은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낫겠나이다” 그가 말씀하시면 우리의 깨지고 좌절된 심령이 완전해 진다.

     교회의 회중들 가운데는 감정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정신적인 장애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영적으로 무력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육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복음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도 사람들은 종종 예배에서 성경말씀을 읽거나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 치유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성경말씀이 성령님에 의해 마음의 계시로서 받아들여지는 순간 오늘도 치유의 역사는 일어난다. 십자가의 치유 사역을 강조하여,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는 자주 이러한 결과는 가져온다. 우리는 이러한 설교를 치유적인 설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삶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위로 받기 위하며 몸부림치는 인생들에게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복음적인 치료를 이루어 가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그레디 데이비스는 이런 설교의 목적을 “한 인간의 삶속에서 병든 생활의 조건, 정신적인 문제, 정서적인 결핍, 그리고 종교적인 방황으로부터 변화를 가져오는 것” Grady Davis, Design for Preaching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58), 127.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일명 목양설교(Pastoral preaching) 또는 위로 설교라고도 부른다. 정 장복, 설교학 서설 (서울: 엠마오, 1992), 115 설교자들은 이러한 치유적인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치시고 싸매시는 치유의 사역을 예배의 현장 속에서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 도다”(시편 107:20)

  

(5) 치유의 성만찬 성례전
    오늘 한국교회는 성만찬 성례전을 일년에 두 번 내지는 네 번에 걸쳐서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분명히 초대교회가 매주일 성만찬을 가지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감사하며, 감격하는 가운데 예배드리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의 선택받은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V 1, 9.  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의는 교회 공동체가 무엇을 하는 공동체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는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지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례되어야 하며,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정 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5), 154.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버린 체 반쪽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성만찬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며, 이 말씀이 성령의 역사 속에 예배 자들의 영혼을 소생케 한다. 성례전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사랑의 실체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특별히 성만찬 성례전은 예수 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모든 것을, 즉 우리를 죄와 질병 그리고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몸을 내어 주시고 피를 흘리신 사역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다(고전 11:26 참조). 즉 성만찬 성례전은 하나님의 강한 능력과 은혜를 우리의 삶속에 받아들이는 은총의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가 있고, 우리 서로간에 교제가 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치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한 주교였던 세라피온은 성찬을 “모든 질병의 치유에 특효인 생명약”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M.T. 켈시, 배상길 역, 치유와 기독교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5), 190에서 재인용.    성찬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의 짐, 죄, 상처를 모두 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 더욱 온전해지는 은혜를 받게 된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제와 기도, 성찬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즉 초창기부터 교회는 성찬을 일년에 두 번 내지 네 번 정도 한 것이 아니라, 주일 예배에서 정기적으로 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바와 같이 사도 시대와 사도 이후의 시대의 교회들은 성찬을 치유의 한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사람들이 아파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는, 집사들이 주일 성찬예배 때에 쓰여진 거룩한 빵과 포도주를 아픈 사람들의 집에 직접 갖다 주어 성찬을 들 수 있게 하였다 A. D. 140년 경 순교자 저스틴(Justin)은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에게 변증서(Apology)를 보내었는데, 거기서 그는 당시 로마에서 초대교인들이 주일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태양의 축일이라 불리는 날(주일)에 여러 도시와 지방에 사는 이들이 일정한 곳에 모인다. 이 때 사도들의 서간이나 선지자들의 말씀을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읽는다. 낭독자가 읽기를 마치면 그 집회의 인도자는 성경 말씀을 강론하고 그 말씀들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 그 후에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함께 기도 드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다. 이 때 집례자는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그리고는 성물(떡과 포도주)을 각 자에게 분배하고, 참석치 못한 사람들은 부제(deacon)가 집으로 가져다준다..”Lucien Deiss, C.S.Sp. Springtime of the Liturgy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79), 93-94. 그들은 성찬을 받는 것이 영적으로 좋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치유를 받고 축복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다. 마크 A 피어슨, 윤수인 역, 치유의 은사를 베푸시는 하나님 (서울: 은성, 1996), 282 즉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성례전은 생명과 건강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M. T. 켈시, 배상길 역, 치유와 기독교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5), 189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여러 가지 문서들은--A. D. 200년경의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과  A. D. 380년경의 사도규약(Apostolic Constitutions) 등--치유의 은사가 교회의 성례전적인 행위에 의해 수여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바바라 쉘몬 라이언은 “성만찬을 통한 치유의 능력”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그것은 치유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제단 앞에 나아가 ‘주님, 나는 당신 자신을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만, 말씀해 주옵소서. 그리하면 내가 낫겠나이다’라고 기도한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의 육신적, 감정적, 영적 필요를 채워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확신 있게 하는 기도다. 만일 우리가 거룩한 빵을 뗄 때 예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몸을 먹을 때 우리가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해야만 한다” 마크 A 피어슨, op. cit., 283에서 재인용.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교회 내에서 생명력 있는 성만찬 성례전이 행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이에의 회복을 위해 힘쓰는 것이다. 우리는 떡과 잔을 받음으로써 갈보리 언덕에서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치유되어 완전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빵과 포도주의 요소에 주술적인 것은 없다. 그것들은 우리들을 위하여 깨어지신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를 나타내 줄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고양시키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식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인 치유를 베푸시는 방법으로서 주신 성만찬 성례전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6) 치유 예배
   사실 신약성서에 나타난 교회의 예배에서 치유가 시행된 선례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예수 님께서 최소한 두 번에 걸쳐서 안식일 예배 중에서 치유의 사역을 하신 것을 찾아볼 수 있으며(막 1:21-27, 눅 6:6-11), 또한 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과 성찬예배를 드리고 있는 도중에 청년 유두고를 살린 사건을 볼 수 있다(행 20:7-12).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병 고치는 일은 예수 님의 목회의 중심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는 치유의 예배를 통하여 치유하는 공동체로서 예수 님의 고치시고 싸매시는 사역을 행동화할 수 있다.

   이 치유의 예배는 미장로교회에서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예배로서, 한국교회도 조심스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예배이다. 물론 일부 교단에서는 예배 때에 수시로 이런 치유의 순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장로교에서는 생소한 예배인 것 같다. 그러나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이미 장로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회에서 교회의 중요한 사역으로 감당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회가 특별히 병든 자들을 위하여 치유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의 정규 사역에 치유예배를 도입하는 방법은 이미 미장로교회를 비롯한 서구의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모형들을 통해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하여는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의 책 [개교회에서의 치유사역 시행법](How to Have a Healing Ministry in Any Church) (Regal, 1988)를 참고할 것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돈 던컬리, 권혁재 역, 누구나 병고치는 기도사역으로 전도 부흥할 수 있다 (서울: 나침판사, 1996), 272-272.  먼저 기도대원들이 특별한 때에 기도 사역을 실시하거나 또는 정규 예배 시간에 기도할 수 있다. 그 다음 방법은 예배가 끝날 무렵에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기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을 하고, 축도가 끝난 직후에 장로들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다. 또 미장로교회 예식서에 있는 것처럼 치유를 위한 특별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이 치유의 예배는 모든 순서가 치유에 초점을 맞추어 짜여진다. 미장로교 예배모범에 있는 그 내용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치유의 예배는 당회의 시인 하에 또 목사의 지도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와 같은 예배는 정기적으로 계획된 예배로서, 또는 이따금 혹은 주일 예배의 일부로서 드릴 수 있다. 이 예배는 모두에게 공개해야 하고, 특히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특별히 관심하는 사람들을 위한 치유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제한을 두어서는 안된다...치유의 예배의 생명적 요소는 기도인데, 이것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약속을 위한 감사, 중재의 기도와 탄원기도를 드려야 한다.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적절히 마련하기도 하고, 또 말로 또는 찬송으로 기도하는 기회도 마련해야 한다. 안수의 형식으로 또는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는 행위도 적절하다(약 5:14). 기도하는 일에는 신앙공동체의 대표들과 사회하는 목사도 포함한다. 모든 기도는 읽고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특별한 초점은 그리스도를 통한 치유에 관한 복음의 약속을 선포하는데 있어야 한다. 이 약속의 인봉은 주의 만찬에서 축하되어지고, 이어서 기도와 안수가 뒤따라야 한다. 목회를 위하여 자신의 삶과 예물을 바치는 기회가 마련되고, 동시에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하는 새로운 결단과 화해의 기회도 마련할 수 있다. 치유의 예배가 기름을 바르고 안수하는 일도 포함된다고 할 때, 이런 기도는 잘못된 해석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소개되어야 한다. 치유는 성화, 열성, 혹은 기도하는 사람의 기술이나 혹은 낫고자 원하는 자의 믿음의 결과라고 이해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Presbyterian Church of U.S.A., The Constitut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A.), Part II Book of Order 1997-1998 (Louisville: The Office of the General Assembly, 1997), W-3.5400.

   한국교회는 이런 치유의 예배를 교회의 형편에 맞게 주일 저녁(또는 오후)예배 때에 성찬과 함께 실시하므로 예수 님의 고치시고 싸매시는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는 말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고치시고 싸매시는 그리스도의 치유의 사역은 이제 앞으로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일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 재림하실 때는,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죄들은 그 뿌리조차 다 제거된다. 그 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비록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치유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치유처럼 완전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치유가 우리 안에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의 예배의 현장 가운데서 일하시는 것이다 마크 A 피어슨, 윤수인 역, 치유의 은사를 베푸시는 하나님, 18지금까지 교회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체험하고, 고치시고 싸매어 주시는 치유의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오늘 많은 신앙인 들이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삶속에 아무런 변화도, 치유도 일어나고 있지 않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다음의 말씀들을 깊이 묵상해 볼일이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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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산 속 기도실이 아름다운 곳 강릉정동기도원 다람쥐 2002-08-01 8077
33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신성수양관 다람쥐 2002-08-01 5278
32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강화 「교산교회」 다람쥐 2002-08-01 4371
31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전원형 교회 「김포전원교회」 다람쥐 2002-08-01 6486
30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풍경] 작고 아름다운 시골교회, 계룡산 학봉교회 다람쥐 2002-08-01 4981
29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신시도교회 다람쥐 2002-08-01 3940
28 인기감동기타 [주보] 좋은 주보와 나쁜 주보 돌쇠 2002-02-16 7018
27 인기감동기타 [인터넷선교]사이버 공간과 신학 돌쇠 2002-01-17 3461
26 더깊은신앙으로 생태적 삶이 별건가! 이현주 2001-12-29 2717
25 더깊은신앙으로 지내는 왜 죽어야 하나 이현주 2001-12-29 2960
24 더깊은신앙으로 왜 영성영성 하는가 이현주 2001-12-29 3729
23 논문신학성경 [성령론] 구원적 신앙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 돌쇠 2001-12-26 4294
22 논문신학성경 [자연신학] 새로운 '자연신학' 을 지향하여 돌쇠 2001-12-26 4510
21 논문신학성경 [실천신학] 성령과 문명: 기독교학회 참관기 돌쇠 2001-12-26 3699
20 논문신학성경 [신약신학] 공관 복음의 제자도 돌쇠 2001-12-26 4014
19 논문신학성경 [개혁신학]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이원론의 극복 돌쇠 2001-12-26 3915
18 논문신학성경 [개혁신학] 개혁신학 돌쇠 2001-12-26 3647
17 논문신학성경 [바울신학] 바울의 의인관 돌쇠 2001-12-26 4142
16 논문신학성경 [바울신학] 바울서신의 지식 사회학적 연구 돌쇠 2001-12-26 4715
15 논문신학성경 [바울신학] 바울의 시대의 원시신앙전승 돌쇠 2001-12-26 4156
14 논문신학성경 [바울신학] 바울신학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 문제 돌쇠 2001-12-26 4223
13 논문신학성경 [윤리신학] 가상현실에 대한 윤리신학적 해석 박충구 교수 2001-12-26 3629
12 인기감동기타 [시대의 징표] 교황청 '과오인정' 문건발표 돌쇠 2001-12-26 3487
11 논문신학성경 [비평학] 복음비평사(福音批評史) 돌쇠 2001-12-26 3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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