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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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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총신대학 부설 선교연구소 편
서 론
제 1 장 만주의 일반적인 고찰
A. 자연환경
B. 정치적 배경
C. 문화적 상황
제 2 장 만주의 선교 역사(한국교회의 만주 선교 포함)
A. 선교의 역사
B. 교회 개척과 개신교의 부흥시기(1906 - 1911)
C. 교회의 내실화 시기 (1912 - 1917)
D. 간도노회 성립시대(1918 - 1921)
E. 간도 노회 성립 이후 (1922 - 1948)
제 3 장 만주의 선교 전략(한족 교포교회 중심으로)
A. 최근의 만주의 교회당 현황
B. 지도자 및 교인의 신앙상태
C. 이단의 활동
D. 만주 교회의 문제점
E. 만주의 선교 전략
결 론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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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만주는 역사적으로 우리의 고토요, 지리적으로는 가장 인접한 곳으로 한국 근대
사에 있어서 민족의 애환이 깃든 곳이다. 해방 직전에는 210만명의 이주민들이 살
고 있었고 이를 대상으로 한국 교회는 피선교국에서 선교 국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만주의 선교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 만주의 일반적인 자연환경이나 지리
적 배경,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살펴보므로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 생각한다.
둘째로는 만주의 선교의 시작과 부흥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교회의 성립되고
어떻게 쇠퇴하였으며, 당시의 교회 조직과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째로는 선교전략에 있어서 최근 만주의 교회현황을 파악하고, 지도자 및 평신
도의 신앙 상태 그리고 이단의 활동 등을 살펴보고 만주 교회의 문제점, 그리고
만주 선교의 실패는 무엇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선교해야 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
는가 방법적인 면을 고찰하였다.
더우기 한국 교회는 만주 선교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여전히 조선 자치족
으로서 가정교회, 지하교회, 유형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이들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으며 또한 앞으로 볼때에도 만주 선교는 한국이 감당해야 되지 않을
까 생각된다.
제1장 만주의 일반적인 고찰
A. 자연환경
1. 지리적 배경
만주는 중국의 동북부 지역 전체를 일컬으며, 그 정확한 위치는 북쪽으로 시베
리아 접경지인 흑룡강 이남 지역, 남쪽으로는 관동주의 만리 장성으로 중국본토에
연결되는 요동반도 여순 지방의 이북 지역, 동쪽으로는 연해주 점경지인 오소리강
까지, 서쪽으로 외몽고 접경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면적은
한반도의 약 6배가 되는 1,306,900km2이고 1945년 당시의 행정 구역은 19개의 성
과 1개의 특별시로 분할되어 있었다. 대중 동서남북 4개정점으로 하는 사변형으로
그 사변 에는 각각 산맥(대흥안령, 장백, 소흥안령, 송령, 연산)과 해만이 둘러싸
여 있으며 그 가운데는 대 평야갸 전개되어 있다.
* 연변 조선족(Yanbian Korean Autonomous District)
원래 청조의 발상지이다. 이 지역을 봉금지라 하여 이주를 금지하다가 1882년에
간무국을 설치하면서 개척하기 시작한 이곳은 우리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간에 정계비를 백두산에 세워 양국간에 국경 분기원점
을 마련하였는데, 이 정계비에 의하면 이곳 연변 지역은 분명히 대한민국 영토에
속한다. 1883년 청나라가 이곳을 개척 하면서 다시 영유권 문제가 제기되어 3회에
걸쳐 국경회담을 가졌는데 청나라가 이 지역의 영육권을 주장하여 해결을 보지 못
하다가 그 후 청나라 가 간무국을 연길청(1902)으로 승격시켜 행정력을 강화하자
구한국 정부 로부터 외교권을 빼앗을 일본은 1907년 용정에 "통감부 출장소"를 설
치하여 준식민지 통치지역으로 관리하던 중 1909년 9월 청일간에 간도에 대한 협
약을 맺고 안봉철도가안동(단동)-봉천(삼양)간 274km 부설권과 무순 탄광 개발권
등 4대 이권과의 교환조건으로 연변지역에 대한 한국의 영육권 을 포기하고 청
나라의 영토로 잃어버린 지역이다. 현재 한민족의 가장 큰 집결 거주지역에만 110
만 정도가 살고 있어 중국내 한 민족의 43%를 차지 하고 있다. 이 자치구는 길림
성내 동남부의 연길, 도문의 두시와 연길, 화룡, 안도, 혼촌, 왕청, 돈화 등 6개
의 현을 합친 면적 41,500평방 km 이다. 중공안에서의 한국 교포들의 공식명칭은
조선족으로 되어 있어 교포들은 스스로 조포라는 말을 쓰고있다. 조선족 자치구는
1952년에 구성 되었으며 행정 중심지는 연길시에 있고 행정 책임자는 한국인이나
그 밖의 각급 관리는 중국인도 있다. 연변은 중국동북의 3성의 하나인 길림성의
동남부 지구인데 동쪽으로는 소련의 시베리아, 남쪽으로는 압록강 상류, 백두산
또는 두만강을 두고 북한과 접경이 되어 있으므로 중공의 군사 기지로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하고 있다. 면적은 대략 우리 나라 강원도와 같은데 총인구로 170만 정도
이며 해방전에도 간도로 알려졌던 곳이다. 동북지방엔 길림성외에 흑룡강성, 요
녕성이 있는데 이 지역을 보통 동삼성 이라고도 하고 옛날엔 만주라고도 부르던 곳
인데 현지 중공거류 교포들도 만주라는 이름이 일제시대의 말이라고 이 말을 몹시
싫어한다. 이 삼개성에서 중국인과 우리 교포가 반반이고 농촌에서는 우리 교포가
더 많은 곳이 여러개 있다. 그러면 동북 3성의 지리적 배경을 세분해서 살펴 보자.
* 길림성(chilin province)
중공의 동북부의 흑룡강성과 요녕성 그리고 내몽고 자치구 사이에 위치하며 동남
부는 우수리강(흑룡강의 하류을 사이에 두고 소련과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부를 사
이에 두고 우리나라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청조 (1636 가1911)말기때 성제도가 실
시된 후 흑룡강성, 요녕성과 더불어 "동삼성" 이라 불려왔다. 면적 29만km, 인구
2,256만이며 주민은 한족을 비롯하여 조선족, 만주족 등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
다. 길림성의 중첩도시는 장춘시이다. 길림성의 동남쪽과 서북쪽은 지대가 높고
중부는 평이부인데 백두산 천지못에서 흐르는 송화강(길이 1,840km), 압록강
(길이 521km)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하천이 허다하며 또 중부 평야지대에 호수가
산재하여 수자원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토지가 비옥하다. 겨울에는 한냉 건조하
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한 대륙성 기후로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1월의 평균기
온은 영하 26도이다. 연강수량은 400 - 100mm이며 총강수량은 60%가 6 - 8월에 집
중하고 있다.
농업이 발달하여 수수, 옥수수, 대수, 사탕무우, 아마 등을 경작하나 연변 조선
족 자치구일대에는 한인들에 의하여 벼농사가 활발하다. 산림은 울창하므로 임업
이 발달하였고, 특용작물로는 약초, 산포도, 버섯류, 각종 동물의 모피등이 산출
된다. 그중에 인삼, 녹용, 담비가죽은 "동북삼보" 라고 불리울 만큼 내외의 명성
이 높다. 공업은 자동차, 기계, 전력, 화학, 야금, 인조 섬유, 제재등이 발전하고
있는데, 그중 자동자 공업이 전국 제1위이고, 제재, 화학 비료의 생산고는 전국 2
위를 차지하고 있다. 철도망은 중국에서 가장 밀도가 높으며 장빈선(장춘-하얼빈
241km), 만주선 (하얼빈-만주리 936km), 장도선(장춘-도문 249km) 등이 있다.
* 요녕성(Liaoning Province)
본성은 옛날에 고구려 땅이기도 했는데 남동쪽은 압록강을 끼고 한만국경을 이
루며 남쪽으로는 황해와 접한다. 이 지역은 한국과 중국을 왕래 하는 통로로써 한
반도에 중국문화를 전파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지역으로 옛 부터 우리 민족과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면적은 23km, 인구 3,572만, 인구 밀도 247명, 동부와
서부는 산지와 구릉이고, 중부는 평원이다. 겨울에는 한랭 건조하고, 여름에는 덥
고, 비가 많이 온다. 연 평균 기온도 동북과 서남 지역간에 10도의 차이가 있
다. 연강수량은 400 - 1000mm 가량이다.
농산물로는 옥수수, 수수, 쌀, 조, 소맥등이며 면하, 대두, 담배, 땅콩 등도 많
이 재배한다. 지하자원으로는 철, 설탕, 금 망강, 동, 연, 알미늄 등 각종 광물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공업은 과거 일본인이 주로 건설한 중공 최대의 공업도시로서
제철기지이며, 석탄화학, 인조석유, 공작기계, 정밀기계, 전기기기, 조선, 화학,
제지방직, 제사, 요업 등 각종 공업이 발달하였다. 교통은전중국을 통하여 철도
만이 가장 조밀한 지역이다. 심양을 중심으로 경심선(북경-심양 850km), 장대선(장
춘-대연 705km), 심길선(심양-길림 445km), 심목선(심양-목동 274km) 등 간선(모스
크바, 평양 등으로 국제 열차가 운행) 철도와 지선들이 있다.
* 흑룡강성(Heilungkiang Porvince)
중국대륙 동북부 끝에 위치하여 북과 동은 소련과 서부는 외몽고(몽고인민 공화
국)와 각각 국경을 이루고 남부는 길림성과 접경해 있는데 청조(1662 가 1911)초
까지도 인구가 희박한 미개발 지역이였다. 러시아 제국의 동진에 대비하여 17세기
후반부터 청조의 군사거점이 설치되기도 했는데, 29세기 초두에 동청철도(시베리
아 철도가 본성의 서북부의 만주, 하얼빈, 목단을 거쳐 블라디 보스톡까지 연결된
것)가 개통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본성을 만주 식민지화의 기지로 삼으려 하였고
한 민족에 의한 개발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면적은 1970년에 내몽고에 자치주의
복단부가 편입되어 현지 71만의 인구 3,270만, 인구 밀도 70명/km(1982년 통계)
중심 도시는 하얼빈시이고, 흑룡강(길이 2,965)은 본성의 최대의 강으로 소련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북부지방은 동토지대도 있고, 남부의 여름은 대륙성 기후이
며, 연 강수량은 300 - 600mm 이다. 농작물은 대두, 사탕무우, 해바라기 등을 재
비하고 북부, 남부, 서부의 산간지대는 산림이 무성하여 천연 대목장 지대로서
말, 소, 면 양을 많이 사육한다.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연산 5,000만톤의 중공 제1
의 유전인 대경유전과 연간 500만톤을 정유하는 대경 정유소가 치치하르시 동남방
약 120km 지점에 있다. 기타, 석탄, 금, 천연소와 철, 알미늄, 흑연의 매장량도 많
다.
B. 정치적 배경
1949년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대만을 제외한 중국전체를 장악해 버렸다. 이것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정치적 균형을 서서히 잃게 되었던 22년에 걸친 혁명전쟁
의 귀결이였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중공당 주석
모택동은 중국이 다시는 다른 나라에 예속되지 않을 것 이라고 선언했다.
1949년의 중공이 당면한 문제는 매우 다양했다. 그 일부는 혁명투쟁이 직접적인
결과였고 다른 일부는 한 세기에 걸친 외국 지배에 유산이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먼 과거로부터 싹터온 이념적인 것도 있었고, 경제적인면도 있었다. 먼저 모택동
은 전국토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1952년 10월까지 90%를 완성한 뒤 1953 - 1957
년까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해 갔다.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을 시도
하였다. 그 전개 운동는 (1) 사회주의 건설 총 노선 (2) 공,농업 생산 대약진 (3)
인민공사(집단농장)이다. 이 셋은 모두 사회주의 개조의 약진 계획을 지향하고 있
기 때문에 보통 "대 약진"이라고 부른다. 1960년의 중가소 관계의 분열과 애약진
운동에서의 어려움이 겹쳐서 매우 심각한 위기를 맞자 1961 - 1965년까지는 경제
조정기간으로서 수정주의 노선으로 들어간 뒤에 제3차 5개년 계획을(1966 - 1970)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10년간의 문화혁명과 나란히 전개되었다.
문화 혁명은 전통적인 문화창조기구, 즉 작가협회, 미술관, 출판소, 신문, 박물
관등을 파괴해 버렸다. 1966년 부터 1969년 사이에 낡은 것들 즉 낡은 이념, 낡은
개인적 습관, 낡은 공적 습관, 그리고 낡은 문화라는 오명을 쓰고 기독교는 공격의
화살을 받았다. 그리하여 교회는 문을 닫고, 종교지도자는 체포되고, 성경과 찬송
그리고 다른 책들을 불태웠으며, 지성인들을박해했다.
국가가 통제하던 몇몇 제도적 교회들 조차도 중국사회 표면에서 완전히 제거되
었다. 제도화된 교회의 마지막 흔적의 장례였다. 당시에 조선족 자치주안의 교회
도 예외가 아니였다. 한성도는 그때에 일어났던 일을 다음 과 같이 편지로 보냈
다. "유학을 했던 사람이나 대학에 조금 다닌 자들은 썩은 지식인으로 놀림받고
압박당했습니다. 우리 전도사님은 지식 분자 예수쟁이의 우두머리로 잡히게 되었습
니다. 삼양거리를 다니서 공산당들은 ' 예수쟁이 타도하라' 라는 구호를 외치며
다녔습니다.
한국 에서 보내는 복음의 방송조차도 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뿐만 아니
라 유교, 불교, 자유주의적 지성주의도 막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에 배치된다
하여 핍박을 가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지하로 잠적했고, 신실한 신자들은 가정교
회를 형성하여 신앙의 명맥을 유지해 갔다.
또한 "종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심지어 그들의 헌법에 "신앙의
자유"란 조문에 종교를 믿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무신론을 신앙할 자유가 있다"
고 했다. 이 기간은 잃어버린 10년 이라고 할 수 있는 암흑기였다.
1976년 1월8일 주은태 수상의 사망과 1976년 9월 9일 모택동 당 주석의 사망후
화국봉이 이끄는 신온건파 정부가 과격파 지도자 이른바 4인방(왕홍문, 장춘교,
강청, 도무원)을 1976년 10월 6일 체포하고 (1980년 공개 재판) 당시에 중국이
직면한 정치, 경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제5차 5개년 계획
(1976-1980)을 재편성하여 10개년 경제개발 계획(1976-1985)을 내놓았다. 이것은
20세기 말까지 G.N.P. 4배 증가와 90년대의 도약을 위한 기초구축이 목표였다.
1986년에는 제7차 5개년 계획을 1990년까지 세워놓고 있다. 최근에 중공은 개방정
책 4개 기본원칙을 제시했는데, 사회주의 노선 마르크스-레닌-모택동 사상
공산당이 영도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계속하는데 있다고 했다. 위의 4개의 기본
원칙 에 부합되지 않는 개혁은 받아 드릴 수 없다고 했다. 또한 87. 4. 11일 에 폐
막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국회)는 개혁파와 보수파를 불문하고 노선상의 갈등을
자제했으며,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안전단결이라는 명제 아래서 타협의 국
면에 접어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중공은 외국인 투자법 건설, 외교등을 강화하는
50개 새 법안 제정을 위한 5개년 계획을 87. 4. 25일 발표했다. 이 법안은 사회
주의 사회 개발 촉진을 골자로 한 것이다. 이같은 법안과 함께 제정된 300개의 행
정법규초안은 1990년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제출하게 된다. 또한 단일민족이 아
니라 한족을 제외한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복합 민족국가라는 문제가 있었지
만 이 모든 지역간의 불균형과 난제들 속에서도 중화 사상으로 용해해 갔다. 특
히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위해서 는 1952
년 조선족 자치국을 인정하여행정 중심지는 연길시에 두고 있다. 중공은 22개성 5
개 자치주 3개의 직활시가 있는데 그중에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성은 동북 3성이
다. 특히 소수민족이라고 차별하기 보다는 자치권을 주어서 고유예술과 문화를 발
전시키도록 하였고, 특히 9월 3일은 조선족 자치기구 창립일로서 큰 행사를 한다.
우리 민족이 중국내에 약 176만명이 사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의 자치주
는 심양군주의 요녕성 군주, 길림성 군주, 흑룡강성 군주 속에 포함된다. 물론 지
방 부대와 민병대의 조직, 변방지역과 도시방위, 사회 질서와 치안 유지하도록 하
며, 고유예술과 문화를 존속 발전시키고 있다.
제목 : 만주와 선교 (2)
C. 문화적 상황
1. 교육 및 학술단체
1949년 연길시는 신형의 종합적 민족대학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연변 대학이다.
1959년 전후해서 연변 농학원, 연변의학원이 건립되었다. 또한 여명여업농대, 연
변사범학교, 무역학교, 예술학교, 위생학교 등 중등전문 학교들이 창설되었다.
연변지구에는 대학이 4개, 중학 265개, 소학교 1,298개가 있다. 1952년에 소
학교육을 전원보급했고, 1958년에는 중학교육이 일반화되었으며, 현재 고급중학교
육을 보편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교포들은 약 3만명 정도가 대학
을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연변대학의 경우 1600명의 대학생 가운데 74%가 한
국 사람이며 요녕성의 심양의 경우에는 조선족 소학교가 20개 중학교가 6개나 된
다. 중공에 있는 소, 중학교의 커리큘럼은 전국적으로 같으며 동포만의 학교라도
한글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어도 사용한다. 교포가운데서 중공의 중앙 국
가기관 활동 분야에 일하는 사람이 수백명이 되며 북경의 중국과 학원의 각 연구
소와 북경대학의 각 지역의 단과 대학에도 여러명이 재학하고 있다. 해방 이래로
문화예술가들도 나냅 발전했다. 연변 자치구는 문학, 예술가연합회, 중국작가 협회,
연극, 음악, 무도, 미술, 영화의 5개 분과 위원회를 창설했다. 또한 작가와 출판
관계자가 278명이며, 이들은 "조선족 문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이외에 중국
조선어학회, 연변언어 연구소, 조선문제연구소, 조선역사 연구소 등이 각각 개설되어
있다. 이외에도 대중과학, 아동지 등을 비롯한 잡지들이 정기적으로 발간되고 있다.
그밖에 연변 가무단, 활극단, 연변희곡극단이 있고, 1957년에는 연변 예술학교가
설립되었다.
2. 매스컴 활동
해방후 1945년에 연길시에 조선어문의 길림인보가 나왔으며, 그 뒤에 연변일보가
나왔다. 그밖에 흑룡강일보의 조선문관, 요녕일보의 조선 문판이 나왔다. 길림일보
는 1945년 10월 10일에 창간되고, "82년도의 발행부수는 26만부였다. 흑룡강 일부
는 1949년 6월 1일에 창간되어 1954년에 송강일보에 합병하면서 당위원회의 기관지
가 되었다.
요녕일보는 1954년에 발간되었는데, 82년에는 43만부이다. 방송국으로는 연길시
에 소재한 T.V. 방송국을 포함해서 5개의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고, 라디오 방송으
로는 길림성에연봉, 라디오 방송, 장춘 라디오 방송이 있으며, 흑룡강성에는 하얼
빈 라디오 방송이 있다. 또한 북경 방송국의 대외 방송과 대내 방송에서 한국어로
방송하고있다. 특히 라디오는 대중선교에 큰 몫을 감당하고 있는데 특히 심야 방
송은 청취감이 좋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정부는 지금 9억의 인구가 라디오를 들
을 수 있는 영역에 생활하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라디오는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
한 큰 무기임이 분명하다.
3. 생활 풍습
중국 대륙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동포들은 아직도 민족 고유의 생활 습관 및 풍
습응 잘 유지하고있다. 이들은 여러가지 악한 자연조건 속에서도 벼농사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벼농사가 맨처음 성공한 지역은 홍화현, 대구자를 중심한
몇몇 고장이였다. 그 성공에 힘입어 임감, 회안, 홍경, 유하, 해룡 등지에서도
1877년에는 성공하였다. 1906년 한족 농민은 1308m의 농업 용수 수용굴을 뚫는데
성공하므로 논에 물을 대는데 어려움이 없어서 벼의 수확이 급증하게 되었다. 이것
을 계기로 연변지구의 논면적이 해마다 확장되므로서 동북지구에서 생산되는 쌀은
그 쌀이 백설같고 찰지며, 영양가 높아, 이름난 경진, 소참지역 벼와 더불어 이름
이 떨치게 되었다.
한족의 마을은 보통 산 밑에 자리잡고 마을과 마을 사이는 20가30 리 이다. 보
통 한 마을은 많으면 수십호, 적으면 십호 정도이다. 집은 동남향, 남향 또는 서남
향으로 짓는다. 기와집과 초가집의 두 종류가 있고 가옥의 건축방식도 지붕이 모
두 경사지게 구조되고 볏집이나 기와로 덮는다. 집의 정면은 3문이나 4문으로 닫
는데 집안은 보통 침실, 객실, 부엌 그리고 창고로 나누어 지고 방바닥은 넓적한
돌을 골 위에 깔아 평평한 온돌을 만든다. 방오 들어갈때는 신을 벗고, 온돌 위
에 앉는다. 가족의 수는 적으면 3-4명, 많으면 10여명 된다. 중국에서 해방이라는
말은 1949년 10월 1일이며 즉 국민당 정권이 수립 된 날이기 때문이다.
해방전에는 혼인은 모두 부모가 짝지워 주는 식이였다. 또한 양자 제도, 데릴
사위제도도 있었고, 농촌에서는 이혼을 할 수 없었고, 과부가 되어도 재가할 수 없
었다. 한족의 큰 명절은 음력설, 청명, 한가위이고, 그 밖에 가정마다 축일, 제일
이 있다. 돌잔치, 회갑, 화혼절(60주년 결혼 기념일)에는 큰 잔치를 벌여 축하한
다. 좇살편담 한인들은 전통적인 유교적 생활방식으로 예의범절을 중요시하고 있
음을 지적했다.
음식은 된장, 고추장, 기미치, 시루떡, 송편, 냉면, 엿 같은 음식을 즐긴다. 여
행하는자에게는 특별히 보신탕을 대접하며 여전히 우리 민족의 식생활과 똑같음을
알 수 있다. 특히 9월 3일은 조선족 자치기구 창립일로서 큰 행사를 가졌는데 82년
9월 3일에는 30주년을 맞아 춤, 놀이, 운동경기, 각종 음식, 술로 한식으로 축제
의 기쁨을 누렸으며, 각종 민속공연도 하면서 순회공연을 하기도 한다.
중공 대륙의 동포들은 "소읊치괄"이란 호칭을 싫어하고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고국에 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문화 혁명 기간 박해 때문에 간절하여 졌다
고 한다. 언어에 있어서도 격리되어 있던 관계를 문법과 철자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얼빈에는 조선식당이 많이 있으나 순수한 조선음식을 만들지 못하고 있
는 실정이며, 또한 동포들도 매일 저녁 조국의 KBS, 아세아, 극동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고국과 호흡을 하는 자가 많이 있다. 편지도 대한 민국이라고 써
서 보내면 반송시키고 있으나, 남조선이라고 쓴 편지는 보으가가돋 도착이 되고
있다.
제 2 장 만주의 선교 역사(한국교회의 만주 선교 포함)
A. 선교의 역사
1. 카톨릭
만주지방에 최초로 전래된 기독교 일파는 7,8세기로 추정되는 경교의 전래를 들
수 있다. 이는 1928년 남만주 안산 일대에서 와제로 된 경교 십자가를 비롯한 경
교 유물이 다수 발굴됨으로써 확증되었다. 781년에는 경교의 중국 일대 전래와
발전을 소상히 밝혀주는 [대진경교유행 중국비]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9세기 중엽
부터 박해가 시작되어 11세기 에는 거의 쇠퇴한 것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중국 경
교의 흥망은 만주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의 경우를 보이고 있다.
그후 로마카톨릭에 대한 선교는 몽고제국이 건설한 원대에 이르러 비롯되고 있
다. 1291년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코르비노 신부가 교황 니콜라우스 4세의 사절로
원의 세조에게 파견됨으로 시작된다. 그는 약 35년간 중국에 머물면서 만주를 방
문하였는데 이것이 카톨릭에 의한 만주지방 선교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1307년
교황으로부터 만주 선교의 책임을 맡았고, 만주의 카톨릭 교세가 확장되자 1696년
교황 이노켄티우스 12세는 만주맛 북경 주교구의 일부로 지정하였다. 183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만주지역을 북경지구로 부터 독립시켜 만주교구를 창립하였는
데, 이 지역 선교를 파리 외방 전도회에서 전담하도록 조처하였다. 1844년 베를 신
부는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선교하였고, 1845년 브르니에르 신부, 1846년에는 베
넬 신부가 도착하였다. 특히 브르니에르는 1845년 5월에 전도 여행중에 칼피스족
에 의해 피살되어 만주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848년 베를 신부는 총살을 당하였
다. 그러나 선교활동은 만주 전역에 확대 되어 갔다. 카톨릭응 선교활동을 계속
되어서 1864년에는 만주전체에 6개소 성당과 약 5,000명의 신자가 존재해 왔다. 그
러나 산동성에서 발달한 의화단 사건의 여파는 1900년 만주의 대부분 성당이 파괴
되었고, 약 1천 5백여명의 카톨릭교인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봉천에서는 100명 교인
이 예배할 때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러한 참변에도 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만주에 11개의 교구가 설치 되었고
약 18만 4천명의 교인이 있었다.
2. 프로테스탄트
신교중에 가장 먼저 만주지방에 선교한 교파는 아일랜드 장로교회였다. 1868년
윌리암 번즈를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는 1847년 11월 아일랜드 장로교회
와 성서공회로 부터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홍콩과 상해, 하문, 산두, 복주,
북경등지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한뒤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받은 것이다. 그는
중국인의 말과 복장을 했고 만주에서는 완전히 중국인과 똑같이 생활하면서 개인
전도에 몰두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유창한 중국어로 설교하였고, 사명
감이 넘쳤다.
만주 지역 선교는 1862년 북장로교 선교를 시작했다. 그후 50년이 지난 후
1920년대에는 한국 교회가 산동성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큰 역사이다. 스
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ohn Ross)는 1871년에 동만주에 탐색 여행을 하고 1874년
만주에서 행상을 하다가 압록강에서 파선되어 상품을 잃어 버린 이응찬을 만나 한
국어를 배우게 되고 로스목사의 동료인 매킨 타이어의 누가복음을 번역하였으며,
이응찬은 1876년에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 맨처음 개신교인 되었다. 한편 로스목
사는 봉천에서 동관교회를 설립하고 1889년 10월에 헌당예배를 드렸다. 당시 출석
교인이 7백여명 이였다. 또한 로스목사는 1884년에 서간도 일대 한국인 촌을 순회
하며 많은 결신자를 얻고 75인에게 세례 베풀기도 하였다. 로스목사 보다 7년 늦
은 1882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의료 선교사 크리스티를 파송하였다. 그
는 봉천에 의학교를 개교하였고,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끝까지 감래하자, 탁
월한 의술로 병자를 치유하여 서서히 관민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
는 맹인의 수술을 성공하여 그의 명성은 만주에 퍼졌다. 그는 40년 동안 만주의
선교와 의료사업을 위해 헌신하였고, 그의 이러한 공로는 만주선교에 지대한 육폐
양 남겼으며 가봉천의 성자가로 불려지게 되었다. 한편 1891년 아일랜드 장로교
회 파송의 의료선교사인 그리그(A. Grieg)는 길림성교회를 세웠으며 1891년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로버트슨 목사와 의사 영을 파송하여 순회전도하였고,
1892년에는 북만선교에 착수하였다. 1895년에 덴마크의 루터파 교회가 다른 선교
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요동반도, 안봉선 철도 연변의 일부지역을 선교하였다.
초기 선교사로 Bolwig과 Wuaitlow 였는데 이들은 1896년 여순, 장하현, 대고산에
각각 교회를 설립하였고, 1898년 수암, 1899 봉황성에도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만주신의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891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회가 잠정적으로 통합되었다. 이
들은 합동하여서 가만주 장로회가를 탄생시켰고, 당시 관동 장로회의 교세는 스코
틀랜드 장로교회가 2341명, 아일랜드까지 합하면 5,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그뒤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1896년에 5,788명, 1897년 10,255명, 1898년
15,490명, 1899년 19,646명으로 4배로 증가했다. 1913년의 만주보고에 따르면 선
교사 153명, 의료 선교 병읏, 12개소, 의사 19명, 봉천의학교 학생 50명이였
고, 1943년 만주지역 기독교인의 통계는 15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제목 : 만주와 선교교 (3)
C. 교회의 내실화 시기 (1912 - 1917)
1912년 105인 사건이 발생되자 북간도 교회에 영향이 미치었다. 북간 도 교회는
신민회의 이동휘와 관계가 있고 간도의 혼춘지역의 민족 지도자 중에는 평양의 대
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선천의 성신학교, 평양의 숭실 학교 출신이 많았기 때
문에 이 계기로 내실화되여 교인수도 꾸준히 증가한 시기이다.
105인 사건으로 관련된 기독교인 가운데는 도망, 전거, 또는 탈교자도 있었다.
한일 합방이후 한인들은 간도 각처에 정치적, 경제적 망명 부락을 건설하였고, 이
주 촌락의형성과 함께 25개처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전체적 으로는 49개처의 교회가
이루어졌다. 1912년 1월 29일 원산 상지 교회에서 함경노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노
회의 설립과 함께 북간도 지역은 박연 선교사와 한인 목사 김존범이 동사 목사로
임명되었다. 1913면 북간도의 교세를 함경북도 지방과 비교하여 보면 원산에 34
개처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함흥에 33개처, 성진에 47개처, 회령에 21개처, 네곳
의 교인 총수는 8557명이였다. 그런데 북간도에는 20개처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1914년에 이르러서는 북간도교회가 34개처요, 해삼위 일대는 33개처 교회가 발전하
고 있었다. 북간도 교회의 전도 방법은 개인 전도였다. 또한 교회 명칭도 동네의
이름을 따서 정했고 또한 동네 이름도 구세동, 영생동, 낙원동으로 정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교회와 부락은 신앙공동체, 생활공동체로 발전하였다. 특히 명동
교회에서는 여전도회와 삼국 부인전도회를 만들어 크게 활동하였고, 용정교회는 영
신학교를, 명동교회는 명동중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1914년 세계 제1차대전이 일어나자 북간도의 한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기에 신앙심이더욱 돈독해졌다. 1914년 평북노회 전도국에서는 최봉석, 최성
주 목사를 서간도에, 한경희 목사를 길림지역에 파송하였다. 1915년에는 차형준목
사가 평북노회 파송으로 안동으로 건너가 전도하였다. 북간도 교회의 성도들은 모
이기에 힘써서 주일예배, 삼일기도회, 이외에도 새벽기도회, 특별기도회, 연합기
도회로 모이고, 성경 공부를 위하여 사경회와 성경학교를 개최했고 각 시찰별 교회
들이 연합하여 전도회를 조직하였다. 1916년 상황을 예수교 장로교 총회록에는 다
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전도구역거리는 2,500리 교회수 106개처, 총교인수 6,000
명, 생활 정도는 조선 내지와 비슷하며 산산 중곡에도 복음을 들고 믿는자가 많았
다.
노회 성립과 함께 각 교회에서는 많은 장로를 장립하였고, 노회 지역 내에 많은
신학생의 수학을 장려하여 목회자 양성에 주력했다. 그 당시 노회 경내 신학생으
로 채필근, 김이곤, 정기헌, 김관식, 최경재, 서창회, 박태환, 정재연, 이태헌, 이
송상, 김내범, 강두송 등이 있었다.
이 시대를 한마디로 함경노회 시대라고 할 수 있다.(1912-1917) 또한 차츰 한인
목사가 각 시찰 구역을 책임맡고 각교회의 목사, 조사여보수를 개교회가 자치적으
로 충당할 만큼 자치, 자립, 자급교회로 발전하였다.
D. 간도노회 성립시대(1918 - 1921)
북간도 지역 교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하는 가운데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독
립선언이 알려퍼지자 북간도 용정촌에서는 1919년 3월 13일 독립 선언 봉화가 울
려졌다. 이로 인해서 일제의 조선독립군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간도에 교회, 학교
들에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환란속에서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교회는 이
환란으로 더욱 강해지며, 교회는 성장되어 가는 것이다.
북간도 교회의 대부분의 교회는 3.1 운동에 가담하였고, 목사, 장로, 교인들이
적극가담하였고 이로 감금자로 생겼고, 죽은자, 중상당한자, 옥중에서 구속되었다
가 풀린자가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란중에서도 간도지역 교회들은 건물
을 매입하거나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함북 노회록 4,5,6,7 회록에 의하면 1919년
9월 부터 1920년 9월까지 각종 모임들이 조직되어 전도와 기도, 성경 연구, 사경
회를 통해 선교활동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간도 노회는 만세 운동의 무력감을 깨닫고 정신적으로 강화하여 인적, 물적 자
원을 공급하는데 힘썼다. 특히 3.1 운동 이후 교인이 집단 이주 하여 거주하는 가
운데 교회의 전도와 교회 성장을 촉진시켰다. 간도 교회들은 비참한 현실을 신앙
으로 극복하면서 1921년 간도 노회를 설립하였다. 간도노회가 설립될 당시 교회
의 총 숫자는 조직교회 30, 미조직 교회 57, 기도회처 28개등 105개였다. 교인수
6442명으로 그중 세례 교인은 약 30%로 1915명 주일 평균 모이는 출석 교인의
4,232명 이였다. 또한 목사는 6명, 영수 19인, 교회 임직원 195명이 된다. 이상
의 교세를 살펴볼 때 북간도 교회는 스스로 관리하고(자치)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기구가 갖추어진 상태로 발전되었다.
E. 간도 노회 성립 이후 (1922 - 1948)
만주지방에는 천도교, 대종교, 시천교, 유교 등 개종교가 성행했지만 기독교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래 도표를 보면 기독교가 차지하는 세력을 알수 있
다.
간도 지방 한인 종교상황 일람표(1925)
+---------------------------+-------------------+--------------------+
| 종 교 별 구 분 | 교회 또는 서원 | 신 도 수 |
+-----+---------------------+-------------------+--------------------+
| | 카나다 장로교 | 61 | 8,263 |
| 야 | 남 감 리 파 | 14 | 1,513 |
| | 동아 기독교 | 7 | 288 |
| 소 | 안 식 교 | 2 | 164 |
| | 천 주 공 회 | 32 | 9,320 |
| 교 +---------------------+-------------------+--------------------+
| | 계 | 116 | 17,548 |
+-----+---------------------+-------------------+--------------------+
| 천 도 교 | 11 | 3,686 |
| 대 종 교 | 3 | 2,109 |
| 청 림 교 | 1 | 30 |
| 원 종 교 | 5 | 272 |
| 시 천 교 | 9 | 5,109 |
| 제 우 교 | 1 | 51 |
+-----+---------------------+-------------------+--------------------+
| | 대 성 유 교 | 2 | 86 |
| 유 | 공 자 회 | 3 | 10,139 |
| +---------------------+-------------------+--------------------+
| | 계 | 5 | 10,225 |
+-----+---------------------+-------------------+--------------------+
| 불 교 | 3 | 43 |
+---------------------------+-------------------+--------------------+
| 총 계 | 154 | 27,073 |
+---------------------------+-------------------+--------------------+
간도노회가 성립된 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회에서는 만주 지역에
적극적인 외교 선교 정책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지역 교회 성장 을 가속화시켰다.
1931년에는 남북 만주 장감, 협의회를 구성하여 광범위하게 전도, 종교교육, 청
년사업 등 전개를 위해 협조를 모색하였다. 당시 만주의 기독교 현황은 다음과 같
다.
재만 기독교 비교 일람 (1934)
+--------------------------------------------------------------------+
| 기 독 교 |
+-----------------------+---------------------+----------------------+
| 지 방 면 | 회 당 수 | 교 인 수 |
+-----------------------+---------------------+----------------------+
| 봉 천 | 15 | 2,554 |
| 신 민 부 | 1 | 100 |
| 통 화 | 6 | 2,030 |
| 해 룡 | 11 | 1,140 |
| 안 동 | 8 | 2,976 |
| 길 림 | 2 | 332 |
| 경 화 | 1 | 70 |
| 신 경 | 4 | 375 |
| 하 얼 빈 | 6 | 769 |
| 수 분 하 | 3 | 364 |
| 해 삼 위 | 1 | 29 |
| 용 정 | 46 | 11,197 |
| 두 도 강 | 17 | 1,697 |
| 연 길 | 6 | 3,578 |
| 백 호 강 | 7 | 1,598 |
| 도 문 | 4 | 329 |
| 훈 춘 | 24 | 2,748 |
+-----------------------+---------------------+----------------------+
| 계 | 162 | 31,886 |
+-----------------------+---------------------+----------------------+
1941년 11월 26 - 27일 신경(장춘)에서 만주에 있는 기독교각 교회가 합동 총회
를 열고 28일 "만주조선 기독교회"의 합동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만주 개신교
의 합동된 교회가 약 280개, 교역자가 100여명, 신도가 약 50,000명에 달하였다.
중공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 기독교회 담임목사 김성하씨는 해방전에는 목사
가 1000여명, 성도가 70 - 80만이 되지 않았다고 하나 해방전 만주 지역 교세는
장로교 6개 노회, 교회 309, 목사 65, 선교사 3, 남자 전도사 84, 여전도사 20,
교인수 40500였고, 감리교는 만주 선교년회, 교역자 52, 교인 4,500명, 그외에
성결교, 동아기독교(침례교) 조선 기독교 등이 약간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 만주지역 선교는 1862년 미북장로교 선교부와 한국 교회의 선교
부의 양면으로 선교가 이루어 졌으며 한국교회의 최초의 선교지역이라는 점에는
의의가 크다. 본 연구의 관심인 만주지역은 한족의 박해를 피해 또는 흉년과 기근,
일제의 토지수탈이 노골화되고 한인 이주 정책이 강화되자 대규모의 한인이 이주
하였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3.1운동이후 국내의 교회는 정치성을 띠게 되었는데,
이때에 만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민족 운동으로는 독립운동의 한 형태로서 이상
향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1913년에는 한국교회가 만주를 향하여 이민을 통하여 복음의 씨앗을 던졌으며
1912년에는 원산 상지교회에서 함경노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1917년에 용정교회에
서 함남노회가 조직되었고, 1921년에는 간도노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이
1949년 공산화 되어진 후 1980년대 까지는 신앙의 압박과 어두움의 시기로서 고통
속에서 개인, 혹은 가정, 친족 중심의 지하 가정교회로 존재해 오고 있는 것이다.
제목 : 만주와 선교 (4)
제 3 장 만주의 선교 전략(한족 교포교회 중심으로)
A. 최근의 만주의 교회당 현황
1949년 이후 공산화 되어 40여년이 지나왔으나 여전히 지하교회를 통하여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다. 특히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통하여
기독교가 극심한 환란과 핍박을 받았으나 그 박해속에서도 기독교는 꽃피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동안 지하 교회에 숨어있던 가정교회들이 중공의 종교 정책의 변화
에 따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연길교회 김성하 목사에 의하면 만주에는
간판을 건 교회도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예배당을 짓지 못하고 있는 가정 교
회가 많다고 하면서 지하교회는 동북삼성에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현재의 교회
현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길림성
교회당 9개 교회, 교인 465인, 평균 한 교회당 52인 가량 된다. 그러나 교회당
을 설립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가 15개 교회에 234명의 성도가 모이며
평균 16명 가량이 회집된다.
2. 요녕성
요녕성에는 정식 교회당을 갖고 있는 교회는 12개 교회에 725명의 성도가 회집
되고 있으며, 한 교회당 평균 62명이 된다. 또한 가정 교회들은 12개 교회에 171
명의 성도가 회집되므로 평균 14명이 된다. 특히 요녕성의 단동시는 압록강을 사이
에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는 중요한 도시이며, 평양까지 왕복하는 차
편이 있다. 이곳을 왕래하는 주민이 수십만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선교는 북한
선교에 포문을 열 수 있는 등대요, 통로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3. 흑룡강성
흑룡강성은 교회당은 건립되지 못했으나 아세아 협력기구의 도움으로 "86년에
강시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동안 30여 교회가 매주 금요일이면 흩어진 처소에서 모
여 송화강 별관의 마가요한의 다락방이 이제 예루살렘교회처럼 변모하였다.
최근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안에서만 도시나 마을마다 교회를 하나씩 세울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한다.
B. 지도자 및 교인의 신앙상태
중국의 한인교회는 지도자가 절대 다수 부족한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지도자상
황을 보면 동북 3성에 총교회수 70개 교회에 목사가 2명, 전도사 4명, 장로 9명,
집사 26명, 평교인 32명이 지도자의 역활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흑룡강성의 교회
는 평신도 지도자가 82%나 되며 이로 인해서 설교집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는 실
정이다.
교인의 신앙 상태를 보면 지도자가 없이 혼자 신앙생활하다가 보니 혼자 신앙을
유지하기가 힘들기에 어떤 때는 구약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서 출애굽기의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설
립과 운영에 대한 지식과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며, 교파의 분류의 금식 기도 단식
기도에 대한 의문, 세례에 대하여도 의문을 가질 정도로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앙의 조기 교육을 통한 유년주일 학교와 중등부, 고등부
청소년들을 위한 모임을 갖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다음 세대를 이어갈 신앙의
후계자가 문제가 된다. 그것은 지도자의 부족 때문이며 선조의 신앙을 그대로 전
수받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C. 이단의 활동
1. 통일교
산업 선교를 통해 중공을 침투하여 순수한 신앙인들을 어지럽히고 있다.
2. 안식교
은밀히 거처하면서 안식교에서 발간되는 가시조가 잡지를 통해 성경의 교리를 어
지럽히고 구약과 신약의 성경의 중심내용을 이상히 취급하여 경건한 생활, 율법주
의에 대한 열심, 재림 소망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미혹하고 있다.
3. 여호와의 증인
역시 안식교 보다 더 많은 문서선교를 통하여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는 데 이
들을 호별방문에 선교 방법은 2인 1조가 되어 특히 개신교인을 특히 상대로 하여
신앙을 유린한다.
D. 만주 교회의 문제점
만주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교회당이 절대 부족하다.
지도자의 부족하다.
신학의 부재이다. 이들은 성경, 찬송도 다 갖고 있지 못한 현실 이며, 기타 주
식,설교집, 기독교 서적이 없으므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진정한 복음
을 전하는 도구가 매우 부족하며 어려운 실정이다.
만주에 있는 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 콜롬비아 성서대학에 선교학
교수로 재직한 솔토우의 말대로 토착교회의 설립과정을 개척단계, 조직단계 - 지
도자 훈련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역시 만주에는 이 세가지가 모두 필요한 곳이
다.
E. 만주의 선교 전략
1. 만주 선교의 실패원인
한민족 이주후의 큰 부흥과 자립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고, 특히 1920년에는
선교사를 파송할 정도의 교회가 식어지고 또 고립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보
다도 1949년 이후 공산화되어 40여년간 폐쇄되어 왔고 모택동 이의 문화혁명을 통
하여 교회가 핍박과 환란을 받을때에 외적으로 교회가 성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지하
교회나 가정교회로 전략하였던 것이 주요원인이라 하겠다. 또한 문제점은 가정교
회나 지하교회에서도 많은 문서와 성경이 없고하여 지도자를 양성한다든가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공산당의 제한속에서 복음
에 대하여 단지 라디오를 통하여 듣는 것이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정
도이기에 전파매체가 부족하고 교회간의 유대관계, 협력관계, 사경회, 부흥회,
기도회 등을 대외적으로 하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당간부들을 위한 대외비 자료에서는 8종 비정상적인 종교활동을 열거하고
있다.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 종교사상을 넣어주고 아동들을 종교 활동에 참가하
여 인도하는 것 정치, 교육과 혼인에 간섭하는 것 생산과 사회 질서를 방해하는
것 헌금한다는 명의로 강제 박탈을 자행하는 속이고 공민의 건강한 활동을 방해
하는 것
인민공사 재산을 이용해서 종교활동을 진행하는 것, 이미 폐지된 낡은 종교와
압제 제도를 회복하는 것, 국외에서 물건 혹은 예물을 받고 홍콩, 마카오, 입구에
서 선전 자료를 진행하는 것
자유로이 전도 여행을 하는 것이상과 같은 부정당한 활동은 반드시 교육의 방법
을 통해서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중공정부에서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 종
교사상 넣어 주는 일에 대하여 금지하고 있기에 복음을 40년전에 반은 사람이 주류
를 이루고 있기에 매우 폐쇄적인 사회에서의 복음 유지가 어려움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있는 성도들 역시 세대차이가 있는 자녀와의 자유로운 신앙토론
이나 가르침이 자료가 없는 가운데 2세교육에 더욱 어려움을 느낀다. 일부 신앙이
돈독한 부모등은 요게벱처럼 신앙 교육을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다.
2. 만주 선교의 방법
* 최대의 전략은 지도자
먼저 지도자가 어떤 환경과 여건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자가 필요하다. 우선 공
산국이기에 다방면에 소질이 있는자이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복음 전하는 것
을 목적으로 하되 특수한 기능을 가진자는 더욱 좋을 것이다. 즉 농사법, 공업 기
술자, 어학에 능하거나,그곳에 필요한 기능을 가진자가 이 일을 한다면 훨씬 효과
적이며 그 기능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교사의 자
격은 아래와 같이 갖춘자가 좋을 것이다.
소명받은 자이여야 한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바친자이여야 한다.
영적인 자이다. 성숙한 인격을 갖춘 자. 즉 중생의 체험과 더불어 성화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써 인간관계 원만, 이해, 격려, 친절, 겸손, 지혜와 덕을 겸비
해야 할 것이다. 자기분야에서 전문가이여야 한다. 즉 정규 교육을 이수하고, 선
교의전문인으로서 풍부한 성경지식, 언어에 능통한 자이여야 한다.
* 선교목표지역 선정
만주에는 특히 한족 중심의 자치주가 많이 있고 이제는 종교적인 자유 가 어느정
도 허용되었기에 길림성의 연길시의 "연길 기독교회"는 매우 중요한 선교센터가
될 수 있다. 더우기 연길시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고 또 목사가 있다는 점
이 매우 유리하다. 그래서 그곳에 센터를 정해 두고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지역을
확대해 가면서 선교해야 할 것이다. 특히 김성하 목사는 아세아 선교 협력기구와
교류를 하고 있으며,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기에 더욱 유리하다. 그 지역에 있는
지도자를 일차적으로 만나서 주변환경과 문화, 풍습, 기후 등 그 지역의 특성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을 습득한 다음 선교를 시행해야 한다.
* 기존교회를 선교의 중심지로 이용하는 방법
만주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다.유형 교회를 비롯해서 가정교회들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현재 기존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며 그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하며, 그들을 통해서 복음의 불씨가 더욱 많이 번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더 많은 개척교회를 하며, 우리는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
여 복음이 확산되도록 해야 될 것이다.
* 방송 선교
중국 선교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방송선교이다. 아세아 방송 이나 극동
방송은 이러한 면에서 매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더 많은 중국 어 방송과 한국어
방송을 통해서 그들의 귀가 뜨여지게 해야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 및
문서선교에도 더욱 애를 써야 할 것이다.
* 팀 선교 전략
선교는 혼자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에 뜻이 있는 사람이
팀을 구성해서 사역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 하다. 이 선교는 선교 단체나 교회의 정
책만으로는 성사될 수 없다. 그러므로 팀의 조화는 매우 중요하다.
외국 선교부와 협력해야 한다. 즉 미국, 중공, 일본 등 교류가 형성된 선교부와
협력하여 재정적, 인적 문제는 한국 선교부에서 감 당하더라도 그들의 명의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의 협력 관계이다.
이제는 한국과의 관계도 호전되리라 생각한다. 88 올림픽 이후로 많은 외교
관계가 완만해 짐을 보는데 특히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국내 선교부간의 협력이다. 즉 서로 자료 교환, 정보 교환 등으로 자기의 선교
단체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 독단으로 하기 보다는 교단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협력함이 바람직하다. 만주 교회의 교포들의 협력 선교이다.
* 다양한 선교 전략
선교 방법은 여러 가지로 적응해야 한다. 문서선교, 의료선교, 스포츠선교, 문화
교류 선교, 산업 선교 등을 통해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간접적으로 침투하는 방법
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미련한 지혜를 사용하심을 믿는 다. 방송 선교를 강화하며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선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방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하나
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최우선이다.
결 론
선교는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사명이요,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명령이다. 만주의
선교는 이미 하나님이 여러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여 조성하셨고 기반을 조성하신
곳으로써 공산세력으로 폐쇄되어 있는 이 장막을 어떻게 넘느냐 하는 것이 과제이
다. 믿음의 선진들이 다방면으로 시도했던 일들위에 이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 기능, 환경 등을 동원해서 선교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한국은 교포사회로
구성된 만주를 향해 언어의 장벽이 없이 선교할 수 있는 잇점을 최대한 살려야 할
것이다. 이 배후에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이 선교전략보다 우선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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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전호진, [현 중공사회 교회의 보고서]
12. 전동식, [선교전략] (서울:총회목회신학원, 1990)
13. 차재명 편, [조선 장로회 사기]
14. [예수교 총회] 제5회 회록
15. [간도 노회 제1,2 회록], 1923.
서 론
제 1 장 만주의 일반적인 고찰
A. 자연환경
B. 정치적 배경
C. 문화적 상황
제 2 장 만주의 선교 역사(한국교회의 만주 선교 포함)
A. 선교의 역사
B. 교회 개척과 개신교의 부흥시기(1906 - 1911)
C. 교회의 내실화 시기 (1912 - 1917)
D. 간도노회 성립시대(1918 - 1921)
E. 간도 노회 성립 이후 (1922 - 1948)
제 3 장 만주의 선교 전략(한족 교포교회 중심으로)
A. 최근의 만주의 교회당 현황
B. 지도자 및 교인의 신앙상태
C. 이단의 활동
D. 만주 교회의 문제점
E. 만주의 선교 전략
결 론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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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만주는 역사적으로 우리의 고토요, 지리적으로는 가장 인접한 곳으로 한국 근대
사에 있어서 민족의 애환이 깃든 곳이다. 해방 직전에는 210만명의 이주민들이 살
고 있었고 이를 대상으로 한국 교회는 피선교국에서 선교 국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만주의 선교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 만주의 일반적인 자연환경이나 지리
적 배경,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살펴보므로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 생각한다.
둘째로는 만주의 선교의 시작과 부흥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교회의 성립되고
어떻게 쇠퇴하였으며, 당시의 교회 조직과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째로는 선교전략에 있어서 최근 만주의 교회현황을 파악하고, 지도자 및 평신
도의 신앙 상태 그리고 이단의 활동 등을 살펴보고 만주 교회의 문제점, 그리고
만주 선교의 실패는 무엇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선교해야 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
는가 방법적인 면을 고찰하였다.
더우기 한국 교회는 만주 선교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여전히 조선 자치족
으로서 가정교회, 지하교회, 유형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이들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으며 또한 앞으로 볼때에도 만주 선교는 한국이 감당해야 되지 않을
까 생각된다.
제1장 만주의 일반적인 고찰
A. 자연환경
1. 지리적 배경
만주는 중국의 동북부 지역 전체를 일컬으며, 그 정확한 위치는 북쪽으로 시베
리아 접경지인 흑룡강 이남 지역, 남쪽으로는 관동주의 만리 장성으로 중국본토에
연결되는 요동반도 여순 지방의 이북 지역, 동쪽으로는 연해주 점경지인 오소리강
까지, 서쪽으로 외몽고 접경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면적은
한반도의 약 6배가 되는 1,306,900km2이고 1945년 당시의 행정 구역은 19개의 성
과 1개의 특별시로 분할되어 있었다. 대중 동서남북 4개정점으로 하는 사변형으로
그 사변 에는 각각 산맥(대흥안령, 장백, 소흥안령, 송령, 연산)과 해만이 둘러싸
여 있으며 그 가운데는 대 평야갸 전개되어 있다.
* 연변 조선족(Yanbian Korean Autonomous District)
원래 청조의 발상지이다. 이 지역을 봉금지라 하여 이주를 금지하다가 1882년에
간무국을 설치하면서 개척하기 시작한 이곳은 우리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간에 정계비를 백두산에 세워 양국간에 국경 분기원점
을 마련하였는데, 이 정계비에 의하면 이곳 연변 지역은 분명히 대한민국 영토에
속한다. 1883년 청나라가 이곳을 개척 하면서 다시 영유권 문제가 제기되어 3회에
걸쳐 국경회담을 가졌는데 청나라가 이 지역의 영육권을 주장하여 해결을 보지 못
하다가 그 후 청나라 가 간무국을 연길청(1902)으로 승격시켜 행정력을 강화하자
구한국 정부 로부터 외교권을 빼앗을 일본은 1907년 용정에 "통감부 출장소"를 설
치하여 준식민지 통치지역으로 관리하던 중 1909년 9월 청일간에 간도에 대한 협
약을 맺고 안봉철도가안동(단동)-봉천(삼양)간 274km 부설권과 무순 탄광 개발권
등 4대 이권과의 교환조건으로 연변지역에 대한 한국의 영육권 을 포기하고 청
나라의 영토로 잃어버린 지역이다. 현재 한민족의 가장 큰 집결 거주지역에만 110
만 정도가 살고 있어 중국내 한 민족의 43%를 차지 하고 있다. 이 자치구는 길림
성내 동남부의 연길, 도문의 두시와 연길, 화룡, 안도, 혼촌, 왕청, 돈화 등 6개
의 현을 합친 면적 41,500평방 km 이다. 중공안에서의 한국 교포들의 공식명칭은
조선족으로 되어 있어 교포들은 스스로 조포라는 말을 쓰고있다. 조선족 자치구는
1952년에 구성 되었으며 행정 중심지는 연길시에 있고 행정 책임자는 한국인이나
그 밖의 각급 관리는 중국인도 있다. 연변은 중국동북의 3성의 하나인 길림성의
동남부 지구인데 동쪽으로는 소련의 시베리아, 남쪽으로는 압록강 상류, 백두산
또는 두만강을 두고 북한과 접경이 되어 있으므로 중공의 군사 기지로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하고 있다. 면적은 대략 우리 나라 강원도와 같은데 총인구로 170만 정도
이며 해방전에도 간도로 알려졌던 곳이다. 동북지방엔 길림성외에 흑룡강성, 요
녕성이 있는데 이 지역을 보통 동삼성 이라고도 하고 옛날엔 만주라고도 부르던 곳
인데 현지 중공거류 교포들도 만주라는 이름이 일제시대의 말이라고 이 말을 몹시
싫어한다. 이 삼개성에서 중국인과 우리 교포가 반반이고 농촌에서는 우리 교포가
더 많은 곳이 여러개 있다. 그러면 동북 3성의 지리적 배경을 세분해서 살펴 보자.
* 길림성(chilin province)
중공의 동북부의 흑룡강성과 요녕성 그리고 내몽고 자치구 사이에 위치하며 동남
부는 우수리강(흑룡강의 하류을 사이에 두고 소련과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부를 사
이에 두고 우리나라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청조 (1636 가1911)말기때 성제도가 실
시된 후 흑룡강성, 요녕성과 더불어 "동삼성" 이라 불려왔다. 면적 29만km, 인구
2,256만이며 주민은 한족을 비롯하여 조선족, 만주족 등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
다. 길림성의 중첩도시는 장춘시이다. 길림성의 동남쪽과 서북쪽은 지대가 높고
중부는 평이부인데 백두산 천지못에서 흐르는 송화강(길이 1,840km), 압록강
(길이 521km)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하천이 허다하며 또 중부 평야지대에 호수가
산재하여 수자원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토지가 비옥하다. 겨울에는 한냉 건조하
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한 대륙성 기후로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1월의 평균기
온은 영하 26도이다. 연강수량은 400 - 100mm이며 총강수량은 60%가 6 - 8월에 집
중하고 있다.
농업이 발달하여 수수, 옥수수, 대수, 사탕무우, 아마 등을 경작하나 연변 조선
족 자치구일대에는 한인들에 의하여 벼농사가 활발하다. 산림은 울창하므로 임업
이 발달하였고, 특용작물로는 약초, 산포도, 버섯류, 각종 동물의 모피등이 산출
된다. 그중에 인삼, 녹용, 담비가죽은 "동북삼보" 라고 불리울 만큼 내외의 명성
이 높다. 공업은 자동차, 기계, 전력, 화학, 야금, 인조 섬유, 제재등이 발전하고
있는데, 그중 자동자 공업이 전국 제1위이고, 제재, 화학 비료의 생산고는 전국 2
위를 차지하고 있다. 철도망은 중국에서 가장 밀도가 높으며 장빈선(장춘-하얼빈
241km), 만주선 (하얼빈-만주리 936km), 장도선(장춘-도문 249km) 등이 있다.
* 요녕성(Liaoning Province)
본성은 옛날에 고구려 땅이기도 했는데 남동쪽은 압록강을 끼고 한만국경을 이
루며 남쪽으로는 황해와 접한다. 이 지역은 한국과 중국을 왕래 하는 통로로써 한
반도에 중국문화를 전파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지역으로 옛 부터 우리 민족과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면적은 23km, 인구 3,572만, 인구 밀도 247명, 동부와
서부는 산지와 구릉이고, 중부는 평원이다. 겨울에는 한랭 건조하고, 여름에는 덥
고, 비가 많이 온다. 연 평균 기온도 동북과 서남 지역간에 10도의 차이가 있
다. 연강수량은 400 - 1000mm 가량이다.
농산물로는 옥수수, 수수, 쌀, 조, 소맥등이며 면하, 대두, 담배, 땅콩 등도 많
이 재배한다. 지하자원으로는 철, 설탕, 금 망강, 동, 연, 알미늄 등 각종 광물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공업은 과거 일본인이 주로 건설한 중공 최대의 공업도시로서
제철기지이며, 석탄화학, 인조석유, 공작기계, 정밀기계, 전기기기, 조선, 화학,
제지방직, 제사, 요업 등 각종 공업이 발달하였다. 교통은전중국을 통하여 철도
만이 가장 조밀한 지역이다. 심양을 중심으로 경심선(북경-심양 850km), 장대선(장
춘-대연 705km), 심길선(심양-길림 445km), 심목선(심양-목동 274km) 등 간선(모스
크바, 평양 등으로 국제 열차가 운행) 철도와 지선들이 있다.
* 흑룡강성(Heilungkiang Porvince)
중국대륙 동북부 끝에 위치하여 북과 동은 소련과 서부는 외몽고(몽고인민 공화
국)와 각각 국경을 이루고 남부는 길림성과 접경해 있는데 청조(1662 가 1911)초
까지도 인구가 희박한 미개발 지역이였다. 러시아 제국의 동진에 대비하여 17세기
후반부터 청조의 군사거점이 설치되기도 했는데, 29세기 초두에 동청철도(시베리
아 철도가 본성의 서북부의 만주, 하얼빈, 목단을 거쳐 블라디 보스톡까지 연결된
것)가 개통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본성을 만주 식민지화의 기지로 삼으려 하였고
한 민족에 의한 개발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면적은 1970년에 내몽고에 자치주의
복단부가 편입되어 현지 71만의 인구 3,270만, 인구 밀도 70명/km(1982년 통계)
중심 도시는 하얼빈시이고, 흑룡강(길이 2,965)은 본성의 최대의 강으로 소련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북부지방은 동토지대도 있고, 남부의 여름은 대륙성 기후이
며, 연 강수량은 300 - 600mm 이다. 농작물은 대두, 사탕무우, 해바라기 등을 재
비하고 북부, 남부, 서부의 산간지대는 산림이 무성하여 천연 대목장 지대로서
말, 소, 면 양을 많이 사육한다.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연산 5,000만톤의 중공 제1
의 유전인 대경유전과 연간 500만톤을 정유하는 대경 정유소가 치치하르시 동남방
약 120km 지점에 있다. 기타, 석탄, 금, 천연소와 철, 알미늄, 흑연의 매장량도 많
다.
B. 정치적 배경
1949년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대만을 제외한 중국전체를 장악해 버렸다. 이것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정치적 균형을 서서히 잃게 되었던 22년에 걸친 혁명전쟁
의 귀결이였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중공당 주석
모택동은 중국이 다시는 다른 나라에 예속되지 않을 것 이라고 선언했다.
1949년의 중공이 당면한 문제는 매우 다양했다. 그 일부는 혁명투쟁이 직접적인
결과였고 다른 일부는 한 세기에 걸친 외국 지배에 유산이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먼 과거로부터 싹터온 이념적인 것도 있었고, 경제적인면도 있었다. 먼저 모택동
은 전국토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1952년 10월까지 90%를 완성한 뒤 1953 - 1957
년까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해 갔다.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을 시도
하였다. 그 전개 운동는 (1) 사회주의 건설 총 노선 (2) 공,농업 생산 대약진 (3)
인민공사(집단농장)이다. 이 셋은 모두 사회주의 개조의 약진 계획을 지향하고 있
기 때문에 보통 "대 약진"이라고 부른다. 1960년의 중가소 관계의 분열과 애약진
운동에서의 어려움이 겹쳐서 매우 심각한 위기를 맞자 1961 - 1965년까지는 경제
조정기간으로서 수정주의 노선으로 들어간 뒤에 제3차 5개년 계획을(1966 - 1970)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10년간의 문화혁명과 나란히 전개되었다.
문화 혁명은 전통적인 문화창조기구, 즉 작가협회, 미술관, 출판소, 신문, 박물
관등을 파괴해 버렸다. 1966년 부터 1969년 사이에 낡은 것들 즉 낡은 이념, 낡은
개인적 습관, 낡은 공적 습관, 그리고 낡은 문화라는 오명을 쓰고 기독교는 공격의
화살을 받았다. 그리하여 교회는 문을 닫고, 종교지도자는 체포되고, 성경과 찬송
그리고 다른 책들을 불태웠으며, 지성인들을박해했다.
국가가 통제하던 몇몇 제도적 교회들 조차도 중국사회 표면에서 완전히 제거되
었다. 제도화된 교회의 마지막 흔적의 장례였다. 당시에 조선족 자치주안의 교회
도 예외가 아니였다. 한성도는 그때에 일어났던 일을 다음 과 같이 편지로 보냈
다. "유학을 했던 사람이나 대학에 조금 다닌 자들은 썩은 지식인으로 놀림받고
압박당했습니다. 우리 전도사님은 지식 분자 예수쟁이의 우두머리로 잡히게 되었습
니다. 삼양거리를 다니서 공산당들은 ' 예수쟁이 타도하라' 라는 구호를 외치며
다녔습니다.
한국 에서 보내는 복음의 방송조차도 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뿐만 아니
라 유교, 불교, 자유주의적 지성주의도 막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에 배치된다
하여 핍박을 가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지하로 잠적했고, 신실한 신자들은 가정교
회를 형성하여 신앙의 명맥을 유지해 갔다.
또한 "종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심지어 그들의 헌법에 "신앙의
자유"란 조문에 종교를 믿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무신론을 신앙할 자유가 있다"
고 했다. 이 기간은 잃어버린 10년 이라고 할 수 있는 암흑기였다.
1976년 1월8일 주은태 수상의 사망과 1976년 9월 9일 모택동 당 주석의 사망후
화국봉이 이끄는 신온건파 정부가 과격파 지도자 이른바 4인방(왕홍문, 장춘교,
강청, 도무원)을 1976년 10월 6일 체포하고 (1980년 공개 재판) 당시에 중국이
직면한 정치, 경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제5차 5개년 계획
(1976-1980)을 재편성하여 10개년 경제개발 계획(1976-1985)을 내놓았다. 이것은
20세기 말까지 G.N.P. 4배 증가와 90년대의 도약을 위한 기초구축이 목표였다.
1986년에는 제7차 5개년 계획을 1990년까지 세워놓고 있다. 최근에 중공은 개방정
책 4개 기본원칙을 제시했는데, 사회주의 노선 마르크스-레닌-모택동 사상
공산당이 영도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계속하는데 있다고 했다. 위의 4개의 기본
원칙 에 부합되지 않는 개혁은 받아 드릴 수 없다고 했다. 또한 87. 4. 11일 에 폐
막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국회)는 개혁파와 보수파를 불문하고 노선상의 갈등을
자제했으며,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안전단결이라는 명제 아래서 타협의 국
면에 접어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중공은 외국인 투자법 건설, 외교등을 강화하는
50개 새 법안 제정을 위한 5개년 계획을 87. 4. 25일 발표했다. 이 법안은 사회
주의 사회 개발 촉진을 골자로 한 것이다. 이같은 법안과 함께 제정된 300개의 행
정법규초안은 1990년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제출하게 된다. 또한 단일민족이 아
니라 한족을 제외한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복합 민족국가라는 문제가 있었지
만 이 모든 지역간의 불균형과 난제들 속에서도 중화 사상으로 용해해 갔다. 특
히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위해서 는 1952
년 조선족 자치국을 인정하여행정 중심지는 연길시에 두고 있다. 중공은 22개성 5
개 자치주 3개의 직활시가 있는데 그중에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성은 동북 3성이
다. 특히 소수민족이라고 차별하기 보다는 자치권을 주어서 고유예술과 문화를 발
전시키도록 하였고, 특히 9월 3일은 조선족 자치기구 창립일로서 큰 행사를 한다.
우리 민족이 중국내에 약 176만명이 사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의 자치주
는 심양군주의 요녕성 군주, 길림성 군주, 흑룡강성 군주 속에 포함된다. 물론 지
방 부대와 민병대의 조직, 변방지역과 도시방위, 사회 질서와 치안 유지하도록 하
며, 고유예술과 문화를 존속 발전시키고 있다.
제목 : 만주와 선교 (2)
C. 문화적 상황
1. 교육 및 학술단체
1949년 연길시는 신형의 종합적 민족대학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연변 대학이다.
1959년 전후해서 연변 농학원, 연변의학원이 건립되었다. 또한 여명여업농대, 연
변사범학교, 무역학교, 예술학교, 위생학교 등 중등전문 학교들이 창설되었다.
연변지구에는 대학이 4개, 중학 265개, 소학교 1,298개가 있다. 1952년에 소
학교육을 전원보급했고, 1958년에는 중학교육이 일반화되었으며, 현재 고급중학교
육을 보편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교포들은 약 3만명 정도가 대학
을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연변대학의 경우 1600명의 대학생 가운데 74%가 한
국 사람이며 요녕성의 심양의 경우에는 조선족 소학교가 20개 중학교가 6개나 된
다. 중공에 있는 소, 중학교의 커리큘럼은 전국적으로 같으며 동포만의 학교라도
한글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어도 사용한다. 교포가운데서 중공의 중앙 국
가기관 활동 분야에 일하는 사람이 수백명이 되며 북경의 중국과 학원의 각 연구
소와 북경대학의 각 지역의 단과 대학에도 여러명이 재학하고 있다. 해방 이래로
문화예술가들도 나냅 발전했다. 연변 자치구는 문학, 예술가연합회, 중국작가 협회,
연극, 음악, 무도, 미술, 영화의 5개 분과 위원회를 창설했다. 또한 작가와 출판
관계자가 278명이며, 이들은 "조선족 문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이외에 중국
조선어학회, 연변언어 연구소, 조선문제연구소, 조선역사 연구소 등이 각각 개설되어
있다. 이외에도 대중과학, 아동지 등을 비롯한 잡지들이 정기적으로 발간되고 있다.
그밖에 연변 가무단, 활극단, 연변희곡극단이 있고, 1957년에는 연변 예술학교가
설립되었다.
2. 매스컴 활동
해방후 1945년에 연길시에 조선어문의 길림인보가 나왔으며, 그 뒤에 연변일보가
나왔다. 그밖에 흑룡강일보의 조선문관, 요녕일보의 조선 문판이 나왔다. 길림일보
는 1945년 10월 10일에 창간되고, "82년도의 발행부수는 26만부였다. 흑룡강 일부
는 1949년 6월 1일에 창간되어 1954년에 송강일보에 합병하면서 당위원회의 기관지
가 되었다.
요녕일보는 1954년에 발간되었는데, 82년에는 43만부이다. 방송국으로는 연길시
에 소재한 T.V. 방송국을 포함해서 5개의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고, 라디오 방송으
로는 길림성에연봉, 라디오 방송, 장춘 라디오 방송이 있으며, 흑룡강성에는 하얼
빈 라디오 방송이 있다. 또한 북경 방송국의 대외 방송과 대내 방송에서 한국어로
방송하고있다. 특히 라디오는 대중선교에 큰 몫을 감당하고 있는데 특히 심야 방
송은 청취감이 좋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정부는 지금 9억의 인구가 라디오를 들
을 수 있는 영역에 생활하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라디오는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
한 큰 무기임이 분명하다.
3. 생활 풍습
중국 대륙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동포들은 아직도 민족 고유의 생활 습관 및 풍
습응 잘 유지하고있다. 이들은 여러가지 악한 자연조건 속에서도 벼농사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벼농사가 맨처음 성공한 지역은 홍화현, 대구자를 중심한
몇몇 고장이였다. 그 성공에 힘입어 임감, 회안, 홍경, 유하, 해룡 등지에서도
1877년에는 성공하였다. 1906년 한족 농민은 1308m의 농업 용수 수용굴을 뚫는데
성공하므로 논에 물을 대는데 어려움이 없어서 벼의 수확이 급증하게 되었다. 이것
을 계기로 연변지구의 논면적이 해마다 확장되므로서 동북지구에서 생산되는 쌀은
그 쌀이 백설같고 찰지며, 영양가 높아, 이름난 경진, 소참지역 벼와 더불어 이름
이 떨치게 되었다.
한족의 마을은 보통 산 밑에 자리잡고 마을과 마을 사이는 20가30 리 이다. 보
통 한 마을은 많으면 수십호, 적으면 십호 정도이다. 집은 동남향, 남향 또는 서남
향으로 짓는다. 기와집과 초가집의 두 종류가 있고 가옥의 건축방식도 지붕이 모
두 경사지게 구조되고 볏집이나 기와로 덮는다. 집의 정면은 3문이나 4문으로 닫
는데 집안은 보통 침실, 객실, 부엌 그리고 창고로 나누어 지고 방바닥은 넓적한
돌을 골 위에 깔아 평평한 온돌을 만든다. 방오 들어갈때는 신을 벗고, 온돌 위
에 앉는다. 가족의 수는 적으면 3-4명, 많으면 10여명 된다. 중국에서 해방이라는
말은 1949년 10월 1일이며 즉 국민당 정권이 수립 된 날이기 때문이다.
해방전에는 혼인은 모두 부모가 짝지워 주는 식이였다. 또한 양자 제도, 데릴
사위제도도 있었고, 농촌에서는 이혼을 할 수 없었고, 과부가 되어도 재가할 수 없
었다. 한족의 큰 명절은 음력설, 청명, 한가위이고, 그 밖에 가정마다 축일, 제일
이 있다. 돌잔치, 회갑, 화혼절(60주년 결혼 기념일)에는 큰 잔치를 벌여 축하한
다. 좇살편담 한인들은 전통적인 유교적 생활방식으로 예의범절을 중요시하고 있
음을 지적했다.
음식은 된장, 고추장, 기미치, 시루떡, 송편, 냉면, 엿 같은 음식을 즐긴다. 여
행하는자에게는 특별히 보신탕을 대접하며 여전히 우리 민족의 식생활과 똑같음을
알 수 있다. 특히 9월 3일은 조선족 자치기구 창립일로서 큰 행사를 가졌는데 82년
9월 3일에는 30주년을 맞아 춤, 놀이, 운동경기, 각종 음식, 술로 한식으로 축제
의 기쁨을 누렸으며, 각종 민속공연도 하면서 순회공연을 하기도 한다.
중공 대륙의 동포들은 "소읊치괄"이란 호칭을 싫어하고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고국에 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문화 혁명 기간 박해 때문에 간절하여 졌다
고 한다. 언어에 있어서도 격리되어 있던 관계를 문법과 철자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얼빈에는 조선식당이 많이 있으나 순수한 조선음식을 만들지 못하고 있
는 실정이며, 또한 동포들도 매일 저녁 조국의 KBS, 아세아, 극동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고국과 호흡을 하는 자가 많이 있다. 편지도 대한 민국이라고 써
서 보내면 반송시키고 있으나, 남조선이라고 쓴 편지는 보으가가돋 도착이 되고
있다.
제 2 장 만주의 선교 역사(한국교회의 만주 선교 포함)
A. 선교의 역사
1. 카톨릭
만주지방에 최초로 전래된 기독교 일파는 7,8세기로 추정되는 경교의 전래를 들
수 있다. 이는 1928년 남만주 안산 일대에서 와제로 된 경교 십자가를 비롯한 경
교 유물이 다수 발굴됨으로써 확증되었다. 781년에는 경교의 중국 일대 전래와
발전을 소상히 밝혀주는 [대진경교유행 중국비]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9세기 중엽
부터 박해가 시작되어 11세기 에는 거의 쇠퇴한 것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중국 경
교의 흥망은 만주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의 경우를 보이고 있다.
그후 로마카톨릭에 대한 선교는 몽고제국이 건설한 원대에 이르러 비롯되고 있
다. 1291년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코르비노 신부가 교황 니콜라우스 4세의 사절로
원의 세조에게 파견됨으로 시작된다. 그는 약 35년간 중국에 머물면서 만주를 방
문하였는데 이것이 카톨릭에 의한 만주지방 선교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1307년
교황으로부터 만주 선교의 책임을 맡았고, 만주의 카톨릭 교세가 확장되자 1696년
교황 이노켄티우스 12세는 만주맛 북경 주교구의 일부로 지정하였다. 183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만주지역을 북경지구로 부터 독립시켜 만주교구를 창립하였는
데, 이 지역 선교를 파리 외방 전도회에서 전담하도록 조처하였다. 1844년 베를 신
부는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선교하였고, 1845년 브르니에르 신부, 1846년에는 베
넬 신부가 도착하였다. 특히 브르니에르는 1845년 5월에 전도 여행중에 칼피스족
에 의해 피살되어 만주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848년 베를 신부는 총살을 당하였
다. 그러나 선교활동은 만주 전역에 확대 되어 갔다. 카톨릭응 선교활동을 계속
되어서 1864년에는 만주전체에 6개소 성당과 약 5,000명의 신자가 존재해 왔다. 그
러나 산동성에서 발달한 의화단 사건의 여파는 1900년 만주의 대부분 성당이 파괴
되었고, 약 1천 5백여명의 카톨릭교인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봉천에서는 100명 교인
이 예배할 때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러한 참변에도 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만주에 11개의 교구가 설치 되었고
약 18만 4천명의 교인이 있었다.
2. 프로테스탄트
신교중에 가장 먼저 만주지방에 선교한 교파는 아일랜드 장로교회였다. 1868년
윌리암 번즈를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는 1847년 11월 아일랜드 장로교회
와 성서공회로 부터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홍콩과 상해, 하문, 산두, 복주,
북경등지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한뒤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받은 것이다. 그는
중국인의 말과 복장을 했고 만주에서는 완전히 중국인과 똑같이 생활하면서 개인
전도에 몰두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유창한 중국어로 설교하였고, 사명
감이 넘쳤다.
만주 지역 선교는 1862년 북장로교 선교를 시작했다. 그후 50년이 지난 후
1920년대에는 한국 교회가 산동성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큰 역사이다. 스
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ohn Ross)는 1871년에 동만주에 탐색 여행을 하고 1874년
만주에서 행상을 하다가 압록강에서 파선되어 상품을 잃어 버린 이응찬을 만나 한
국어를 배우게 되고 로스목사의 동료인 매킨 타이어의 누가복음을 번역하였으며,
이응찬은 1876년에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 맨처음 개신교인 되었다. 한편 로스목
사는 봉천에서 동관교회를 설립하고 1889년 10월에 헌당예배를 드렸다. 당시 출석
교인이 7백여명 이였다. 또한 로스목사는 1884년에 서간도 일대 한국인 촌을 순회
하며 많은 결신자를 얻고 75인에게 세례 베풀기도 하였다. 로스목사 보다 7년 늦
은 1882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의료 선교사 크리스티를 파송하였다. 그
는 봉천에 의학교를 개교하였고,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끝까지 감래하자, 탁
월한 의술로 병자를 치유하여 서서히 관민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
는 맹인의 수술을 성공하여 그의 명성은 만주에 퍼졌다. 그는 40년 동안 만주의
선교와 의료사업을 위해 헌신하였고, 그의 이러한 공로는 만주선교에 지대한 육폐
양 남겼으며 가봉천의 성자가로 불려지게 되었다. 한편 1891년 아일랜드 장로교
회 파송의 의료선교사인 그리그(A. Grieg)는 길림성교회를 세웠으며 1891년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로버트슨 목사와 의사 영을 파송하여 순회전도하였고,
1892년에는 북만선교에 착수하였다. 1895년에 덴마크의 루터파 교회가 다른 선교
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요동반도, 안봉선 철도 연변의 일부지역을 선교하였다.
초기 선교사로 Bolwig과 Wuaitlow 였는데 이들은 1896년 여순, 장하현, 대고산에
각각 교회를 설립하였고, 1898년 수암, 1899 봉황성에도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만주신의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891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회가 잠정적으로 통합되었다. 이
들은 합동하여서 가만주 장로회가를 탄생시켰고, 당시 관동 장로회의 교세는 스코
틀랜드 장로교회가 2341명, 아일랜드까지 합하면 5,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그뒤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1896년에 5,788명, 1897년 10,255명, 1898년
15,490명, 1899년 19,646명으로 4배로 증가했다. 1913년의 만주보고에 따르면 선
교사 153명, 의료 선교 병읏, 12개소, 의사 19명, 봉천의학교 학생 50명이였
고, 1943년 만주지역 기독교인의 통계는 15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제목 : 만주와 선교교 (3)
C. 교회의 내실화 시기 (1912 - 1917)
1912년 105인 사건이 발생되자 북간도 교회에 영향이 미치었다. 북간 도 교회는
신민회의 이동휘와 관계가 있고 간도의 혼춘지역의 민족 지도자 중에는 평양의 대
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선천의 성신학교, 평양의 숭실 학교 출신이 많았기 때
문에 이 계기로 내실화되여 교인수도 꾸준히 증가한 시기이다.
105인 사건으로 관련된 기독교인 가운데는 도망, 전거, 또는 탈교자도 있었다.
한일 합방이후 한인들은 간도 각처에 정치적, 경제적 망명 부락을 건설하였고, 이
주 촌락의형성과 함께 25개처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전체적 으로는 49개처의 교회가
이루어졌다. 1912년 1월 29일 원산 상지 교회에서 함경노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노
회의 설립과 함께 북간도 지역은 박연 선교사와 한인 목사 김존범이 동사 목사로
임명되었다. 1913면 북간도의 교세를 함경북도 지방과 비교하여 보면 원산에 34
개처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함흥에 33개처, 성진에 47개처, 회령에 21개처, 네곳
의 교인 총수는 8557명이였다. 그런데 북간도에는 20개처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1914년에 이르러서는 북간도교회가 34개처요, 해삼위 일대는 33개처 교회가 발전하
고 있었다. 북간도 교회의 전도 방법은 개인 전도였다. 또한 교회 명칭도 동네의
이름을 따서 정했고 또한 동네 이름도 구세동, 영생동, 낙원동으로 정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교회와 부락은 신앙공동체, 생활공동체로 발전하였다. 특히 명동
교회에서는 여전도회와 삼국 부인전도회를 만들어 크게 활동하였고, 용정교회는 영
신학교를, 명동교회는 명동중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1914년 세계 제1차대전이 일어나자 북간도의 한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기에 신앙심이더욱 돈독해졌다. 1914년 평북노회 전도국에서는 최봉석, 최성
주 목사를 서간도에, 한경희 목사를 길림지역에 파송하였다. 1915년에는 차형준목
사가 평북노회 파송으로 안동으로 건너가 전도하였다. 북간도 교회의 성도들은 모
이기에 힘써서 주일예배, 삼일기도회, 이외에도 새벽기도회, 특별기도회, 연합기
도회로 모이고, 성경 공부를 위하여 사경회와 성경학교를 개최했고 각 시찰별 교회
들이 연합하여 전도회를 조직하였다. 1916년 상황을 예수교 장로교 총회록에는 다
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전도구역거리는 2,500리 교회수 106개처, 총교인수 6,000
명, 생활 정도는 조선 내지와 비슷하며 산산 중곡에도 복음을 들고 믿는자가 많았
다.
노회 성립과 함께 각 교회에서는 많은 장로를 장립하였고, 노회 지역 내에 많은
신학생의 수학을 장려하여 목회자 양성에 주력했다. 그 당시 노회 경내 신학생으
로 채필근, 김이곤, 정기헌, 김관식, 최경재, 서창회, 박태환, 정재연, 이태헌, 이
송상, 김내범, 강두송 등이 있었다.
이 시대를 한마디로 함경노회 시대라고 할 수 있다.(1912-1917) 또한 차츰 한인
목사가 각 시찰 구역을 책임맡고 각교회의 목사, 조사여보수를 개교회가 자치적으
로 충당할 만큼 자치, 자립, 자급교회로 발전하였다.
D. 간도노회 성립시대(1918 - 1921)
북간도 지역 교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하는 가운데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독
립선언이 알려퍼지자 북간도 용정촌에서는 1919년 3월 13일 독립 선언 봉화가 울
려졌다. 이로 인해서 일제의 조선독립군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간도에 교회, 학교
들에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환란속에서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교회는 이
환란으로 더욱 강해지며, 교회는 성장되어 가는 것이다.
북간도 교회의 대부분의 교회는 3.1 운동에 가담하였고, 목사, 장로, 교인들이
적극가담하였고 이로 감금자로 생겼고, 죽은자, 중상당한자, 옥중에서 구속되었다
가 풀린자가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란중에서도 간도지역 교회들은 건물
을 매입하거나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함북 노회록 4,5,6,7 회록에 의하면 1919년
9월 부터 1920년 9월까지 각종 모임들이 조직되어 전도와 기도, 성경 연구, 사경
회를 통해 선교활동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간도 노회는 만세 운동의 무력감을 깨닫고 정신적으로 강화하여 인적, 물적 자
원을 공급하는데 힘썼다. 특히 3.1 운동 이후 교인이 집단 이주 하여 거주하는 가
운데 교회의 전도와 교회 성장을 촉진시켰다. 간도 교회들은 비참한 현실을 신앙
으로 극복하면서 1921년 간도 노회를 설립하였다. 간도노회가 설립될 당시 교회
의 총 숫자는 조직교회 30, 미조직 교회 57, 기도회처 28개등 105개였다. 교인수
6442명으로 그중 세례 교인은 약 30%로 1915명 주일 평균 모이는 출석 교인의
4,232명 이였다. 또한 목사는 6명, 영수 19인, 교회 임직원 195명이 된다. 이상
의 교세를 살펴볼 때 북간도 교회는 스스로 관리하고(자치)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기구가 갖추어진 상태로 발전되었다.
E. 간도 노회 성립 이후 (1922 - 1948)
만주지방에는 천도교, 대종교, 시천교, 유교 등 개종교가 성행했지만 기독교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래 도표를 보면 기독교가 차지하는 세력을 알수 있
다.
간도 지방 한인 종교상황 일람표(1925)
+---------------------------+-------------------+--------------------+
| 종 교 별 구 분 | 교회 또는 서원 | 신 도 수 |
+-----+---------------------+-------------------+--------------------+
| | 카나다 장로교 | 61 | 8,263 |
| 야 | 남 감 리 파 | 14 | 1,513 |
| | 동아 기독교 | 7 | 288 |
| 소 | 안 식 교 | 2 | 164 |
| | 천 주 공 회 | 32 | 9,320 |
| 교 +---------------------+-------------------+--------------------+
| | 계 | 116 | 17,548 |
+-----+---------------------+-------------------+--------------------+
| 천 도 교 | 11 | 3,686 |
| 대 종 교 | 3 | 2,109 |
| 청 림 교 | 1 | 30 |
| 원 종 교 | 5 | 272 |
| 시 천 교 | 9 | 5,109 |
| 제 우 교 | 1 | 51 |
+-----+---------------------+-------------------+--------------------+
| | 대 성 유 교 | 2 | 86 |
| 유 | 공 자 회 | 3 | 10,139 |
| +---------------------+-------------------+--------------------+
| | 계 | 5 | 10,225 |
+-----+---------------------+-------------------+--------------------+
| 불 교 | 3 | 43 |
+---------------------------+-------------------+--------------------+
| 총 계 | 154 | 27,073 |
+---------------------------+-------------------+--------------------+
간도노회가 성립된 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회에서는 만주 지역에
적극적인 외교 선교 정책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지역 교회 성장 을 가속화시켰다.
1931년에는 남북 만주 장감, 협의회를 구성하여 광범위하게 전도, 종교교육, 청
년사업 등 전개를 위해 협조를 모색하였다. 당시 만주의 기독교 현황은 다음과 같
다.
재만 기독교 비교 일람 (1934)
+--------------------------------------------------------------------+
| 기 독 교 |
+-----------------------+---------------------+----------------------+
| 지 방 면 | 회 당 수 | 교 인 수 |
+-----------------------+---------------------+----------------------+
| 봉 천 | 15 | 2,554 |
| 신 민 부 | 1 | 100 |
| 통 화 | 6 | 2,030 |
| 해 룡 | 11 | 1,140 |
| 안 동 | 8 | 2,976 |
| 길 림 | 2 | 332 |
| 경 화 | 1 | 70 |
| 신 경 | 4 | 375 |
| 하 얼 빈 | 6 | 769 |
| 수 분 하 | 3 | 364 |
| 해 삼 위 | 1 | 29 |
| 용 정 | 46 | 11,197 |
| 두 도 강 | 17 | 1,697 |
| 연 길 | 6 | 3,578 |
| 백 호 강 | 7 | 1,598 |
| 도 문 | 4 | 329 |
| 훈 춘 | 24 | 2,748 |
+-----------------------+---------------------+----------------------+
| 계 | 162 | 31,886 |
+-----------------------+---------------------+----------------------+
1941년 11월 26 - 27일 신경(장춘)에서 만주에 있는 기독교각 교회가 합동 총회
를 열고 28일 "만주조선 기독교회"의 합동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만주 개신교
의 합동된 교회가 약 280개, 교역자가 100여명, 신도가 약 50,000명에 달하였다.
중공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 기독교회 담임목사 김성하씨는 해방전에는 목사
가 1000여명, 성도가 70 - 80만이 되지 않았다고 하나 해방전 만주 지역 교세는
장로교 6개 노회, 교회 309, 목사 65, 선교사 3, 남자 전도사 84, 여전도사 20,
교인수 40500였고, 감리교는 만주 선교년회, 교역자 52, 교인 4,500명, 그외에
성결교, 동아기독교(침례교) 조선 기독교 등이 약간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 만주지역 선교는 1862년 미북장로교 선교부와 한국 교회의 선교
부의 양면으로 선교가 이루어 졌으며 한국교회의 최초의 선교지역이라는 점에는
의의가 크다. 본 연구의 관심인 만주지역은 한족의 박해를 피해 또는 흉년과 기근,
일제의 토지수탈이 노골화되고 한인 이주 정책이 강화되자 대규모의 한인이 이주
하였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3.1운동이후 국내의 교회는 정치성을 띠게 되었는데,
이때에 만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민족 운동으로는 독립운동의 한 형태로서 이상
향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1913년에는 한국교회가 만주를 향하여 이민을 통하여 복음의 씨앗을 던졌으며
1912년에는 원산 상지교회에서 함경노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1917년에 용정교회에
서 함남노회가 조직되었고, 1921년에는 간도노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이
1949년 공산화 되어진 후 1980년대 까지는 신앙의 압박과 어두움의 시기로서 고통
속에서 개인, 혹은 가정, 친족 중심의 지하 가정교회로 존재해 오고 있는 것이다.
제목 : 만주와 선교 (4)
제 3 장 만주의 선교 전략(한족 교포교회 중심으로)
A. 최근의 만주의 교회당 현황
1949년 이후 공산화 되어 40여년이 지나왔으나 여전히 지하교회를 통하여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다. 특히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통하여
기독교가 극심한 환란과 핍박을 받았으나 그 박해속에서도 기독교는 꽃피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동안 지하 교회에 숨어있던 가정교회들이 중공의 종교 정책의 변화
에 따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연길교회 김성하 목사에 의하면 만주에는
간판을 건 교회도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예배당을 짓지 못하고 있는 가정 교
회가 많다고 하면서 지하교회는 동북삼성에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현재의 교회
현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길림성
교회당 9개 교회, 교인 465인, 평균 한 교회당 52인 가량 된다. 그러나 교회당
을 설립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가 15개 교회에 234명의 성도가 모이며
평균 16명 가량이 회집된다.
2. 요녕성
요녕성에는 정식 교회당을 갖고 있는 교회는 12개 교회에 725명의 성도가 회집
되고 있으며, 한 교회당 평균 62명이 된다. 또한 가정 교회들은 12개 교회에 171
명의 성도가 회집되므로 평균 14명이 된다. 특히 요녕성의 단동시는 압록강을 사이
에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는 중요한 도시이며, 평양까지 왕복하는 차
편이 있다. 이곳을 왕래하는 주민이 수십만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선교는 북한
선교에 포문을 열 수 있는 등대요, 통로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3. 흑룡강성
흑룡강성은 교회당은 건립되지 못했으나 아세아 협력기구의 도움으로 "86년에
강시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동안 30여 교회가 매주 금요일이면 흩어진 처소에서 모
여 송화강 별관의 마가요한의 다락방이 이제 예루살렘교회처럼 변모하였다.
최근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안에서만 도시나 마을마다 교회를 하나씩 세울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한다.
B. 지도자 및 교인의 신앙상태
중국의 한인교회는 지도자가 절대 다수 부족한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지도자상
황을 보면 동북 3성에 총교회수 70개 교회에 목사가 2명, 전도사 4명, 장로 9명,
집사 26명, 평교인 32명이 지도자의 역활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흑룡강성의 교회
는 평신도 지도자가 82%나 되며 이로 인해서 설교집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는 실
정이다.
교인의 신앙 상태를 보면 지도자가 없이 혼자 신앙생활하다가 보니 혼자 신앙을
유지하기가 힘들기에 어떤 때는 구약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서 출애굽기의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설
립과 운영에 대한 지식과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며, 교파의 분류의 금식 기도 단식
기도에 대한 의문, 세례에 대하여도 의문을 가질 정도로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앙의 조기 교육을 통한 유년주일 학교와 중등부, 고등부
청소년들을 위한 모임을 갖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다음 세대를 이어갈 신앙의
후계자가 문제가 된다. 그것은 지도자의 부족 때문이며 선조의 신앙을 그대로 전
수받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C. 이단의 활동
1. 통일교
산업 선교를 통해 중공을 침투하여 순수한 신앙인들을 어지럽히고 있다.
2. 안식교
은밀히 거처하면서 안식교에서 발간되는 가시조가 잡지를 통해 성경의 교리를 어
지럽히고 구약과 신약의 성경의 중심내용을 이상히 취급하여 경건한 생활, 율법주
의에 대한 열심, 재림 소망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미혹하고 있다.
3. 여호와의 증인
역시 안식교 보다 더 많은 문서선교를 통하여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는 데 이
들을 호별방문에 선교 방법은 2인 1조가 되어 특히 개신교인을 특히 상대로 하여
신앙을 유린한다.
D. 만주 교회의 문제점
만주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교회당이 절대 부족하다.
지도자의 부족하다.
신학의 부재이다. 이들은 성경, 찬송도 다 갖고 있지 못한 현실 이며, 기타 주
식,설교집, 기독교 서적이 없으므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진정한 복음
을 전하는 도구가 매우 부족하며 어려운 실정이다.
만주에 있는 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 콜롬비아 성서대학에 선교학
교수로 재직한 솔토우의 말대로 토착교회의 설립과정을 개척단계, 조직단계 - 지
도자 훈련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역시 만주에는 이 세가지가 모두 필요한 곳이
다.
E. 만주의 선교 전략
1. 만주 선교의 실패원인
한민족 이주후의 큰 부흥과 자립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고, 특히 1920년에는
선교사를 파송할 정도의 교회가 식어지고 또 고립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보
다도 1949년 이후 공산화되어 40여년간 폐쇄되어 왔고 모택동 이의 문화혁명을 통
하여 교회가 핍박과 환란을 받을때에 외적으로 교회가 성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지하
교회나 가정교회로 전략하였던 것이 주요원인이라 하겠다. 또한 문제점은 가정교
회나 지하교회에서도 많은 문서와 성경이 없고하여 지도자를 양성한다든가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공산당의 제한속에서 복음
에 대하여 단지 라디오를 통하여 듣는 것이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정
도이기에 전파매체가 부족하고 교회간의 유대관계, 협력관계, 사경회, 부흥회,
기도회 등을 대외적으로 하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당간부들을 위한 대외비 자료에서는 8종 비정상적인 종교활동을 열거하고
있다.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 종교사상을 넣어주고 아동들을 종교 활동에 참가하
여 인도하는 것 정치, 교육과 혼인에 간섭하는 것 생산과 사회 질서를 방해하는
것 헌금한다는 명의로 강제 박탈을 자행하는 속이고 공민의 건강한 활동을 방해
하는 것
인민공사 재산을 이용해서 종교활동을 진행하는 것, 이미 폐지된 낡은 종교와
압제 제도를 회복하는 것, 국외에서 물건 혹은 예물을 받고 홍콩, 마카오, 입구에
서 선전 자료를 진행하는 것
자유로이 전도 여행을 하는 것이상과 같은 부정당한 활동은 반드시 교육의 방법
을 통해서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중공정부에서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 종
교사상 넣어 주는 일에 대하여 금지하고 있기에 복음을 40년전에 반은 사람이 주류
를 이루고 있기에 매우 폐쇄적인 사회에서의 복음 유지가 어려움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있는 성도들 역시 세대차이가 있는 자녀와의 자유로운 신앙토론
이나 가르침이 자료가 없는 가운데 2세교육에 더욱 어려움을 느낀다. 일부 신앙이
돈독한 부모등은 요게벱처럼 신앙 교육을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다.
2. 만주 선교의 방법
* 최대의 전략은 지도자
먼저 지도자가 어떤 환경과 여건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자가 필요하다. 우선 공
산국이기에 다방면에 소질이 있는자이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복음 전하는 것
을 목적으로 하되 특수한 기능을 가진자는 더욱 좋을 것이다. 즉 농사법, 공업 기
술자, 어학에 능하거나,그곳에 필요한 기능을 가진자가 이 일을 한다면 훨씬 효과
적이며 그 기능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교사의 자
격은 아래와 같이 갖춘자가 좋을 것이다.
소명받은 자이여야 한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바친자이여야 한다.
영적인 자이다. 성숙한 인격을 갖춘 자. 즉 중생의 체험과 더불어 성화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써 인간관계 원만, 이해, 격려, 친절, 겸손, 지혜와 덕을 겸비
해야 할 것이다. 자기분야에서 전문가이여야 한다. 즉 정규 교육을 이수하고, 선
교의전문인으로서 풍부한 성경지식, 언어에 능통한 자이여야 한다.
* 선교목표지역 선정
만주에는 특히 한족 중심의 자치주가 많이 있고 이제는 종교적인 자유 가 어느정
도 허용되었기에 길림성의 연길시의 "연길 기독교회"는 매우 중요한 선교센터가
될 수 있다. 더우기 연길시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고 또 목사가 있다는 점
이 매우 유리하다. 그래서 그곳에 센터를 정해 두고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지역을
확대해 가면서 선교해야 할 것이다. 특히 김성하 목사는 아세아 선교 협력기구와
교류를 하고 있으며,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기에 더욱 유리하다. 그 지역에 있는
지도자를 일차적으로 만나서 주변환경과 문화, 풍습, 기후 등 그 지역의 특성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을 습득한 다음 선교를 시행해야 한다.
* 기존교회를 선교의 중심지로 이용하는 방법
만주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다.유형 교회를 비롯해서 가정교회들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현재 기존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며 그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하며, 그들을 통해서 복음의 불씨가 더욱 많이 번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더 많은 개척교회를 하며, 우리는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
여 복음이 확산되도록 해야 될 것이다.
* 방송 선교
중국 선교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방송선교이다. 아세아 방송 이나 극동
방송은 이러한 면에서 매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더 많은 중국 어 방송과 한국어
방송을 통해서 그들의 귀가 뜨여지게 해야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 및
문서선교에도 더욱 애를 써야 할 것이다.
* 팀 선교 전략
선교는 혼자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에 뜻이 있는 사람이
팀을 구성해서 사역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 하다. 이 선교는 선교 단체나 교회의 정
책만으로는 성사될 수 없다. 그러므로 팀의 조화는 매우 중요하다.
외국 선교부와 협력해야 한다. 즉 미국, 중공, 일본 등 교류가 형성된 선교부와
협력하여 재정적, 인적 문제는 한국 선교부에서 감 당하더라도 그들의 명의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의 협력 관계이다.
이제는 한국과의 관계도 호전되리라 생각한다. 88 올림픽 이후로 많은 외교
관계가 완만해 짐을 보는데 특히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국내 선교부간의 협력이다. 즉 서로 자료 교환, 정보 교환 등으로 자기의 선교
단체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 독단으로 하기 보다는 교단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협력함이 바람직하다. 만주 교회의 교포들의 협력 선교이다.
* 다양한 선교 전략
선교 방법은 여러 가지로 적응해야 한다. 문서선교, 의료선교, 스포츠선교, 문화
교류 선교, 산업 선교 등을 통해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간접적으로 침투하는 방법
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미련한 지혜를 사용하심을 믿는 다. 방송 선교를 강화하며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선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방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하나
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최우선이다.
결 론
선교는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사명이요,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명령이다. 만주의
선교는 이미 하나님이 여러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여 조성하셨고 기반을 조성하신
곳으로써 공산세력으로 폐쇄되어 있는 이 장막을 어떻게 넘느냐 하는 것이 과제이
다. 믿음의 선진들이 다방면으로 시도했던 일들위에 이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 기능, 환경 등을 동원해서 선교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한국은 교포사회로
구성된 만주를 향해 언어의 장벽이 없이 선교할 수 있는 잇점을 최대한 살려야 할
것이다. 이 배후에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이 선교전략보다 우선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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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예수교 총회] 제5회 회록
15. [간도 노회 제1,2 회록],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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