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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텔레비젼과 사라지는 어린이들

생명환경자연 최용우............... 조회 수 3715 추천 수 0 2002.10.12 03: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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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처/《사라지는 어린이》(임채정 옮김, 분도출판사, 1987)
저자/?

텔레비젼과 사라지는어린이

- 미국의 매체 생태학자. 이 글은 아동기의 생성과 소멸을 정보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고찰하면서 특히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가 가져온 변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 The Disappearance of Childhood 의 우리말 역본《사라지는 어린이》(임채정 옮김, 분도출판사, 1987)에서 발췌한 것이다.

6세의 아이나 60세의 노인이나

나는 13세 되던 해에 성의 비밀을 알려면 밀러의《북회귀선》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그 책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첫째는 그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또 하나는 돈을 필요로 했다. 또 다른 문제는 그 책을 억지로〈읽어야〉했다. 따라서 그 책의 내용은 대부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고, 나보다 먼저 읽은 어느 사려 깊은 독자가 밑줄을 그어 내가 주의를 기울였던 어떤 특정 부분은 내 경험으로는 터득할 수가 없어 상상 행위를 필요로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텔레비전은 물리적...경제적...인식적, 또는 상상력의 속박이 따르지 않는 자유 입학이 허락되는 기술이다. 6세의 아이나 60세의 노인이나 텔레비전이 제공해야만 하는 경험에는 동일한 자격을 가진다. 이러한 뜻에서 텔레비전은 구어 그 자체를 능가하는 무상의 사회 평등적 대화 매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속삭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속삭일 수도 없고, 그 그림 또한 구체적이고 스스로 설명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은 모두 본다.
이러한 상황이 부른 가장 명백하고도 일반적인 효과는 세속적인 지식의 전용성(專用性)을 근절시킨 것이며, 따라서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주요 차이점을 완전히 없앤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사회 조직의 기본 원칙으로부터 나타난다. 어떤 집단을 주로 규정하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정보의 전용성이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법률인들이 아는 것을 전부 알고 있다면 법률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교사들이 아는 것을 학생들도 모두 안다면 그들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일 5학년생이 6학년이 아는 지식을 모두 안다면 6학년이라는 것은 전혀 불필요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역할은 특정 정보 환경의 조건에 의해 결정되며, 이것은 가장 분명하게 어린시절의 사회적 범주의 경우에 해당된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아는 어떤 사물들을 알지 못하는 인간 집단이다. 중세에 어린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어른들이 정보를 독점할 방법이 없었던 때문이었다. 구텐베르크 시대에는 그러한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텔레비전의 시대에는 이것이 해체되었다.

사라지는 수치심

이것은 어린이의〈순진성〉이 사라졌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며, 단지 어린이의 매력이 감소되었다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전파 매체가 급속하고도 무차별하게 어른세계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폭로함에 따라 몇가지 뜻깊은 결과가 발생되었다. 첫째, 수치 관념이 희석되고 뻔뻔스러워졌다. 우리는 끊임없이 야만성에 붙잡힐 위험, 폭력과 무질서, 본능, 이기주의에 압도당할 위험이 있다. 수치심은 야만성이 꼼짝못하도록 하는 장치이며 그 힘의 대부분은 여러가지 행위를 감싸고 있는 신비나 두려움이다. 이러한 행위에는 사고와 말도 포함되는데, 그 모두는 대중의 시야로부터 항상 숨겨진다는 사실 때문에 신비하고 두려운 것이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숨김으로써 신비하게 만든다. 우리는 또 그것들을 신비화함으로써 규제한다. 어떤 경우에는 어른들은 어떤 비밀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서로 감출 수도 있고 정신분석의의 진찰실이나 고해실에서 안도감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어린이들이 그러한 문제를 눈치채기까지는 통제가 필요하다. 분명 중세 이후, 아직 자제력이 충분치 못한 어린이에게는 폭력, 성, 이기심에 대한 충동은 특히 위험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따라서 수치심을 가르친다는 것은 공식, 비공식 어린이 교육에서 중요하고도 미묘한 부분을 이루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린이들은 신비와 두려움이 둘러싼 비밀의 세계, 즉 여러 단계를 통해 부끄러움이 일련의 도덕적 명령으로 전환되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칠 어른들에 의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세계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어린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른에게 힘과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수치심이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모르지만 어른들은 어떤 말을 사용하면 부끄러운 것이고, 어떤 내용은 서로 토론하기에 부끄러운 것이며, 어떠한 행위는 은밀해야만 하는가 등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특히 분명하게 하고 싶다. 나는 사회의 정보구조가 수치심의 내용을 창조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수치심의 뿌리는 어디에나 있는 것으로 어떤 인간들의 역사와 공포심에까지 깊은 연원을 갖는 것이고, 이 책의 범위와 내용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밀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수치심이 사회적 통제 및 역할 분담의 수단으로서 아무런 영향도 발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어느 누가 공공 해변에서는 발가벗으라는 법이 있는 사회에서 산다면, 신체의 어느 부분을 드러내는 데 따르는 수치심은 급속히 사라질 것이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떤 비밀을 지키는 한가지 수단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비밀보호의 수단을 빼앗긴다면 비밀도 빼앗기는 것이다.
만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감출 어둡고 상하기 쉬운 비밀이 없고, 어른들 생각에 그것이 필요하고 안전하며 온당하다고 하여 아이들에게 모두 밝힌다면, 분명 어른과 아이들을 구분하는 선은 위험스럽게 축소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어린이들에게 광범위하게 축적된 어른들의 강력한 자료를 넘긴다면 어린이는 유지될 수 없다. 정의하자면 어른이라는 것은 신비가 풀리고 비밀이 벗겨졌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처음부터 어린이가 신비와 비밀을 안다면 우리가 어느 누구와 다른 말을 그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잃어버린 예절

수치심이 점차 엷어지면서 물론 그것에 상응하여 예절에 대한 중요성도 감소한다. 수치심이 충동을 극복하는 심리학적 장치라면, 예절은 같은 것의 외면적인 사회적 표현이다. 식탁 예절에서 옷 입는 예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 사람이 배운 자제력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자제력을 가르치는 수단인 것이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예절이나 예의는 대체로 문자해득력으로 말미암아 높은 수준의 자제력과 욕구 충족의 유예를 요구하며 또 진작시키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인쇄술 이후에야 비로소 대중 사이에 정교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절은 문자해득력에 대한 사회적 유사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둘은 모두 육체가 정신에 복종하기를 요구한다. 그 둘은 상당 기간의 배움 과정을 요구한다. 그 둘은 집중적인 어른들의 가르침을 요구한다. 문자해득력 때문에 위계적인 지적 질서가 창출되었으며 예절 때문에는 위계적인 사회적 질서가 창출되었다. 어린이들은 글자를 깨치고 예절을 배워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문자해득력이 인간개발 구조로서의 은유의 힘을 잃은 정보환경 속에서는 예절의 중요성이 쇠퇴한다. 새로운 매체는 연령 집단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며 따라서 위계적 사회 질서라는 관념에는 적대적이다.
사회적 예절이 요구하는 것은 어른의 상징세계와 어린이의 상징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공공연한 차이가 유지되는 일이다. 중세에는 몰랐던 이러한 관습은 흥미 있는 사회적 허구 이상의 것을 상징한다. 어른들이 말을 조심하는 것은 어떤 사회적 이상, 즉 야비하고 외설적인 언어 속에 포함된 그 거칠고 지저분하고 냉소적인 태도에서 어린이들을 보호하려는 취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말조심은 사회적 위계에서의 그들의 위치에 대한 이해, 특히 그들이 아직 그런 태도를 공개적으로 나타낼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할 구분이 흐려지면 물론 그러한 언어상의 존대는 의미를 잃는다. 오늘날 이 관습은 너무도 빨리 침식되어 여전히 이 관습을 지키는 사람은 오히려〈이상한 사람〉취급을 받는다. 우리는 마치 어린 사람들의 귀에 어떠한 말도 어색치 않았던 14세기적 상태로 우리가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호기심의 상실이 의미하는 것

이러한 모든 것에 직면하여 어른들의 권위와 어린이들의 호기심은 근거를 잃는다. 왜냐하면 수치심이나 예절은 모두 비밀이라는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궁금한 것들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어른들이 권위를 갖는 것은 그들이 지식의 기본 근원을 알기 때문이다.
연장자들이 젊은이들에게 권위를 갖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차이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같은 세대이다. 모든 문화적 비밀을 끊임없이 폭로함으로써 전파 매체는 어른들의 권위와 아이들의 호기심에 심각한 난제를 제기한 것은 분명하다. 호기심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젊은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발전하려면 비밀을 밝히기 위한 의문의 힘을 인식해야만 한다.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는 경이에 의해서 연결된다. 그러나 경이로움이라는 것은 어린이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곳에서만 주로 나타난다. 그 두 세계를 통합해버린 매체로 인해서 밝혀야 할 비밀 때문에 조성되던 긴장이 해소되면서 경이의 미분학은 변한다. 호기심은 냉소, 더 심한 경우에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우리의 어린이들은 권위 있는 어른들이 아니라 아무 곳에서나 들리는 뉴스에 의존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에게는 이제 어린이들이 없는 것이다.

위선의 보다 훌륭한 얼굴

나는 위선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공개적 지식과 사적인 지식이 완고하게 동떨어져 있는 상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결국 위선의 보다 훌륭한 얼굴은 어떤 사회적 이상주의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이의 경우, 건강하고 정상적인 성장을 위한 조건을 유지시키려고 비밀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그것을 생각할 경우, 어린이란 어느 정도의 위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폭력을 예로 들어보자. 인류는 서로를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데 과도한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상징 제작 및 도구 제작과 아울러 살인은 인간의 가장 현저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내 계산으로는 나의 생애 동안만 해도 7,500만 명의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이 숫자는 베이커식 표현으로 하면 개인 사업에 의한 살인, 말하자면 거리의 살인이나 가족살인 또는 강도살인 따위로 죽은 사람들은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도 위선일까? 위선은 좀더 엄격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의 현실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많이 알면 아직 미숙한 정신 건강에 위험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는 그 지식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어린이 발달에 관한 진보적인 견해에 따르면, 어린이들이 어른들은 폭력에 대한 충동을 통제하며 선악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가진 것으로 믿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브루노 베틀하임의 말처럼, 이런 믿음을 통해 어린이들은 역경 속에서도 그들을 지탱케 할 합리성을 기르는 힘을 제공할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감정을 개발할 수 있다. 워딩턴은〈인간 발전의 한 구성 요소이며 선택을 가능케 하는 힘은 아이들의 선악의 기준을 연장자의 권위로부터 받아들이는 능력이다〉라는 가정을 주장했다. 그런 믿음이 없이는 아이들은 희망이나 용기를 가질 수 없고 훈련될 수도 없다. 어른들의 폭력이나 도덕적 부조리라는〈사실〉을 어린이들에게 감추는 것이 위선이라면, 그 위선은 슬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단코, 어린이의 성장을 촉진시키려는 대의 속에서의 위선은 악이 아니다.

폭력과 비밀의 노출

어린이를 폭력과 도덕적 타락에 눈뜨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베틀하임이《마술의 쓸모》라는 책에서 보여 준 바와 같이 동화의 중요성은 어린이들이 정신적 상처 없이 악과 만나게 되는 형태로 악의 존재를 밝히는 것에 있다. 이것은 동화의 내용이 여러 세기에 걸쳐 유기적으로 성장하고 어른들의 통제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심리적 배경이 항상 안심시켜 주고 정신 건강에 유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텔레비전에서 드러내는 폭력은 어머니의 목소리로 조정되는 것도 아니고, 어린이에게 알맞게끔 조절되는 것도 아니며, 어린이 발달 이론으로 규제되지도 않는다. 그것이 거기에 있는 이유는 오로지 텔레비전이 항상 변화무쌍한 소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거기에 있는 이유는 텔레비전은 동시에 모든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향하도록 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텔레비전은 어떠한 비밀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결과, 가혹한 폭력의 전면적인 노출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인 폭력의 비밀이란 실제로는 텔레비전이 폭로하는 보다 큰 비밀의 일부일 따름이다. 어린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텔레비전에 주로 나타나는 것들은 어른들의 세계는 부조리, 갈등, 걱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다. 텔레비전은 성인 생활의 무대 뒷면을 공개한다. 텔레비전이 아낌없이 성인 생활의 비밀을 폭로하는 여러가지 실례가 많지만 특히 흥미를 끄는 두가지 항목이 있다. 첫째는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 아니면 최소한 그 허약성에 대한 관심이다. 여러가지 소재,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다양한〈인간적〉흥미에 관한 소재를 찾으면서 텔레비전은 정치인들의 사생활에서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자료를 발견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기 국가 지도자들의 아내와 아이들, 애인, 음주 습관, 성생활, 실언 따위에 대해 그토록 많이 알았던 일이 이전에는 한번도 없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적어도 조금만이라도 알았던 사람들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계속 정보를 얻었던 것인데,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텔레비전 이전에는 정치적 생활의 어둡거나 사적인 부문은 대개 어른들의 일이었다는 뜻이다. 어린이들은 오늘날에도 신문 독자가 아니지만 옛날에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텔레비전 시청자들이며 따라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약점을 지속적으로 알게 된다. 이 결과는 어린이들이 이른바 정치인, 나아가서는 정치 과정 그 자체에 대해서까지도 어른들의 태도 ?? 냉소주의에서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 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어린이들은 또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감추고자 노력하는 표본적인 문제인 인간 육체의 약점에 대해서도 계속 정보를 얻는다. 어린이들도 물론 사람은 병에 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죽는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 사실 때문에 아이들이 당황하지 않게 될 때까지는 그 자세한 내용은 대부분 감추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었다. 텔레비전은 사실(私室)의 문을 열었다. 요즈음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인간 육체의 질병은 치질에서 건선 심장마비까지, 신경염에서 신경통에 이르기까지, 관절염에서 심장병까지, 암에서 충치, 피부병, 시력 장애에 이르기까지 45종이 넘는다. 이 정도로는 충분히 인생이 불안하고 무서워 보이지 않다는 듯이 수소폭탄의 문제, 테러 방지에 관한 국가의 무능 따위도 함께 논의된다.
상징과 전기라는 기적을 통하여 우리 어린이들은 선악을 불문하고 여느 사람들이 아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신비하고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텔레비전이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든, 오늘날의 어린이들이 옛날의 어떤 어린이 집단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관찰이다. 흔히 사용하는 비유로 텔레비전은 세상으로 향한 창이라고 한다. 이런 말은 전적으로 옳지만 왜 이것이 발전의 표상으로 인식되는 것인지는 하나의 의문이다. 현재의 아이들이 옛날 아이들에 비해서 많은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린이들이 나이든 사람들의 지식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었다는 것, 아니면 어른과 비슷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 나의 비유법을 활용한다면 - 어른들의 정보라는 감추어진 과실에 접함으로써 아이들은 어린이의 동산에서 추방된 것이다.

어른아이의 등장

이 글이 기초하고 있는 그 생각 - 전파 정보 환경 때문에 어린이가〈사리지고〉있다는 - 은 우리의 전파 정보 환경 때문에 어른 역시 사라지고 있다는 말로 표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애써 제시했던 것처럼, 어른이라는 근대적 관념은 주로 인쇄술의 산물이다. 어른과 연결된 거의 모든 특질은 완전히 읽고 쓰는 문화의 요구에 의해 촉진되거나 확대되었다. 자제 능력, 욕구 충족을 유예하는 인내, 개념적이며 지속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복잡한 능력, 역사적 연속성과 미래에 대한 큰 관심, 이성과 위계적 질서에 대한 높은 평가 등이 그것이다. 전파 매체가 독해력을 문화권 밖으로 밀어내고 중심부를 차지하면서, 상이한 태도와 성격적 특질이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으며 축소된 어른의 개념이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린이를 배제하지 않는 개념이며, 따라서 그 결과는 인생의 단계를 새로이 구성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시대에는 인생의 구조형태가 세 가지로 분류된다. 한쪽 끝은 유아기이고 반대편은 노쇠기이며, 그 사이에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어른아이가 있다.
어른아이는 그 지적 정서적 잠재력이 실현되지 않고, 특히 어린이와 관련하여 크게 다르지 않는 어른을 말한다. 그러한 어른은 언제나 존재했었지만, 문화에 따라서 그 정도가 변한다. 중세에는 이 어른아이가 정상 상태였는 바, 그것은 주로 문자해득력, 학교, 예절 따위가 없었고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한 특수 훈련이나 배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그 비슷한 이유로 어른아이는 우리 시대의 문화 속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대두되고 있다. 인간이 성장을 이룩한 상징 무대가 그 형태와 내용에서, 특히 어린이와 어른의 감수성이 구별될 필요가 없는 방향으로 변하자 불가피하게 그 두 단계의 인생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텔레비전의 정치학

오늘날의 어른아이가 탄생된 과정을 연구하자면 몇개의 접근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텔레비전이 정치 정보의 전달이라는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의 정치의식과 정치적 판단의 의미에 대해 따져보는 것 이상 더 흥미로운 것은 없다. 텔레비전 등장 이전에는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정보의 양과 질을 비교적 손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등장한 이후에는 그러한 통제가 어려워져서 정치 지망생들은 대중들이 아는 것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이미지 관리인〉을 고용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물론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정보의 양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보의 형태이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도 다른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입을 통해 말하는 형식으로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비구술적 방법을 통한 정보〈방출〉도 있다. 서 있는 자세, 미소짓는 모습, 시선의 초점, 땀 흘리는 모양, 화난 모습 따위가 모두 그들이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효과를 가진다.
텔레비전 시대에는 정치적 판단이 어떤 명제에 대한 지적 평가에서 어떤 이미지의 총화에 대한 직감적이며 정서적인 반응으로 바뀐다. 텔레비전 시대에는 사람들은 정치인들에 대해 그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처럼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이른바〈건전한 정치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논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미학적인 문제로 만듦으로써 재정의한다. 이제 겨우 읽고 쓸 수 있는 10세 아이도 어떤 후보가〈방출〉하는 정보에 대해 정보가 많은 50세 성인만큼이나 쉽고 빠르게 판단하거나 최소한 반응을 나타낼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더욱 날카롭기까지 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말과 논리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 헌법이 씌어지던 무렵, 매디슨과 그의 동료들은 성숙한 시민정신에는 반드시 문자해득력과 이에  상응하는 분석능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 때문에 보통 21세 이하의 젊은이로 규정되는 국민은 선거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것인데, 복잡한 글을 알려면 꽤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대에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일은 복잡한 문자해득 수준에 의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문자 해득력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선거 연령에 달한 미국인들 가운데 레이건이 집필한 책을 읽은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아니 그에게 그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사람이 집필한 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읽은 것이 있겠는가? 도대체 몇 사람이나 대통령 선거 토론에서 진행되는 논쟁을 따라갈 수 있을까? 레이건이 카터나 앤더슨이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을 선행시켰다고 믿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뉴스쇼의 마취효과

미국인들은 대부분의 세계 정보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그 가운데서 상당량을 텔레비전 뉴스쇼라고 알려진 형식을 통해서 얻는다. 그들은 어떤 경험을 하는가? 그들은 어떤 종류의 정보를 얻는가? 어떠한 전망과 통찰력이  유용하게 되는가? 만일 의미가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대중은 잘 알게 되는가? 텔레비전 뉴스쇼는 어느 정도의 어른들의 의식에 맞추어지는가?
텔레비전 뉴스쇼가 어떠한 것인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구조를 조심스럽게 살펴야만 한다. 예를 들면 그러한 쇼는 모두 음악으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난다. 또한 광고 하나하나마다 항상 음악이 따른다. 그것은 무슨 목적 때문인가? 극장이나 영화에서도 그렇게 하지만 그것은 관중의 정서를 고양시키고, 긴장을 유발시키며, 기대감을 부풀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영화 음악과 텔레비전 뉴스 음악 사이에는 한가지 중요한 기능상의 차이가 있는 바, 영화 음악은 영화 내용이 요구하는 특정 정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서운 음악, 행복한 음악, 낭만적 음악 따위가 그것이다. 텔레비전 뉴스쇼에서는 첫번째 보도가 아프가니스탄 침공이든지 시 예산 문제든, 혹은 수퍼볼 승리 소식이든 항상 같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매일 밤 똑같은 음악을 똑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사건의 동반자로 사용함으로써 텔레비전 뉴스쇼는 그 주제 선율(중심사상)의 발전에 기여한다. 즉, 어제오늘 사이에 어떤 중요한 차이가 없다는 것, 어제 요구되었던 정서가 오늘도 똑같이 요구된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그날의 여러가지 일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주제는 아름다움, 속도, 단절 등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발전한다.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텔레비전 뉴스 보도 담당자들이 거의 젊고 매력적이라는 것 - 아마 미국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것을 직접 보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텔레비전은 당연히 시각적 상에 치우친 것이며, 거의 모든 경우에 매력적인 개인의 용모가 목소리의 자질보다 앞선다. 텔레비전 뉴스 보도자가 보도하는 뉴스의 의미를 필수적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 따른 표정 연출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그러한 노력조차도 포기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시청자들이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텔레비전에 관한 한 미국에서 뉴스 보도자가 될 수 있는 60세 여성은 한명도 없다. 시청자들은 자신들의 얼굴에는 매력을 못 느끼는 듯하다. 문제는 뉴스의 내용이 아니라 뉴스를 전달하는 보도자들인 것이다.
시청자들은  또한 다양성에 매력을 느끼며 복잡한 것은 싫어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30분에 걸친 뉴스쇼에 15~20가지〈이야기〉가 있게 되는 이유이다. 광고에 할애되는 시간, 다음 프로 예고, 뉴스 보도자의 말장난 등을 계산하면 평균 한가지 이야기에 약 60초가 소요된다. 무작위로 선택한 CBS방송의 어느날 밤 쇼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즉 공무원들의 뇌물에 관한 이야기 264초, 프레슬러 상원의원과 관련된 이야기에 37초, 이란에 관해서 40초, 소련 에어로플로트 항공에 관해 22초, 아프가니스탄 학살에 28초, 무하마드 알리에 관해서 25초, 뉴멕시코 교도소 폭동에 관해서 53초,〈순항〉이라는 영화에 반대하는 항의에 관해서 160초, 스튜디오 54소유주에 관해서 18초, 수잔 소머스에 관해서 18초, 유도탄에 관해 16초, 불경기에 관한〈심층〉조사(제1부)에 174초, 동계 올림픽에 관해서 22초, 세인트 존스 팀과 루이스빌 팀 사이의 농구시합에 166초, 일기예보에 120초, 영화 비평에 100초였다.
〈뉴스〉를 편성하는 이 방법은 두가지 흥미 있는 효과를 획득한다. 첫째, 이것은 어떤 한가지 사건을 생각하기 어렵게 만들며, 둘째, 이것은 어떤 한가지 사건에 대해서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생각한다는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자문할 시간과 동기를 갖는 것이다. 즉, 그러한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과정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세계와 그것은 어떻게 들어맞는가?
당연하게도 그 요점은 텔레비전의 모든 사건들은 역사적 연속성이나 전후관계를 철저히 피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단편적이며 신속한 이야기의 전환 속에서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똑같은 흐름으로 휩쓸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지와 감성 모두를 마취시키며 둔화시키는 텔레비전이다.
여기서 명심해야만 할 것은 텔레비전 뉴스쇼는 어느 것이 어느 것을 설명하는 일이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무섭게 초현실적이고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에어로플로트 항공과 수잔 소머스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스튜디오 54와 이란 사이는?〈순항〉이라는 영화와 아프가니스탄 학살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뇌물받은 공무원과 유도탄 사이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의 어느 하나라도 끝까지 추적될 것인가? 이란은 왜 40초의 가치밖에 없고 세인트 존스의 게임은 166초의 가치가 있는가? 어찌하여 소머스는 알리보다 적은 시간을 배당받아야 할 것으로 결정되었을까? 그리고 광고와 다른 이야기와의 관계는 결국 무엇인가? CBS의 쇼에는 끝날 때까지 약 10분을 차지하는 21개의 광고가 있었다. 뇌물 사건 보도 이전에 3개의 광고가 따랐으며, 뉴멕시코 교도소 폭동 보도 앞에 4개, 불경기에 관한 특별 보도 앞에 3개가 방영되었다. 여러분도 잘 알겠지만, 광고 방송은 유쾌하고 만족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 2개는 성애적인 내용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그렇게 늘어놓는다면 사람들은 세계를 무엇으로 이해하겠는가? 사람들은 사건의 중요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인간 행위의 어떤 원칙이 표명되며 어떠한 도덕 질서의 체계에 따라 그것들은 평가될 것인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 텔레비전 뉴스쇼는 다음과 같이 변함없는 대답을 한다. 즉, 세상에는 식별되는 균형 감각이란 없다. 사건이란 전적으로 특유한 것이며, 역사는 엉뚱한 것이고,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견주어 평가할 이성적 바탕이란 없다. 한마디로 뉴스는 어른의 세계관이 아닌 것이다.
실로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는 우리는 모순 감각조차 발견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뉴멕시코의 어느 교도소 수인들의 절망과 좌절을 이야기한 다음 미국의 풍요를 기리는 광고를 4개씩이나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뉴스 보도자가 최소한 윙크라도 할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그는 그가 한 말에 대해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의 총화는 텔레비전 뉴스쇼는 그 명칭이 뜻하는 바로 그대로라는 것이다. 쇼는 즐기는 것으로, 청중이 웃고 울며 마취되도록 하는 일련의 특수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해 인위적이며 환상적인 세계를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다. 그 효과는 물론 정치적 인간의 생각을 왜소화시키고, 성인의 이해와 미성년의 이해 사이의 차이점을 마멸시키는 것이다.

천국의 황홀경 - 상업광고

이러한 과정은 정치 이외의 분야에까지 확대된다. 성숙된 어른의 감성을 나타내는 분명한 표지의 하나는 광고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 사이를 구분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문화는 그러한 차이가 뚜렷하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대에는 그러한 구분이 가망 없게 흐려졌는데, 그것은 주로 텔레비전 광고의 편재적(遍在的) 정보 통신형태 때문이다. 뉴스쇼가 정치적 판단의 의미를 바꾸는 것과 똑같이 텔레비전 광고는 소비 의식과 깊은 신앙심의 의미를 모두 바꾸었다.
텔레비전 광고는 분석 능력이나 우리가 보통 이성적이고 성숙한 판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요구하는 형태로 상품을 제시하지 않는다. 소비자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어른, 아이 모두에게 논리나 실증의 부담 없이 똑같이 열중할 수 있는 우상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기업적 설득력을 경멸하고 주로 상징과 종교적 수사학을 동원하여 일하는 한, 이같은 정보전달 형태를〈광고〉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잘못이다. 텔레비전 광고는 실로 종교적 문학의 한 형태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공정하다고 나는 믿는다.
대부분의 중요한 텔레비전 광고들은 일종의 정연한 신학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유 형태를 띤다. 모든 종교적 비유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대한 전망과 구원의 길을 암시하는 죄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것들은 또 무엇이 죄악의 근원이며 무엇이 성자의 의무인가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옷깃 때자국의 비유〉를 테마로 한 광고를 생각해 보자. 이것은 텔레비전 기록으로서는 성경의〈탕자의 비유〉에 해당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이것은 그 유형을 생각나게 하는 대부분의 요소와 형태와 내용을 갖춘 하나의 원형이다. 먼저〈옷깃 때자국의 비유〉는 짧아서 고작 30초밖에 사람들의 시간과 주의를 빼앗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세가지인데 모두가 명백하다. 첫째, 텔레비전 선전은 비싸다. 둘째, 회중의 주의집중 시간은 길지 않고 쉽게 산만해진다. 셋째, 비유는 길 필요가 없는 바, 전통적으로 보면 그 이야기 구조는 촘촘하고 그 상징은 명확해야 하며 설명은 간결해야 한다.
〈옷깃 때자국의 비유〉의 구조는 실로 기분좋게 전통적이다. 이 이야기에는 도입부와 중반부, 그리고 결말이 있다. 이 이야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어느 부부가 좀 느슨한 배경 ?? 말하자면 식당 ?? 속에서 묘사되는데, 그들은 서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말하자면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침 웨이트레스 한명이 그들의 식탁으로 다가왔다가 그 남자의 옷깃에 때묻은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당돌하게도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차가운 경멸의 웃음을 띤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규칙위반을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해버린다. 모욕감을 느낀 그 남자는 경멸과 분노로 자기 아내를 노려본다. 그녀는 대조적으로 자기연민과 자기혐오감을 드러낸다. 이것이 그 이야기의 초반부로서, 말하자면 문제의 제기이다.
그 다음 장면은 남자 셔츠 옷깃의 때자국을 틀림없이 제거해주는 세제를 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아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남편에게 자기의 작업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남편은 사랑에 넘치는 미소를 보냄으로써 그녀를 용서한다. 이것이 그 이야기의 중반부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 부부가 식당에 앉아 있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 웨이트레스의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사회적 징계에서도 해방된다. 이것이 마지막 부분으로, 도덕과 설명 그리고 주석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의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이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죄의 근원은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인 바, 자비심 많은 산업발전이 이룬 업적의 명세서를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행과 모욕과 인생의 불협화음을 초래한 원천이다. 그리고〈옷깃 때자국의 비유〉에서 강력하게 묘사된 것처럼 과학기술적 무지의 결과는 어느 때고, 경고 없이 전면적인 분해활동의 힘으로 엄습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적 무지라는 기습적 공격력은 텔레비전 광고 이론에서는 특히 중요한 부분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그 회중의 취약점을 항상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족이나, 더 나쁘게는 자아도취에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약삭빠른 이해 없이 살려고 하는 것은 항상 위험한 것인데, 그 이유는 분명한 순진성은 틈을 노리는 사람들에게는 어찌할 수 없이 눈에 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틈을 노리는 사람이란 웨이트레스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으며, 이웃이거나, 심지어는 여러분의 한심한 무지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분의 부엌에서 물체로 변하는 유령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때자국〉에서처럼 구원의 길은 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두가지 장애물이 있다. 첫째로 요구되는 것은 당신이 당신보다 앞선 사람들의 충고나 사회적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때자국〉이야기에서는 웨이트레스가 비록 가혹하고 가차없는 여성임에 틀림없지만 자문역을 담당한다. 어떤 이야기 속에서는 조언자가 신중하지 않고 빈정거린다. 그러나 예를 들어 위생 휴지, 샴푸, 아스피린 광고 등 대부분의 이야기 속에서는 조언자가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자기들도 취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아주 사근사근하고 정감 있다.
무식한 사람들은 지시를, 그 지시하는 뜻에 맞추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더이상 강조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시청자들에게 두가지 일을 동시에 지시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충고를 열심히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만큼 열심히 남에게 충고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충고를 해준다는 것은 성도들의 기본 임무이다. 실로 이상적인 종교공동체는 서로서로 과학기술의 진보에 관한 충고를 주고받는 많은 남녀 무리의 비유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처럼 우리가 언제 하느님이라는 전통적 관념에 대한 신앙을 과학기술이라는 고상하게 만드는 힘에 대한 신앙으로 바꾸었는지는 말하기 쉽지 않다. 이러한 변화를 초래하는 데 있어서 텔레비전 광고가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텔레비전 광고가 동시에 변화를 반영하고, 이것을 기록하고 확대시켰으며, 또 그렇게 하는 과정 가운데서 난숙한 정신 지향성을 축소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결과, 상업광고는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경계선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어린이들도 텔레비전 광고의 신학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까다롭거나 복잡한 것, 또는 존재의 성격에 많은 의문을 제기할 만한 것이 전연 없다. 이 신학을 수용한 어른들은 어린이와 다를 것이 없다.

영상표현이 지닌 한계

텔레비전이 조장하는 정치, 상업, 정신적 의식에 관한 유치한 개념은 정치인이나 광고장이 또는 텔레비전 내용을 제공하는 텔레비전 관계자들의〈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지적하는 것이 아마 좋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단지 그들이 본 그대로 텔레비전을 이용할 뿐이며, 따라서 그들의 동기는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그것에 비해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분명 그들은 텔레비전의 방법을 이용하지만, 어린이같은 어른들을 생산하는 것은 매체이용자들의 성격이 아니라 텔레비전의 성격이다. 이 점은 분명히 이해해야만 하는 필수 항목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텔레비전을〈개량하면〉어른이 보존될 수 있다고 잘못 믿게 되는 위험을 무릅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해를 서로 전할 효과적인 수단을 갖지 못한다. 텔레비전은 현재 중심의 매체이다. 텔레비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지금〉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경험되며, 그것이 바로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비디오테이프는 며칠 또는 몇달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을 통해서 들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 결과, 현재는 그 무엇보다도 크게 확대되었고, 어른들은 텔레비전 때문에 즉각적인 만족을 바라는 어린이와 같은 욕구와 결과에 대한 어린이 같은 무관심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추측이다.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상황은 또 하나의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라디오나 레코드 같은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은 공중행동의 규칙에 따를 것을 요구하지 않는 고립적인 경험을 낳는 경향이 있다. 텔레비전은 심지어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일 것조차 요구하지 않으며, 그에 따라 사회적 응집에 관한 어른들의 인식을 장려하는 행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텔레비전 구조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그토록 애써 주장해 왔던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텔레비전은 그 내용의 대부분을 언어가 아닌 시각적 영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것은 필수적으로 대화형식의 표현법을 보류하지 않으면 안된다. 텔레비전의 흥미 기능이 거의 무한한 것은 이 때문이다. 텔레비전은 최초로 대중의 진정한 주장이 되었는데, 그것은 텔레비전이 장악한 광범위한 시청자들의 숫자 때문만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거의 모든 것이 관념의 주장이나 반복이 아닌 이야기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정치도 이야기가 되고, 뉴스도 이야기이며, 광고와 종교도 한낱 이야기이다.
흔히 비평가들은 텔레비전이 최소공통분모에 호소한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텔레비전 영상을 두고 그것이 추구할 수 있는 보다 높은 지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탁월한 과학저술가이며 물리학 교수인 번슈타인은〈코스모스〉에 관한 그의 비평에서 그러한 해답의 한가지를 제시했다. 번슈타인은 어떤 과학 프로그램이 방영될 때에는 보는 영상은 정지시키고 화면의 교수는 책상 뒤에 앉아 그저 말을 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그 설명에 복잡한 사실이나 관념 또는 추측이 포함된다면 그러한 프로그램은 어떤 교육받은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프로그램은 텔레비전이 아니다. 그것은〈새벽 강좌〉이다. 그것은 강의실이나 교실을 복제하는 데 사용되는 텔레비전이며, 보다 높은 배움을 열망하는 사람들조차도 오랫동안 볼 것인지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정신의 균질화와 문자문화의 파괴

텔레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어른과 아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텔레비전은 그 속성상 정신구조를 균질화시키기 때문이다. 흔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12세의 정신 수준에 맞추어 제작된다고 하는 비평에서 이 풍자가 잘못된 것은 프로그램 자체가 지향할 수 있는 다른 정신 수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논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보이든지, 나는 텔레비전을〈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한계와 한계의 영향을 기술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단히 많은 것들이 우리가 이 위대한 문화변형 매체의 성격으로 이해한 것에 따라 방향이 정해진다. 1981년 에머슨 대학의 졸업식사를 통해 ABC 텔레비전 회사의 이사장 골든슨은 졸업생들에게〈……우리는 더이상 전통적 기능의 지배에만 의존할 수 없다. 전달자로서, 행위자로서, 창조자로서 … 그리고 시민으로서 … (전자혁명은) 신종의 문자해득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시각적 문자해득력이 될 것이며, 전자 문자해득력이 될 것이고, 인류 초기역사의 순수한 구두(口頭) 전통을 극복한 것으로서의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씌어진 언어에 대한 해득력을 훨씬 넘어서는 발전이 될 것이다.〉그가 올바르게 말한 것처럼, 텔레비전과 기타 전파 매체는 전통적 기능에 숙달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나의 요점인데, 그 이유는 그러한 기능은 어른과 어린이의 구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 차별을 촉진시키는 데 무력하리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시각적 문자해득력〉은 구두 전통을 극복한 것으로서의 문자언어에 대한 해득력을 훨씬 넘어서 발전이 될 것이라는 그의 설명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골든슨의 흉중에 있는 발전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의아해 할 뿐이다. 문자해득력은 하나의 순수한 축복이었다고 하는 주장은 비록 순진하고 부적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씌어졌고, 다음에는 인쇄된 말은 문명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조직을 가져 왔다. 그것이 가져온 것은 논리와 과학, 교육, 예절이었다. 실로 골든슨씨가 권장하는 바로 그 과학기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자해득력의 존립근거인〈전통적 기능〉을 무력하게 만드는 어떤 정신이 미디어의 창조를 통해 그 자신을 파괴하는 씨앗을 뿌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 방송사의 이사장을 제외하고 누구나 이러한 사실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 나는 당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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