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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조국과 성서를 사랑한 김교신 선생

사회역사경제 들소리신문............... 조회 수 3597 추천 수 0 2002.10.15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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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처/들소리신문

탄생 100주년 맞은  김교신 이용도 김재준 함석헌

 1901년은 20세기의 첫 출발인 해. 그래서인지 어느해 보다 일제치하와 분단된 현실을 위해 준비된 선각자들이 많이 태어난 해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김교신 함석헌 김재준 이용도 등이다. 이들의 특징은 나름대로 각기 특성있는 모습으로 시대에 상당한 반향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에 본지는 탄신 100주년을 맞은 믿음의 선각자 4명의 삶과 사상을 김교신 선생을 시작으로 각 인물별로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제1편 조국과 성서를 사랑한 김교신 선생 (1)삶과 그 의미

“나는 다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나다나엘이 진정한 이스라엘인이라 불리운 것과 같이 김교신 씨는 진정한 조선인이었다. 김교신 씨는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민족을 사랑하고 조선어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는 고루한 배타적 민족주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새로 태어난 조선인이었다(중략). 미국 류의 천박한 그리스도교에 의하지 않고 소련의 공산주의 같은 불신앙에 의하지 않고 또 세속적인 민족운동에 의하지 않고 권력자에게 영합, 협력하는 것에 의하지도 않고 순수한 무교회 복음의 신앙에 의해서 조선인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조선인을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김교신 씨는 그 소중한 일생을 바쳤다.”  신앙의 동지인 일본인 야나이바라는 1945년 `가신(嘉信)' 복간호의 추도문에서 병사한 지 3개월이 된 김교신 선생을 철저히 조국과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교신 선생. 그가 오는 18일로 탄신 100주년을 맞는다. 44년이라는 생애 동안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철저한 자기발견과 신앙과 구도정신을 가르쳤고 민족의 선각자로서 `성서'만이 민족을 바로 세울 수 있다며 `성서조선' 등의 잡지와 성서연구 모임을 통해 평생 성경을 가르치며 일본의 민족성 말살정책 아래서도 고유한 정신을 계승해 갔다.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 사포리에서 부친 김념희와 모친 양신 사이의 장자로 전통있는 유가(儒家)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03년 그가 두살이 되던때 패암으로 요절하였고 1912년 함흥 주북의 한씨 가문의 4세 위인 한매와 결혼했다.  9살이 되던 해에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1918년 3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일어난 3^1운동에 참가해 활동했다.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 목이 타도록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그의 가슴에는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된다.  그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정측영어학교에 입학했고 이 무렵 노방전도를 접하고 동경의 야라이쪼 성결교회의 시미즈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던 교회는 세속적인 이권투쟁에 전념했고 마침내 목사를 추방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김교신은 교회의 내분에 대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 반항기에 접어든다. 그후 1921년 1월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성서연구회 출석과 그에게서 배운 정신적 자양분으로 이후 무교회운동가로 삶의 방향을 확정한다.  김교신은 이후 귀국할 때까지 약 7년간 우찌무라에게 성서를 배웠는데 우찌무라의 최대 역작으로 불리는 로마서 강의가 있을 때면 늘 맨 앞 자리에 앉아 경청했다고 한다.  그는 우찌무라의 신앙의 자세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태도를 보았고 우찌무라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김교신은 마사이케, 이시하라 등과 함께 `가시와키청년회'에 소속한다. 또 1925년부터 우찌무라의 조선인 제자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어 성서 연구에 전념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공부했다.  한편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으나 1923년 지리박물과로 전과한다. 1927년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귀국하여 고향인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이후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등에서 약 15년간 교사로서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각성에 힘을 쏟는다.  그의 제자로는 어린이 운동의 개척자인 `새싹회'의 윤석중, 덴마크의 농촌운동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류달영(현 성천문화재단 이사장),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 우승하여 한국의 기상을 온 세계에 떨친 손기정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해 냈다.  많은 사람들은 손기정 선수는 기억하나 당시 동경 예선까지 따라갔던 사람이 바로 김교신 이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손기정 씨는 회고담을 통해 “그 때 선도차에 탄 김교신 선생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이 스승의 눈물만 바라보며 뛰어 우승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제자양성과 함께 `성서조선'을 통해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제61호~83호)와 류달영의 `농촌계몽의 선구여성 최용신 소전', 김교신의 `산상수훈 연구' 등의 명작과 민족성을 일깨우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성서조선'은 일본에서 귀국한 직후인 1927년 7월부터 함석헌, 송두용 등 `조선성서연구회' 멤버들과 잡지를 발행했으며 1930년 5월 제16호부터는 주필로 `성서조선' 발행에 전 책임을 지게 된다.  총독부의 서슬퍼런 검열에 의해 삭제, 발행 금지 처분을 받으면서도 1942년 3월 폐간될 때까지 158호를 발간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무교회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그리스도교 전도를 행함과 동시에 `토착적^민중적 기독교'를 주장했으며 성서연구, 민족적 신앙, 또 외국의 교파 교리나 외국의 선교회로부터의 독립신앙을 촉구했다.  그는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면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실천의 장인 식민지 조선사회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것이며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 `조선'에게 최상의 선물인 `성서'를 갖게해 성서에 기초한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글 `성서를 조선에'는 그가 얼마나 조선을 그리고 복음을 사랑했는지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으나 인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어떤 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어떤 자는 문학을 주며, 어떤 자는 의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다.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뼈를 세우며, 그 피를 만들고자 한다. 같은 기독교로서도 어떤자는 기도생활의 법열의 경을 창하며, 어떤 자는 영적 체험의 신비세계를 역설하며, 어떤 자는 신학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하나, 우리는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자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미력을 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조선에.”  김교신은 함석헌과 함께 우찌무라의 성서연구회에 출석하며 성서 연구나 활동을 하면서 조선의 역사를 그리스도교의 섭리 사관에서 보는 눈을 갖게 된다. 즉 우리 민족의 높은 이상을 우리 역사와 지리의 긍정적 이해와 기독교의 섭리사관에서 이끌어 내고자 했던 것이다. 누구나 고유한 인격과 사명을 갖고 있듯이 각 민족 역시 그 민족마다 고유한 민족성과 사명을 갖는 것으로 여겼고 그런 맥락에서 성서만이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바르게 직시할 수 있다고 본것이다.  그러나 `성서조선'을 통해 우여곡절도 많았다. 1942년 3월 소위 `성서조선 사건'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김교신 뿐만 아니라 독자들까지 체포되어 옥중생활을 했으며 1943년 3월 불기소 처분을 받고 출옥한다. 그후 전도생활의 길이 막혀버린 김교신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어둠가운데 있는 신앙 동지들을 격려하고 1944년 7월에 흥남일본질소비료공장에서 취직하여 5천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의 복리와 인격 교육에 힘을 쏟으면서 `해방'을 준비했다. 그러나 해방을 3개월 남겨두고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던 발진티푸스를 간호하다가 자신도 그 병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서도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안 의사, 나 언제 퇴원하여 공장으로 갈 수있습니까? 나 40평생에 처음으로 공장에서 민족을 내 체온 속에서 만나보았오. 이 백성은 참 착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이나 빵보다도 따뜻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 누가 그들을 그렇게 불쌍한 무리로 만들었느냐고 묻기 전에 이제 누가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느냐가 더 급한 문제로 되었습니다. 안 의사 나와 함께 가서 일합시다. 추수할 때가 왔으나 일꾼이 없습니다. 꼭 갑시다.”  그는 한국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위해 하나님의 준비된 자로 이 땅에 와 민족말살정책에 항거하며 하나님의 주신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지켜내면서 일제치하의 역사속에 징검다리가 되어 무사히 `고난의 강'을 건널수 있게 해 준 위대한 민족의 `스승'이었다.

김경희 기자
제1편 조국과 성서를 사랑한 김교신(끝)

`민족 구원'을 최선으 로 여긴 그 사람

 그간 김교신의 삶과 의미 그후 사상과 활동에 대해 실었다. 이번주에는 지난 18일 오후 2시 성천문화재단(이사장 류달영)에서 김교신 탄신 100주년을 맞아 `기념 강연회'(사진)에서 발제된 내용을 발췌, 그의 사역과 열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자리에서 교육자로, 신앙인으로서, 지리학자로서 애국자로의 김교신의 삶이 조명됐다.  교육자 김교신(김정환 전 고려대 교수)=김교신은 교사로서 기본은 인격적 사랑, 동행적 자세, 자기발견 촉구, 구도 정신의 현시, 종교적 수준의 인생 태도, 약자에 대한 사랑 등이다.  김교신은 제자 하나 하나의 성품, 가정 환경, 출신 고향, 장래의 희망 등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사랑을 발동하였다. 자기 집에서 주일 오전마다 하던 성서 강의에 일이 있어 참석못하고 오후에야 찾아온 학생을 위해서도 단정하게 앉아 1인 강의를 해 주었고, 어느 한 학생이 커닝하는 것을 보더니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그 자리에서 흐느껴 울고, 시골에서 올라와 외로운 학생에게 너의 고향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근면하다고 학생들 앞에 말하여 고무해 주었다.  김교신은 동문 동행적 자세로 교육에 임해 지대한 교육적 역량을 발휘한 삶이다. 그는 일단 학교에 나오면 성서 연구 및 집필 시간을 제외하고는 학생들과 생활을 같이 했다. 특히 운동장에서는 농구 코치로 학생과 같이 뛰었고, 등산도 함께 하기를 좋아했고, 심지어 씨름까지도 함께 어울려 했다. 김교신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사명의 자각 `조선'의 섭리사적 인식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교육의 마당에 있어 학생들에게 자기 발견을 촉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위대한 교사는 종교적 수준의 신념 또는 신앙에 산 사람들이 많다. 김교신이 이러한 인물이었음을 세삼 상기할 필요도 없으리라.  `조선산 기독교'의 김교신(양현혜 전주대 겸임교수)=근대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서구는 스스로와는 구별하는 의미로 아시아지역을 `동양'이라고 명명하였다. 아시아에 부여된 이 명칭은 단순한 지역적인 개념 외에 서양적 입장에서 논해진 의미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구와는 이질적인 것으로서 뒤떨어지고 미개하며 역사를 주체적으로 형성해 갈 수 없는 세계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의시속에서 조선은 고유의 역사적 실체를 박탈당하고 역사없는 공간으로 폄하되었다. 따라서 조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긴급했던 과제는 자신의 주체성을 소외시킨 서구 중심주의로부터 탈피하여 스스로의 역사적 주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조선 기독교사에서 이 문제를 가장 심도있게 고뇌한 사상가의 한 사람이 김교신이었다. 그리고 미국적 기독교를 흉내내거나 자민족 우월주의의 병에 걸린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선교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기독교라치면 기독교인이기를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설파했다. 김교신이 꿈꾸었던 `조선산 기독교'는 기독교를 통한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역사 현실 안에서 고난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불의를 정화해 나가는 `창조적 자기 수고'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며 창조해 가려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산 기독교'의 구조는 서구 중심주의의 지적 폭력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역사적 주체성을 회복하려 했던 그의 고뇌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근대지리학과 현대지리학의 가교 역할을 한 김교신(이은숙 상명대학교 지리학과 교수)=우리나라 지리학은 풍수지리, 실학, 지리지 편찬, 지도 제작 등과 같이 조선시대의 전통지리로 맥을 이어왔으나 구한말에 전래된 근대지리학은 수용될 기회도 없이 일제강점으로 단절되고, 해방을 맞이한 후 바로 현대지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있는데 최남선과 김교신이다. 김교신은 자신의 종교관과 민족관, 그리고 그가 몸 바쳐온 지리교육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지리소고'라는 논문을 쓴 지리학자이다. 이것은 1934년 성서조선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그의 지리시상과 조선에 대한 지리관을 밝힌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학 논문이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자연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개개인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20세기 초반 이후 현대지리학의 새로운 사조인 가능론과 상통하는 것이다. 지리적 환경은 단지 주어진 것이고 인간이 선택적으로 이를 이용하기 때문에 지역적 특성의 형성된다는 것이 가능론의 골격이다. 이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반도정책론에 대한 반론의 바탕을 이룬다.  김교신은 조선의 정치적 현실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함에 있어서 정치지리학적 개념을 도입하고 있었다. 국가의 응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리적 단위와 정치적 단위가 일치해야 된다는 것이라던가, 조선의 위치와 정치적 운명의 관계를 역사라는 테두리 속에서 설명하려는 노력 등이 그것이다. 그는 조선의 반도적 위치에 대하여 낙관적 해석을 했는데 이는 일본의 압박을 당하는 조선민족을 계몽하고, 국토에 대한 애착을 갖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한반도라는 위치를 효율적인 것으로 만들려면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위치에 대한 자각과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통해서만이 반도정체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애국자 김교신(유달영 성천문화재단 이사장)=김교신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56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약한 국민정신과 황폐한 교육계와 공허한 종교계를 걱정하는 많은 이들의 가슴속엔 순수한 인간 김교신의 모습이 더욱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그는 날이 갈수록 그 존재의 의미가 더욱 커져 가는 인물이다. 혹자는 김교신을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종교개혁자라고 한다. 또한 진정한 스승의 상을 구현한 참 교육자라고도 한다. 이 주장을 그르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김교신을 무엇보다 참다운 애국자로 평하고 싶다. 그는 엄격한 유학자의 가정에서 자라나서 외국에 유학할 만큼 성장한 후에 기독교 신도가 되었다. 그의 신앙은 매우 엄격한 것이어서 나중에는 국내의 기독교계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이단으로 몰려 미움과 저주를 받았다. 한국의 토착적 신앙을 자리잡게 하고자 그는 최후까지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 까닭을 생각해 볼 일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시대의 산물이다. 이 민족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그 문화를 말살 당하면서 처절한 노예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김교신에게는 오로지 애국이 모든 행동의 근간이었다. 나라 없는 망국의 한이 골수에 사무친 자유혼의 애국자 김교신이 참으로 이 겨레를 멸망으로부터 건져 낼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를 애달프게 찾고 찾던 끝에 무교회 기독인으로서, 또 이 민족의 교사로서의 길을 100미터 경주를 달리듯 초인적으로 살고 45세로 끝낸 일생이라고 할 것이다. 김교신은 그 신앙의 출발부터가 자기 개인이나 집안의 길흉화복을 넘어서서 민족 구원을 최선의 길로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취/재/파/일-김교신 선생 기획을 마치며

본질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이단자

 김교신. 무교회신앙으로 역사 속에 이단자로 남아있는 그를 문헌과 그의 제자들을 만나 보면서 오늘의 기독교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그는 분명 선각자였다. 그는 오늘날의 교파납립으로 빚어질 병폐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경고하며 서구의 기독교를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본질'을 계승하면서 한국적인 기독교를 주장했다. 그래서 서구 선교사들에 의존하는 기독교의 모습이 아닌 철저한 자립과 토착화된 기독교를 말했다. 서구 선교의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은 오늘날 많은 교단의 분열을 낳게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한 식구끼리도 하나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 병폐는 비단 한국교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3세계 선교 오지에도 교파마다 들어가 파당을 만들고 자기네 교단만이 구원을 줄 수 있는 양, 추태를 부리고 있다. 조용한 시골마을을 싸움바닥으로 만들고 머릿수 계산해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데 돈 얼마라는 등 웃지 못할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총회랍시고 `성총'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패로 몰려나와 다른 교파를 만들고 그 교파 마다 신학교를 만들어 숫자 불리기에 급급하다. 1년도 안돼 사기꾼이 목사로 둔갑하고 목사를 무슨 스탬프 찍듯이 양산해 내도 제어할 장치가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성도들의 수준은 온전하겠는가. 결국 물량주의는 성공했으나 정신이 사라져 버린, 한국사회에서 조차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게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김교신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자신에게 철저한 사람이었다. 날마다 자신을 점검하고 새벽이면 일어나 냉수마찰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밤이면 꼬박 꼬박 일기를 쓰면서 반성했다.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성도의 나아갈 방향을 소개하고 학생들에게 역사 의식을 고취시키며 민족 앞에 세계 앞에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소명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민중의 스승이며 복음의 증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관, 특히 기존교회의 제도나 형식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으로 결국 이단자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글쎄. 그 이단이라는 기준의 잣대를 믿지 못할 것이 많은게 또한 한국교회 판이라서 다는 아니지만 기존교회서 `이단'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정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김교신을 접하면서 우습게도 그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메시지를 조금이라도 귀담아 들으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오늘날의 이토록 처참한 기독교의 하락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형식과 본질.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형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형식만 남아있지 본질은 잃어버렸다. 차라리 본질을 두고 형식을 덜 소중히 했더라면 지금같이 본질은 온 데 간 데 없고 형식만 남아 속이 텅 비어 버린 껍질 뿐인 기독교라는 소리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희망을 노래한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기에. 예수의 주 되심을 믿는 백성이기에 또한번 기독교인들에게 희망을 주시지 않을까. 그간 4회 연재한 김교신에 대한 글을 1940년 1월 성서조선지에 실린 `나를 이용하라'는 글로 마감하고자 한다.  “세상에는 남을 이용하려고 밤낮 책략을 꾸미며 애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단, 그리스도에 있어서 이용되려는 것이니 상고한 후에 이용하라…. 십수년내로 양정학교 교사인 고로 월급이 풍부해서 쓰고 남은 것을 처분하기 위하여 다달이 기독교 서류를 발간한 것이 많으니 이것을 이용할 것이 하나요. 또 승차할인권을 사용하므로 원거리로 갈수록 큰 이익을 보는 듯이 기뻐 원정을 희망하며 생활이 넉넉한 고로 차비나 숙식을 자담하면서 전도하는 일을 한 가지 자랑으로 알고 있으니 이를 이용하기는 알맞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이제 우리 속에는 `말씀'의 불이 일어났다. 누구든지 이용하라.”  말씀의 불이 일어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됐던 김교신은 자신을 이용하라며 민족 앞에, 복음을 듣고자하는 사람들 앞에 기꺼이 한 몸 내어 던진다. 오늘 누가 시대를 향해 `나를 이용하라'고 고함지르며 민족 앞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단자'라는 멍에를 무릎쓰고 한 몸내어 던질 것인가. 그 `이단자'가 그리운 4월이다.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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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인기감동기타 [특수선교] 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해야 할 10가지 이유 최용우 2002-09-29 3142
34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산 속 기도실이 아름다운 곳 강릉정동기도원 다람쥐 2002-08-01 7974
33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신성수양관 다람쥐 2002-08-01 5241
32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강화 「교산교회」 다람쥐 2002-08-01 4368
31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전원형 교회 「김포전원교회」 다람쥐 2002-08-01 6477
30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풍경] 작고 아름다운 시골교회, 계룡산 학봉교회 다람쥐 2002-08-01 4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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