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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성령의 사람 시무언 이용도 목사

수도관상피정 들소리신문............... 조회 수 4146 추천 수 0 2002.10.17 00: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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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성령의 사람 시무언 이용도 목사(1) 

“나는 다만 하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노라”

 1932년 10월 평양 노회가 이용도 금족령을 통과시켰다. 이용도 목사의 부흥집회는 평양은 물론, 해주^안주 등 그가 가서 말씀을 듣고 강단에 서면 사람이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평양 노회의 금족령 결의 사항에는 ①이용도는 거짓말쟁이다 ②이용도는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③이용도는 파괴주의자다 ④이용도는 질서를 혼란케 하는 자다 ⑤이용도를 세우면 본교회 담임 목사가 푸대접을 받아 살 길이 막막해 진다.  이 같은 결의 내용 중 ⑤는 참으로 솔직한 표현이다. 그 때만 해도 교회들이 순진해서 솔직한 표현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용도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집회처가 결정되면 사방에서 벌떼처럼 밀려들곤 했었다. 웬만한 교회이면 수 천명씩이 모인다. 사람이 앉아 있는 무릎 위에 다른 사람이 앉기도 해야 할 만큼, 서 있으면 예배가 끝날 때까지 꼼작 못하고 서 있어야 하고, 추운 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창문 위에 사람이 매달려야 하고,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당 담장이 무너지기도 하고, 나무위에 사람이 오르면 나무 가지가 끊어져 나무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위태롭게도 했었다.  평양 노회의 금족령은 지역 교회 목회자들의 밥줄이 위태롭기도 했으나 이용도 목사의 무차별 사랑, 무한대한 용서의 크기를 당시 교회가 감당할 수 없었다. 이용도는 학창시절에도 길가다가 거지를 만나면 자기 옷과 거지의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자기 가진 것을 모두 털어 거지의 주머니(깡통)에 집어 넣어 주기도 했었다.  어찌나 그의 손이 큰지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떠나는 날이면 그가 지나가는 길목에 거지들과 가난한 자들이 수십명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집회한 교회가 준 사례금을 모두 털어 나누어주곤 했었다.  평양 노회의 금족령 이후 이용도 목사를 혐오하는 세력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로 크게 나뉘었다. 이용도가 소속한 감리교에서도 그를 압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용도는 집회를 강행했다.  그의 열정은 무한이었다. 그가 강단에서 서서 설교를 시작하면 3~4시간, 예배를 마치고 나서는 강단 앞에 엎드려 밤새워 기도하고, 오전에 낮공부, 그리고 다시 계속되는 집회는 (그때만 해도) 일주일 내내 계속했다. 병약한 그가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일주일 동안 힘있게 집회를 인도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회중은 기가 질려 버린다. 그러나 그의 열정적인 설교와 눈물이 풍성한 감동, 예술적인 표현법, 시적인 어휘의 표현에서 무식하고 유식한 사람 나이가 많거나 젊거나 간에 그의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버리기가 일수 였다.  해주, 안주, 평양을 오고 가면서 그는 집회를 했고, 사방 1백리 정도에서 그를 따르는 열광하는 신자들은 순례자들이 되어 그를 성자로 추앙하며 따르고 있었다.  이용도에게 있어서 뿌리칠 수 없는 몇 사람도 있었다. 이른바 HCM사건이라 하는 익명으로, 지금 밝히면 태용^남주^준명이라 하여 인명을 말하는 데 이들은 이용도가 어느 만큼 아끼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 이용도가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지나 문둥이를 피하지 않는 그였기에 십자가 예수를 시인하는 이들과는 너그럽게 사귐을 갖는 너그러움 때문에 지나친 주장을 한다싶은 이들도 모른다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용도에게는 남녀가 한방에서 기거하면서도 불의가 없으며 무흠하다 하여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덜미가 잡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들이 이용도를 외면하기 시작하고, 교파들이 금족령을 내리고 하여 활동의 폭이 좁아지다 보니 따르는 이들이 제한된 집회 장소를 찾아 낮밤을 가리지 않고 수십, 수백리를 걷다 보면 숙박시설이 넉넉지 않은 그때 저들은 자연히 한 방에서 찬송과 기도, 나아가 서로를 위로하면서 지내다 보면 낮밤의 구분이 없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1932년 말에 이르러서 였으며 이용도는 차츰 건강이 쇠잔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더구나 그의 삶과 하나 또 하나의 동작은 너무나 투명하였기에 그에게서 어떤 허물의 틈새를 차지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의 앞에 죽음 밖에 없는가. 십자가, 나는 그 후에 오는 부활을 믿노라. 이 육에 추한 몸은 완전히 죽어버리고 영에 속한 몸으로 바꿀려 하노라. 이것도 하나님의 성의(聖意)를 기다릴 뿐이로다. 내 능력으로는 죽을 수도 없고 더구나 순도(殉道)라는 그런 영광을 얻기 감당치 못하노라. 오직 聖意에 있을 뿐이로다. 오 성령이시어 나를 이끌어 골고다까지 아멘.  나는 주께 몸 바친다고 하여도 그저 부족한 것 밖에 없습니다. 몸이 열개가 있으면 그것을 다 주께 드리어 주님을 기쁘게만 하고 싶습니다.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루라도 온전히 주의 뜻대로 살면 그것이 나에게는 큰 복이요 영광입니다.  오 주여 저희들을 이끌어 육에서 곤하고 영에서 길이 편하게 하여 주옵소서. 육에서 슬프고 영에서 기쁘게 하옵소서. 육에서 수치를 당하고 영에서 영광을 얻게 하옵소서.  나는 세상을 위하여 있지 않사옵고 다만 하늘만 위하여 있사옵나이다. 하늘의 것 영의 것을 위하여는 곤고나 빈핍이나 수치나 죽음이나 무엇이든지 달게 받게 하옵소서.  나의 육신은 죽을 것이옵고 세상은 망할 것이로소이다. 주여 이 죽을 것을 어서 죽여 주시고 망할 것을 어서 망하게 해 주옵소서. 영은 살아야 할 것이옵고 하늘은 흥하여야 할 것이로소이다. 주여 이 살자를 어서 영원히 살게 해 주시고 흥할 것을 어서 흥하게 하옵소서.  오, 형제여 육에 죽고 영에 살자. 땅에서 천하고 하늘에서 귀하자. 우리 주님이 밟으신 길이니라. 내 천하려 해도 스스로 천하게 할 수 없고 내 죽으려 해도 자살할 수 없으니 나의 주여 나를 천하게 하시고 나를 죽이소서. 그리하여 온전히 주를 영광스럽게만 하옵소서.  형아! 나는 나의 일에 대하여 아무 수단도 방법도 없는 것을 알아다오. 무슨 깊은 철학적 원리를 내게 묻지 말아다오. 죽음. 이것만이 나의 수단이요 방법이요 원리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날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냥 무식스럽게 돌진하려는 것 뿐이다. 어느날이든지 나의 빛 없는 죽음! 그것이 나의 완성일 것이다.  울어라! 성자야. 울어라! 성녀야, 겟세마네는 어디 있어 나의 피 눈물을 기다리누! 차고 침뱉았던 가야바의 아문은 어디 있으며 가시관에 홍포를 입었던 빌라도의 법정은 어디 있어 나를 기다리는 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십자가를 등에 지고 멸시 천대 비웃음 중에 우리 주님 걸어가던 오, 너 예루살렘 거리야 너는 어디서 또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 때가 되거든 외쳐 부르라….  이용도 서간집 내용 중에서 몇 구절 옮겨 보았다. 이용도는 요한복음적 신앙과 신학 형태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고, 영지주의적 이분법을 통해서 또한 영지주의를 극복한 예수의 삶에 익숙한 신앙의 터전을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용도가 그토록 죽기를 원했고 살아서 주를 따를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예수를 따르고 싶은 열망이 성취되는 날이 성큼 다가왔다.  1932년에서 1933년에 이용도는 더 이상 길이 없어졌다. 안주 노회에서 이용도 매장 결의도 한 몫을 했다. 그의 육신도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해주 집회. 1933년 1월 28일에서 2월 4일까지 집회는 이용도 자신이 그의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듯 절박한 심정이었다. 열변, 땀, 기침, 그리고 다시 열변, 땀, 기침, 피를 쏟아내듯 그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말씀을 전파했다.  자정 가까운 무렵 설교를 마치고 쓰러지듯이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이용도 목사를 청년 7, 8명이 달겨들어 기도실로 끌고 가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발길질을 하였다. 한 참 후에야 여인들이 울부짓으며 달려들어 이용도 목사를 부축하여 숙소로 향했다. 계절은 아직도 겨울,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이용도는 맨 발이었다.  이용도 목사는 몇몇 성도들의 강요에 못이겨 숙소 4, 5평 되는 방에서 2월 4일 새벽까지 그래도 매회마다 모이는 백오십여 명의 신자들은 상대로 그의 공식 집회를 마무리 하였다.

〈편집위원실>
제2편 성령의 사람 시무언 이용도 목사(2) 

마음껏 노래하고 마음껏 날고 싶은 청년 용도

 이용도의 특징이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행 4:20). 이 사람은 염병같은 X이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행 24: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권면하시는 도다(고후 5:14), 그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우리는 또 기도하고 말씀 전하기만 힘쓰리라(행 6:3)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행 26:29) 우리도 가서 같이 죽자(요 11:16).  이 글은 가까운 친구와 함께 다짐한 그의 진실한 고백이다. 이용도는 예수를 만나기 전부터 자기가 태어난 1901년과 함께 고난의 아들이었다. 그해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흥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어떤 표적이 있었다는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범부요, 범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친구들은 이끌만큼 리더쉽도 있었고 친구들도 그를 따랐다. 그런데 그의 부친은 술을 많이 좋아했다. 대주가 였다.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인 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용도는 어머니를 따라 13살 부터 기도할 줄 아는 아이였다. 어린 나이였으나 신앙의 깊이가 자리 잡혀갔다. 13살이면 1913년, 일본에게 나라를 내준지도 3년째, 나라의 사정도 어수선하였다.  이용도는 가정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기 위하여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인내를 거듭하였다. 초등학교(보통학교)를 마치고 1915년 개성 한영서원(후에 송도 고등보통학교가 됨)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4년이면 졸업하는 학교를 9년에 졸업했다는 일화가 그의 됨됨이를 말해 준다. 1년 공부하고 1년 쉬고, 또 1년 하고 쉬어가고, 또 계속되는 그의 반공(半工)시대가 자그만치 9년이었다. 그러고도 그는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그는 한영서원 재학중 1919년 3월을 맞는다. 일찍부터 민족감정이 예민했고, 보통학교 시절에 일본인 교장의 핍박에 항의, 학교를 그만두려다가 교장 선생이 가정을 방문,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사과를 한 후에야 학교로 갈만큼 이용도의 자존심은 강했다.  3.1 운동이 일어났다. 이용도는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3, 4차례 체포 감옥에 갇혔다. 2년 언도를 받고 울었다. 감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민족의 해방과 독립의 기회가 왔으나 이를 행동에 옮기지 못한 민족의 한을 서러워 하며 울었다. 어떤 일화에서는 이용도가 형무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어찌나 통분하여 울고 통곡을 하는지 간수들이 쩔쩔 맺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무작정 윽박지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4년제 학교를 9년에 다닐 만큼 그는 집요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점심 먹을 때 슬그머니 뒷산으로 가서 눈물을 삼키다가 돌아와서 친구들이 밥 먹었느냐고 물으면 헛트름을 하면서 배를 내미는 등 배부르다는 시늉을 하곤 했었다. 구차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참았다. 가정에서도 궂은 일은 모두 용도차지, 그는 학교에서 그의 집까지가 1백 40리 되는데 그 길을 늘 걸어서 다녔다. 새벽에 일어나 길을 재촉해 집에 오면 새벽 3시나 4시가 되지만 피곤하다는 기색을 감추면서 집안 식구들을 배려하였다.  굶고 춥고 떨면서, 남들은 4년이면 졸업하는 학교를 9년 다니고 자기보다 5년 늦은 후배들하고 같이 졸업장을 받을 그 시간 그는 감옥에 있었으니 어찌하는가. 그는 졸업장은 없이 졸업 인정서만을 받아 들었다.  이용도의 3.1운동, 곧 만세운동을 더 자세히 옮겨 보자. 1919년 3월 1일부터 대한민국 만세를 목이 터져라고 불렀다. 개성 거리를 뛰고 달리며 만세를 불렀다.  용도는 1919년 3월 1일, 당일로 붙들려 갔다. 2개월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1920년 2월 11일 소위 기원절 사건으로 다시 끌려가 6개월 구금, 1921년 성탄절에 불온 문서 사건으로 붙잡혀 가서 반년이나 구금, 1922년 감옥에는 태평양 회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징역 언도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용도의 학교 교장 왓슨 씨는 용도의 민족운동이 옳다는 판단에 격려를 해 주고 싶지만 쉽지가 않았다. 왓슨이 이용도를 만나 설득을 하면 용도는 교장 선생을 붙잡고 통곡, 결국 같이 붙잡고 울다가 헤어지곤 하였다. 이용도의 만세 논리가 너무나 정정 당당해서 교장 선생이 오히려 설득을 당했다고 한다.  용도의 애국 열심, 그때의 용도의 몸과 마음은 불덩어리요, 그의 피와 눈물 모두가 또한 불덩어리였다는 것이다. 3.1 운동과 함께 이 용도의 민족 해방 논리, 3.1 운동의 논리, 자유 인간의 논리가 틀이 잡혀 가니 어느 누구든지 그에게 가까이 가면 함께 타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용도는 이미 이론과 뱃심을 갖춘 독립투사와 같이 되어 있었다. 하기는 용도 15, 16살 때 벌써 그 존재가 알려져 윤치호, 이상재, 양국삼 씨 등이 감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용도의 예비 독립 투자시절 기록을 변종호편저의 이용도 목사 전집 제 2권에서 그대로 옮긴다.  1. 두뇌가 명석하고 관찰이 예리한 용도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일을 꾸며내는 것이었는 데 일은 꾸미는 데 미쳐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그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생각에 열중 하였는데 안(案)이 완성되어 운동에 착수하게 되면 필요한 활동은 주의 깊고 쾌속하게 전개하여 벼락같이 실천한다는 것이다. 선전물 등사와 동지 연락 등에 어찌나 신속하게 하였는지 후에 알게 되는 부형, 경찰, 법관 등도 혀를 내 두른 다는 것.  2. 일을 꾸며내거나 어디서 지시를 맏아 가지고서 대중 앞에서 선전을 하는데 있어서는 그 열변과 웅변이 만인을 감탄시키고 도취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애국적 웅변가로 알려지게 되었고 경찰에 붙들리게 되면 문초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요령있게 활동해 온 보고를 하고 형사들은 권면하고 훈계하는 데 그 말이 어떻게나 조리 있고 지당한 말인지 형사들이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멍해져 경청하곤 한다는 것이 형사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3. 그는 언제든지 죄를 혼자 뒤집어 쓰고 벌을 혼자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였다. 그래서 동지들이 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모 사건에서 이용도와 김종필이가 서로 내가 혼자 한 일이라고 혼자 벌을 받으려고 고집하고 경쟁한 일은 한 때 개성 거리에 아름다운 이야기거리 였었다.  4. 그는 경찰관과 사법관을 감동시키고 그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하도 진실하고 정성되고 뜨거운 웅변인지라 취조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용도를 동정하고 아끼고 우대하였다. 담당 형사가 붙잡아 가면서도 감탄하여 특별히 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비밀히 내통하여 도망갈 기회를 주기도 했으며 개성 경찰서장이 `감복했다' `아까운 학생이다'라고 칭찬을 하였고 검사가 구형을 하며 울고 판사가 언도를 하면서 탄식을 했다.  5.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할 때에 아름다운 행적이 많이 있었으나 알 길이 없고 후일에 같이 있었던 죄수의 입에서 말이 퍼지게 되어 알려진 내용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겨울을 당하니 철갑을 두손에 밤낮 채워두는 사형수의 손목에 얼음이 꽂혔다. 이 철갑과 얼음에 얼어붙은 손목을 용도는 가끔 자기 배 속에 품어 주어서 녹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배고파 하는 죄수들에게 자기 밥을 주고서 저는 고요히 기도를 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  이 같은 내용을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의 행실이 그만큼 성숙한 모습이라고 했을 때, 그 때로 부터 먼 후일인 오늘 우리가 생각할 때 이는 미화요 꾸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의 불같은 생애를 볼 때 결코 과소평가 하거나 미담이 미담을 낳았다고 볼 수 없다. 함께 했던 이들이 증인이요 또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전도사, 목사, 부흥사로 남은 생을 사는 동안에 그의 진면목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이용도의 신학생 시절  서대문 형무소를 나온 이용도는 송도 고궁 보통학교로 직행했다. 다시 학업을 계속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교장의 입장이 난처했다. 이 용도를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었다.  교장은 궁리 끝에 이용도를 신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상급학교 진학의 길로 보이기도 했지만 처치곤란한 인물을 따돌려 버리는 이중효과를 노렸다. 이용도에게 권하고 신학교 당국에게도 간청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용도는 민족이 독립을 하고 자유를 얻어야지 신학공부 따위가 뭐 그리 급하겠느냐고 생각했다. 민족을 위하여 뼈가 부러지고 피가 터지고 목숨이 가루가 되어도 그것이 구국의 명령이요 이 땅에 태어난 남아의 절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장의 간곡한 권고는 차츰 이용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신학교 생활을 결심했다.  협성 신학교, 영문과 1학년 학생이 되었다. 민족애도 가슴이 불타고 있는 그로서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같은 자기 신세를 한 편으로는 탄식했다.  신학생이 되었으나 용도는 공부에 취미를 얻지 못했다. 그저 신문, 잡지, 시집, 소설, 법률, 정치 서적 등을 탐독하여 학생들끼리 모이면 이론을 캐고 논쟁을 일삼았다. 강의 시간에는 까다롭고 난삽한 질문을 던져 교수들을 골려 주는 등 경건치 못한 행동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그는 이론가, 논쟁꾼, 말성꾼, 싸움패, 과격파로 알려졌다. 신학생이건 교수건 닥치는대로 시비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를 헐뜯고 미워하고 얕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 자기 가슴에서 타오르는 애국심이 분노를 나타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용도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하루 이틀 경건한 분위기에서 생활하면서 마음이 진정되어갔다.  그는 공부보다 어린아이들을 지도하는 주일학교 일에 관심을 보였다.  유년 지도에 목표를 둔 용도는 시, 노래, 연극 등 연구에 몰두, 등화나 동요도 창작하고 아동 설교에 열심을 보이고 가극의 주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아호를 심조(心鳥)라 하여 마음껏 노래하고 마음껏 나르는 새를 그리워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시원치가 않았다.

〈편집위원실>
제2편 성령의 사람 시무언 이용도 목사(3) 

“예수에게 아주 미쳐버리게 하소서”

 요즘 이용도 목사에 대한 후한 평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되려면서도 왜 그리도 인색한 세월들이었는지, 30여 년 전만 해도 이용도 목사를 거론하면 그것만으로도 큰 죄가 되고 이단시 되었던 일이 있었다.  하기야 30여 년 전 여의도 순복음교회, 이 교회가 서대문 로터리에 `순복음 중앙교회'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을 때, 그때 조용기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신학생들이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서대문 로터리 순복음 중앙교회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성결교신학교(현 성결대학교) 학생들이 새벽기도회 시간에 조용기 목사가 인도하는 기도회에 참석하면 `정학', 방언을 하면 `무기정학', 방언을 성령 세례의 표징이라고 조용기 목사와 같은 주장을 하는 학생은 `퇴학'을 당했었다.  이같은 농담같은 사건이 30여 년 전 한국교회의 이해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 누가 조용기 목사를 이단이라고 하는가?  이용도 이야기로 옮겨 가자. 이용도 목사를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이용도 연구단체나 기념단체에게 묻고 싶다. 그대들이 진실로 이용도를 아느냐고, 또 이용도와 함께 행동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이용도의 건강 위기  이용도는 이미 보통학교 학생시절에 민족투사, 독립지사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에게 있어서 일본의 억압에서 민족을 구하는 일이야 말로 그의 생명의 의미였다. 그는 보았다. 왜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는가? 이는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의 부족에서라고 믿었다.  타의에 이끌려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가 돌파해 나가야할 길이 보였다. 어린이들이다. 어린아이들과, 때묻지 않은 아이들과 어울리기로 했다. 그래서 성극도 만들고,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고, 주인공으로 배우 노릇까지 해 보면서 울고 웃는 가운데 한 계절을 보냈다.  그에게 친구가 생겼다. 이호빈과 이환신이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학창의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나 이용도는 한구석에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분명 내가 사는 이 시대가 평탄할까? 또 내가 지금 이렇게 안일하게 살아남아 있어도 되는 것일까?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을 때 그 많은 우국지사들이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것을 보고 들었다. 아예, 조국을 떠나 만주로, 중국으로, 러시아로 멀리 훗날을 기약하며 떠나는 이들도 보았다. 2천만 내 동포는 어디로 흩어지는 것인가? 지금 흩어지면 언제 또 만나는가.  분명, 우리 민족은 일본에 앞선 민족이었는 데 언제 우리가 저들의 노예가 될만큼 허약해 졌을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2학년 1학기가 끝났다. 그리고 가을, 또 겨울학기가 다가온다. 이용도는 몸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의사 검진, 폐병 3기!  당시 폐병은 상당히 무서운 병이었다. 페스트와 함께 중증이 되면 회생이 쉽지 않은 병이다. 무조건 쉬라는 의사의 명령을 어찌해야 하는가. 때는 1925년 절친한 친구 이호빈과 환신도 대책은 없다. 겨우 이호빈의 고향 평남 강동으로 이용도를 보내서 요양시킨다는 게 최선의 방책이었다.  이용도 일행이 강동에 와서 쉬고 있는데 강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요구했다. 당시 폐병환자는 티를 내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 이용도가 환자인 줄 아무도 모른다. 신학생들이 방학동안에 지방에 내려왔으면 지방교회가 부흥회를 요청할 만큼 그때는 신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피할 수 없는 세 친구는 대책이 없었다. 대동강 상류, 얼음 밭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집회 시간이 다가왔다. 첫날은 환신이 설교를 하고 이용도가 사회를 하기로 정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찬송을 인도하던 이용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다. 울었다. 울보 이용도가 소리내어 운다. 청중들이 따라서 운다. 온 예배당이 눈물 바다였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둥 마는 둥 분위기는 울보 이용도가 이끌게 되었다.  다음날 부터는 이용도 중심이었다. 이용도는 찬송을 부르다가 울고, 설교를 하다가 울고, 웃다가 울고, 우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이용도의 눈물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 주간의 부흥회는 울다가 웃다가 끝났다. 중환자 이용도에게 증상이 나타났다. 얼굴에 생기가 돈다. 밥맛이 좋다. 밥을 몇 그릇 씩을 먹을 만큼 이용도의 건강이 변해 버렸다.  이용도와 친구들은 강동지방 교회들에게 부흥회를 자청 했다. 소문이 돌아 저들의 부흥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온 이용도는 전이나 다름 없이 주일학교 운동에 여념이 없었다. 그가 주도하는 성극은 소문이 날만큼 수준급이었다.  1928년 1월 28일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이용도는 그 다음날 강원도 통천교회로 떠났다. 강동교회 집회 후에도 이용도는 영적인 단계로 접어들기 보다는 다분히 문화적 고뇌, 즉 인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천품이 문화와 예술적 범주 안에서 자족할 만큼이었다. 그의 눈물 또한 인간의 본질, 또 근원의 갈망이라기 보다는 민족애의 그것이었고, 당시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들의 갈림길에서 이용도가 사회주의로 뻗어나가지 않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총이었다.  당시 3·1 만세 실패에 실망한 수많은 지사나 지성인들이 사회주의로 전향했던 그 유행의 길목에서 이용도가 민족에게 중심한 인간주의를 지키게 된 것은 그 자신은 물론 그가 이룩한 `이용도식 목사'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통천교회 부임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 이용도는 휴머니스트의 범주를 벗어나 십자가 예수와 만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반 우려반으로 사람들은 마음을 졸이게 된다.  이용도는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그의 교양과 예술적 이해와 배우로서의 역량, 그 어느 것 하나 그의 목회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 중심이 되지 못한 인본주의의 한계에서 허덕이는 수준임을 그 자신은 아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용도는 자기의 영적 빈곤을 재빨리 터득했다. 빈 껍데기 뿐인 자신을 발견했다. 마침 그의 교구 안에 박재봉이라는 청년이 있어 함께 기도하는 친구로 삼았다. 이용도는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10일 동안의 금식이었다. 계속해서 10일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이용도의 집중기도는 이용도의 또다른 면모였다. 용도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다. 흔들리던 그의 신앙에 깊은 확신의 시간들이었다. 마귀와 대결  이용도의 영성단계가 휴머니즘 수준을 뛰어넘어 신의 경지를 노크 하게 된다. 10일 금식기도 후 기도에 자신감을 얻은 용도는 새벽 3시 기도하러 나갔다. 이용도의 기도제목은 단호했다. `아버지여, 나의 혼을 빼어버리소서. 그리고 예수에게 아주 미쳐버리게 하소서. 예수에게 미치기 전에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없고, 마귀를 이길 수 없나이다'.  기도의 시간, 마귀가 나타났다. 크고 까만 몸둥이에 수족에는 검고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 반짝이는 사발 같은 눈, 무서운 모습으로 이용도를 움켜 쥐려고 한다.  괴물 같은 마귀는 이용도를 농락했다. 이용도는 기도했다. 예배당 안에 마귀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 예배당 가득이었다.  용도는 마귀들과 싸웠다. 벽을 치고 유리창을 깨고 형체가 없는 마귀와 싸우는 이용도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마귀와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사탄세계에 대한 우월감과 자신감이었다.  이용도의 영적 상승은 드디어 십자가와의 만남이었다. 휴머니즘의 단계, 신비주의의 위험을 극복하고 이용도는 십자가에 자기를 매달았다. 십자가에 달린 이용도  이용도가 마귀와 싸우는 내용의 핵심은 `아버지여'였다. 그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 되는 결정적 소원을 다짐하고 있다. 사단과 싸움이 있고 난 후의 이용도는 또다시 변신하였다. 그는 어찌보면 제 정신을 못차린 사람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이미 육신의 생활을 청산한 초월세계에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1928년, 1929년, 드디어 1930년 2월 26일 부터 3월 9일 까지 평양 중앙교회에서 이용도는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 집회에 하나님의 권능이 크게 나타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의 죽음, 빌라도의 심판이 이용도의 입에서 나올 때 내 대신 죽으신 예수를 확신하는 신의 세계에 참여하는 기쁨의 성도가 일어나고, 빌라도의 비겁한 재판을 설명하는 말씀 앞에 어느 변호사는 통곡을 하는 등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적 변화는 놀랍기만 했다.  `나는 이렇게 달리는 데 너는 무엇을 하느냐'고 외치는 이용도 목사의 고함소리가 신자들의 가슴팍에 화살촉처럼 박힌다. 누구도 십자가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고통하는 모습을 말하는 예수, 아니 이용도의 입가에 미소가 돌며 `… 이렇게 사랑하시는 군요'하는 말이 나왔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인간을 향한 무한 사랑으로 경험되는 순간의 비밀 아닌 비밀을 이용도는 명백하게 경험하였다.  이용도는 이미 사람의 단계를 초월한다. 이용도 찬가를 그만 부르자고 필자가 호소하는 것은 이용도는 쉽게 해석될 신학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그에게 신학 또는 요즘 유행하는 `영성운동'의 방식으로 계산할 수 있는 그 따위도 무모한 소행이 될 것이다. 이용도는 이에 예수의 십자가 안에 일치를 이루었고, 그 스스로 따로이 신학을 말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예수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용도는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직 아무도 그를 시비하지 않을 때 예수 안에 숨어들기를 원했다. 그는 폐병 3기를 마음 속에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거룩한 제단에의 귀의를 위한 지름길이 폐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서 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편집위원실>
제2편 성령의 사람 시무언 이용도 목사(4) 

“죽이겠다면 죽어 주겠다”

교회들이 이용도 목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쉽게 감당해낼 목사가 아니라는 판정을 일찍이 내린 것이다. 빠르기도 해라. 겨우 30살 젊은이일 뿐인 이용도 목사는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르듯 높은 인기  평양지역 부흥회를 끝내자. 이용도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이곳 저곳으로 초청을 받아가는 곳마다 성황이었다. 평양, 황해도 신천 등지에서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원산지방에서 수근거림이 시작됐다. 자기네 구역이나 지키지 왜 여기저기를 다니느냐, 자기 교파나 지킬 것이지 왜 장로교회를 찾아 다니느냐. 시비는 인사 이동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용도 목사는 주일학교 교육의 천재이다. 주일학교 연합회 사무실, 크고 넓은 교회 안에 가득한 신자들을 향하여 예수를 크게 증거하던 이용도는 연합회 사무실 조그마한 책상 앞에 앉았다. 한직으로 몰아 넣어 숨통을 조이겠다는 인사방침이었는데 이용도에게 날개를 달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주일학교 연합회에서도 그에게 인기가 집중되고, 미국 유학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흐지부지 되었다. 이용도의 영적 상황이 변했다. 주일학교 연합회 간사에서 전국 순회 부흥사가 되었다. 가능하면 감리교단 안에서만 활동하고 상회와 마찰, 동역자들과의 갈등도 없이 하려고 애를 썼다. 조심하면 할수록 이용도 찬성과 반대의 의견들이 팽팽했다. 집회요청이 높아지고 반대하는 고함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러나 1931년 무렵에는 평양, 재령, 경남 거창, 간도 용정, 함남, 은률, 선천, 서울 아현, 경남 통영, 사천, 충북 진천, 서울 삼청동, 종암 전도관(지금의 서울중앙교회) 개성, 화천 등 헤아릴 수 없는 곳곳에서 이용도는 쓰임을 받았다. 인기충천이었다. 이용도는 바울이야, 아니야 세례요한이야, 사람이 아니야, 성신이야, 예수의 그림자야, 더 하면 예수의 그 모습이야로 까지 발전할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함부로 말을 했다.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1930년대의 한국교회는 크게 일어났다. 1907년 길선주 목사의 평양부흥, 1919년 민족자결의 독립만세, 1930년대의 이용도 부흥은 한국교회는 물론 민족의 기운이 다시 솟아오르는 듯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용도 이야기가 화제로 등장했었다. 1931년도는 이용도 인생의 전성기였다. 이용도는 설교를 어찌나 빨리 하는지 어떤 속기사도 그의 설교를 다 받아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더구나 열정적인 설교, 그것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동안, 그의 목은 잠겼다. 그는 더구나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을 때는 주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는다고 곧 바로 통역을 내세웠다. 1931년 2월 28일 재령교회의 지역예배서도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신자들, 이용도는 통역을 세웠다. `나는 말을 할 수 없노라.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설교는 나의 중심에 가득 서리어 있노라. 중심에 있어 나를 괴롭게 하노라. 나는 말을 할 수 없어 오직 눈물을 흘리노라, 이 눈물은 오늘의 나의 설교로다. 나는 중심에 있는 말을 다 할 수 없어 전신으로 힘을 모아 쥐어 손을 드노라. 들은 손이 곧 나의 설교로다. 나는 말할 수 없으며 엎드려 기도하노라. 이는 곧 나의 설교로다. 나의 등에서 흐르는 땀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진실한 설교로다. 보라! 말이 없는 예수를! 그러나 그 말 없는 위대한 설교를 들으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린 피땀과 더운 눈물은 모든 인간의 영에 호소하는 예수의 진실한 설교로다. 골고다에서 지고 있는 그 십자가는 예수의 설교이니 곧 모든 인간에게 외치는 하나님의 설교로다. 가시관을 쓰고 흘리는 이마의 피와 땀은 예수의 진실한 설교로다.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의 영에 외치는 설교로다. 이 설교를 듣고도 감격이 없는 자들이 어찌 나의 설교에 감동이 있으랴! 1931년 2월이 가기 전에 재령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참말 그는 사람이 아니야. 그는 성자야. 그는 성신이야. 그는 예수야….' 야단났다. 음모가 보인다. 이용도가 죽게 되었구나. 이 말이 회자되는 그 출발점부터 이용도는 자기 관리에 들어갔어야 했다. 진심이든지 아니든지 이용도 주변(측근)에서는 이용도 관리가 서툴렀다. 그 자신도 낭만에 가까운 감상, 그리고 꾸밈을 모르는 진실, 그는 악극(연주 등)에도 자질이 있고 연출력이 있었다는데 왜 음모를 감지하지 못했을까. 그에게 먹여 죽일 독약이 준비되고 있는 신자들, 교역자들, 책임 없는 주둥이들이 입질을 해대는 그것을 어찌 몰랐을까. 이용도가 여덟 살, 어린 거지에게 자기 두루마기, 속옷, 버선 등까지 입혀 주고 자기 방에 데려다 같이 자고 떡국 사먹이면서 내가 너의 어려움을 모르고 있었다니 이래도 내가 죄인이 아니랄 수 있느냐고 탄식했다는 일화를 우리는 안다. 이용도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사람의 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징조들로 보려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을 정치적 이해력으로 보지 않으려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가 너무 많았다. 또 다시 말하면 비둘기 같은 순수와 뱀 같은 지혜의 균형을 감당키 어려운 빈틈이었다. 그가 꽃 같은 나이 (꽃 같은 이라는 여성어 수사법을 쓰는 것은 그는 이제 겨우 2년 차 부흥사요 막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에 가을 서리를 맞보게 되었다. 위기는 다가오고 재령교회 집회 후 만주 용정에 다녀온 이용도는 평양 남문교회 강단에 섰다. 이용도의 설교는 인간의 죄악을 질타하고, 교회가 온 몸으로 예수를 섬기지 않는다 하여 사정없이 꾸짖고 차츰 목회자들의 무성의한 자세, 즉 능력을 구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자 본연의 모습으로 신자들 앞에 서지 못하는 부분을 추궁하였다. 이 부분들은 목사의 자기 자책이 심하게 나타날 때 동역자들은 오해하는 것이다. 재령에서 너무나 큰 감동을 일으킨 후 이용도는 차별화 된 목사, 천사의 단계를 뛰어 넘는 성자로 추앙하는 한 무리의 신자들 그룹이 형성되면서 빈틈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양에 다시 나타난 이용도, 이용도는 무교회주의자라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당시 일본경찰이 김교신의 `성서조선' 독자 한 사람을 1개 사단의 군대보다 무서워했다는데 이용도 목사도 `성서조선'을 구독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성서조선 독자들은 정통교회의 파괴자로 여겼다. 일본 고등계 형사들만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무서워 한 게 아니고 장·감·성(장로회·감리회·성결회) 교회들도 무서워했고 문둥이만큼 거북해 했었다. 이용도 목사가 설교하는 평양 남문밖교회, 당대의 (큰)거물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평양의 정치력이 있는 목사들 7,8명이 이용도 설교에서 빈틈을 찾아내고자 방문하여 예배에 참석했다. 이용도 목사는 요한복음 6장 1절에서 59절까지를 읽고 난 후, 대뜸 `토마스 목사의 피와 살을 먹은 평양성아! 네가 언제까지 의인의 피를 요구하며 얼마나 더 많은 의인의 피를 요구하느냐 하는 말에 이르러 온 성도들이 통곡을 한다. 설교에서 책을 잡으려고 했던 목사들이 모두 자복, 회계, 통곡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강한 영적 현상들이 나타났다. 집회하다가 쫓겨난 이용도  서울 아현성결교회 부흥회다. 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인데 10월 1일 밤, 집회 도중 이용도 목사는 강단에서 쫓겨났다. 이 대목은 이용도가 친구 이호빈 목사에게 보낸 편지 한 대목을 인용한다.  ‘형님… 한국서 가장 성스럽고 은혜가 깊다고 자랑하는 그들의 본부! 아현성결교회! 학원, 선생, 학생들(당시 경성신학교 현 서울신학대학과 교수와 신학생들을 지칭하는 것 같음)과 함께 은혜 받던 그곳에서 밤중에 그 교회 전도사에게 축출 당하여 책보 끼고 무악산 허리를 타고 송림으로 나는 들어갔으니 은근히 주의 품이 더 그리웠습니다. -후략-’  이용도의 한계, 한국 기독교의 한계가 나타났다. 이용도 목사는 지금도 그 때 그 자리에 있는 아현성결교회(충정로 전철역)에서 떠밀려 쫓겨났다. 무악산은 무악재를 말하는데 무악재 소나무 아래서 코앞에 그의 집(현저동)이 있으니 처자식이 있는 따스한 방보다 소나무 숲에서 가을 찬바람을 맞으며 밤을 새우는 이용도 목사를 우리는 상상해 본다. 죽음이 가까이 있구나  이용도 목사에게 핍박의 칼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작살을 한 번 맞았으니 두 번, 세 번, 결국은 그가 쓰러질 때까지 피를 본 적대자들은 숨쉴 틈을 주지 않을 것이다.  아현성결교회는 신자들이 문제되었던 것보다는 순수하고 총명한 신학생들이 이용도의 강력한 말씀 호소에 회개와 통곡이 심하여 책임자들이 이를 수습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이는 묘한 간증인데 신학과나 교회가 통제를 할 수 없으니 위기의 원인 이용도를 추방해 버린 것이다.  전국교회들이 들끓고 있었다. 황해노회가 ①이용도는 재령교회를 훼방한다. ②여신도들과 서신거래를 자주 한다. ③불을 끄고 기도를 한다. ④교역자를 공격한다. ⑤`성서조선'을 선전한다. ⑥무교회주의자요.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이다.  1932년, 반대가 심하지만 이용도 집회도 같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용도는 자기를 향한 한국교회의 집요한 목조름을 모르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이용도를 감당할만한 힘이 없었다. 이용도에게도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는 예수의 ‘때’에 대한 지혜수가 없어 보였다. 죽이려는 자와 죽어야 하는 자의 긴장감도 없는 무대책의 날들이 흐르고 있었다.  이용도 목사의 부인이 다른 남편을 얻어 도망질을 했다느니, 언제나 성직에 있는 자에게 취약 부분인 이성문제로 이용도를 괴롭혔다. 여인들과 불끄고 기도하고 한 방에서 집단혼숙을 했다. 여자 문제와 무교회신앙으로 교회를 파괴하려는 자라는 치사율 100%의 극약이 이용도의 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용도 목사는 더 이상 집요하게 싸울 의사가 없었다. 재주부려 빠져나갈 위기는 아니라고 보았다. 죽이겠다면 죽어주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평양노회 결의사항 ①이용도는 거짓말쟁이다. ②이용도는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③이용도는 파괴주의이다. ④이용도는 질서를 혼란케 하는 자이다. ⑤이용도를 세우면 본 교회 담임 목사가 푸대접을 받아 살 길이 막막해 진다. (이 부분은 다시 읽어보자고 여기에 싣는다.)  이용도 목사 운명하다. 1933년 10월 2일 오후 5시. 이용도 목사는 친지 친구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떠나다.  한국교회를 위하여 조용히 떠나가시다.

〈편집위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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