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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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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두레마을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속에 있는 속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하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 전서 : 3장 15절)
<두레마을>이라 할때의 '두레' 말은 오랜 조상적부터 쓰여오던 순수우리말입니다. '두레'란말의 원래 의미는 더블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옛날 한 마을이 이루어 지면 마을 한 가운데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경우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우물의 바가지를 '두레박'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 사는 공동체의 경계선에서 원래 두레라는 말이 나왔는가 하면 여럿이 둥글게 앉아 쓰는 상을 두레상이라 하였습니다. 농촌에서는 농사철이면 여러 집이 그룹을 짜서 함께 품앗이를 하며 농업노동의 고달품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럴 경우를 두렛품앗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농촌에서 여인네들이 여름밤에 길쌈을 할 때면 혼자서 일하기에는 잠이 오고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마당 한 가운데 모깃불을 피워두고 조를 이루어 함께 길쌈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새벽녘에 공평이 나누어 자기 몫을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두레길쌈이라 일컬었습니다. 이땅에 살았던 우리조상들은 이렇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레전통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흐트러지게 되면서 두레정신을 더욱 흐트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두레전통은 주로 선민들의 삶속에서 면면히 흘러 오다가 일제시대에 크게 서리를 맞아 큰 타격을 받게되었습니다. 이유인즉 농민사회에서 두레운동이 강한 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농민들 사이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독립운동을 조사하던 일본 경찰은 그 운동의 출발지가 두레운동에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일제시대에 두레운동은 몹시 위축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방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레란 이름조차 낮설은 말이 되게 되었습니다.
내가 공동체 마을을 설립하겠다는 마음을 처음 가지게 된 때는 74년 서울 구치소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74년 1월17일에 체포되었던 나는 처음엔 서대문 구치소의 독방에 수감되었습니다. 0.7평의 방이어서 보건체조 조차 할 수 없는 좁은 방이었습니다. 그 방에서 모처럼 성경을 깊이 읽으며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일반수 8명이 있는 방으로 옮겨졌습니다.
옮겨간 방에는 1.7평의 방에 나까지 9명이 수감되었습니다. 방이 너무 좁아 잠 잘때가 문제였습니다. 앉기만 해도 한방 가득한 터에 밤에 제대로 누울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없이 한쪽 어깨만 바닥에 붙이고 자는 칼잠을 자야 했습니다. 자다다 무슨 일로 어깨가 빠지게 되면 금방 자리가 없어지는 터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좁은 방에서 나를 더욱 못견디게 하였던 것은 방 안에서 일어나는 빈부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있는 사람들은 감옥안에서도 끼니마다 불고기 백반을 사들여 먹었습니다만 가난한 죄수들은 관에서 지급하는 콩 보리밥만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콩밥도 꼭꼭 씹어 먹으면 구수하고 영양가도 괜찮은 터인데 바로 앞에서 고기를 먹고 있는데 자기는 콩밥을 먹고 있는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자연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없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이거 징역와서도 벨이 상해 못견디겠구먼 어느 눔은 인삼 묵고 언 눔은 배추 뿌리 묵는게 아이가”
이렇게 심술을 터트리면 부자 쪽에서도 가만 있지를 않고 응수했습니다.
“왜 억울 혀? 억울하면 시켜 먹어 니 앞으로 불고기 백반 한 상 시켜줘?”
이렇게 되면 식사하다가 싸움판이 벌어졌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하면 서로 도우며 나누며 사는 공동체로 방 분위기를 바꾸어 볼까를 생각하였습니다. 하루는 분위기를 살펴 동료 죄수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우리 이 방을 공동체 방으로 만들어 봅시다. 통장의 돈도 치약도, 비누도 무엇이든지 함께 쓰는 공동체를 이뤄봅시다.”
내가 감방동료들에게 공동체를 이루자고 처음 제안하였을 때에는 반발이 심하였습니다. 그 방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눈을 흘기며 반박하였습니다.
“당신 혹시 피양서 온 사람 아녀?, 그기 빨갱이 사상인데...”
그러는 그에게 나는 성심껏 답하며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나는 교회 성직자입니다. 반공정신에 대하여는 확실합니다. 진정한 공동체 정신은 기독교의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좁은 방에서 니것 내것 따지며 다투고 사느니 한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들이라 생각하고 함께 가지고 함께 나누며 사는 것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설득하려 들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부하며 당신이 기독교 성직자이거나 말거나 말하는 내용은 공산당이 하는 소리에 틀림없으니까 한번만 그런 소리를 더하면 간첩신고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때를 맞추어 좋은 일이 생겨 공동체를 이루어 보자는 나의 제안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름아니라 19세난 젊은이가 그 방에 함께 수감되어 있었는데 약간 저능에 속하는 불쌍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초겨울 추위에 몸단속을 잘못하여 발에 동상이 심하였습니다. 특히 오른편 발이 너무 상하여 무릎 아래를 절단하여야 하는 처지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측은하여 입고 있던 솜옷을 벗어 입히고 내복과 양말등 갈아 주며 하루 세 번씩 상한 발에 마사지를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젊은이에게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두 발을 가지고도 못살아서 감옥까지 왔는데 한발을 잃으면 어떻하겠습니까? 하고 기도 드린지 8일만에 상한 부위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거뭇거뭇 죽어가던 살결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 완연히 나타났습니다.
나는 감방 동료의 동상에 걸린 상처가 회복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이 되어 그를 병실로 가서 진단케 하였습니다. 병실에 다녀 온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김선생님 땜에 내 다리가 살았데요. 다리 안짤라도 된대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훔치자 감방안의 다른 동료들도 함께 기뻐하며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감방 안의 분위기가 현저하게 달라졌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드디어 공동체를 시작할 수 있게 되기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통장의 돈이며 치약이며 비누며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함께 사용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허구한 날 음담패설이나 나누고 도둑질 하거나 사기치는 요령들을 나누던 사람들이 가족 걱정도 하고 장래 걱정도 하며 서로가 가슴을 열고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중에 한 명이 내게 성경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성경 중에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골라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성경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그들은 성경 공부로 수준을 높여 가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자 나는 그들과 예배를 드리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을 지나는 사이에 나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확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삶이 사람을 변화 시키는 힘이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석방이 되어 선교지에 복귀하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 선교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석방되기 전에 앞으로 세우게 될 공동체 마을의 이름으로 [두레마을]이란 이름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조상때부터의 공동체 정신과 성경의 공동체적 삶을 접합시켰을 때에 태어나는 공동체의 모습으로서 [두레마을 공동체]를 그때부터 마음속에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감옥에서 공동체 마을을 세워 공동체선교에 전력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두레마을>이란 이름까지 작명(作名)하여 출옥하긴 하였으나 막상 <두레마을>을 시작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되게 되었을 때에 교회가 철거민들을 조직하여 경기도 화성군의 남양만 간척지로 집단귀농하였습니다.
간척지에 도착한 우리는 50세대 단위로 한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정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우리들의 발상이 북한의 집단농장과 같은 발상이라하여 공동체 마을을 이루는 계획은 허락되지 않고 남양만에 입주하는 1200세대의 15개 부락에 골고루 흩어져 정착케 되었습니다. 그때가 1976년이었습니다. 공동체 마을을 세우는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우선 제한적으로나마 공동체를 실현하여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열두 가정이 한 조를 이루어 벼농사를 두레형식으로 공동경작키로 하고 먼저 못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열두 가정이 한 못자리를 만들게 되면 하루에 한가정만 못자리를 돌보고 나머지 11가정은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농기구도 12가정이 돈을 모아 사게 되면 경제적으로 큰 이익이 됩니다. 이런 면이 공동체가 지니는 장점이라 생각되어 먼저 못자리 만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못자리에 자주 물이 마르고 잡초가 자라도 뽑으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논에 물이 마르는 일에 대하여 서로 책임을 미루기만 하고 못자리에 잡초가 무성하여도 서로 모르는 척 하고 다른 사람이 뽑기만 기다렸지 자신이 해결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나는 다시 공동못자리를 12등분으로 가르고서 각자 자기 못자리를 직접관리하게 하였더니 잡초가 3일안에 깨끗이 정리되고 논에 물이 마르는 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때 나는 공동체란 것이 이상대로만 쉽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레마을은 신앙과 생활과 산업의 삼위일체 신앙을 추구합니다. 바른 신앙에서 건전한 생활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건전한 산업이 이루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 온 지 한 세기를 지나며 교회가 기틀이 잡혀지고 교인들의 숫자가 괄목할만하게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적 신앙,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점입니다.
지난 백년간에 세계는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갈등과 투쟁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다행히 사회주의 체제가 판정패를 당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승리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주의에 장점이 있듯이 공산주의에도 장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자본주의의 장점과 공산주의의 장점을 하나로 합쳐서 제3의 대안을 마련한다면 어떤 내용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만들어 낸 대안(代案)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는 그간에 성경을 너무 영적인 책으로만 읽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통하여 얻게 되는 첫째는 영혼의 구원이요, 신령한 세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영적인 면으로만 국한시켜 읽으면 성경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치는 영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이란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 구원에 대한 길잡이인 동시에 현실 문제를 바르게 풀어나가는 대안을 제시하여 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바른 경제, 바른 교육, 바른 정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며 바람직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공동체인 두레마을을 일컬어 대안공동체(代案共同?.Alternative Community)라 부릅니다. 대안공동체로서의 두레마을은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대하여 하나의 기독교적 대안으로서 제시하려는 공동체운동이라 하겠습니다.
두레교회 김진홍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속에 있는 속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하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 전서 : 3장 15절)
<두레마을>이라 할때의 '두레' 말은 오랜 조상적부터 쓰여오던 순수우리말입니다. '두레'란말의 원래 의미는 더블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옛날 한 마을이 이루어 지면 마을 한 가운데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경우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우물의 바가지를 '두레박'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 사는 공동체의 경계선에서 원래 두레라는 말이 나왔는가 하면 여럿이 둥글게 앉아 쓰는 상을 두레상이라 하였습니다. 농촌에서는 농사철이면 여러 집이 그룹을 짜서 함께 품앗이를 하며 농업노동의 고달품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럴 경우를 두렛품앗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농촌에서 여인네들이 여름밤에 길쌈을 할 때면 혼자서 일하기에는 잠이 오고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마당 한 가운데 모깃불을 피워두고 조를 이루어 함께 길쌈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새벽녘에 공평이 나누어 자기 몫을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두레길쌈이라 일컬었습니다. 이땅에 살았던 우리조상들은 이렇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레전통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흐트러지게 되면서 두레정신을 더욱 흐트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두레전통은 주로 선민들의 삶속에서 면면히 흘러 오다가 일제시대에 크게 서리를 맞아 큰 타격을 받게되었습니다. 이유인즉 농민사회에서 두레운동이 강한 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농민들 사이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독립운동을 조사하던 일본 경찰은 그 운동의 출발지가 두레운동에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일제시대에 두레운동은 몹시 위축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방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레란 이름조차 낮설은 말이 되게 되었습니다.
내가 공동체 마을을 설립하겠다는 마음을 처음 가지게 된 때는 74년 서울 구치소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74년 1월17일에 체포되었던 나는 처음엔 서대문 구치소의 독방에 수감되었습니다. 0.7평의 방이어서 보건체조 조차 할 수 없는 좁은 방이었습니다. 그 방에서 모처럼 성경을 깊이 읽으며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일반수 8명이 있는 방으로 옮겨졌습니다.
옮겨간 방에는 1.7평의 방에 나까지 9명이 수감되었습니다. 방이 너무 좁아 잠 잘때가 문제였습니다. 앉기만 해도 한방 가득한 터에 밤에 제대로 누울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없이 한쪽 어깨만 바닥에 붙이고 자는 칼잠을 자야 했습니다. 자다다 무슨 일로 어깨가 빠지게 되면 금방 자리가 없어지는 터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좁은 방에서 나를 더욱 못견디게 하였던 것은 방 안에서 일어나는 빈부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있는 사람들은 감옥안에서도 끼니마다 불고기 백반을 사들여 먹었습니다만 가난한 죄수들은 관에서 지급하는 콩 보리밥만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콩밥도 꼭꼭 씹어 먹으면 구수하고 영양가도 괜찮은 터인데 바로 앞에서 고기를 먹고 있는데 자기는 콩밥을 먹고 있는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자연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없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이거 징역와서도 벨이 상해 못견디겠구먼 어느 눔은 인삼 묵고 언 눔은 배추 뿌리 묵는게 아이가”
이렇게 심술을 터트리면 부자 쪽에서도 가만 있지를 않고 응수했습니다.
“왜 억울 혀? 억울하면 시켜 먹어 니 앞으로 불고기 백반 한 상 시켜줘?”
이렇게 되면 식사하다가 싸움판이 벌어졌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하면 서로 도우며 나누며 사는 공동체로 방 분위기를 바꾸어 볼까를 생각하였습니다. 하루는 분위기를 살펴 동료 죄수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우리 이 방을 공동체 방으로 만들어 봅시다. 통장의 돈도 치약도, 비누도 무엇이든지 함께 쓰는 공동체를 이뤄봅시다.”
내가 감방동료들에게 공동체를 이루자고 처음 제안하였을 때에는 반발이 심하였습니다. 그 방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눈을 흘기며 반박하였습니다.
“당신 혹시 피양서 온 사람 아녀?, 그기 빨갱이 사상인데...”
그러는 그에게 나는 성심껏 답하며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나는 교회 성직자입니다. 반공정신에 대하여는 확실합니다. 진정한 공동체 정신은 기독교의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좁은 방에서 니것 내것 따지며 다투고 사느니 한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들이라 생각하고 함께 가지고 함께 나누며 사는 것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설득하려 들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부하며 당신이 기독교 성직자이거나 말거나 말하는 내용은 공산당이 하는 소리에 틀림없으니까 한번만 그런 소리를 더하면 간첩신고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때를 맞추어 좋은 일이 생겨 공동체를 이루어 보자는 나의 제안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름아니라 19세난 젊은이가 그 방에 함께 수감되어 있었는데 약간 저능에 속하는 불쌍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초겨울 추위에 몸단속을 잘못하여 발에 동상이 심하였습니다. 특히 오른편 발이 너무 상하여 무릎 아래를 절단하여야 하는 처지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측은하여 입고 있던 솜옷을 벗어 입히고 내복과 양말등 갈아 주며 하루 세 번씩 상한 발에 마사지를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젊은이에게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두 발을 가지고도 못살아서 감옥까지 왔는데 한발을 잃으면 어떻하겠습니까? 하고 기도 드린지 8일만에 상한 부위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거뭇거뭇 죽어가던 살결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 완연히 나타났습니다.
나는 감방 동료의 동상에 걸린 상처가 회복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이 되어 그를 병실로 가서 진단케 하였습니다. 병실에 다녀 온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김선생님 땜에 내 다리가 살았데요. 다리 안짤라도 된대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훔치자 감방안의 다른 동료들도 함께 기뻐하며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감방 안의 분위기가 현저하게 달라졌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드디어 공동체를 시작할 수 있게 되기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통장의 돈이며 치약이며 비누며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함께 사용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허구한 날 음담패설이나 나누고 도둑질 하거나 사기치는 요령들을 나누던 사람들이 가족 걱정도 하고 장래 걱정도 하며 서로가 가슴을 열고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중에 한 명이 내게 성경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성경 중에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골라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성경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그들은 성경 공부로 수준을 높여 가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자 나는 그들과 예배를 드리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을 지나는 사이에 나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확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삶이 사람을 변화 시키는 힘이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석방이 되어 선교지에 복귀하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 선교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석방되기 전에 앞으로 세우게 될 공동체 마을의 이름으로 [두레마을]이란 이름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조상때부터의 공동체 정신과 성경의 공동체적 삶을 접합시켰을 때에 태어나는 공동체의 모습으로서 [두레마을 공동체]를 그때부터 마음속에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감옥에서 공동체 마을을 세워 공동체선교에 전력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두레마을>이란 이름까지 작명(作名)하여 출옥하긴 하였으나 막상 <두레마을>을 시작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되게 되었을 때에 교회가 철거민들을 조직하여 경기도 화성군의 남양만 간척지로 집단귀농하였습니다.
간척지에 도착한 우리는 50세대 단위로 한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정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우리들의 발상이 북한의 집단농장과 같은 발상이라하여 공동체 마을을 이루는 계획은 허락되지 않고 남양만에 입주하는 1200세대의 15개 부락에 골고루 흩어져 정착케 되었습니다. 그때가 1976년이었습니다. 공동체 마을을 세우는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우선 제한적으로나마 공동체를 실현하여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열두 가정이 한 조를 이루어 벼농사를 두레형식으로 공동경작키로 하고 먼저 못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열두 가정이 한 못자리를 만들게 되면 하루에 한가정만 못자리를 돌보고 나머지 11가정은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농기구도 12가정이 돈을 모아 사게 되면 경제적으로 큰 이익이 됩니다. 이런 면이 공동체가 지니는 장점이라 생각되어 먼저 못자리 만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못자리에 자주 물이 마르고 잡초가 자라도 뽑으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논에 물이 마르는 일에 대하여 서로 책임을 미루기만 하고 못자리에 잡초가 무성하여도 서로 모르는 척 하고 다른 사람이 뽑기만 기다렸지 자신이 해결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나는 다시 공동못자리를 12등분으로 가르고서 각자 자기 못자리를 직접관리하게 하였더니 잡초가 3일안에 깨끗이 정리되고 논에 물이 마르는 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때 나는 공동체란 것이 이상대로만 쉽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레마을은 신앙과 생활과 산업의 삼위일체 신앙을 추구합니다. 바른 신앙에서 건전한 생활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건전한 산업이 이루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 온 지 한 세기를 지나며 교회가 기틀이 잡혀지고 교인들의 숫자가 괄목할만하게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적 신앙,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점입니다.
지난 백년간에 세계는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갈등과 투쟁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다행히 사회주의 체제가 판정패를 당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승리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주의에 장점이 있듯이 공산주의에도 장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자본주의의 장점과 공산주의의 장점을 하나로 합쳐서 제3의 대안을 마련한다면 어떤 내용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만들어 낸 대안(代案)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는 그간에 성경을 너무 영적인 책으로만 읽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통하여 얻게 되는 첫째는 영혼의 구원이요, 신령한 세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영적인 면으로만 국한시켜 읽으면 성경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치는 영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이란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 구원에 대한 길잡이인 동시에 현실 문제를 바르게 풀어나가는 대안을 제시하여 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바른 경제, 바른 교육, 바른 정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며 바람직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공동체인 두레마을을 일컬어 대안공동체(代案共同?.Alternative Community)라 부릅니다. 대안공동체로서의 두레마을은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대하여 하나의 기독교적 대안으로서 제시하려는 공동체운동이라 하겠습니다.
두레교회 김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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