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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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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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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간이 죄를 짓고 어덴에서 쫓겨났다. 그후 하나님은 에덴을 두루도는 화염검을 든 천사들이 타락한 인간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런 하나님의 조치는 인간보고 너희들 밖에 나가 벌좀 서고 그 다음 잘 행위(동)한 후 이곳에 들어 오너라' 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나가 죽으라는 것이다. 에덴에서 살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 지은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은 죄의 삯으로 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인간이 이 땅에서 기다려야 할 것은 죽음(망하는 것만 기다려야 합니다)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성공하겠다든지 살아남겠다는 것은 어처구는 없는 짓이다.
처음 인간의 죄란 스스로 신이 되어 살아남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망을 낳았고, 이 욕망은 살아남기 위한 행위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죄라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인간의 첫째 아들(땅에서 난 첫째아들)가인의 제사 행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 이유 역시 이런 맥락에서인 것이다.
이런 인간을 염두 해두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는 인간들에게 희망이란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분 외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안식일과 각종 절기와 제사를 통해 희생되는 어린양을 제시함) 율법이 보여 준 것은 잘 지키면 에덴에 다시 넣어 줄께가 아니라, 인간들아 어느 누구도 살고자 하는 그 욕망에서 발생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 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조치였다. 율법은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 살 가치 없는 존재임을 재확인하게 하는 장치였고, 한편으로는 제사를 통해 죽어간 어린양을 보여줌으로 복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죄관이 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난 후 인간들은 자기 조직과 집단에 맞는 선과 악의 기준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는 악은 멀리하고 선을 더 확보해 나가는 식의 행위를 해갔던 것이다. 이것이 윤리이고 도덕이며 종교...등에서 나타났다. 왜 그렇게 한 것인가? 인간 쪽에서 행한 선을 확보함으로서 자기 존재의 영원성이 보존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였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라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행위를 하고 살아가고 있기에 그 상태가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그 어떤 구석에도 발생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땅에서 본능적으로 살려는 욕망으로 행위를 하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 장자, 맡물(십일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부활로 증거하셨다. 곧 그 분의 대신 죽으심(십자가는 우리가 저렇게 저주 받아야 함을 보여주는 공간이며,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은 죄삯의 지불이 되었다.)만으로 구원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 것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라"는 말씀은 조직과 사회가 말하는 죄를 안지었으면 회개 할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오늘 하루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조직과 사회가 의로 간주하려는 모두가 다 저주 받아야할 꺼리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누가 이 저주에서 벗어 날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있다면 그는 하늘의 긍휼을 입은 자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 오신 예수님에 의해 발생된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가 신자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38-39) 오늘도 이 믿음를 가진 자를 만나고 싶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 지은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은 죄의 삯으로 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인간이 이 땅에서 기다려야 할 것은 죽음(망하는 것만 기다려야 합니다)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성공하겠다든지 살아남겠다는 것은 어처구는 없는 짓이다.
처음 인간의 죄란 스스로 신이 되어 살아남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망을 낳았고, 이 욕망은 살아남기 위한 행위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죄라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인간의 첫째 아들(땅에서 난 첫째아들)가인의 제사 행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 이유 역시 이런 맥락에서인 것이다.
이런 인간을 염두 해두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는 인간들에게 희망이란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분 외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안식일과 각종 절기와 제사를 통해 희생되는 어린양을 제시함) 율법이 보여 준 것은 잘 지키면 에덴에 다시 넣어 줄께가 아니라, 인간들아 어느 누구도 살고자 하는 그 욕망에서 발생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 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조치였다. 율법은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 살 가치 없는 존재임을 재확인하게 하는 장치였고, 한편으로는 제사를 통해 죽어간 어린양을 보여줌으로 복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죄관이 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난 후 인간들은 자기 조직과 집단에 맞는 선과 악의 기준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는 악은 멀리하고 선을 더 확보해 나가는 식의 행위를 해갔던 것이다. 이것이 윤리이고 도덕이며 종교...등에서 나타났다. 왜 그렇게 한 것인가? 인간 쪽에서 행한 선을 확보함으로서 자기 존재의 영원성이 보존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였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라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행위를 하고 살아가고 있기에 그 상태가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그 어떤 구석에도 발생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땅에서 본능적으로 살려는 욕망으로 행위를 하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 장자, 맡물(십일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부활로 증거하셨다. 곧 그 분의 대신 죽으심(십자가는 우리가 저렇게 저주 받아야 함을 보여주는 공간이며,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은 죄삯의 지불이 되었다.)만으로 구원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 것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라"는 말씀은 조직과 사회가 말하는 죄를 안지었으면 회개 할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오늘 하루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조직과 사회가 의로 간주하려는 모두가 다 저주 받아야할 꺼리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누가 이 저주에서 벗어 날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있다면 그는 하늘의 긍휼을 입은 자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 오신 예수님에 의해 발생된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가 신자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38-39) 오늘도 이 믿음를 가진 자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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