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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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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kidok.co.kr/PaperHTM/1328/14859.asp
기독신문 2001/1/10 1328호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⑨ 주일과 주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일로부터 잠시 숨을 돌리게 하시려고 안식일법을 제정하셨다.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23:12).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인류에게는 여러 가지 나쁜 습성이 나타났는데, 그 습성들 가운데 하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적절한 선에서 절제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에 한번 몰두하면 일중독증에 빠지고, 공부에 몰두하면 공부벌레가 되어 버린다. 만일 사람이 일이나 공부가 재미있고 좋다고 해서 쉬지 않고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이나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기는커녕 병들어서 마침내는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일을 중단하고 쉴 것을 명령하셨다. 출애굽기 20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친히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신 것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도 쉬어야 한다는 강력한 명령을 주셨다.
그런데 진정한 쉼은 단지 노동을 중단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육체적인 노동을 중단한다 하더라도 영혼이 편안하지 않으면 쉼을 누릴 수 없다. 따라서 진정한 안식이 이루어지려면 영혼도 쉬어야 한다. 영혼이 쉰다는 것은 영혼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은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고 병을 얻게 된다. 영혼이 병 들면 육체도 병이 드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러면 영혼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말하기 전에 바울의 인간관을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바울은 인간을 속사람(롬7:22)과 겉사람(고후4:16)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속사람이란 대체로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의 세계에 비견될 수 있는 영혼의 깊은 심연을 말하며, 겉사람은 프로이드가 말한 의식의 세계에 비견될 수 있는 의식, 이성, 생활의 차원을 말한다. 겉사람은 인간이 경험하고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세계인 반면에, 속사람은 실재하는 인간의 자아의 중심을 이루는 구성요소이면서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차원이다.
그런데 영혼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작업이 있어야 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속사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회상해야 한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들은 신분이 변화된 자들이다. 죄와 사망의 왕국 시민의 신분으로부터 의와 생명의 왕국의 시민의 신분으로 겉사람의 영역에 아직 죄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성도들을 흔들려고 하지만, 이 죄의 잔재는 속사람의 차원에서 일어난 죄로부터의 해방을 결코 흔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이 구원의 확신을 회상할 때 성도들의 영혼은 한없는 위로를 얻게 된다.
둘째로, 속사람의 차원에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우리들이 이제 세상에서 겉사람의 삶을 영위하다 보면 그 영혼에 죄의 때가 자꾸자꾸 덮이기 시작한다. 이 죄의 때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 때가 더욱 더 두껍게 영혼을 덮어 가다가 마침내는 각질화되어 영혼을 질식 상태로 빠뜨린다. 따라서 이 죄악의 때를 정기적으로 닦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영혼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혼에 묻은 때를 닦아내고 영혼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건강한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아 회개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 새롭게 무장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의 말씀을 받고 삶의 방향을 재점검하며, 성도들과 사랑과 위로 안에서 교제해야 한다. 이 일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회상과 적용이 있다. 구약시대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곧 출애굽사건으로 예표되었다. 따라서 신명기 5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7일째 되는 날 출애굽 사건을 기억할 것을 명령하셨다.
따라서 안식일 계명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20장11절을 유념하면서 육체적인 노동을 중단하고 쉬는 동시에 신명기 5장 15절을 유념하면서 그 쉬는 시간에 바로 출애굽사건으로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기념하는 일 곧 예배를 드려야 한다. 창조 사건에 근거하여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는 출애굽기의 명령과 출애굽 사건에 근거하여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는 신명기의 명령은 서로 상반되는 명령이 아니다. 두 명령을 종합할 때 비로소 육체와 영혼이 모두 숨을 돌릴 수 있다.
한편 구약성경은 오늘날의 토요일에 해당하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을 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안식일 대신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더욱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구약성경에 반복하여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반면에 주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 않는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명령보다는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명령을 준수하는 것이 더 타당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보다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안식의 상징들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예표하고 또한 이 사건에서 성취되기 시작한다. 안식일 계명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예표하는 것이며, 이 사건에 와서 원리적으로 성취된 후에 완전한 성취를 향하여 나아간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이르러서 안식의 의미는 밝혀지고 진정한 전인적인 안식의 터가 확립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영혼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거듭남으로써 안식을 얻는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이 모든 믿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서 장차 성도들의 몸도 부활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이 약속된다(고전15:20).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영혼과 육체의 실체적이고 전인적인 안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출애굽기 20장의 육체적 안식과 신명기 5장의 영적 안식의 명령을 모두 성취시키면서 진정한 전인적 안식의 터전을 마련하는 전환점을 이루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일어난 토요일 다음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나 구속사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정당하고 바른 관습이다. 성경에 주일을 안식일 대신 지키라는 명시적인 명령이 없는 것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안식 후 다음날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셨으며(요20:19), 사도 바울은 고린도(고전16:2)와 드로아(행20:7) 등지에서 주일에 집회를 가졌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초대교회가 주일에 예배드리는 전통을 시행했으며, 321년 콘스탄틴 황제의 선포를 거쳐 주일은 중세 기간 동안 확고부동한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는 날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주일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은 원칙적으로 중단되어야 한다. 주일에 공부하는 것도 잘못된 관습이다. 주일까지도 쉬지 못하고 노동과 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견실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정말로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희생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왜 일주일에 하루 정도 이것저것 다 손을 떼고 과감하게 쉬지 못하는가?
그러나 교회는 역사적으로 비상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부류의 일들은 주일에도 행하도록 허용해 왔다.
첫째로, 교회는 필요불급한 일들(opera necessitatis)을 행하도록 허용했다. 이 일들은 대체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인간이나 동물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행하는 일들을 가리킨다. 예수님 당시의 사례를 본다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인다든가(눅13:15), 우물에 빠졌을 경우에 끌어내는 일(눅14:5)이 허용되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군대에서 보초를 서는 일, 소방수가 주일에도 화재에 대비하여 대기하는 일, 의사나 간호사가 당직근무를 하는 일, 밭의 농작물이 재해 피해를 입었을 때 긴급하게 복구하는 일 등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긍휼을 베푸는 목적으로 행하는 일들(opera charitatis)을 안식일에도 행하도록 허용했다. 예수님은 안식일 예배 중인데도 불구하고 손마른 환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서 치료해 주셨다(막3:1-5). 오늘날에도 주일에 응급환자를 진료해 준다든지, 문병을 하거나 구제하는 행위들은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종교적인 일들(opera pietatis)을 주일에도 행하도록 허용해 왔다. 이 일들은 오늘날 특히 성직에 종사하는 목사나 교역자들에게 해당하는 일들이다. 성도들이 주일에 안식을 제대로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위하여 누군가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가 설교를 하지 않고 성도들이 영적인 안식을 누릴 수가 없으며, 교역자들이 집회를 위하여 바쁘고 세심하게 준비함이 없이 교회가 안식을 누릴 수가 없다. 교역자들은 주일에 다른 성도들이 제대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가장 바쁘게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일에 교회를 위하여 바쁘게 일하는 교역자들을 보고 안식일을 범한다고 비난해서는 안되며, 교역자들은 주일에 쉬지 못하고 일한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모든 율법은 제정 정신을 파악한 후에 그 정신의 지평 안에서 준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주의에 떨어지고 만다. 안식일 계명도 마찬가지다. 안식일은 인간의 영육간의 생명을 지나친 노동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긍휼과 배려에서 제정된 것이다. 우리는 이 계명 속에 담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그토록 우리를 깊이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 계명을 소중히 여기고 준수해야 한다.
이상원 박사swlee@chongshin.ac.kr<총신대신학대학원 교수·기독교윤리학>
01-01-03
기독신문 2001/1/10 1328호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⑨ 주일과 주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일로부터 잠시 숨을 돌리게 하시려고 안식일법을 제정하셨다.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23:12).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인류에게는 여러 가지 나쁜 습성이 나타났는데, 그 습성들 가운데 하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적절한 선에서 절제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에 한번 몰두하면 일중독증에 빠지고, 공부에 몰두하면 공부벌레가 되어 버린다. 만일 사람이 일이나 공부가 재미있고 좋다고 해서 쉬지 않고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이나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기는커녕 병들어서 마침내는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일을 중단하고 쉴 것을 명령하셨다. 출애굽기 20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친히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신 것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도 쉬어야 한다는 강력한 명령을 주셨다.
그런데 진정한 쉼은 단지 노동을 중단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육체적인 노동을 중단한다 하더라도 영혼이 편안하지 않으면 쉼을 누릴 수 없다. 따라서 진정한 안식이 이루어지려면 영혼도 쉬어야 한다. 영혼이 쉰다는 것은 영혼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은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고 병을 얻게 된다. 영혼이 병 들면 육체도 병이 드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러면 영혼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말하기 전에 바울의 인간관을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바울은 인간을 속사람(롬7:22)과 겉사람(고후4:16)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속사람이란 대체로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의 세계에 비견될 수 있는 영혼의 깊은 심연을 말하며, 겉사람은 프로이드가 말한 의식의 세계에 비견될 수 있는 의식, 이성, 생활의 차원을 말한다. 겉사람은 인간이 경험하고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세계인 반면에, 속사람은 실재하는 인간의 자아의 중심을 이루는 구성요소이면서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차원이다.
그런데 영혼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작업이 있어야 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속사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회상해야 한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들은 신분이 변화된 자들이다. 죄와 사망의 왕국 시민의 신분으로부터 의와 생명의 왕국의 시민의 신분으로 겉사람의 영역에 아직 죄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성도들을 흔들려고 하지만, 이 죄의 잔재는 속사람의 차원에서 일어난 죄로부터의 해방을 결코 흔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이 구원의 확신을 회상할 때 성도들의 영혼은 한없는 위로를 얻게 된다.
둘째로, 속사람의 차원에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우리들이 이제 세상에서 겉사람의 삶을 영위하다 보면 그 영혼에 죄의 때가 자꾸자꾸 덮이기 시작한다. 이 죄의 때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 때가 더욱 더 두껍게 영혼을 덮어 가다가 마침내는 각질화되어 영혼을 질식 상태로 빠뜨린다. 따라서 이 죄악의 때를 정기적으로 닦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영혼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혼에 묻은 때를 닦아내고 영혼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건강한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아 회개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 새롭게 무장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의 말씀을 받고 삶의 방향을 재점검하며, 성도들과 사랑과 위로 안에서 교제해야 한다. 이 일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회상과 적용이 있다. 구약시대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곧 출애굽사건으로 예표되었다. 따라서 신명기 5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7일째 되는 날 출애굽 사건을 기억할 것을 명령하셨다.
따라서 안식일 계명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20장11절을 유념하면서 육체적인 노동을 중단하고 쉬는 동시에 신명기 5장 15절을 유념하면서 그 쉬는 시간에 바로 출애굽사건으로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기념하는 일 곧 예배를 드려야 한다. 창조 사건에 근거하여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는 출애굽기의 명령과 출애굽 사건에 근거하여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는 신명기의 명령은 서로 상반되는 명령이 아니다. 두 명령을 종합할 때 비로소 육체와 영혼이 모두 숨을 돌릴 수 있다.
한편 구약성경은 오늘날의 토요일에 해당하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을 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안식일 대신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더욱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구약성경에 반복하여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반면에 주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 않는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명령보다는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명령을 준수하는 것이 더 타당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보다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안식의 상징들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예표하고 또한 이 사건에서 성취되기 시작한다. 안식일 계명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예표하는 것이며, 이 사건에 와서 원리적으로 성취된 후에 완전한 성취를 향하여 나아간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이르러서 안식의 의미는 밝혀지고 진정한 전인적인 안식의 터가 확립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영혼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거듭남으로써 안식을 얻는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이 모든 믿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서 장차 성도들의 몸도 부활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이 약속된다(고전15:20).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영혼과 육체의 실체적이고 전인적인 안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출애굽기 20장의 육체적 안식과 신명기 5장의 영적 안식의 명령을 모두 성취시키면서 진정한 전인적 안식의 터전을 마련하는 전환점을 이루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일어난 토요일 다음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나 구속사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정당하고 바른 관습이다. 성경에 주일을 안식일 대신 지키라는 명시적인 명령이 없는 것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안식 후 다음날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셨으며(요20:19), 사도 바울은 고린도(고전16:2)와 드로아(행20:7) 등지에서 주일에 집회를 가졌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초대교회가 주일에 예배드리는 전통을 시행했으며, 321년 콘스탄틴 황제의 선포를 거쳐 주일은 중세 기간 동안 확고부동한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는 날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주일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은 원칙적으로 중단되어야 한다. 주일에 공부하는 것도 잘못된 관습이다. 주일까지도 쉬지 못하고 노동과 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견실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정말로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희생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왜 일주일에 하루 정도 이것저것 다 손을 떼고 과감하게 쉬지 못하는가?
그러나 교회는 역사적으로 비상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부류의 일들은 주일에도 행하도록 허용해 왔다.
첫째로, 교회는 필요불급한 일들(opera necessitatis)을 행하도록 허용했다. 이 일들은 대체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인간이나 동물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행하는 일들을 가리킨다. 예수님 당시의 사례를 본다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인다든가(눅13:15), 우물에 빠졌을 경우에 끌어내는 일(눅14:5)이 허용되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군대에서 보초를 서는 일, 소방수가 주일에도 화재에 대비하여 대기하는 일, 의사나 간호사가 당직근무를 하는 일, 밭의 농작물이 재해 피해를 입었을 때 긴급하게 복구하는 일 등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긍휼을 베푸는 목적으로 행하는 일들(opera charitatis)을 안식일에도 행하도록 허용했다. 예수님은 안식일 예배 중인데도 불구하고 손마른 환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서 치료해 주셨다(막3:1-5). 오늘날에도 주일에 응급환자를 진료해 준다든지, 문병을 하거나 구제하는 행위들은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종교적인 일들(opera pietatis)을 주일에도 행하도록 허용해 왔다. 이 일들은 오늘날 특히 성직에 종사하는 목사나 교역자들에게 해당하는 일들이다. 성도들이 주일에 안식을 제대로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위하여 누군가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가 설교를 하지 않고 성도들이 영적인 안식을 누릴 수가 없으며, 교역자들이 집회를 위하여 바쁘고 세심하게 준비함이 없이 교회가 안식을 누릴 수가 없다. 교역자들은 주일에 다른 성도들이 제대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가장 바쁘게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일에 교회를 위하여 바쁘게 일하는 교역자들을 보고 안식일을 범한다고 비난해서는 안되며, 교역자들은 주일에 쉬지 못하고 일한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모든 율법은 제정 정신을 파악한 후에 그 정신의 지평 안에서 준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주의에 떨어지고 만다. 안식일 계명도 마찬가지다. 안식일은 인간의 영육간의 생명을 지나친 노동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긍휼과 배려에서 제정된 것이다. 우리는 이 계명 속에 담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그토록 우리를 깊이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 계명을 소중히 여기고 준수해야 한다.
이상원 박사swlee@chongshin.ac.kr<총신대신학대학원 교수·기독교윤리학>
0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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