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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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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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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그림을 직접 접해보지는 못했으나, 가끔 외신을 타고 들려오는 그의 그림 경매 소식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얼마 전에는 그의 그림 한 점이 무려 30억 원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광산 선교를 하는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잘 알려진 대로 평생에 단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다고 하니 가난한 그의 생활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림에 문외한인 나로서 그의 작품에 대해 감히 무어라 이야기할 개재는 아니나, 그의 그림 가운데 밝고 화려한 면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하기 어려울 듯 싶다. 고흐 자신의 '초상화'나 '헌 구두'에서는 삶의 고뇌가 깊이 녹아 있다. 그의 작품 속에 스며있는 이런 진솔한 삶의 무게가 그의 작품가치를 더 높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부(富)가 성공의 척도이며 노력의 결과를 당대에 걷어들여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들의 가치관으로는 그의 그림을 감상하기조차 죄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고흐의 작품이 이렇게 해를 거듭하면서 그 가치를 더해가고 있는데,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산다는 우리의 가치관은 한 세대를 뛰어 넘지 못한다.
하나님께 헌금을 하고도 그 결과를 내 눈으로 바로 보아야 한다. 이만큼 헌금을 했더니 이렇게 주시더라는 간증을 들을 때면 혹시 하나님을 대상으로 투자나 투기를 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런 우리의 마음 때문일까, 입만 열면 교회의 개혁을 외치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면서도 헌금문제는 언제나 예외다. 아니, 헌금문제는 초대교회를 뛰어 넘어 구약시대로 회귀(回歸)하고 있다.
구약시대의 헌금은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대하34:9, 14)이거나 많은 경우 십일조(창28:22, 레27:30, 말3:8-12)를 의미한다.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강조하신 십일조의 정신이 드디어 한국교회에 와서 그 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국교회에서 드리는 헌금에는 구약시대의 제사 냄새가 물신 풍긴다. "예물을 제단에 올려놓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매일 새벽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히9:12)셨으므로 다시는 우리가 피 흘리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도 왜 구약의 제사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려고 이렇게 애쓰고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물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구약 성경의 제의적 용어이겠지만 이제는 그 문자적 의미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헌금의 정신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초대교회다. 오늘과 같은 의미의 헌금은 초대교회에서 비롯되었다. 초대교회의 헌금은 연보(捐補; Collection, Offerings)의 개념에 가깝다. 현대교회의 태동을 보여주는 사도행전의 교회들(안디옥, 고린도, 갈라디아 등)은 기근으로 인해 곤궁에 처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거나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 부조(扶助)의 개념으로 헌금을 하기 시작하였다.(행11:27-30, 고전16:1-3 등)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변했으니 헌금에 대한 인식은 바뀔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정신만은 버려서는 안 된다. 초대교회에서 사용한 헌금의 다양한 명칭 속에서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수 있지 않은가 싶다. "연보" 개념의 로기아(고전16:1), "기쁨으로 드린다"는 의미의 하믈레스(고후8:2), "좋은 모금"을 의미하는 율로기아(고후9:5), 그리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코이노니아(고후9:13)의 의미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요즘 교회 헌금문제가 가끔 세상법정에까지 올라 우리의 얼굴을 뜨겁게 한다. 남편 몰래 아내가 한 헌금을 돌려달라는 "헌금 반환청구소송", 작정한 헌금을 빨리 내라고 교회가 교인을 상대로 제기한 "약정헌금 청구소송", 이제 교회의 헌금문제는 교회 울을 넘어 세상의 법과 현실적인 상황논리에 내 맡겨진지 오래다.
새벽기도 길에 동네 골목에서 가끔 만나던 한 아주머니가 있다. 불면증 때문에 잠을 설치고 새벽에 산에 오른단다. 그렇다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해 보라고 몇 번 권해보았다. 그 때마다 그는 "교회에 다닐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던데요" 하며 망설이더니, 어느 날 그 아주머니는 결심을 하고 우리 교회 새벽기도 교인이 되었다.
그가 교회 문을 들어서기 전에 가졌던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기우(杞憂)였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할텐데...
출처 뉴스앤죠이신문 심재원 (2002-05-13 오전 9:23:58
그는 광산 선교를 하는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잘 알려진 대로 평생에 단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다고 하니 가난한 그의 생활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림에 문외한인 나로서 그의 작품에 대해 감히 무어라 이야기할 개재는 아니나, 그의 그림 가운데 밝고 화려한 면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하기 어려울 듯 싶다. 고흐 자신의 '초상화'나 '헌 구두'에서는 삶의 고뇌가 깊이 녹아 있다. 그의 작품 속에 스며있는 이런 진솔한 삶의 무게가 그의 작품가치를 더 높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부(富)가 성공의 척도이며 노력의 결과를 당대에 걷어들여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들의 가치관으로는 그의 그림을 감상하기조차 죄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고흐의 작품이 이렇게 해를 거듭하면서 그 가치를 더해가고 있는데,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산다는 우리의 가치관은 한 세대를 뛰어 넘지 못한다.
하나님께 헌금을 하고도 그 결과를 내 눈으로 바로 보아야 한다. 이만큼 헌금을 했더니 이렇게 주시더라는 간증을 들을 때면 혹시 하나님을 대상으로 투자나 투기를 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런 우리의 마음 때문일까, 입만 열면 교회의 개혁을 외치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면서도 헌금문제는 언제나 예외다. 아니, 헌금문제는 초대교회를 뛰어 넘어 구약시대로 회귀(回歸)하고 있다.
구약시대의 헌금은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대하34:9, 14)이거나 많은 경우 십일조(창28:22, 레27:30, 말3:8-12)를 의미한다.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강조하신 십일조의 정신이 드디어 한국교회에 와서 그 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국교회에서 드리는 헌금에는 구약시대의 제사 냄새가 물신 풍긴다. "예물을 제단에 올려놓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매일 새벽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히9:12)셨으므로 다시는 우리가 피 흘리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도 왜 구약의 제사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려고 이렇게 애쓰고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물론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구약 성경의 제의적 용어이겠지만 이제는 그 문자적 의미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헌금의 정신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초대교회다. 오늘과 같은 의미의 헌금은 초대교회에서 비롯되었다. 초대교회의 헌금은 연보(捐補; Collection, Offerings)의 개념에 가깝다. 현대교회의 태동을 보여주는 사도행전의 교회들(안디옥, 고린도, 갈라디아 등)은 기근으로 인해 곤궁에 처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거나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 부조(扶助)의 개념으로 헌금을 하기 시작하였다.(행11:27-30, 고전16:1-3 등)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변했으니 헌금에 대한 인식은 바뀔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정신만은 버려서는 안 된다. 초대교회에서 사용한 헌금의 다양한 명칭 속에서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수 있지 않은가 싶다. "연보" 개념의 로기아(고전16:1), "기쁨으로 드린다"는 의미의 하믈레스(고후8:2), "좋은 모금"을 의미하는 율로기아(고후9:5), 그리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코이노니아(고후9:13)의 의미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요즘 교회 헌금문제가 가끔 세상법정에까지 올라 우리의 얼굴을 뜨겁게 한다. 남편 몰래 아내가 한 헌금을 돌려달라는 "헌금 반환청구소송", 작정한 헌금을 빨리 내라고 교회가 교인을 상대로 제기한 "약정헌금 청구소송", 이제 교회의 헌금문제는 교회 울을 넘어 세상의 법과 현실적인 상황논리에 내 맡겨진지 오래다.
새벽기도 길에 동네 골목에서 가끔 만나던 한 아주머니가 있다. 불면증 때문에 잠을 설치고 새벽에 산에 오른단다. 그렇다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해 보라고 몇 번 권해보았다. 그 때마다 그는 "교회에 다닐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던데요" 하며 망설이더니, 어느 날 그 아주머니는 결심을 하고 우리 교회 새벽기도 교인이 되었다.
그가 교회 문을 들어서기 전에 가졌던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기우(杞憂)였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할텐데...
출처 뉴스앤죠이신문 심재원 (2002-05-13 오전 9: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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