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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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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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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
지난 5월 5일 어린이주일 교회에서 예배 드린 후 점심을 나가서 먹기로 했다. 내가 사는 이곳은 공원이 여러개 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녹색잔디나 나무들을 실컷 볼 수 있다. 잔디 위에 자리를 만들고 고기 구워 먹을 준비를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이면 가장 많이 먹는 삼겹살. 처음에는 쭈삣거리던 사람들도 막상 고기냄새가 풍기자 정신이 없다. 아이들 입에 넣어주랴, 자신들도 한입 싸서 넣으랴, 굽기가 바쁘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배가 부르다. 어느 정도 시늉을 들어주다가 살짝 빠져나가 접시에 밥 조금하고 김치만 곁들여 놓고 한쪽에서 먹고 있었다. 누가 나를 발견해 버렸다. '사모님, 고기 드세요'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한다. '사모님은 고기를 싫어하시는 갑다'
그런가? 나는 고기를 싫어하는가?
광주에 와서 살게 된지 얼마쯤 지나서였다. 남편과 강진 시댁을 다녀오던 길, 나주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언니한테 들러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곳 끝나는 시간과 우리가 나주를 지나칠 무렵의 시간이 거의 맞을 것 같아서였다. 언니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근처 농협에 근무하시는 형부까지 합해져서 우리는 함께 광주로 향하게 되었다.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으므로 밥을 먹고 가자고 한다. 나주 근처에 오리고기를 하는 곳이 있는데 잘 하더라면서 우리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오리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각종 야채와 소스를 곁들여 싸서 먹는 요리였다. 어찌나 맛이 있는지 다른 사람이 나보다도 한 점 더 집어 먹을까봐 나는 정신없이 먹었다. 말 한마디 없이 그냥 먹기만 했다.
저 세 사람은 이 맛있는 것을 먹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만 저리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상관없다. 나만 잘 먹으면 된다. 이렇게 한참을 먹다가 내 손에 든 고기와 야채의 양이 너무 많았는지 그만 목구멍에 척 걸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식구들 앞이라지만 이걸 도로 내놓을 수도 없고 아니면 입안 가득 물고 화장실 같은 곳으로 뛰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 맛있는 고기를 어떻게 하든지 뱃속으로 집어넣기로 작정했다. 목구멍은 분명 탄력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많은 양이 천천히, 아주 아주 천천히 목구멍을 통과하고 있었다. 물론 물도 마시지 않았다. 예감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목구멍 아랫부분으로 그 주먹만한 쌈 덩어리가 다 내려갔을 때에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목구멍에 때 벗겼다, 라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경우에 하는 말이라는 걸. 그날 정말 목구멍에 때가 있었다면 안 벗겨지고는 배겨나질 못했을 것이다. 정말 깨끗하게 씻겨 나갔을 것이다. 그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었다. 그냥 맛있는 걸 몽땅 먹고 난 후에 배가 너무 불러 "아이고! 나, 오늘 목구멍 때 벗겼네" 그렇게 말하면 되는 줄로 알았다. 그건 아직 뭘 몰랐던 나의 생각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개척'의 ㄱ자도 몰랐던 우리는 고생길로 접어들었다. 시골에서만 살다가 도시에 와서 살게 된 우리의 상황은 달라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돈을 주고 사먹어야 했다.
당근 한개를 비닐랩으로 둘둘 말아 얼마, 파 한 뿌리를 싸 가지고 얼마 등, 정말 야멸차게 그램 수에 딱딱 맞추어 가격표 붙여 내놓은 마켙 진열장을 보면 저절로 한숨만 나왔다.
시골마당에 한아름씩 묻어두었던 대파랑 집사님들이 봉지봉지 현관에 갖다 두었던 상추나 야채 무더기들이 눈물나게 그리웠다. 처음에는 시골 들판에 널려있는, 발에 밟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쑥 같은 것도 돈을 주고 사먹어야 했다. 그러니 비싼 고기가 얼마나 내 입 속으로 들어왔겠는가.
내가 그날 언니로부터 얻어먹은 오리고기를 그렇게 먹을 수밖에 없었던 간단한 이유이다. 꼭 생전 처음 고기꼴 본 사람처럼 먹었을 것이다. 정말 나는 그날 오리고기를 다 먹고 나서 언니한테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봤다'고 말했었다(내 목구멍, 때 벗겨진 것을 지금까지 언니는 모른다).
그때 했던 내 말이 잊혀지지 않는지 언니는 가끔씩 '너, 그렇게 맛있었다는 오리고기 먹으러 가자' 한다. 얼마 전에도 내 목구멍의 때를 벗겨주었던 그 오리고기를 그때 그 집에서 또 먹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때처럼 또 큰 주먹쌈을 싸서 정신없이 먹었을 것 같은가.
형편이 나아졌구나, 짐작할 것 같아서 얼른 말해야겠다. 형편은 그대로인데 단지 나아진 건 내 자신이 고기 못 먹고 사는 환경에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어느 정도 숙달되고 나니까 고기 좀 못 먹었다고 해서 그렇게 허겁지겁, 껄떡? 거리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 먹지 않으면 언제 또 때가 오랴, 이런 좋은 기회 다시 없을테니까 지금 실컷 먹어두자, 는 치사한 생각이 들지 않게 되더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도 한 입 더 먹을까봐 욕심내면서 전전긍긍하지도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기 좀 덜 먹어도 이 육신 지탱해 나가는데 별 지장은 없더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다음, 짐작되어지는 가난한 개척교회 사모님에게 무조건 고기부터 꼭 사 먹일 것이다.
광주 산월교회 김영옥
김영옥 (2002-05-22 오후 5:43:27
지난 5월 5일 어린이주일 교회에서 예배 드린 후 점심을 나가서 먹기로 했다. 내가 사는 이곳은 공원이 여러개 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녹색잔디나 나무들을 실컷 볼 수 있다. 잔디 위에 자리를 만들고 고기 구워 먹을 준비를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이면 가장 많이 먹는 삼겹살. 처음에는 쭈삣거리던 사람들도 막상 고기냄새가 풍기자 정신이 없다. 아이들 입에 넣어주랴, 자신들도 한입 싸서 넣으랴, 굽기가 바쁘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배가 부르다. 어느 정도 시늉을 들어주다가 살짝 빠져나가 접시에 밥 조금하고 김치만 곁들여 놓고 한쪽에서 먹고 있었다. 누가 나를 발견해 버렸다. '사모님, 고기 드세요'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한다. '사모님은 고기를 싫어하시는 갑다'
그런가? 나는 고기를 싫어하는가?
광주에 와서 살게 된지 얼마쯤 지나서였다. 남편과 강진 시댁을 다녀오던 길, 나주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언니한테 들러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곳 끝나는 시간과 우리가 나주를 지나칠 무렵의 시간이 거의 맞을 것 같아서였다. 언니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근처 농협에 근무하시는 형부까지 합해져서 우리는 함께 광주로 향하게 되었다.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으므로 밥을 먹고 가자고 한다. 나주 근처에 오리고기를 하는 곳이 있는데 잘 하더라면서 우리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오리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각종 야채와 소스를 곁들여 싸서 먹는 요리였다. 어찌나 맛이 있는지 다른 사람이 나보다도 한 점 더 집어 먹을까봐 나는 정신없이 먹었다. 말 한마디 없이 그냥 먹기만 했다.
저 세 사람은 이 맛있는 것을 먹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만 저리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상관없다. 나만 잘 먹으면 된다. 이렇게 한참을 먹다가 내 손에 든 고기와 야채의 양이 너무 많았는지 그만 목구멍에 척 걸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식구들 앞이라지만 이걸 도로 내놓을 수도 없고 아니면 입안 가득 물고 화장실 같은 곳으로 뛰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 맛있는 고기를 어떻게 하든지 뱃속으로 집어넣기로 작정했다. 목구멍은 분명 탄력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많은 양이 천천히, 아주 아주 천천히 목구멍을 통과하고 있었다. 물론 물도 마시지 않았다. 예감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목구멍 아랫부분으로 그 주먹만한 쌈 덩어리가 다 내려갔을 때에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목구멍에 때 벗겼다, 라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경우에 하는 말이라는 걸. 그날 정말 목구멍에 때가 있었다면 안 벗겨지고는 배겨나질 못했을 것이다. 정말 깨끗하게 씻겨 나갔을 것이다. 그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었다. 그냥 맛있는 걸 몽땅 먹고 난 후에 배가 너무 불러 "아이고! 나, 오늘 목구멍 때 벗겼네" 그렇게 말하면 되는 줄로 알았다. 그건 아직 뭘 몰랐던 나의 생각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개척'의 ㄱ자도 몰랐던 우리는 고생길로 접어들었다. 시골에서만 살다가 도시에 와서 살게 된 우리의 상황은 달라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돈을 주고 사먹어야 했다.
당근 한개를 비닐랩으로 둘둘 말아 얼마, 파 한 뿌리를 싸 가지고 얼마 등, 정말 야멸차게 그램 수에 딱딱 맞추어 가격표 붙여 내놓은 마켙 진열장을 보면 저절로 한숨만 나왔다.
시골마당에 한아름씩 묻어두었던 대파랑 집사님들이 봉지봉지 현관에 갖다 두었던 상추나 야채 무더기들이 눈물나게 그리웠다. 처음에는 시골 들판에 널려있는, 발에 밟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쑥 같은 것도 돈을 주고 사먹어야 했다. 그러니 비싼 고기가 얼마나 내 입 속으로 들어왔겠는가.
내가 그날 언니로부터 얻어먹은 오리고기를 그렇게 먹을 수밖에 없었던 간단한 이유이다. 꼭 생전 처음 고기꼴 본 사람처럼 먹었을 것이다. 정말 나는 그날 오리고기를 다 먹고 나서 언니한테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봤다'고 말했었다(내 목구멍, 때 벗겨진 것을 지금까지 언니는 모른다).
그때 했던 내 말이 잊혀지지 않는지 언니는 가끔씩 '너, 그렇게 맛있었다는 오리고기 먹으러 가자' 한다. 얼마 전에도 내 목구멍의 때를 벗겨주었던 그 오리고기를 그때 그 집에서 또 먹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때처럼 또 큰 주먹쌈을 싸서 정신없이 먹었을 것 같은가.
형편이 나아졌구나, 짐작할 것 같아서 얼른 말해야겠다. 형편은 그대로인데 단지 나아진 건 내 자신이 고기 못 먹고 사는 환경에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어느 정도 숙달되고 나니까 고기 좀 못 먹었다고 해서 그렇게 허겁지겁, 껄떡? 거리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 먹지 않으면 언제 또 때가 오랴, 이런 좋은 기회 다시 없을테니까 지금 실컷 먹어두자, 는 치사한 생각이 들지 않게 되더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도 한 입 더 먹을까봐 욕심내면서 전전긍긍하지도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기 좀 덜 먹어도 이 육신 지탱해 나가는데 별 지장은 없더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다음, 짐작되어지는 가난한 개척교회 사모님에게 무조건 고기부터 꼭 사 먹일 것이다.
광주 산월교회 김영옥
김영옥 (2002-05-22 오후 5: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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