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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맛있는 추억> 곰보아저씨의 돌사탕

수필칼럼사설 김은식............... 조회 수 3639 추천 수 0 2003.01.14 09: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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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9'를 뽑았는데 '6'이라니…

돌사탕이라고 있었다. 조금 큰 강낭콩만한 짙은 밤색 덩어리로 된 일종의 불량식품인데, 인내심을 가지고 입 속에 품고 있다가 어금니로 꾹 누르면 말랑해진다는 점에서 굳이 종류를 나누자면 사탕보다는 캐러멜이었다. 다만 제대로 된 포장이 된 것이 아니다보니 제조사도 분명치 않고, 결국 가격도 분명치 않았다.

가격이 분명치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딱 부러지게 '몇 개에 얼마'하는 식으로 파는 물건이 아니라 이른바 '뽑기'를 통해 수량이 결정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부르지만, 내 부모님이 다닌 것이 소학교였던 것과 같이 내가 다닌 것은 국민학교였다. 그 명칭의 적합성 이전에 말이다) 앞 문구점에서 십 원을 내면 주인 아저씨는 점선따라 절반쯤 절단된 동그라미 딱지가 수십 개 빼곡한 마분지 판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면 아저씨의 감시 아래 꼭 한 개의 딱지를 선택하여 뜯어내는 '뽑기'가 이루어지는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염력을 짜내 고른 딱지 뒷면에 새겨진 숫자만큼의 돌사탕이 나의 차지가 된다.

어쩌면 그때도 중요한 것은 돌사탕 자체가 아니라 그 숫자였는지도 모른다. 정말 자갈만큼 단단한 것을 혀로 달래고 녹여가며 씹어봐야 제대로 된 밀크 캐러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릿하고 어설픈 맛이 그 시절에도 그다지 그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억세게 운이 좋아 달랑 십원으로 돌사탕 한주먹을 따낸다면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몇 반의 누가 몇 개를 뽑았다더라고. 그것은 일종의 기록경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돌사탕이란 애당초 몇 개씩 정해 팔아서는 값이 없었을 물건이다. 그 십원도 어느 만큼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딱지를 뜯어내는 긴장감과 박진감, 그리고 혹시나 대여섯 개 넘는 '대박'이라도 터지면 또래들에게 아낌없이 한 개씩 돌리며 자랑하고 싶은 고만고만한 사행심과 교환되는 값이었다.

대개의 도박이 그렇듯이 돌사탕 뽑기도 배당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제일 많이 나오는 숫자는 3이나 4였고, 지뢰처럼 1이나 2도 꽤나 숨어 있었다. 그래서 운좋게 대여섯개씩 뽑는 날은 꽤나 신이 났었다. 그리고 잘한 것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 좋을 것도 없으면서 부러움을 살 수 있었다.

내 경우에는 스스로 운 좋은 아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돌사탕 뽑기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지는 않았다. 간혹 내가 뽑아든 딱지에 적힌, 자신들에게 배분될 수량조차 되지 않는 1이나 2라는 숫자를 보면서 실망하는 친구들 앞에서 자못 비참해지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혼자서 돌사탕 뽑기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굽이굽이 추억과 사연이 새겨진 하교길에서, 보통 때라면 친구들 예닐곱은 뭉쳐다니며 가방 들어주기 가위바위보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혼자였던 것은 아마도 혼자서 무슨 야단이라도 맞거나 심부름을 하느라 뒤처진 경우였을 것이다.

그래서 호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고 한 손으로는 신발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친구들이 지나간 먼지마저 가라앉은 길로 터덜거리며 내딛다가 생각치 않은 십원짜리 동전이 한 개 만져졌거나, 아니면 관전객이 없는 틈에 부담없이 나의 운을 시험해보고 싶은 주눅든 객기가 솟았을 것이다. 또 어쩌면 그렇지 않아도 철길 넘어 논밭 사이 지루하고 심심한 길, 돌사탕 두어 개라도 녹이는 재미로 걸을 작심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건 나는 딱지 한 개를 뜯었다. 애초에 큰 기대 없이 뽑는 것이라 이것 저것 고를 것 없이 하나를 뜯어냈다.

실패의 기억은 억눌러도 솟아나기 마련이건만 또 생각해보면 많은 경우에 애써 불러 일깨우기도 한다. 시험을 앞두고 떨어졌던 기억들을 떠올리고, 높은 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목소리가 뒤집어졌던 언젠가를 생각한다. 축구골대에 슈팅을 날리면서 빗나갔던 경험을 되살리고, 축구경기를 보면서 열 올리다 절망했던 순간을 되새긴다. '언제는 잘된 적이 있었나? 내(우리)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나름대로는 만약 실패할 경우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한 대비책이랍시고 하는 짓이지만, 그런 기억들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게 나의 발목을 잡아왔다. 해보기도 전에 위축되고, 혹시 초반에 잘 풀린다 싶으면 '이렇다 잘 되는거 아냐?'하는 들뜬 마음에 덤벙질치다 실수를 자초하고. 패배주의란 다른 복잡한 것도 아닐 것이다.

물론 그만큼이나마 의외였기에 아직도 기억을 한다만 어쨌거나 내가 뜯어낸 딱지에는 '9'가 적혀 있었다.

뽑기가 기록경기라면 9는 더이상 깨질 수 없는 완벽한 기록이다. 프로야구의 투수가 방어율 0.00으로 방어율왕이 되었다거나, 기계체조 선수가 10점 만점으로 금메달을 따는 것과도 같다. 9 이상의 숫자는, 이 '뽑기계'에는 없는 것이다.

"어... 어... 9다. 아저씨 9예요. 우와아"

한번도 예상치 못한 행운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뜯어낸 딱지를 든 채 손을 휘저으며 기합도 넣었다. 그것은 일종의 골 세리모니였다. 그리고 그 점수를 공인받고 돌사탕으로써 확정하기 위해 '곰보'라고 불리던 주인아저씨에게 그 딱지를 넘겼다.

"봐요. 9 맞죠? 돌사탕 아홉 개 주세요."

아마 아저씨도 장사를 하면서 9를 뽑는 아이를 자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못해도 삽사십 개는 될 딱지들 속에서 9라는 숫자는 한 개 씩이나 들어 있거나, 혹은 없을지도 몰랐다. 어쨌건 나로서는 9를 뽑았다는 아이를 한번도 본 적이 없거니와, 들은 적도 없었다. '아홉'이라는 환호성을 듣는 곰보아저씨의 얼굴에도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선수는 골을 넣고 환호해도 소용 없다. 심판이 오프사이드라거나 골키퍼 차징이라는 판정을 내리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아저씨는 딱지를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180도 돌려서 내 눈 앞에 놓으며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6이야."

생각치도 못했던 일격이었다. 날벼락이었다. "예?"
그리고 곧바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쪼잔스럽게도 아저씨는 완강했다.

"아녜요, 아저씨. 봐요, 9잖아요."
"6이야."
다른 말은 필요도 없다는 듯이.

국민학교 3학년이거나 혹은 4학년이었을 나와, 소나기 맞은 도랑물 수면처럼 곰보가 가득한 얼굴의 문방구 주인 아저씨는 동그란 딱지에 적힌 숫자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6이네, 9네 실랑이를 벌였다.

평소에 숫기가 없어 엄마에게 과자나 장난감 하나 사달라는 말도 못하던 나였지만, 그 날은 모처럼의 기록적인 행운이 아까웠던지, 꽤나 오래 덤벼들었다.

그렇지만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게임의 주최자이자 한참 연장자인 아저씨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안타까움과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음을 절감한 순간, 나는 6개면 어디냐, 그리고 9와 겨우 세 개 차이가 아니냐고 스스로 위로하며 가게를 나섰다.

그렇지만 집으로 걸음을 내디딜수록 6과 9는 달랐다. 엄청나게 달랐다. 9였다면, 친구들이 얼마나 놀라고 부러워했을 것인가? 그래, 끝까지 9를 고수했어야 했는데. 아차, 딱지 표면을 그대로 좌우로 돌려서 9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을, 왜 그 생각을 못했더라... 그리고 결국 와닿는 생각의 종점은, '나에게 돌사탕이 아홉 개나 뽑힐 리가 없지'하는 엽전 모양의 한탄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손으로 신발 주머니를 휘휘 돌리며 다른 한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런데 게임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9가 적힌 딱지 못지 않은 행운이 손가락에 잡혔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십원짜리 동전이었다. 문구점에 들어서기 전에 한 개 발견하고 신이 났던 바로 그 십원이었다. 문구점을 나와 십 분은 넘게 걸었을 그 순간에도 그 동전은 나에게 남아 있었다.

맞다. 나는 참가비 내는 것도 잊고 딱지를 뜯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저씨는 9를 뽑았다고 설치는 꼬마를 진정시키느라, 그래서 여섯개 선에서 막아내느라고 십원을 징수하는 시점을 놓쳐버린 것이었다. 나는 십원을 내지 않고 뽑기를 해서 돌사탕 여섯 개를 따낸 것이었다.

아마 곰보아저씨는 진땀을 훔쳐내며 그나마 돌사탕 세 개를 지켜낸 것에 안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느 순간에 십원의 참가비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언제고 내가 돌아오면 받아내리라고 별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소심한 만큼 또 쓸데없이 주도면밀하기도 했던 나는 그날 이후 꽤 오랫동안 그 문구점을 멀찍이 돌아서 학교에 다녔다.

그렇다면 우리 둘 중 더 손해본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얼마 전까지도 돌사탕 여섯 개를 공짜로 손에 넣은 내가 단연 승자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최소한 몇 달은 되었을 그 시간 동안 혹시라도 덜미가 잡힐까봐 돌아다녔던 발품도 그렇지만, 지레 불안했던 마음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더구나 그 기록적인 행운이 누구에 의해서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도 치명적이었다. 물론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어제 9를 뽑았지만 곰보아저씨의 억지에 의해 6으로밖에 인정받지 못했다'고 자랑했지만, 무심한 표정으로 이구동성 돌아오는 대답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뻥 치지 마."

한 오년 되었을까? 여행길에 우연히 주변을 지나던 버스에서 거짓말처럼 그 문구점을 보았다. 예전에 논밭 넘어 찻길이 멀었던 학교지만, 이십 년 넘게 흐르면서 길이 가로질러 학교 담장 옆으로 붙어있었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릴 겨를도 없이 지나치면서 본 문구점. 간판은 칠도 한 번 안 했는지 용하게 옛모습과 엇비슷했고, 늙어도 굵게 패인 얼굴이 여전한 가게 앞 의자의 곰보아저씨도 기억 속의 그것과 비슷했다.

하찮은 것에 매달리느라 돌아다니는 목돈을 못잡아 아직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계시는지. 아니면 또 이십 년이 지나도록 똑같이 파릇파릇한 아이들과 숫자놀음하는 재미에 나이 먹는 줄 모르고 계신지. 그 단호하고 냉정하던 표정마저 기억 속에서는 푸근하게 삭아내린다.

어쨌거나, 건강하세요. 곰보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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