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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김재성 (민들레성서마을지기)

위대한 사상가들은 인간의 본질을 그의 자유에서 보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으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다”고 했다. 사르트르는 이 말을 실존주의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신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그 무엇에 의하여 판단되거나, 그 어떤 일정한 인간성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사람에게 어떤 정해진 결론이란 있을 수 없으며, 사람은 자유로우며 자유 그 자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유임을 자각하는 인간은 고독과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그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의식하고 역사 앞에서 책임적이 되고 참여적이 된다고 보았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을 자유에서 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무신론적 주장이라는 것 때문에, 무조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거부감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이나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자들보다는, 비록 무신론적 입장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자유를 철저히 확립하려고 하는 사르트르가 훨씬 더 그리스도교의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거듭 자신의 사명이 사람들을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임을 밝혔다. 그는, 공적 활동을 시작하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사명이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눅 4:18). 또 믿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요 8:31, 36). 그는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하였다(요 3:8).

바울은, 그의 새로운 선교 상황에서, 예수가 선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바울이 이방 선교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부딪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할례 문제였다. 우리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기가 쉽지 않지만, 유대사람들에게서는 할례는 누구나 받아야 하는 것이며, 그것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짐승 같이 여겼다. 그들은 이방 사람들을 모욕할 때도 “할례도 받지 않은 놈들”이라고 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유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할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자들이 거의 다 유대인이었고 그들은 모두 어려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디옥을 중심한 바울의 이방 선교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이방 사람들은 할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전혀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신자가 되고자 할 때 할례를 강제로 받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바울은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하면서, 할례를 믿음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복음의 진리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이는, 아주 보수적이고 율법적인 일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과 싸웠다. 바울이 만약 거기에서 움츠러들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이스라엘 내 유대교의 한 종파로 떨어졌을 것이며, 세계로 뻗어나가지도, 오늘날의 교회를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흔들릴 수도 있는 갈라디아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 5:1).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를 해방시켜서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분으로 이해하였다. 사르트르는 신이 없어야 인간이 자유롭다고 보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다고 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신이 없음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고독과 불안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결정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종살이를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에게만은 복종해야 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노예는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고전 7:22-23).

이런 자유의 경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시가 한 편 있다.

복종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이 말하는 복종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한 것’, 곧 자유보다도 더 자유로운 것이다. 그것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보다는 바울이 말하는 자유에 가깝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지인가!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그 누구나 그 무엇에도 종살이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께만 복종하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말로만 그리스도께 복종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직, 교리, 교권, 또는 어떤 종교에 종속되게 하려고 한다. 나아가서 이 세상에서 물질의 복을 누리고 행운을 안게 되는 ‘축복’에 종속되게 한다. 그리하여 가장 자유를 누려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자유를 못 누리고 있다. 늘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사람들이 되어서 남들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데 바쁘며, 자기 자신은 늘 이러저러한 것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한테 벌을 받으면 어떡하나, 지옥에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가 그런 것들에 종속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살이이고,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임을. 주님은 우리가 그런 것들에 종살이하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 종살이를 하는 삶을 사느니 차라리 신,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치장된 온갖 속박들을 다 걷어치우고 사르트르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를 얻는 것이 낫다.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은, 한용운이 말하는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한 복종’이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께만 복종하는 삶이다. 이 복종은 무릎 꿇는 삶보다는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의존의 감정이 아니다.

언젠가 원로 교수님 한 분이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셔서 놀란 적이 있다. 그 논지는 이렇다. 사람의 본질은 자유인데, 누군가를 사랑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의존하고 매이게 되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게 되고, 자유롭지 않은 인간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사랑이라는 단어에다가 따옴표를 해 주어야 할 것 같다. 그 사랑은 이른바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유행가 가사에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느니 ‘사랑만은 않겠어요’라느니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이런 것들이 판을 치는 것이다. 흔히들 그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사랑이라기보다는 의존의 감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성 문제에 대해 점점 대담해지고 있다는 말들을 한다. 부부관계는 한 십년 정도 되면 시들해져서, 그저 아이들 때문에 살고 정 때문에 사는 것이지, 애틋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이니 뭐니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성을 접할 기회가 많은 오늘날 사람들은 그런 데서 만난 새로운 상대에게 애틋함을 느끼고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고 한다. 남편은 한 번도 자기를 주체로 대하거나 소중한 존재로 대해주지 않는데 그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해 주고 세상에서 제일 위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혼란에 빠지고 불륜에 빠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시기심과 질투심에 불타게 하고, 가정이 깨지게 하고,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 끓는 감정은 자기의 외로움을 남에게 호소하고 나누고 싶은 감정일 수 있다. 뭔가 자기가 몰입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사람은 왠지 뭔가에 몰입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그게 되지 않을 때 삶은 권태롭고 속에서 절실한 감정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중년에 오는 달콤한 유혹이나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사랑이 아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자기의 주체가 바로 서지 못한 데서 오는 허전함이다. 그것은 속에서부터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외부로부터 채우려고 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처음 느껴보는 사랑’이라는 것인데 그것의 본질은 ‘의존의 감정’일뿐이다.

그것이 의존의 감정인 한 그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사람은 자유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것은 사랑일 수 없다. 의존의 감정은 둘 중 하나다. 내가 상대방에게 의존하면 상대방은 나에 대한 결정권을 갖기 때문에 의기양양하고 나는 매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반대로 상대방이 나에게 의존하면 나는 시들한데 상대방은 안달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게임이 있을 뿐이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체성이 없고 속이 비어 있어 허하고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자꾸 이런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가 없는 사람이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서 구걸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노래하는 새처럼, 향기를 뿜는 꽃처럼, 자신에게 노래가 있고 향기가 있을 때 ‘너’를 향해서 노래를 하고 향기를 뿜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진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 5:13).

오늘날 “예수는 없다”거나 “예수는 신화다”는 책 제목만 읽고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오직 예수”만을 외치는 신자들, 예수 이름 말고는 구원이 없다고 하면서 다른 종교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는 신자들, 어느 스님이 신학교에 와서 강연을 했다고 해서, 그 신학교뿐 아니라 교단 전체를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안에서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진정 그런 자유를 누린다면 어찌하여 그렇게 불안해 하며 피해의식을 가지는 것인가. 어느 누가 예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어느 책이 예수는 신화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위태롭게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의 자유가 문제인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문제인 것이다. 흔들리는 것은 그들의 주체성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또는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서 예수에게 의존하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도피하는 ? 痼訣?진정으로 자유 안에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무엇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 그는 예수에게 의존할 수는 있어도 예수를 사랑할 수는 없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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