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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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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5/22(수) 16:49
■ 기독교 시민운동의 현주소 (上)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시민운동’이 사회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88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대선에서 야권분열로 인해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난 뒤 운동권은 극심한 논쟁에 휘말렸고, 이과정에서 온건파로 분류되던 인사들이 기존의 운동권과 결별하고 새로운 운동의 양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이 당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직을 사퇴한 서경석목사가 중심이 돼 창립한 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연합(경실련)이다.
1990년대부터 자리잡기 시작
이후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사회참여를 모색해 오던 기독교계 인사들이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을 창립해 시민운동에 뛰어들었고,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운동을 표방하는 참여연대도 창립됐다.
이들은 과거 이념 중심의 투쟁을 해 온 운동권에 식상해 있던 국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에 따라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 가게 된다.
이렇게 되자 기존의 운동권들도 시민운동을 표방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사회운동협의회의 후신인 기독교사회선교연대이다. 기사협은 원래 기독교계의 각 부문운동단체들이 결성한 협의체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국내의 정치상황이 변화하면서, 기존의 정치투쟁 중심의 운동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 갔고, 이에 따라 운동의 방향에 있어서 대대적인 평화가 필요한 상황이 옴으로써 시민운동을 표방하는 단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물론 YMCA나 YWCA 같은 기독교 청년단체들도 아주 오래 전부터 시민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활동이 시민운동의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이들 청년단체들의 활동 영역은 점차 좁아져 갔다.
문제는 이처럼 시민운동을 표방하고 나선 기독교단체들의 활동이 아주 미미하거나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기독교사회선교연대의 경우, 재정난으로 인해 사무실까지 없애고 지금은 가입단체들이 돌아가면서 간사단체를 맡아 연락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사업을 펼쳐 나갈 위원회도 대부분 없애는 등, 사실상 활동 중단상태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한국의 상황에서 기독교 시민운동은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한국 기독교의 시민운동 자체가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나라 시민운동이 한국사회에서 갖고 있는 위치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시민운동은 운동권 분열의 결과로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운동권이 노동자와 농민을 외치면서 이념 중심의 투쟁을 해 온 것과는 달리 시민운동은 보다 온건한 ‘생활 속의 개혁’을 추구하게 됐다. 경실련이 출범하면서 이른바 ‘토지소유 제한’과 ‘금융실명제’ 등을 주장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당시 운동권의 관심 대상이던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은 토지소유 상한제나 금융실명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경실련의 운동은 이들보다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6·10 항쟁의 중심세력이었던 이른바 ‘넥타이부대’가 경실련 활동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시민운동은 그 출발점부터 중산층과 인텔리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현재 참여연대 등 시민운동 기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는 결국 우리 나라의 시민운동이 과거의 ‘과격한 운동’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나타난 것임을 의미한다.
과거 운동권의 이념 답습
그러나 기독교 시민운동은 과거 운동권의 후신이다. 기독교사회선교연대의 경우, 일부 지역운동에 참여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종로 5가 운동권’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시민운동은 그 정체성 자체가 일반 시민운동과는 다르다.
‘과거 운동의 대안’이 아니라 ‘과거 운동의 계승’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과거 운동권이 겪고 있는 침체현상을 기독교 시민운동 역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해진다. 과연 기독교 시민운동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시민운동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시민운동의 정체성을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우선 한국사회의 변천 과정에서 중산층과 인텔리층이 중심이 되는 운동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대한 것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중산층 중심의 사회로 굳어 졌는가 하는 질문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른바 IMF 사태를 겪으면서 나타난 사실은, 우리 나라의 중산층이 사실은 무척 엷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IMF 사태의 와중에서 상당수가 더 낮은 단계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이른바 ‘경제 세계화’ 과정이 진행될수록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사회의 구성이 중산층은 없고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 양극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운동 방식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의 시민운동은 몇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시민운동 초창기의 경실련 같은 단체들은, 문제점과 대안을 언론을 통해 제시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해 나갔다. 당시로서는 이것이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었지만, 이 방법의 문제는 ‘대안’을 현실화할 ‘움직임’이 결여돼 있다는 사실에 있다.
즉, 좋은 문제와 대안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정부나 누군가가 나서서 이를 실천해 주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민운동이 발전해 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그 결과 일정부분 실효를 본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번 총선에서 시민단체들이 전개한 ‘낙선운동’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시민운동은 ‘풀뿌리운동’으로 자리를 잡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시민운동 자체가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일부 명망가와 활동가를 중심으로 한 운동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민운동의 이념을 실천할 ‘폭넓은 주체세력’이 형성돼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어쩌면 시민운동의 출발점부터 있어 왔던 ‘태생적 한계’일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시민운동은 ‘교회’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시민운동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기독교 시민운동의 이념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에 있고, 이는 기독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르게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 시민운동은,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신앙실천운동이 돼야 하고, 교인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교회로 거듭나게 하는 교회개혁운동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기독교 시민운동은 이같은 기독교적 정체성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 운동’의 특성을 거의 담아 내지 못하고 과거 일반 운동권의 이념이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정체성 찾지 못하고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교인들을 풀뿌리 조직으로 묶어 내고, 그들의 실천이 지역사회를 변화시켜 결국은 한국사회 전체의 변혁과 개혁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연결고리를 기독교 시민운동이 창출해 나가야 하는데도, 아직 이같은 풀뿌리 조직사업이나 변혁운동의 과제를 만들어 내는 일 조차 기독교 시민운동은 제대로 해 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 시민운동은 교회 내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운동이다. 교회를 통해 지역과 사회가 변혁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교회의 중요한 선교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 특유의 분리주의와 분파주의라고 할 수 있다. 풀뿌리 조직을 통한 변혁운동에는 지역별로 이루어지는 교회들 사이의 연대가 필수적이지만, 아직 한국의 교회는 이같은 연대를 이룰 만할 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분파주의를 극복하는 것 역시 기독교 시민운동에 주어진 과제이며, 이는 다시 교회 개혁운동과 연결된다. 연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기독교 시민운동이 에큐메니칼 정신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정신을 통해 실천되는 연합과 나눔의 정신이 기독교 시민운동의 풀뿌리 조직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정신적인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시민운동이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재정적인 어려움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운동에 개교회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기독교 시민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간다면, 재정적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시민운동의 성패 여부는 바로 교회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 시민운동은 교회의 참여를 이끌어 낼 구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기독교사회선교연대나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직은 이 두 기구가 명망가와 활동가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구조는 결국 기독교 시민운동이 ‘운동단체와 구호, 그리고 활동가는 있지만 구체적인 운동이 없는’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 있게 만든다. 최근 기윤실이 펼치고 있는 교회세습 방지운동 역시 그 내용이나 목표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과 목표가 교회에서 구체화되기 힘든 이유도, 교회와 교인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기 힘든 구조적 어려움 때문이다.
특히 세습 방지를 법제화하기 위한 교단 헌법 개정 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개교회 목회자들이 동의와 참여가 필수적이지만, 기윤실의 입장에서는 아직 힘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기독교 시민운동이 지금이라도 그 정체성이나 운동양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교인들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 대중은 아직‘운동’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세속적 차원과 신앙적 차원을 뚜렷하게 구분하려는 이분법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 두가지는 모두 기독교 시민운동이 추구해야 할 목표인 동시에 운동의 내용이기도 하다. 기독교시민운동은 지금 눈에 보이는 운동과제를 찾아내는 일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같은‘시민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시민운동이 신앙과 삶을 모두 포괄하는 통전적운동이 되기 위해서 이는 필수적인 선결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한국 교회의 시민운동이 새로운 대안적 운동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운동단체들만의 활동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되며, 운동단체와 교회, 교인, 그리고 에큐메니칼 기구까지를 서로 연결하는 네트워킹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 시민운동 단체들은 이점에서 많은 약점을 안고 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 시민운동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민성식부국장
(1654호 2002. 5. 26)
◎ 2002/6/5(수) 16:47
■ 기독교 시민운동의 현주소 (下)
정치적 야욕에 불타
기독교계 시민단체들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시작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모인사를 비롯한 교계인사들의 사회단체 진출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시민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몇몇 시민단체들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은 사건들이 터지면서 교계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정치적 욕심을 가지고 진출한 교계 인사들의 잘못된 시각으로 인해 기존의 운동권과 함께 기독교시민운동에 대한 치명타를 입히면서 건강한 정신으로 시작한 교계 시민단체들까지 많은 비판의 소리에 휘말리고 있다.
또한 한때, 잘나가던 환경단체장은 성희롱이라는 죄를 범해 시민단체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달 중국동포 강제 추방에 따른 반대 집회에서 모목사가 단상에서 “여기 오신 기자 여러분들이 기사를 잘 써달라”는 발언을 해 취재기자들을 당황케 하며 “너무 정치적 냄새를 노골적으로 풍기는 작태가 아닌가”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적인 욕심으로 시민운동을 시작한 교계 단체들이 있는가 하면 진심으로 선교를 위해 시작한 단체는 개교회의 무관심과 열악한 재정으로 인해 잊혀져 가는 단체들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난 70년대 노동자 투쟁의 불씨를 던져준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기독교계 민주화운동으로 지금까지 도시산업 속에 민주주의와 정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역할을 감당하고 했다.
또한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늘어나는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전도활동을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와 의료봉사활동, 노동법 교육 등을 통해 인근의 노동자들의 모임을 결성하는등 활발한 사업을 벌여왔다.
이 와중에 전태일씨의 분신자살로 인해 노동계가 들끓어 오르면서 영등포 산업선교회는 노동자들의 일에 무관심할 수 없어 한국사회에서는 최초로 노동인권에 대해 다루게 됐다. 이때를 계기로 노동자 투쟁의 본부격으로 급부상해 한국의 노동운동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최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결과로 나타난 구조조정 등으로 인해 노동운동의 급격한 쇠퇴와 함께 그 활동도 주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박진석목사(영등포 산업선교회총무)는 “교계 시민단체의 어려움은 하나님의 영성과 사회운동과의 괴리로 인해 많은 제약이 있다”면서 “교계 시민운동단체들의 현실은 개교회와의 연대성 결여로 인해 더 많은 한계성에 부딪히곤 한다”고 말했다.
박목사는 또 “교계에서는 진보적으로 보이는 단체들도 일반 사회에서 보는 시각은 보수적인 기독교단체라는 비난도 받고 있는등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녹색연합과 비교되며 기독교내 환경운동을 펼치는 기독교환경운동연합은 지난 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로 출발해 97년 초교파적이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개편되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기 위해 지금까지 ‘녹색교회 21제정’과 함께 녹색소비를 위한 실천운동, 새만금 갯벌 살리기, 생명윤리 기본법 제정 촉구운동 등 최근에 생명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교회와 사회운동사이 괴리
특히 각종 한국교회의 도덕성과 윤리회복, 교회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는데 기여해 온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대중문화 비판과 담임목사직 세습반대운동, 한국교회 성윤리 회복등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너무 방대한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기윤실의 이러한 운동에 대해서 한편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청소년 보호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기윤실의 스포츠신문 음란광고와 만화등에 대한 모니터활동은 스포츠신문사의 사과광고까지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반면, 박진영이나 한국영화에 대한 선정성 시비논란등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대중문화의 다양성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사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기윤실의 담임목사직 세습반대운동과 관련해서는 일반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개교회의 반감을 사고, 언론플레이에 집중하지 않았냐는 비판도 받기도 했다. 이런 기윤실의 활동은 교회 내부에서는 진보적인 활동들로 비쳐지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보수적인 기독교단체들의 꽉막힌 활동으로 비쳐지기도 하는등 이중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또 YMCA의 경우는 NGO단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그 프로그램들이나 추진하는 사업면에서 초기의 정신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Y의 경우 각 지역단위별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들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소비자 운동이나 올해 선거를 의식한 유권자 운동이 고작이고, 근본적인 사회문제인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무비판적인 작태로 인해 사회성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올 선거를 대비해 서울Y가 추진하고 있는 유권자 10만인위원회는 그 인원모집에 있어서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으며, 만인공동회 등의 활동도 사회NGO단체라는 점을 넘어서 자신들 임의로 선거판에 영향을 주는 월권을 행사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를 사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렇게 교계 시민단체들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서 교계 시민단체들의 사업들이 단순한 언론을 의식한 사업들로 전락해 언론에서도 보여주기식 보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활에 나선 시민단체
기독교시민운동의 현 상황은 그야말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재정난, 운동의 대중화 부족, 교인들의 참여유도 결여등 변화된 사회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급한불 끄기에 바쁘며, 주도적으로 나가기 보다는 이끌려 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재정난의 경우, 독일이나 미국등의 원조가 90년대 중반에 끊김으로써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은 모두 자활에 나서야 했다. 스스로 일어서기에 실패한 기독교시민단체는 문을 닫아야했고, 그나마 생존을 위해 애쓰는 단체는 하루 하루 버텨나가며 각 단체 특성별로 홀로서는 방법들을 강구중이다.
먼저 장충동에 위치한 여성 평화집에 입주한 기독여민회와 한국여신학자협의회등 기독교여성단체들의 경우는 독일로부터 재정적 지원이 끝났던 96년도 이후부터,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다. 좋은 프로젝트를 서울시나 각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해 재정지원을 따내기도 하고, 바자회와 재정적 능력이 있는 인사들의 후원회원 모집등이 그 방법들이다.
그러나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하는 기독교시민단체가 더 많은게 현실이다. 기독교사회선교연대는 경우는 사무실까지 없애고 가입단체들이 돌아가면서 간사단체를 맡아 연락을 취해 사실상 그 활동이 유명무실하다.
또한 YWCA나 YMCA경우는 그보다는 재정적 기반이 탄탄하지만,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두 기관의 경우는 후원회원이 막강해 그나마 다른 기독교시민단체보다는 재정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나, 많은 회원과 방대한 사업 운영을 위해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때마다 후원회원개발과 모금방법 개발을 위한 연구에 상당한 시간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도덕성을 담보로 하는 기독교시민단체의 경우는 그 활동범위가 교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 교회와 교인들의 후원과 모금을 얻는 방법 강구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 있어서 좋은 운동이슈와 교회 정서를 감안한 운동의 개발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변화된 사회상황에 일반시민운동단체나 기독교시민운동단체나 맥을 못추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시민운동이 그 주최자가 되어야할 시민과 교인들의 참여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소수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지도력은 양성과제
기독교시민운동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대상이 되는 교인들과 계층의 참여와 지지가 절대적인데, 지금까지의 기독교시민운동은 몇몇 소수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움직여 왔다는 점이다.
물론, 창조적 소수에 의한 사회변혁이 암울했던 시대에는 빛을 발하고 선각자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나, 이젠 한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독교시민운동으로의 자리매김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연구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기독교시민운동이 그동안 견지해 오던 진보적이며, 전투적인 용어와 운동방법을 좀더 교회대중에게 친숙한 용어와 대중적인 운동방법으로의 연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기독교시민운동이 담보해온 개혁성을 무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참여하고픈 생각이 들만한 운동이슈와 대중적 방법들이 고려되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를 위해선 그동안 기독교시민운동단체 혼자 내지는 같은 성격을 지닌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간의 연대에서 시야를 넓혀, 그 운동의 대상이 되는 집단과 손을 잡아야 한다. 예를들면 여성신학적 입장에서 교회내 남녀평등운동을 펼치는 기독교여성시민단체의 경우는 좀 보수적인 각 교단 여신도회와 연대해 나가야한다.
이 말은 교회내 기본 정서인 복음성에 익숙한 교인들의 정서를 고려해 가며, 설득을 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기독교시민운동은 교회와의 연대에 있어서 적극적인 액션을 펼쳐야 할때이다. 그동안 교회를 향해 ‘뭐뭐 고쳐’라고 외쳤지, 교회에 다가가 그들의 문제에 귀기울이고 협력하는데는 소홀해 왔다.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의 성장과 교인증가 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교회상황을 고려하면서 환경운동이나, 문화운동, 평등운동등을 펼쳐간다면,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의 외로운 투쟁은 좀더 좋은 협력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가 지난 10년간을 ‘기독여성10년’으로 정하고 세계 각 교회여성들이 교회와 함께 남녀 평등을 가로막는 바윗돌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설 것을 권고했지만, 실제로 기독교여성운동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여성10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는 교회와 함께 하지 못한 점을 뼈져리게 반성해야 했다.
또하나 기독교시민운동의 개선해야 할 문제점은 인재 양성에 소홀하다는 점이다. 특히 중간지도력의 부실은 기독교시민운동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투자하고 힘써야 할 분야이다. 변화된 사회상황 때문에 사회진리와 정의에 공감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사실 기독교시민운동을 하겠다고 전처럼 나서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시민운동이 노령화 되고 있고, 젊은 감각과 30,40대 지도력을 키워내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수 없다. 가장 일을 잘하는 지도자는 바로 자신의 일을 이을 후계자를 양성해 내는 것이라고 할때, 기독교시민운동 지도자들은 젊은 지도력 양성에도 관심을 많이 쏟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시민단체의 역할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에 중점을 둔다면, 기독교시민단체의 역할은 한국교회가 개혁되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하기 위한 소금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선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가 먼저 도덕적 윤리적으로 건강해야하고, 재정적 문제와 인력문제를 타개해 나가며, 한국교회의 속으로 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때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삶이 건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21세기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의 활동은 교회와 함께하는 시민운동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우은진차장·박건상기자 공동취재 집필
(1656호 2002. 6. 9)
■ 기독교 시민운동의 현주소 (上)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시민운동’이 사회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88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대선에서 야권분열로 인해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난 뒤 운동권은 극심한 논쟁에 휘말렸고, 이과정에서 온건파로 분류되던 인사들이 기존의 운동권과 결별하고 새로운 운동의 양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이 당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직을 사퇴한 서경석목사가 중심이 돼 창립한 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연합(경실련)이다.
1990년대부터 자리잡기 시작
이후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사회참여를 모색해 오던 기독교계 인사들이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을 창립해 시민운동에 뛰어들었고,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운동을 표방하는 참여연대도 창립됐다.
이들은 과거 이념 중심의 투쟁을 해 온 운동권에 식상해 있던 국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에 따라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 가게 된다.
이렇게 되자 기존의 운동권들도 시민운동을 표방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사회운동협의회의 후신인 기독교사회선교연대이다. 기사협은 원래 기독교계의 각 부문운동단체들이 결성한 협의체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국내의 정치상황이 변화하면서, 기존의 정치투쟁 중심의 운동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 갔고, 이에 따라 운동의 방향에 있어서 대대적인 평화가 필요한 상황이 옴으로써 시민운동을 표방하는 단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물론 YMCA나 YWCA 같은 기독교 청년단체들도 아주 오래 전부터 시민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활동이 시민운동의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이들 청년단체들의 활동 영역은 점차 좁아져 갔다.
문제는 이처럼 시민운동을 표방하고 나선 기독교단체들의 활동이 아주 미미하거나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기독교사회선교연대의 경우, 재정난으로 인해 사무실까지 없애고 지금은 가입단체들이 돌아가면서 간사단체를 맡아 연락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사업을 펼쳐 나갈 위원회도 대부분 없애는 등, 사실상 활동 중단상태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한국의 상황에서 기독교 시민운동은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한국 기독교의 시민운동 자체가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나라 시민운동이 한국사회에서 갖고 있는 위치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시민운동은 운동권 분열의 결과로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운동권이 노동자와 농민을 외치면서 이념 중심의 투쟁을 해 온 것과는 달리 시민운동은 보다 온건한 ‘생활 속의 개혁’을 추구하게 됐다. 경실련이 출범하면서 이른바 ‘토지소유 제한’과 ‘금융실명제’ 등을 주장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당시 운동권의 관심 대상이던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은 토지소유 상한제나 금융실명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경실련의 운동은 이들보다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6·10 항쟁의 중심세력이었던 이른바 ‘넥타이부대’가 경실련 활동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시민운동은 그 출발점부터 중산층과 인텔리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현재 참여연대 등 시민운동 기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는 결국 우리 나라의 시민운동이 과거의 ‘과격한 운동’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나타난 것임을 의미한다.
과거 운동권의 이념 답습
그러나 기독교 시민운동은 과거 운동권의 후신이다. 기독교사회선교연대의 경우, 일부 지역운동에 참여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종로 5가 운동권’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시민운동은 그 정체성 자체가 일반 시민운동과는 다르다.
‘과거 운동의 대안’이 아니라 ‘과거 운동의 계승’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과거 운동권이 겪고 있는 침체현상을 기독교 시민운동 역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해진다. 과연 기독교 시민운동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시민운동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시민운동의 정체성을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우선 한국사회의 변천 과정에서 중산층과 인텔리층이 중심이 되는 운동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대한 것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중산층 중심의 사회로 굳어 졌는가 하는 질문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른바 IMF 사태를 겪으면서 나타난 사실은, 우리 나라의 중산층이 사실은 무척 엷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IMF 사태의 와중에서 상당수가 더 낮은 단계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이른바 ‘경제 세계화’ 과정이 진행될수록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사회의 구성이 중산층은 없고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 양극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운동 방식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의 시민운동은 몇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시민운동 초창기의 경실련 같은 단체들은, 문제점과 대안을 언론을 통해 제시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해 나갔다. 당시로서는 이것이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었지만, 이 방법의 문제는 ‘대안’을 현실화할 ‘움직임’이 결여돼 있다는 사실에 있다.
즉, 좋은 문제와 대안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정부나 누군가가 나서서 이를 실천해 주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민운동이 발전해 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그 결과 일정부분 실효를 본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번 총선에서 시민단체들이 전개한 ‘낙선운동’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시민운동은 ‘풀뿌리운동’으로 자리를 잡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시민운동 자체가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일부 명망가와 활동가를 중심으로 한 운동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민운동의 이념을 실천할 ‘폭넓은 주체세력’이 형성돼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어쩌면 시민운동의 출발점부터 있어 왔던 ‘태생적 한계’일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시민운동은 ‘교회’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시민운동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기독교 시민운동의 이념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에 있고, 이는 기독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르게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 시민운동은,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신앙실천운동이 돼야 하고, 교인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교회로 거듭나게 하는 교회개혁운동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기독교 시민운동은 이같은 기독교적 정체성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 운동’의 특성을 거의 담아 내지 못하고 과거 일반 운동권의 이념이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정체성 찾지 못하고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교인들을 풀뿌리 조직으로 묶어 내고, 그들의 실천이 지역사회를 변화시켜 결국은 한국사회 전체의 변혁과 개혁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연결고리를 기독교 시민운동이 창출해 나가야 하는데도, 아직 이같은 풀뿌리 조직사업이나 변혁운동의 과제를 만들어 내는 일 조차 기독교 시민운동은 제대로 해 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 시민운동은 교회 내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운동이다. 교회를 통해 지역과 사회가 변혁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교회의 중요한 선교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 특유의 분리주의와 분파주의라고 할 수 있다. 풀뿌리 조직을 통한 변혁운동에는 지역별로 이루어지는 교회들 사이의 연대가 필수적이지만, 아직 한국의 교회는 이같은 연대를 이룰 만할 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분파주의를 극복하는 것 역시 기독교 시민운동에 주어진 과제이며, 이는 다시 교회 개혁운동과 연결된다. 연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기독교 시민운동이 에큐메니칼 정신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정신을 통해 실천되는 연합과 나눔의 정신이 기독교 시민운동의 풀뿌리 조직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정신적인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시민운동이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재정적인 어려움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운동에 개교회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기독교 시민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간다면, 재정적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시민운동의 성패 여부는 바로 교회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 시민운동은 교회의 참여를 이끌어 낼 구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기독교사회선교연대나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직은 이 두 기구가 명망가와 활동가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구조는 결국 기독교 시민운동이 ‘운동단체와 구호, 그리고 활동가는 있지만 구체적인 운동이 없는’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 있게 만든다. 최근 기윤실이 펼치고 있는 교회세습 방지운동 역시 그 내용이나 목표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과 목표가 교회에서 구체화되기 힘든 이유도, 교회와 교인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기 힘든 구조적 어려움 때문이다.
특히 세습 방지를 법제화하기 위한 교단 헌법 개정 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개교회 목회자들이 동의와 참여가 필수적이지만, 기윤실의 입장에서는 아직 힘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기독교 시민운동이 지금이라도 그 정체성이나 운동양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교인들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 대중은 아직‘운동’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세속적 차원과 신앙적 차원을 뚜렷하게 구분하려는 이분법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 두가지는 모두 기독교 시민운동이 추구해야 할 목표인 동시에 운동의 내용이기도 하다. 기독교시민운동은 지금 눈에 보이는 운동과제를 찾아내는 일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같은‘시민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시민운동이 신앙과 삶을 모두 포괄하는 통전적운동이 되기 위해서 이는 필수적인 선결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한국 교회의 시민운동이 새로운 대안적 운동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운동단체들만의 활동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되며, 운동단체와 교회, 교인, 그리고 에큐메니칼 기구까지를 서로 연결하는 네트워킹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 시민운동 단체들은 이점에서 많은 약점을 안고 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 시민운동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민성식부국장
(1654호 2002. 5. 26)
◎ 2002/6/5(수) 16:47
■ 기독교 시민운동의 현주소 (下)
정치적 야욕에 불타
기독교계 시민단체들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시작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모인사를 비롯한 교계인사들의 사회단체 진출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시민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몇몇 시민단체들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은 사건들이 터지면서 교계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정치적 욕심을 가지고 진출한 교계 인사들의 잘못된 시각으로 인해 기존의 운동권과 함께 기독교시민운동에 대한 치명타를 입히면서 건강한 정신으로 시작한 교계 시민단체들까지 많은 비판의 소리에 휘말리고 있다.
또한 한때, 잘나가던 환경단체장은 성희롱이라는 죄를 범해 시민단체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달 중국동포 강제 추방에 따른 반대 집회에서 모목사가 단상에서 “여기 오신 기자 여러분들이 기사를 잘 써달라”는 발언을 해 취재기자들을 당황케 하며 “너무 정치적 냄새를 노골적으로 풍기는 작태가 아닌가”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적인 욕심으로 시민운동을 시작한 교계 단체들이 있는가 하면 진심으로 선교를 위해 시작한 단체는 개교회의 무관심과 열악한 재정으로 인해 잊혀져 가는 단체들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난 70년대 노동자 투쟁의 불씨를 던져준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기독교계 민주화운동으로 지금까지 도시산업 속에 민주주의와 정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역할을 감당하고 했다.
또한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늘어나는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전도활동을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와 의료봉사활동, 노동법 교육 등을 통해 인근의 노동자들의 모임을 결성하는등 활발한 사업을 벌여왔다.
이 와중에 전태일씨의 분신자살로 인해 노동계가 들끓어 오르면서 영등포 산업선교회는 노동자들의 일에 무관심할 수 없어 한국사회에서는 최초로 노동인권에 대해 다루게 됐다. 이때를 계기로 노동자 투쟁의 본부격으로 급부상해 한국의 노동운동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최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결과로 나타난 구조조정 등으로 인해 노동운동의 급격한 쇠퇴와 함께 그 활동도 주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박진석목사(영등포 산업선교회총무)는 “교계 시민단체의 어려움은 하나님의 영성과 사회운동과의 괴리로 인해 많은 제약이 있다”면서 “교계 시민운동단체들의 현실은 개교회와의 연대성 결여로 인해 더 많은 한계성에 부딪히곤 한다”고 말했다.
박목사는 또 “교계에서는 진보적으로 보이는 단체들도 일반 사회에서 보는 시각은 보수적인 기독교단체라는 비난도 받고 있는등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녹색연합과 비교되며 기독교내 환경운동을 펼치는 기독교환경운동연합은 지난 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로 출발해 97년 초교파적이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개편되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기 위해 지금까지 ‘녹색교회 21제정’과 함께 녹색소비를 위한 실천운동, 새만금 갯벌 살리기, 생명윤리 기본법 제정 촉구운동 등 최근에 생명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교회와 사회운동사이 괴리
특히 각종 한국교회의 도덕성과 윤리회복, 교회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는데 기여해 온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대중문화 비판과 담임목사직 세습반대운동, 한국교회 성윤리 회복등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너무 방대한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기윤실의 이러한 운동에 대해서 한편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청소년 보호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기윤실의 스포츠신문 음란광고와 만화등에 대한 모니터활동은 스포츠신문사의 사과광고까지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반면, 박진영이나 한국영화에 대한 선정성 시비논란등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대중문화의 다양성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사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기윤실의 담임목사직 세습반대운동과 관련해서는 일반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개교회의 반감을 사고, 언론플레이에 집중하지 않았냐는 비판도 받기도 했다. 이런 기윤실의 활동은 교회 내부에서는 진보적인 활동들로 비쳐지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보수적인 기독교단체들의 꽉막힌 활동으로 비쳐지기도 하는등 이중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또 YMCA의 경우는 NGO단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그 프로그램들이나 추진하는 사업면에서 초기의 정신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Y의 경우 각 지역단위별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들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소비자 운동이나 올해 선거를 의식한 유권자 운동이 고작이고, 근본적인 사회문제인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무비판적인 작태로 인해 사회성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올 선거를 대비해 서울Y가 추진하고 있는 유권자 10만인위원회는 그 인원모집에 있어서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으며, 만인공동회 등의 활동도 사회NGO단체라는 점을 넘어서 자신들 임의로 선거판에 영향을 주는 월권을 행사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를 사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렇게 교계 시민단체들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서 교계 시민단체들의 사업들이 단순한 언론을 의식한 사업들로 전락해 언론에서도 보여주기식 보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활에 나선 시민단체
기독교시민운동의 현 상황은 그야말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재정난, 운동의 대중화 부족, 교인들의 참여유도 결여등 변화된 사회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급한불 끄기에 바쁘며, 주도적으로 나가기 보다는 이끌려 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재정난의 경우, 독일이나 미국등의 원조가 90년대 중반에 끊김으로써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은 모두 자활에 나서야 했다. 스스로 일어서기에 실패한 기독교시민단체는 문을 닫아야했고, 그나마 생존을 위해 애쓰는 단체는 하루 하루 버텨나가며 각 단체 특성별로 홀로서는 방법들을 강구중이다.
먼저 장충동에 위치한 여성 평화집에 입주한 기독여민회와 한국여신학자협의회등 기독교여성단체들의 경우는 독일로부터 재정적 지원이 끝났던 96년도 이후부터,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다. 좋은 프로젝트를 서울시나 각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해 재정지원을 따내기도 하고, 바자회와 재정적 능력이 있는 인사들의 후원회원 모집등이 그 방법들이다.
그러나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하는 기독교시민단체가 더 많은게 현실이다. 기독교사회선교연대는 경우는 사무실까지 없애고 가입단체들이 돌아가면서 간사단체를 맡아 연락을 취해 사실상 그 활동이 유명무실하다.
또한 YWCA나 YMCA경우는 그보다는 재정적 기반이 탄탄하지만,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두 기관의 경우는 후원회원이 막강해 그나마 다른 기독교시민단체보다는 재정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나, 많은 회원과 방대한 사업 운영을 위해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때마다 후원회원개발과 모금방법 개발을 위한 연구에 상당한 시간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도덕성을 담보로 하는 기독교시민단체의 경우는 그 활동범위가 교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 교회와 교인들의 후원과 모금을 얻는 방법 강구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 있어서 좋은 운동이슈와 교회 정서를 감안한 운동의 개발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변화된 사회상황에 일반시민운동단체나 기독교시민운동단체나 맥을 못추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시민운동이 그 주최자가 되어야할 시민과 교인들의 참여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소수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지도력은 양성과제
기독교시민운동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대상이 되는 교인들과 계층의 참여와 지지가 절대적인데, 지금까지의 기독교시민운동은 몇몇 소수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움직여 왔다는 점이다.
물론, 창조적 소수에 의한 사회변혁이 암울했던 시대에는 빛을 발하고 선각자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나, 이젠 한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독교시민운동으로의 자리매김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연구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기독교시민운동이 그동안 견지해 오던 진보적이며, 전투적인 용어와 운동방법을 좀더 교회대중에게 친숙한 용어와 대중적인 운동방법으로의 연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기독교시민운동이 담보해온 개혁성을 무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참여하고픈 생각이 들만한 운동이슈와 대중적 방법들이 고려되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를 위해선 그동안 기독교시민운동단체 혼자 내지는 같은 성격을 지닌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간의 연대에서 시야를 넓혀, 그 운동의 대상이 되는 집단과 손을 잡아야 한다. 예를들면 여성신학적 입장에서 교회내 남녀평등운동을 펼치는 기독교여성시민단체의 경우는 좀 보수적인 각 교단 여신도회와 연대해 나가야한다.
이 말은 교회내 기본 정서인 복음성에 익숙한 교인들의 정서를 고려해 가며, 설득을 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기독교시민운동은 교회와의 연대에 있어서 적극적인 액션을 펼쳐야 할때이다. 그동안 교회를 향해 ‘뭐뭐 고쳐’라고 외쳤지, 교회에 다가가 그들의 문제에 귀기울이고 협력하는데는 소홀해 왔다.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의 성장과 교인증가 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교회상황을 고려하면서 환경운동이나, 문화운동, 평등운동등을 펼쳐간다면,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의 외로운 투쟁은 좀더 좋은 협력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가 지난 10년간을 ‘기독여성10년’으로 정하고 세계 각 교회여성들이 교회와 함께 남녀 평등을 가로막는 바윗돌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설 것을 권고했지만, 실제로 기독교여성운동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여성10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는 교회와 함께 하지 못한 점을 뼈져리게 반성해야 했다.
또하나 기독교시민운동의 개선해야 할 문제점은 인재 양성에 소홀하다는 점이다. 특히 중간지도력의 부실은 기독교시민운동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투자하고 힘써야 할 분야이다. 변화된 사회상황 때문에 사회진리와 정의에 공감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사실 기독교시민운동을 하겠다고 전처럼 나서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시민운동이 노령화 되고 있고, 젊은 감각과 30,40대 지도력을 키워내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수 없다. 가장 일을 잘하는 지도자는 바로 자신의 일을 이을 후계자를 양성해 내는 것이라고 할때, 기독교시민운동 지도자들은 젊은 지도력 양성에도 관심을 많이 쏟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시민단체의 역할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에 중점을 둔다면, 기독교시민단체의 역할은 한국교회가 개혁되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하기 위한 소금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선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가 먼저 도덕적 윤리적으로 건강해야하고, 재정적 문제와 인력문제를 타개해 나가며, 한국교회의 속으로 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때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삶이 건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21세기 기독교시민운동단체들의 활동은 교회와 함께하는 시민운동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우은진차장·박건상기자 공동취재 집필
(1656호 2002.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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