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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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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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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방문을 열면 영혼의 작은 섬이 보인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추억의 방문을 열면 영혼의 작은 섬이 보인다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있을, 그 옛날 우리가 서 있던 추억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 유년의 아련한 추억의 방문을 열고 그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노라면, 희뿌연 안개가 방 안 가득 자욱하지만 이내 걷히고, 그 안에 소중하게 담겨져 있던 추억의 조각들이 하나 둘 아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우리가 제 아무리 추억의 방문을 단단하게 못질을 해 두었다해도, 그 놈은 꿈틀! 살아나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그 방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되살아나는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음미해 보노라면 청정한 바람 일 듯 우리 마음에 환한 미소를 머금게 해 준다. 뒤늦게 시집을 간 순덕이 누나의 미소가 되살아나고,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던 정용 엄마의 그늘진 얼굴이 함께 추억의 방에서 기다린다. 슬픔을 먹음은 추억이든, 아름다운 그림 같은 추억이든 그 추억의 날개를 달고 한참을 날다보면 그늘진 얼굴에 햇빛이 비추고, 온 몸에 흐뭇한 기운이 감돌게 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어쩌면 앞산 가득 되살아나는 유년의 아련한 추억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지도 모른다. 책상 서랍 속에나 박혀있을 빛 바랜 사진들을 다시 꺼내어 보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의식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 무서운 세상에서, 그 추억의 조각들이 우리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힘겹고 고달프고, 애절하고 가난한 것이기는 하나 그 추억의 조각들은 포근하고 아늑한 어머니 품속 같아서 우리 지친 영혼을 위로한다.
우리 영혼의 밀실 속으로 스며드는 햇빛은 기계를 통해, 물질을 통해, 공장굴뚝이나 고도산업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영혼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의 어머니, 바로 내 유년의 작은 추억의 섬을 통해 영롱하고 아름답게 비춰지는 것이다.
내 유년의 추억의 방은 내 영혼의 작은 섬이다. 흰 치마저고리를 입으신 어머니가 있는 섬, 개울가 정겨운 동무들이 있는 섬, 마루 밑에서 늘어진 잠을 자는 삽살이와 밭두렁에 앉아 가을 햇살을 음미하는 늙은 소가 있는 섬, 산과 실개천과 나무와 꽃이 있는 섬, 언제나 정겨운 이웃집 아주머니의 넉넉한 웃음과 농부 아저씨들의 굵직한 땀방울이 있는 섬, 학교 가는 길가에 함박웃음 머금고 있는 코스모스가 있는 섬, 이 섬의 작은 조각들이 내 영혼의 집을 짓고, 나는 그 집에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추억의 방문을 열고 소풍을 떠나자
눈을 살며시 감고 나의 추억의 방문을 열면, 한 소년이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어요. 한 손에는 노란 주전자를 다른 한 손에는 무엇을 싼 보자기를 들고 있네요. 아, 그렇군요. 봄 논에 거름을 주고 물을 댄 후 써래질을 하시는 아버지께 드릴 시원한 막걸리를 담아 가고 있군요.
아니! 그런데 그 소년은 개울가에 서서 주변을 살피더니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주전자 입구에 입을 대고 꿀꺽!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더니, 보자기를 풀어 김치 한 조각을 입안에 넣는 게 아니겠어요? 잠시 후 소년은 다시 주변을 두어 번 두리번거리더니 또 한 모금, 그리고 김치 한 조각 가을 햇살은 따사로이 내리고, 먼 산에는 구름 식구들이 소풍 가는지 싱긋! 한번 웃어 주고요. 솔바람은 소년의 이마를 스치며 유혹을 하네요. 이내 소년의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고, 소년은 개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어느덧 구름 식구와 함께 즐거운 봄 소풍을 떠납니다.
아니! 안개가 자욱해지더니 그림이 사라졌어요. 금방 해님이 얼굴을 내밀고 햇살이 맑게 뿌려지고 시원한 개울물이 흐르고, 그 옆에는 땅콩밭, 고구마밭이 보이네요. 아까 그 소년이 동무들과 함께 잘 보이지도 않는 ‘새끼고추’를 손으로 가리고 개울가로 뛰어 들고 있어요. 아! 물론 막걸리 마시던 그림과는 다른 장면이지요. 그 소년과 동무들은 이내 물 속으로 둥근 수박과 참외를 서로 던지고 받으며 놉니다. 그러다가 수박에 멍이 들고 깨지면, 오줌 섞인 개울물과 범벅이 된 수박을 서로 나누어 먹고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서로 웃네요.
아까 그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어요. 혼자가 아닌 모양이네요. 누렁이와 슬픈 눈빛을 주고받으며 있어요. 소년은 누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이네요.“미리야(메리라는 개이름)! 우리 엄마가 오늘 너를 개장사에게 파신데, 어떡하면 좋으니. 너 이거 먹어.”
바지 주머니에서 보름달 빵을 꺼내어 누렁이에게 떼어 주며 글썽이는 소년.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맛있게 먹는 누렁이. 그러나 누렁이도 이내 이별을 눈치 챘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미리야! 너 어서 도망가 우리 집에 다시는 오지마. 집에 오면 넌 죽어.”
소년은 다시 빵을 누렁이 입에 넣어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길을 달려갑니다. 그러나 소년의 뒤를 쫓아오는 누렁이. 다시 소년은 누렁이 목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고, 멍청하게 키만 커다란 미루나무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몸둥이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움직이며 신나게 춤을 춥니다.
소년이 봄산을 오르고 있어요. 소년은 신나 해 하며 앞장을 서고, 형은 삽과 괭이를 어깨에 매고 뒤 따라 오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산을 오르는 소년은 마냥 즐거워하네요.
“헝아! 이걸루 할까?”“아니, 조금만 더 올라가 보면 더 큰 것이 있을 거야.”황토산을 타고 조금 가다가 멈춰선 형은 동생을 부릅니다.“희동아! 이걸루 하자. 줄기를 보면 굉장하겠는걸?”
우선 삽으로 겉흙을 걷어내고 조금 깊어지면 괭이로 흙을 파내는 형. 그 옆에서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동생. “헝아! 칡뿌리 머리가 굉장한 걸?”“그래. 우리가 캔 것 중에 제일인 것 같다.”“오늘은 이거 하나만 캐도 괜찮겠어.”
형제가 번갈아 흙을 파고 퍼내고, 다시 파고 퍼내고 하는 사이 칡뿌리는 부끄러운 몸을 드러내고.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던 해님도 힐끗 바라봅니다. 다리가 두 갈래로 난 걸로 보니 칡뿌리는 암놈인 게 분명합니다. 알도 통통하게 밴 것이 맛도 있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형의 다리통보다도 동생의 허리통보다도 큰 칡뿌리를 어떻게 들고 가느냐 입니다. 소년은 삽과 괭이를 들고 형은 어깨에 칡뿌리를 짊어지고 끙! 끙! 산을 내려옵니다. 칡뿌리가 너무 무거워 형제가 산을 내려오는지, 산이 형제를 업고 내려오는지 모르게 집으로 왔습니다.
설레임, 무소유 그리고 자연과 하나되는 소풍
그림처럼 펼쳐진 우리 유년의 삶은 소풍과 같았다. 설레임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여유로움이 있는 소풍. 동무들과 더불어 앞산 뒷산 뛰어 놀던 소풍길은 마냥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대신에 전철소리, 자동차소리, 기계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심지어는 땅 싸움, 돈 싸움에 종교싸움까지 한 순간도 조용할 날이 없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 소풍과 같은 삶을 살지만, 어른들은 소풍을 즐기지 못하고, 망치려고만 한다.
우리 인생은 소풍과 같은 삶이다. 누구나 소풍을 떠나기 전날 밤에 밤하늘을 보며 잠 못 이뤘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별님, 밤새 반짝 반짝 눈을 뜨고 계세요. 그래야 내일 아침에 해님이 뜨고, 우리들 소풍을 떠날 수 있어요. 별님, 두 눈감고 있으면 정말 안 되요?”
별들이 잠들지 않고 꼬박 밤을 새운 덕에 소풍가는 날은 해님도 함께 떠나는 즐거운 날이다. 동무들과 손잡고 떠나는 소풍길은 즐거움의 길, 가벼움의 길, 넉넉함의 길이다. 이것저것 가방에 가득 담아 자기만 먹고 즐기는 길이 아니다.
이른 아침 엄마가 쌓아 주신 김밥, 찐 계란, 사이다 한 병, 그리고 선생님께 드릴 담배 한 갑이 전부이다. 그리고 혼자 가는 길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동무들과 함께 걷는 소풍길은 신나는 길이다. 비록 김밥 한 덩이, 사이다 한 병이지만,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 소풍길은 넉넉한 길이다. 무엇을 이루러 가는 길이 아니니 소풍길은 ‘무소유’의 길이다. 소풍길은 마음을 비우고 손에 쥔 것을 놓고 가는 길이기에 가벼운 길이다.
소풍길은 무엇보다 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길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고, 산새소리 들으며 사람과 자연이 어깨동무하는 길이다. 소풍길은 사람만의 길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가는 길이다. 사람이 자연의 품에 안기는 길이요, 자연이 사람 품에 안기는 길이다. 넓은 공터에 모여 앉아 노래자랑을 하면 주변의 굴참나무도, 다람쥐도, 너구리도 함께 노래하고, 즐거워한다.
소풍오신 예수
2000년 전에 아기 예수는 이 세상에 왜 오셨을까? 하늘에서 이 세상으로 소풍을 오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하나님 아버지, 잠시 저 세상으로 소풍 좀 다녀오겠습니다.”“즐겁고 신나는 소풍이 되거라.”그렇다. 아기 예수는 서로 사랑하며 재미있게 소풍과 같은 삶을 사실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마리아가 노래하듯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시기 위해 오셨다.”(눅 1:5153)
우리가 떠나는 소풍길에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교만한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이 있는가. 모두가 같은 사람, 같은 동무들, 어깨 걸고 놀 수 있는 친구들만이 있다. 바로 마리아의 노래처럼 아기 예수님은 높고 낮은, 지배하고 지배받는, 부유하고 빈한 모든 것을 흩으시고 모든 사람과 그 관계를 친구의 관계,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로 만드셔서 정말 인생을 소풍길처럼 재미있고 멋있게 살게 하시려고 오셨다.
그런데 이 세상에 와보니 소풍길이 아니다. 서로 다투고 논쟁하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서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하고, 죄인들을 잡아간다. 이건 소풍이 아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까지 잡아죽이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것이 무엇인가!
“이 세상 사람들아, 인생은 소풍놀이란 말이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나. 서로 등 두드려주고 어깨 걸고 손 마주잡고 서로 평등한 동무요 친구로 만나 즐겁게 소풍놀이 하는 것이 하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삶이란 말이야. 그래서 나도 이 세상에 소풍놀이 온 것이네. 그러니 제물이 어떻고, 땅이 어떻고, 권세가 어떻고, 종교가 어떻고 서로 다투며 싸우며 살지 말고 즐겁고 멋지게 놀잔 말이네. 인생은 소풍이라네.”이 말씀을 전하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로마의 위정자들은,“뭐 인생이 소풍놀이라고 그렇게 심한 말을, 인생은 놀이가 아니라 힘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며 그 권세를 누리며 사는 것이 인생이란 말이야, 그런데 네가 감히 인생을 농락하는구나. 그래, 인생이 무엇인지 한 번 그 맛을 보여주지.”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그들의 종교적 힘과 정치적 힘을 앞세워 십자가에 달아 죽였던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소풍길을 떠나는 데, 어른들이 그것은 애들 장난이라고 방해하고 훼방놓는 것과 같다. 전도서 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었다. “멋지게 잘 사는 것은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다.”(5:18),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5:20)
마치 우리가 어릴 적 소풍놀이하며 먹고 마시며 즐기던 일이 인생이라 하신다.
우리는 너무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소꿉놀이하듯 살다가도 너무 심각한 나머지 절망하기도 하고 남의 것을 탐하기도 하며 서로 싸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소풍처럼 살다간 조선인
지금은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나머지 서로 아옹다옹 다투며 정신 없이 살지만, 원래 조선인은 대체로 소풍과 같은 삶을 살기를 좋아했다. 언제나 소풍 떠나는 나그네요, 소풍을 떠나는 어린 아이의 삶이었다. 조선인은 음주가무, 춤과 노래, 그리고 술과 놀이를 좋아했고, 자연과 더불어 지내기를 좋아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풍류(風流)정신이라 할 수 있다. 유동식 선생은 우리 민족사상의 근원을 ‘風流道’에 있다고 보았다.
선생은 한국의 풍류도를 ‘한 멋진 삶’으로 설명하신다. ‘한’에는 하나, 하늘, 우주, 크다, 전체, 아우르다 등의 초월적이며 종교적인 뜻을 가지고 있고, ‘멋’에는 흥과 율동, 조화와 자연스러움, 자유와 같은 문화 예술적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삶’에는 생명이라는 생물학적 개념과 살림살이라는 사회적 개념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소풍길’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되게 하는 ‘한’이 있고,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고 노래하는 가무(歌舞)가 있고, 그래서 사람의 소풍과 같은 삶은 내가 사는 것 같으나 하나님과 더불어 가는 ‘삶의 성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소풍은 내 안에 무궁한 우주를 모시는 거룩한 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소풍에는 일상 삶에 생명력과 창조력을 심어주는 삶의 기운이 있다. 소풍은 일상에 얽매이지 않고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하고 창조적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좁고 답답한 인간사를 뛰어 넘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켜 준다. 그래서 소풍은 우주의 신령한 기운을 더 해 준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를 빼앗기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은 이러한 소풍정신, 풍류정신의 여유로움 속에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힘을 얻곤 했다. 감옥에 갇힌 문익환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감옥에서 십자수를 놓는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비록 갇힌 몸이었지만, 늦봄 선생은 소풍 온 마음으로 감옥의 답답하고 어두운 마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소풍정신이 휴전선 철조망을 넘고 남과 북이 함께 손잡고 통일의 소풍을 떠나는 꿈을 꿀 수 있었으며, 또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소풍정신은 하나님의 마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 이미 예고된 죽음의 입성인 것을 알았지만, 나귀 타고 춤을 추며 들어가셨다. 사람들은 호산나 호산나 연호했고 예수는 나귀에 타고 춤을 추었다. 이 광경은 소풍 온 사람의 모습과 같다할 수 있다. 내일 죽을 것을 알고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어릴 적 동무들과 욕심 없이 즐겁고 여유롭게 놀았던 소풍놀이와 같은 모습이다. 현실의 도그마에 얽매여 있지 않고 엉성함 속에 따스함이 있고 비여 있음 속에 꽉 차있는 것이 어릴 적 소풍놀이였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소풍 온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품에 있다가 잠시 이 세상에 소풍을 와서 동무들과 흥겹고 멋지게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소풍 온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의 자리에 있다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소풍 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소풍 온 마음으로 동무들과 어깨 걸고 즐겁게 살다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온 우리들은 소풍과 같은 삶, 소풍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소풍과 같은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어릴 적 떠났던 소풍길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무소유의 길, 동무들과 손잡고 떠나는 흥겨움의 길, 미지의 세례로 떠나는 설레임의 소풍길을 떠나보자. 그것은 바로 우리 신앙인이 걸어 가야할 구원의 길이다.
여기 천상의 시인 천상병님의 시가 오늘 우리의 복음이다. 눈을 감고, 가만가만히 우리의 영혼으로 시를 읽어 가 보자. 그러면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마음, 소풍과 같은 여유로움이 찾아 올 것이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채희동 (2001-04-06 오후 12:29:46)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추억의 방문을 열면 영혼의 작은 섬이 보인다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있을, 그 옛날 우리가 서 있던 추억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 유년의 아련한 추억의 방문을 열고 그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노라면, 희뿌연 안개가 방 안 가득 자욱하지만 이내 걷히고, 그 안에 소중하게 담겨져 있던 추억의 조각들이 하나 둘 아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우리가 제 아무리 추억의 방문을 단단하게 못질을 해 두었다해도, 그 놈은 꿈틀! 살아나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그 방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되살아나는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음미해 보노라면 청정한 바람 일 듯 우리 마음에 환한 미소를 머금게 해 준다. 뒤늦게 시집을 간 순덕이 누나의 미소가 되살아나고,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던 정용 엄마의 그늘진 얼굴이 함께 추억의 방에서 기다린다. 슬픔을 먹음은 추억이든, 아름다운 그림 같은 추억이든 그 추억의 날개를 달고 한참을 날다보면 그늘진 얼굴에 햇빛이 비추고, 온 몸에 흐뭇한 기운이 감돌게 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어쩌면 앞산 가득 되살아나는 유년의 아련한 추억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지도 모른다. 책상 서랍 속에나 박혀있을 빛 바랜 사진들을 다시 꺼내어 보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의식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 무서운 세상에서, 그 추억의 조각들이 우리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힘겹고 고달프고, 애절하고 가난한 것이기는 하나 그 추억의 조각들은 포근하고 아늑한 어머니 품속 같아서 우리 지친 영혼을 위로한다.
우리 영혼의 밀실 속으로 스며드는 햇빛은 기계를 통해, 물질을 통해, 공장굴뚝이나 고도산업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영혼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의 어머니, 바로 내 유년의 작은 추억의 섬을 통해 영롱하고 아름답게 비춰지는 것이다.
내 유년의 추억의 방은 내 영혼의 작은 섬이다. 흰 치마저고리를 입으신 어머니가 있는 섬, 개울가 정겨운 동무들이 있는 섬, 마루 밑에서 늘어진 잠을 자는 삽살이와 밭두렁에 앉아 가을 햇살을 음미하는 늙은 소가 있는 섬, 산과 실개천과 나무와 꽃이 있는 섬, 언제나 정겨운 이웃집 아주머니의 넉넉한 웃음과 농부 아저씨들의 굵직한 땀방울이 있는 섬, 학교 가는 길가에 함박웃음 머금고 있는 코스모스가 있는 섬, 이 섬의 작은 조각들이 내 영혼의 집을 짓고, 나는 그 집에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추억의 방문을 열고 소풍을 떠나자
눈을 살며시 감고 나의 추억의 방문을 열면, 한 소년이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어요. 한 손에는 노란 주전자를 다른 한 손에는 무엇을 싼 보자기를 들고 있네요. 아, 그렇군요. 봄 논에 거름을 주고 물을 댄 후 써래질을 하시는 아버지께 드릴 시원한 막걸리를 담아 가고 있군요.
아니! 그런데 그 소년은 개울가에 서서 주변을 살피더니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주전자 입구에 입을 대고 꿀꺽!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더니, 보자기를 풀어 김치 한 조각을 입안에 넣는 게 아니겠어요? 잠시 후 소년은 다시 주변을 두어 번 두리번거리더니 또 한 모금, 그리고 김치 한 조각 가을 햇살은 따사로이 내리고, 먼 산에는 구름 식구들이 소풍 가는지 싱긋! 한번 웃어 주고요. 솔바람은 소년의 이마를 스치며 유혹을 하네요. 이내 소년의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고, 소년은 개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어느덧 구름 식구와 함께 즐거운 봄 소풍을 떠납니다.
아니! 안개가 자욱해지더니 그림이 사라졌어요. 금방 해님이 얼굴을 내밀고 햇살이 맑게 뿌려지고 시원한 개울물이 흐르고, 그 옆에는 땅콩밭, 고구마밭이 보이네요. 아까 그 소년이 동무들과 함께 잘 보이지도 않는 ‘새끼고추’를 손으로 가리고 개울가로 뛰어 들고 있어요. 아! 물론 막걸리 마시던 그림과는 다른 장면이지요. 그 소년과 동무들은 이내 물 속으로 둥근 수박과 참외를 서로 던지고 받으며 놉니다. 그러다가 수박에 멍이 들고 깨지면, 오줌 섞인 개울물과 범벅이 된 수박을 서로 나누어 먹고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서로 웃네요.
아까 그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어요. 혼자가 아닌 모양이네요. 누렁이와 슬픈 눈빛을 주고받으며 있어요. 소년은 누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이네요.“미리야(메리라는 개이름)! 우리 엄마가 오늘 너를 개장사에게 파신데, 어떡하면 좋으니. 너 이거 먹어.”
바지 주머니에서 보름달 빵을 꺼내어 누렁이에게 떼어 주며 글썽이는 소년.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맛있게 먹는 누렁이. 그러나 누렁이도 이내 이별을 눈치 챘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미리야! 너 어서 도망가 우리 집에 다시는 오지마. 집에 오면 넌 죽어.”
소년은 다시 빵을 누렁이 입에 넣어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길을 달려갑니다. 그러나 소년의 뒤를 쫓아오는 누렁이. 다시 소년은 누렁이 목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고, 멍청하게 키만 커다란 미루나무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몸둥이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움직이며 신나게 춤을 춥니다.
소년이 봄산을 오르고 있어요. 소년은 신나 해 하며 앞장을 서고, 형은 삽과 괭이를 어깨에 매고 뒤 따라 오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산을 오르는 소년은 마냥 즐거워하네요.
“헝아! 이걸루 할까?”“아니, 조금만 더 올라가 보면 더 큰 것이 있을 거야.”황토산을 타고 조금 가다가 멈춰선 형은 동생을 부릅니다.“희동아! 이걸루 하자. 줄기를 보면 굉장하겠는걸?”
우선 삽으로 겉흙을 걷어내고 조금 깊어지면 괭이로 흙을 파내는 형. 그 옆에서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동생. “헝아! 칡뿌리 머리가 굉장한 걸?”“그래. 우리가 캔 것 중에 제일인 것 같다.”“오늘은 이거 하나만 캐도 괜찮겠어.”
형제가 번갈아 흙을 파고 퍼내고, 다시 파고 퍼내고 하는 사이 칡뿌리는 부끄러운 몸을 드러내고.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던 해님도 힐끗 바라봅니다. 다리가 두 갈래로 난 걸로 보니 칡뿌리는 암놈인 게 분명합니다. 알도 통통하게 밴 것이 맛도 있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형의 다리통보다도 동생의 허리통보다도 큰 칡뿌리를 어떻게 들고 가느냐 입니다. 소년은 삽과 괭이를 들고 형은 어깨에 칡뿌리를 짊어지고 끙! 끙! 산을 내려옵니다. 칡뿌리가 너무 무거워 형제가 산을 내려오는지, 산이 형제를 업고 내려오는지 모르게 집으로 왔습니다.
설레임, 무소유 그리고 자연과 하나되는 소풍
그림처럼 펼쳐진 우리 유년의 삶은 소풍과 같았다. 설레임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여유로움이 있는 소풍. 동무들과 더불어 앞산 뒷산 뛰어 놀던 소풍길은 마냥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대신에 전철소리, 자동차소리, 기계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심지어는 땅 싸움, 돈 싸움에 종교싸움까지 한 순간도 조용할 날이 없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 소풍과 같은 삶을 살지만, 어른들은 소풍을 즐기지 못하고, 망치려고만 한다.
우리 인생은 소풍과 같은 삶이다. 누구나 소풍을 떠나기 전날 밤에 밤하늘을 보며 잠 못 이뤘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별님, 밤새 반짝 반짝 눈을 뜨고 계세요. 그래야 내일 아침에 해님이 뜨고, 우리들 소풍을 떠날 수 있어요. 별님, 두 눈감고 있으면 정말 안 되요?”
별들이 잠들지 않고 꼬박 밤을 새운 덕에 소풍가는 날은 해님도 함께 떠나는 즐거운 날이다. 동무들과 손잡고 떠나는 소풍길은 즐거움의 길, 가벼움의 길, 넉넉함의 길이다. 이것저것 가방에 가득 담아 자기만 먹고 즐기는 길이 아니다.
이른 아침 엄마가 쌓아 주신 김밥, 찐 계란, 사이다 한 병, 그리고 선생님께 드릴 담배 한 갑이 전부이다. 그리고 혼자 가는 길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동무들과 함께 걷는 소풍길은 신나는 길이다. 비록 김밥 한 덩이, 사이다 한 병이지만,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 소풍길은 넉넉한 길이다. 무엇을 이루러 가는 길이 아니니 소풍길은 ‘무소유’의 길이다. 소풍길은 마음을 비우고 손에 쥔 것을 놓고 가는 길이기에 가벼운 길이다.
소풍길은 무엇보다 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길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고, 산새소리 들으며 사람과 자연이 어깨동무하는 길이다. 소풍길은 사람만의 길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가는 길이다. 사람이 자연의 품에 안기는 길이요, 자연이 사람 품에 안기는 길이다. 넓은 공터에 모여 앉아 노래자랑을 하면 주변의 굴참나무도, 다람쥐도, 너구리도 함께 노래하고, 즐거워한다.
소풍오신 예수
2000년 전에 아기 예수는 이 세상에 왜 오셨을까? 하늘에서 이 세상으로 소풍을 오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하나님 아버지, 잠시 저 세상으로 소풍 좀 다녀오겠습니다.”“즐겁고 신나는 소풍이 되거라.”그렇다. 아기 예수는 서로 사랑하며 재미있게 소풍과 같은 삶을 사실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마리아가 노래하듯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시기 위해 오셨다.”(눅 1:5153)
우리가 떠나는 소풍길에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교만한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이 있는가. 모두가 같은 사람, 같은 동무들, 어깨 걸고 놀 수 있는 친구들만이 있다. 바로 마리아의 노래처럼 아기 예수님은 높고 낮은, 지배하고 지배받는, 부유하고 빈한 모든 것을 흩으시고 모든 사람과 그 관계를 친구의 관계,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로 만드셔서 정말 인생을 소풍길처럼 재미있고 멋있게 살게 하시려고 오셨다.
그런데 이 세상에 와보니 소풍길이 아니다. 서로 다투고 논쟁하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서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하고, 죄인들을 잡아간다. 이건 소풍이 아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까지 잡아죽이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것이 무엇인가!
“이 세상 사람들아, 인생은 소풍놀이란 말이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나. 서로 등 두드려주고 어깨 걸고 손 마주잡고 서로 평등한 동무요 친구로 만나 즐겁게 소풍놀이 하는 것이 하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삶이란 말이야. 그래서 나도 이 세상에 소풍놀이 온 것이네. 그러니 제물이 어떻고, 땅이 어떻고, 권세가 어떻고, 종교가 어떻고 서로 다투며 싸우며 살지 말고 즐겁고 멋지게 놀잔 말이네. 인생은 소풍이라네.”이 말씀을 전하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로마의 위정자들은,“뭐 인생이 소풍놀이라고 그렇게 심한 말을, 인생은 놀이가 아니라 힘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며 그 권세를 누리며 사는 것이 인생이란 말이야, 그런데 네가 감히 인생을 농락하는구나. 그래, 인생이 무엇인지 한 번 그 맛을 보여주지.”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그들의 종교적 힘과 정치적 힘을 앞세워 십자가에 달아 죽였던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소풍길을 떠나는 데, 어른들이 그것은 애들 장난이라고 방해하고 훼방놓는 것과 같다. 전도서 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었다. “멋지게 잘 사는 것은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다.”(5:18),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5:20)
마치 우리가 어릴 적 소풍놀이하며 먹고 마시며 즐기던 일이 인생이라 하신다.
우리는 너무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소꿉놀이하듯 살다가도 너무 심각한 나머지 절망하기도 하고 남의 것을 탐하기도 하며 서로 싸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소풍처럼 살다간 조선인
지금은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나머지 서로 아옹다옹 다투며 정신 없이 살지만, 원래 조선인은 대체로 소풍과 같은 삶을 살기를 좋아했다. 언제나 소풍 떠나는 나그네요, 소풍을 떠나는 어린 아이의 삶이었다. 조선인은 음주가무, 춤과 노래, 그리고 술과 놀이를 좋아했고, 자연과 더불어 지내기를 좋아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풍류(風流)정신이라 할 수 있다. 유동식 선생은 우리 민족사상의 근원을 ‘風流道’에 있다고 보았다.
선생은 한국의 풍류도를 ‘한 멋진 삶’으로 설명하신다. ‘한’에는 하나, 하늘, 우주, 크다, 전체, 아우르다 등의 초월적이며 종교적인 뜻을 가지고 있고, ‘멋’에는 흥과 율동, 조화와 자연스러움, 자유와 같은 문화 예술적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삶’에는 생명이라는 생물학적 개념과 살림살이라는 사회적 개념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소풍길’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되게 하는 ‘한’이 있고,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고 노래하는 가무(歌舞)가 있고, 그래서 사람의 소풍과 같은 삶은 내가 사는 것 같으나 하나님과 더불어 가는 ‘삶의 성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소풍은 내 안에 무궁한 우주를 모시는 거룩한 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소풍에는 일상 삶에 생명력과 창조력을 심어주는 삶의 기운이 있다. 소풍은 일상에 얽매이지 않고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하고 창조적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좁고 답답한 인간사를 뛰어 넘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켜 준다. 그래서 소풍은 우주의 신령한 기운을 더 해 준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를 빼앗기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은 이러한 소풍정신, 풍류정신의 여유로움 속에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힘을 얻곤 했다. 감옥에 갇힌 문익환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감옥에서 십자수를 놓는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비록 갇힌 몸이었지만, 늦봄 선생은 소풍 온 마음으로 감옥의 답답하고 어두운 마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소풍정신이 휴전선 철조망을 넘고 남과 북이 함께 손잡고 통일의 소풍을 떠나는 꿈을 꿀 수 있었으며, 또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소풍정신은 하나님의 마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 이미 예고된 죽음의 입성인 것을 알았지만, 나귀 타고 춤을 추며 들어가셨다. 사람들은 호산나 호산나 연호했고 예수는 나귀에 타고 춤을 추었다. 이 광경은 소풍 온 사람의 모습과 같다할 수 있다. 내일 죽을 것을 알고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어릴 적 동무들과 욕심 없이 즐겁고 여유롭게 놀았던 소풍놀이와 같은 모습이다. 현실의 도그마에 얽매여 있지 않고 엉성함 속에 따스함이 있고 비여 있음 속에 꽉 차있는 것이 어릴 적 소풍놀이였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소풍 온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품에 있다가 잠시 이 세상에 소풍을 와서 동무들과 흥겹고 멋지게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소풍 온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의 자리에 있다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소풍 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소풍 온 마음으로 동무들과 어깨 걸고 즐겁게 살다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온 우리들은 소풍과 같은 삶, 소풍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소풍과 같은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어릴 적 떠났던 소풍길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무소유의 길, 동무들과 손잡고 떠나는 흥겨움의 길, 미지의 세례로 떠나는 설레임의 소풍길을 떠나보자. 그것은 바로 우리 신앙인이 걸어 가야할 구원의 길이다.
여기 천상의 시인 천상병님의 시가 오늘 우리의 복음이다. 눈을 감고, 가만가만히 우리의 영혼으로 시를 읽어 가 보자. 그러면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마음, 소풍과 같은 여유로움이 찾아 올 것이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채희동 (2001-04-06 오후 12:2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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