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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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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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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기독교 영성을 기존의 신앙생활과 다르거나, 심지어 기독교의 또 다른 종파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침체되거나 성장을 멈춘 목회에 대한 해결책과 수단으로 기대를 갖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현대 목회가 갖는 딜레마는 첫째, 지식의 다변화와 전문화다. 과거, 목회자는 영역에 관계없이 만능이고 전지전능한 지도자로 존경을 받아왔다. 그러나 사회, 문화, 정치, 교육 등 각 분야별 전문가가 그루(guru)가 된다. 목회자의 설교는 인터넷과 유선 방송 등에서 같은 상황에 대한 전문가의 해설과 비교하여 평가를 받게 된다.
둘째, 세계화의 경향이다. 수년 전 미국과 이라크 전쟁에서 미사일 발사에서부터 목표물에 적중하는 것을 실황으로 볼 수 있었다. 지구 저편에서 일어나는 홍수와 기아와 폭력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그들의 고통에 참여한다. 뉴욕 월가의 지표가 한국의 투자자들의 행, 불행의 동시적인 지표가 된다. 금주의 설교 내용은 이미 낡은 상황에 대한 해설이거나, 아니면 회중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자칫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셋째, 교회만이 진리를 선포하는 유일한 장(場)이 아니다. 영적 서적들과 각종 세미나, 교양 교육, 기도원 및 수도원에서 행하는 피정 등도 목회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다. 주 5일 근무로 인한 교회 이탈 환경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그리고 불교도와 무슬림과 이웃하며 살고 있다.
넷째, 평신도의 성경 지식이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신학 및 성경 연구는 더 이상 목회자의 전용물이 아니다. 평신도 사역이 부각되면서 평신도의 지적 수준은 매우 향상되었다. 이번 주 설교에 대해 설교자와 평신도간에 심각한 토론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렇듯 목회 및 신앙생활의 상황은 다원화되고 변화되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 137:4)라고 노래한 시편기자의 심정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궁극적이며, 삶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목말라하는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찾는다.
이제 목회 및 신앙의 근본에서 다시 정립해야 할 때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영성 회복, 또는 영성 형성이 떠오르고 있다.
<영성사의 전환점> 기독교 영성사의 흐름도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와 같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 죽는 것과 같이, 주류에서 벗어난 영성의 지류란 “물 없는 샘”(벧후 2:17)일 뿐이다. 여기서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어느 전통과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무엇이냐?
세상이라는 사막을 여행하고 있는 목마른 우리들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몇 해 전 설문조사에 현대 기독교인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 체험”이라고 나타났다. 이 체험을 나는 “영성”이라는 단어로 요약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을 지경이 되자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신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흰 떡가루 같은 것을 내려주셨다. 생전 처음 먹어본 그들 중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만나”라고 부르기로 했다. 만나란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의미의 말이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신비이며 오의(奧義)다.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라고 했다. 영성은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신비다. 주님은 제자 도마에게 신비를 신비 그대로 믿는 것이 신실한 신앙 태도라고 교훈하셨다.
영성이란 인간 역사 안에서 존재하였으며,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많고 다양하다. 사람마다 그 정의가 다르고, 또 달라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지명하여(사 43:1)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성탐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 영성 탐구는 이론이나, 학문, 개념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제로 체험하여 개인적인 삶과 인격으로 형성되며, 성(聖)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인류적으로는 역사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의 강, 많은 지류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歷史)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과, 신앙인의 삶으로 구체화된 개인적인 모습과 성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하나의 강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영성사에서 크게 여섯 점환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길을 잃었을 때 바른 길로 방향을 틀어주심이다. 그러는 동안 강의 큰 줄기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계획에 따라 흐르며, 이에 응답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모습들이 강의 지류를 만들고 있다.
<영성사의 전환점> 기독교 영성사의 흐름도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와 같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 죽는 것과 같이, 주류에서 벗어난 영성의 지류란 “물 없는 샘”(벧후 2:17)일 뿐이다. 여기서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어느 전통과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대형/ 은성출판사 대표 hermits@chollian.co

기독교 영성을 기존의 신앙생활과 다르거나, 심지어 기독교의 또 다른 종파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침체되거나 성장을 멈춘 목회에 대한 해결책과 수단으로 기대를 갖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현대 목회가 갖는 딜레마는 첫째, 지식의 다변화와 전문화다. 과거, 목회자는 영역에 관계없이 만능이고 전지전능한 지도자로 존경을 받아왔다. 그러나 사회, 문화, 정치, 교육 등 각 분야별 전문가가 그루(guru)가 된다. 목회자의 설교는 인터넷과 유선 방송 등에서 같은 상황에 대한 전문가의 해설과 비교하여 평가를 받게 된다.
둘째, 세계화의 경향이다. 수년 전 미국과 이라크 전쟁에서 미사일 발사에서부터 목표물에 적중하는 것을 실황으로 볼 수 있었다. 지구 저편에서 일어나는 홍수와 기아와 폭력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그들의 고통에 참여한다. 뉴욕 월가의 지표가 한국의 투자자들의 행, 불행의 동시적인 지표가 된다. 금주의 설교 내용은 이미 낡은 상황에 대한 해설이거나, 아니면 회중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자칫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셋째, 교회만이 진리를 선포하는 유일한 장(場)이 아니다. 영적 서적들과 각종 세미나, 교양 교육, 기도원 및 수도원에서 행하는 피정 등도 목회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다. 주 5일 근무로 인한 교회 이탈 환경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그리고 불교도와 무슬림과 이웃하며 살고 있다.
넷째, 평신도의 성경 지식이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신학 및 성경 연구는 더 이상 목회자의 전용물이 아니다. 평신도 사역이 부각되면서 평신도의 지적 수준은 매우 향상되었다. 이번 주 설교에 대해 설교자와 평신도간에 심각한 토론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렇듯 목회 및 신앙생활의 상황은 다원화되고 변화되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 137:4)라고 노래한 시편기자의 심정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궁극적이며, 삶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목말라하는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찾는다.
이제 목회 및 신앙의 근본에서 다시 정립해야 할 때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영성 회복, 또는 영성 형성이 떠오르고 있다.
<영성사의 전환점> 기독교 영성사의 흐름도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와 같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 죽는 것과 같이, 주류에서 벗어난 영성의 지류란 “물 없는 샘”(벧후 2:17)일 뿐이다. 여기서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어느 전통과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무엇이냐?
세상이라는 사막을 여행하고 있는 목마른 우리들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몇 해 전 설문조사에 현대 기독교인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 체험”이라고 나타났다. 이 체험을 나는 “영성”이라는 단어로 요약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을 지경이 되자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신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흰 떡가루 같은 것을 내려주셨다. 생전 처음 먹어본 그들 중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만나”라고 부르기로 했다. 만나란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의미의 말이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신비이며 오의(奧義)다.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라고 했다. 영성은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신비다. 주님은 제자 도마에게 신비를 신비 그대로 믿는 것이 신실한 신앙 태도라고 교훈하셨다.
영성이란 인간 역사 안에서 존재하였으며,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많고 다양하다. 사람마다 그 정의가 다르고, 또 달라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지명하여(사 43:1)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성탐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 영성 탐구는 이론이나, 학문, 개념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제로 체험하여 개인적인 삶과 인격으로 형성되며, 성(聖)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인류적으로는 역사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의 강, 많은 지류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歷史)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과, 신앙인의 삶으로 구체화된 개인적인 모습과 성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하나의 강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영성사에서 크게 여섯 점환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길을 잃었을 때 바른 길로 방향을 틀어주심이다. 그러는 동안 강의 큰 줄기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계획에 따라 흐르며, 이에 응답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모습들이 강의 지류를 만들고 있다.
<영성사의 전환점> 기독교 영성사의 흐름도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와 같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 죽는 것과 같이, 주류에서 벗어난 영성의 지류란 “물 없는 샘”(벧후 2:17)일 뿐이다. 여기서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어느 전통과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대형/ 은성출판사 대표 hermits@chollia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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