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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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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묻혀있는 공동묘지 앞에서 울고 있는 이스라엘인.
파토스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은 “나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이며, 이것은 종교심과 인생관을 좌우한다. 어떤 이는 인생을 한 조각의 뜬구름으로 노래했다.
“인생이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나는 것, 죽음이란 한 조각의 구름이 사라지는 것, 생이란 원래 없었던 것이므로 삶과 죽음에 집착할 것이 무엇인가?”
나는 3년 전에 아버지를 떠나 보냈다. 사십 줄에 늦둥이로 얻은 나를 무척 사랑하셨는데, 운명하시던 전 날 무슨 예감이라도 드셨는지 쉰 목소리로 힘을 다해 내 이름을 부르셨다. 이제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 장례를 치르고 산을 내려오는데 문뜩 옛 시구가 떠올랐다. “평토제를 지내고 사람들이 흩어진 후, 산은 적적하고 달은 황혼에 걸렸구나”(平土祭 人散後 山寂寂 月黃昏).
나는 회심곡을 즐겨 듣는다. 몇 해 전 개인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 관악산에 자주 올랐다. 거기서 구입한 테이프를 혼자 장거리 운전을 할 때면 듣는다. 상여를 메고 떠나면서 부르는 만가(輓歌)에는 허무와 슬픔이 서려 있다.
“어제까지 울 너머로 세상 얘기하던 님이, 자고 나니 허망하게 베옷 입고 꽃신 신고, 명정 창포 앞세워서 저승길이 웬 말이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북망산 머나먼 길”.
비관론자들은 인생을 무덤을 향한 일직선의 여정으로 본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은 기대할 어떤 것도 없으며 모두가 허망하다고 한다.
시편 기자도 무상한 인생을 노래했다. 사람은 “한 번 쉬는 입김”에 불과하며 인생은 “지나가는 그림자”(시44:4)와 같다고 했다. 인간의 일생을 “손바닥만큼”(시39:5~6) 된다고 했다. 솔로몬은 인생을 “헛되다”(전1:1)고 결론 지으며 전도서를 시작했다. 야고보는 생계를 세우는 성도들에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고 했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 인생에는 허무와 비애(pathos: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슬픈 운명) 외에는 그 무엇도 없단 말인가!
인생 여정
기독교는 인간의 파토스를 신앙 여정의 출발점이며 동인(動因)으로 본다. 산상수훈에서 삶의 파토스적인 정황을 “가난”과 “애통(신음)”으로 꼽고 있다. 가난이란 경제적인 궁핍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소유로도 삶의 의미를 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청빈한 태도를 가리킨다. 애통이란 죄와 고통과 죽음을 지고 끙끙거리는 인생이지만 주님을 따르려는 자들이 발하는 신음 소리다. 중국의 석학 오경웅 박사는 <내심낙원>에서 이 가난과 애통을 신앙의 움이 트는 것으로 표현하여 맹아(萌芽)의 단계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여행을 ‘목적지로의 이동’이라고 생각한다. 인생 여정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을 향한 사막 여정으로 비견한다. 요한 클리마쿠스의 천상을 향해 올라가는 30계단의 <사다리>, 존 번연의 <천로역정>, 한나 허나드의 <암사슴 발과 같이> 등 신앙 여정을 풍유적으로 쓴 책들이 있다. 영성의 진보를 정화, 조명, 합일의 단계로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단계는 한 단씩 밟는 계단이 아니라 상황을 말한다. 상황에는 순서가 없으며, 한 상황은 다른 상황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순서대로 밟는 계단으로 오해한다면 바리새인 같은 신앙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한편, 신앙의 여정을 내면으로 향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작금에 선불교나 힌두교 등으로부터 수행법이 소개되면서, 지나치게 편향되는 경향이 보여 염려스럽다. 인간 내면의 탐구는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내면을 향한 여정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우리를 세상과 격리시키고 현실 도피적으로 만든다.
초대 교부 에바그리우스는 원주(圓周)의 원리를 설명했다. 인간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며, 그 중심은 어디에도 있다. 그리고 원주 위에 자신과 이웃들과 삶의 모든 정황들이 놓인다. 내면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원주 위의 것들도 가까워진다. 궁극적으로 중심과 합일을 이룰 때면, 이웃은 타자가 아니라 바로 “나”다. 이웃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러한 영성적인 여정은 내면과 외면을 향한 동시적인 것이며, 이 삶의 여정은 빙글빙글 돌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나선형이다.
여기 지금
헬라어에 시간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크로노스(chronos)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기준한 시간이며, 카이로스(kairos)는 중요한 사건의 때를 의미한다. 1세기 근동지방에서는 결혼식의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신랑이 나타나는 시각이 예식이 시작되는 시각이다. 그러므로 지각하는 신랑은 없다. 마태복음 25:1~13에서 신랑이 오는 때가 바로 그 때이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카이로스는 주인공이 정각을 결정한다.
하나님은 두 종류의 시간 모두의 주인이시다. 주님의 성육신과 재림과 심판은 크로노스 안에서 일어나는 카이로스이다. 성경의 사건은 “그 때 거기”에서 일어났지만, 이제 그 일들이 “여기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 현존의 영성이다. 하나님 현존의 영성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분리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이 광장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았다. 순례자는 금화를 내보이며 말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가르쳐 준다면 이것을 주겠소”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는 생각하더니 하루 종일 구걸한 돈을 순례자 앞에 내밀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을 말해 주신다면 이걸 모두 드리겠소.”
인생 지도 그리기
하나님 임재를 체험하는 훈련은 먼저, 개인의 생육력(生育歷)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는 훈련이다. 생육력이란, 앞에서 언급했던 ‘기독교 영성사의 흐름도’와 같이, 자신의 ‘인생 지도’다. 자신의 인생 지도를 작성하려면 먼저 지난 날들을 십대, 청년, 장년, 노년 등으로 크로노스적으로 나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일어난 중요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시고 역사하신 바를 카이로스적으로 살펴 적는다. 이것은 한 번만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신을 묵상하면서 보완해 나간다. 처음에는 별로 적을 것이 별로 없지만 영성이 깊어질수록 적을 것이 많아지고, 전에는 슬픔과 원망의 일들이 이제는 감사할 것으로 변화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되면 내 존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변화를 받는다.
최대형/ 은성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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