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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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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 부모님이 우리가 사는 신혼집을 다니러 왔다. 6남매 중 막내인 우리 집에 부모님이 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아내는 어색해하며 물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셨어요? 상 차릴까요?” 했다가, “아니, 됐다, 됐다”는 대답을 듣고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식사를 했으리라 생각하면서 상 차리기를 그만두었다. 저녁 때가 다 되어서 부모님은 옆에 사는 형님 댁으로 갔다. 얼마 후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한 눈치가 보였다. 무슨 일인지 형님에게 은근히 물었더니, “서울 막내 집에 갔다가 밥도 못 얻어 먹었다”고 서운해한다는 것이었다. 서울 토박이 새댁인 아내는 경상도 토박이 시부모님의 “됐다”는 의미를 알지 못했던 해프닝이었다. 이제 아내는 이 촌놈과 30년이나 같이 살면서 “됐다!”는 말을 잘 알게 되었다.
대기업에서 신축 공장 건설 팀원으로 일하던 때였다. 땅에서 수 톤이나 되는 H빔을 크레인으로 올리면서 아득히 높은 꼭대기에 있는 기술자와 교신한다. 밑에 있는 기술자가 묻는다. “됐나? 오버!” 그러면 위에 있는 기술자가 대답한다. “됐다, 오버!” 무엇이 됐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서로 “됐다”라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남들은 모르지만, 그들만이 교감하는 언어로써 한 치의 오차가 없이 튼튼한 공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관계였다. 서로를 안다는 것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두 권의 책을 주셨다. 자연과 성경이 그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목적이 같다. 저자이신 하나님을 우리로 하여금 창조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알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자신을 모르는 자이며,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은 향방없이 달리는 마라토너와 같으며,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와 같다(고전 9:2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신을 아는 지식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통하며, 이렇게 볼 때 신학과 인류학은 둘이 아니다.
헬라 사고로 ‘안다’는 정신(mind)과 마음(heart)의 기능으로 분리된다. 정신은 이론적이며 이성적인 추리로써 아는 것이며, 마음은 논리나 이성을 초월하여 체험적이며 직관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사고로는 정신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안다”는 단어로 남녀간의 교합을 의미하는 “야다”(yada)라는 말을 사용한다. 창세기 4:1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Now the man knew his wife;NRSV)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신랑이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결혼하여 신방에 든다는 것이다. 결혼하는 순간 신랑의 신분에 따라 신부의 신분도 변한다. 하나님을 앎으로써 우리의 신분에 변화가 온다. 즉, 구원받은 자가 된다.
영성신학에서는 정신의 작용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며, 마음의 작용은 그 대상과 ‘합일’을 이룬다고 설명한다. 정신의 작용으로는 ‘나’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마음의 작용으로는 더 이상 나와 하나님은 둘이 아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정신을 가지고 마음으로 내려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정신과 마음은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방법으로써 차별이 없어진다. 기독교 영성에서 묵상(meditation)을 정신작용, 관상(contemplation)을, 좁은 의미이지만, 마음의 작용이라고도 한다. 묵상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며 관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정보와 지식의 차원으로 아는 것이지만,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는 없다. 관상은 나와 하나님은 둘이 아니며 한 몸을 이룬 영적 혼인관계를 갖는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구별은 없다. 그대가 내 안에, 내가 그대 안에 있다. 성 삼위 하나님이 일체를 이루듯, 나와 하나님이 합일을 이룬 상태가 된다.
묵상의 범주와 훈련
미국 뉴욕주 코닝시를 자주 여행했었다. 엘마이라 공항에서 코닝 시티로 들어가면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굽이치노라면 산 중턱에 “Jesus is the Answer”라고 쓴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글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나의 묵상이 된다. 예수님은 그 글을 통해 여전히 내 마음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성 형성에 있어서 묵상의 몇 가지 범주를 나열하고자 한다.
1) 자연 묵상: 자연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득 차 있다. 프란시스코는 피조의 만물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같은 선상에 동일하게 놓고 보았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그릇이며, 하나님을 가리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도구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피조물을 의인화하여 형제 태양, 누이 달빛, 형제 늑대, 자매 새들, 심지어 그의 말년에 죽음을 “어머니 죽음이여!”라고 반겼다.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자연을 보고 배우자! 그 안에 사랑이 넘치도록 가득하다.
2) 인생 묵상: 영성에서는 인생을 여행으로 본다. 여행의 방향은 요람에서 죽음을 향한 직선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내주(內住)하시는 내면을 향한다. 인생 묵상의 목적은 인생을 주관자를 알고 그에게 순종하고 내어 맡기는 데 있다. 인생 묵상의 대상은 첫째,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의 인생은 좋은 묵상 재료이다. 자신의 지난날들을 시간과 장소로 구분하여 상세히 회상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인생 지도를 그리는 것은 영성 생활에 있어서 필수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바로 회개와 고백이며,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함이다. 두 번째는 성경의 인물을 묵상함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묵상하며, 자기 자신의 삶과 비견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유익하다. 나는 넘어질 때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를 비교하며 묵상한다. 세 번째는 교부, 성인 성녀, 순교자, 순교자적인 삶을 산 현대인들의 삶을 묵상함이다. 네 번째는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인생관을 탐구함이다. 인도에서 인생을 묵상하기 위해서 갠지스 강을 찾는다. 어떤 이들은 방금 죽은 시신 곁을 떠나지 않고 그것이 백골이 될 때까지 관찰(白骨觀)하며 허무한 인생을 묵상하는 이들도 있다.
3) 영적 독서: 영적 독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이며, 둘째는 경건 서적을 읽는 것이다. 5세기 성 베네딕트는 당시 너무 엄격하고 세세한 생활 규칙을 정리하여 ‘규칙’을 정립했다. 이 규칙이 현대 서방 수도원과 교회 생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베네딕트는 규칙을 통해 기도, 독서, 노동을 강조했다. 여기서 독서란 영적 독서를 말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귀고 2세(Guigo II)에 의하여 영적 훈련(spritale exercitium)으로 정리되었으며, 이것을 렉치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라고 한다. 렉치오 디비나는 말씀을 읽고(lectio), 묵상하고(meditation), 기도하고(oratio), 관상하는(contemplatio) 4단계로 설명한다.
최대형/ 은성출판사 대표 hermits@choll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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