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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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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의 대화 주간기독교 통권 1511 호
어두운 밤의 영성

부정의 영성
기독교 역사적으로 볼 때 초대 및 초기 중세에는 수도원 생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 수덕적인 영성이 발달되었으며, 프란시스 및 도미니크의 탁발수도회를 지나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신비적인 영성이 특징으로 지어졌다. 여기서 수덕적인 영성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하심에 인간의 노력이 연합하는 신앙생활을 뜻하며, 신비적인 영성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삶을 뜻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수덕생활은 아직 주체로서의 “나”와 객체로서의 “하나님”과 구분된 관계를 말하며, 신비생활은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대의 수덕적인 영성과 중세의 신비적인 영성이 연결됨으로써 그 동안 별개로 이해했던 것이 통합적인 영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신비적인 요소가 없는 수덕생활은 허황된 것이며, 수덕생활이 없는 신비주의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기독교 신비의 전통을 부정(apophatic)의 영성이라 하며, 이에 대한 이론을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이라고 한다. 여기서 부정이란 신학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긍정문을 사용하지 않고 부정문을 사용한다고 해서 “부정의 신학”이라고 한다.
부정의 영성은 정교회 전통에서 발전되었으며, 지금도 정교회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부정은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분석적인 서방교회 전통과는 정교회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따지고 분석함으로써 지성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 그대로 알고자 한다. 따라서 신비를 “신비 그 자체로 둔다”는 부정(apophatic)의 전통은 유한한 피조물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고전 13:12) 보려는 신앙태도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정의 영성
성경에는 부정의 영성을 설명한 곳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써 이를 증명한다. 왜냐하면 부정의 영성은 나는 지금 글로 설명하고 있지만 언어로써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곤란을 당할 때마다 애굽의 “고기 가마”(출 16:3)를 회상하며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다. 시내산에 들어간 모세의 소식이 끊기자 백성들은 금붙이를 모아다가 자신들을 위하여 새로운 신상을 만들었다. 그 동안 보이지 않고 백성들이 마음에 들게만 하지 않았던 야훼보다는 그들이 만들고, 여기 저기 마음대로 옮겨놓을 수 있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만족시켜 줄 것으로 기대되는 신(神)이 필요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신상을 철저히 부수지 않고는, 심지어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모두 죽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곳은 수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40년이 걸렸다. 현대 신앙인들은 이러한 우상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다. 하나님을 은사로 보는 것 자체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부정의 의미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옷은 벗겨졌으며,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배반했으며, 심지어 아버지마저 외면하시는 제 육시를 맞으셨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철저한 무(無), 절대무(絶對無)가 주는 고통으로 인해 인간 예수의 절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였다. 그런 다음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주님의 승천은 인성이 신성으로의 온전한 변화, 아버지와 성령과 일체를 이루는 성자의 자리로의 회귀(回歸)를 뜻한다.
어둔 밤 영성과 현대 방식
14세기의 대표적인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은 <어두운 밤>을 집필했다. 당시 수도회를 개혁하려는 그의 투쟁을 막기 위해 지도자들은 그를 어두운 방에 가두었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두운 감방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을 보면서 “어두움이 발하는 빛”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그의 사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인간의 지식과 오감이 철저히 어두워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빛이 발한다“는 것이다. 이 어두움은 앞에서 언급한 우상파괴와 벗겨짐을 의미한다.
인간에 있어서 어두운 밤은 고통의 시간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요 12:24) 과정이다. 고통하는 욥의 삶이다. 이러한 삶은 누구에게나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어두운 밤을 체험하고, 정말 어쩔 수 없이 닥쳐올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 훈련한다. 이것이 어둔 밤의 영성훈련이다.
이러한 부정의 전통은 지나친 나머지 개인적인 신비주의로 흐르는 과오를 낳았다. 이에 반하여 14세기에 오캄의 윌리엄은 부정의 전통을 과거의 방식이라고 규정하면서, “현대 방식”(via moderna)을 주창하였다. 현대 방식에서는 “믿음이란 기도, 봉사, 성경읽기, 사회 참여 등으로 반드시 ‘표출’되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신앙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윌리엄의 본 뜻과는 달리 “표출되는 신앙“에 집착한 나머지 지나친 형식주의를 낳게 되었다. 이런 과도한 형식주의가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개신교회 전통과 부정의 영성 훈련
어둔 밤의 영성훈련은 우리 나라 개신교회 전통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우리 나라 개신교회는 철저한 현대 방식에 뿌리를 둔 긍정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교회는 교회 건물의 크기, 헌금의 액수, 교인의 수, 사회 활동, 파송한 나라와 선교사의 수 등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좋은 교인이란 십일조 여부와 액수, 전도, 봉사, 은사의 여부 등으로 판가름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은 좋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기준―그것이 하나님의 고유 영역임에도 불구하고―은 밖으로 “표출되는” 것에 우선을 두는 것은 교회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개인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선물을 구하거나,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분이 나에게 신심이 좋다는 청년을 소개한다며 “교회 행사가 결정되면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때가 작년 가뭄으로 인해 양수기 모금 운동을 벌이던 때였다. 물론 비를 내리게도 하시며, 안 내리게도 하시는 천지 주재자이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간구하는 신앙 태도를 비평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넘어 계시는 하나님에 마음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영성훈련에서는, 특히 어둔 밤의 영성 훈련은 “아니다”라는 말의 훈련이 필요하다. 단지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다. 언어로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침묵기도의 훈련이다.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영적 독서(lectio divina)의 훈련이다. 선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을 보는 훈련이다. 삶의 어두움에서 고통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을 통해서 주시는 피조되지 않은 빛을 보는 훈련이다.
최대형/ 은성출판사 대표 hermits@chollian.com
어두운 밤의 영성

부정의 영성
기독교 역사적으로 볼 때 초대 및 초기 중세에는 수도원 생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 수덕적인 영성이 발달되었으며, 프란시스 및 도미니크의 탁발수도회를 지나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신비적인 영성이 특징으로 지어졌다. 여기서 수덕적인 영성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하심에 인간의 노력이 연합하는 신앙생활을 뜻하며, 신비적인 영성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삶을 뜻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수덕생활은 아직 주체로서의 “나”와 객체로서의 “하나님”과 구분된 관계를 말하며, 신비생활은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대의 수덕적인 영성과 중세의 신비적인 영성이 연결됨으로써 그 동안 별개로 이해했던 것이 통합적인 영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신비적인 요소가 없는 수덕생활은 허황된 것이며, 수덕생활이 없는 신비주의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기독교 신비의 전통을 부정(apophatic)의 영성이라 하며, 이에 대한 이론을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이라고 한다. 여기서 부정이란 신학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긍정문을 사용하지 않고 부정문을 사용한다고 해서 “부정의 신학”이라고 한다.
부정의 영성은 정교회 전통에서 발전되었으며, 지금도 정교회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부정은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분석적인 서방교회 전통과는 정교회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따지고 분석함으로써 지성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 그대로 알고자 한다. 따라서 신비를 “신비 그 자체로 둔다”는 부정(apophatic)의 전통은 유한한 피조물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고전 13:12) 보려는 신앙태도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정의 영성
성경에는 부정의 영성을 설명한 곳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써 이를 증명한다. 왜냐하면 부정의 영성은 나는 지금 글로 설명하고 있지만 언어로써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곤란을 당할 때마다 애굽의 “고기 가마”(출 16:3)를 회상하며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다. 시내산에 들어간 모세의 소식이 끊기자 백성들은 금붙이를 모아다가 자신들을 위하여 새로운 신상을 만들었다. 그 동안 보이지 않고 백성들이 마음에 들게만 하지 않았던 야훼보다는 그들이 만들고, 여기 저기 마음대로 옮겨놓을 수 있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만족시켜 줄 것으로 기대되는 신(神)이 필요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신상을 철저히 부수지 않고는, 심지어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모두 죽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곳은 수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40년이 걸렸다. 현대 신앙인들은 이러한 우상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다. 하나님을 은사로 보는 것 자체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부정의 의미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옷은 벗겨졌으며,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배반했으며, 심지어 아버지마저 외면하시는 제 육시를 맞으셨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철저한 무(無), 절대무(絶對無)가 주는 고통으로 인해 인간 예수의 절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였다. 그런 다음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주님의 승천은 인성이 신성으로의 온전한 변화, 아버지와 성령과 일체를 이루는 성자의 자리로의 회귀(回歸)를 뜻한다.
어둔 밤 영성과 현대 방식
14세기의 대표적인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은 <어두운 밤>을 집필했다. 당시 수도회를 개혁하려는 그의 투쟁을 막기 위해 지도자들은 그를 어두운 방에 가두었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두운 감방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을 보면서 “어두움이 발하는 빛”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그의 사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인간의 지식과 오감이 철저히 어두워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빛이 발한다“는 것이다. 이 어두움은 앞에서 언급한 우상파괴와 벗겨짐을 의미한다.
인간에 있어서 어두운 밤은 고통의 시간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요 12:24) 과정이다. 고통하는 욥의 삶이다. 이러한 삶은 누구에게나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어두운 밤을 체험하고, 정말 어쩔 수 없이 닥쳐올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 훈련한다. 이것이 어둔 밤의 영성훈련이다.
이러한 부정의 전통은 지나친 나머지 개인적인 신비주의로 흐르는 과오를 낳았다. 이에 반하여 14세기에 오캄의 윌리엄은 부정의 전통을 과거의 방식이라고 규정하면서, “현대 방식”(via moderna)을 주창하였다. 현대 방식에서는 “믿음이란 기도, 봉사, 성경읽기, 사회 참여 등으로 반드시 ‘표출’되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신앙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윌리엄의 본 뜻과는 달리 “표출되는 신앙“에 집착한 나머지 지나친 형식주의를 낳게 되었다. 이런 과도한 형식주의가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개신교회 전통과 부정의 영성 훈련
어둔 밤의 영성훈련은 우리 나라 개신교회 전통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우리 나라 개신교회는 철저한 현대 방식에 뿌리를 둔 긍정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교회는 교회 건물의 크기, 헌금의 액수, 교인의 수, 사회 활동, 파송한 나라와 선교사의 수 등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좋은 교인이란 십일조 여부와 액수, 전도, 봉사, 은사의 여부 등으로 판가름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은 좋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기준―그것이 하나님의 고유 영역임에도 불구하고―은 밖으로 “표출되는” 것에 우선을 두는 것은 교회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개인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선물을 구하거나,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분이 나에게 신심이 좋다는 청년을 소개한다며 “교회 행사가 결정되면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때가 작년 가뭄으로 인해 양수기 모금 운동을 벌이던 때였다. 물론 비를 내리게도 하시며, 안 내리게도 하시는 천지 주재자이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간구하는 신앙 태도를 비평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넘어 계시는 하나님에 마음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영성훈련에서는, 특히 어둔 밤의 영성 훈련은 “아니다”라는 말의 훈련이 필요하다. 단지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다. 언어로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침묵기도의 훈련이다.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영적 독서(lectio divina)의 훈련이다. 선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을 보는 훈련이다. 삶의 어두움에서 고통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을 통해서 주시는 피조되지 않은 빛을 보는 훈련이다.
최대형/ 은성출판사 대표 hermits@choll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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