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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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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김조년 교수 (deulsori@chollian.net)
◎ 홈페이지:http://www.deulsoritimes.co.kr
[1029]교회와 공동체
우리 사회에서는 언젠가부터 공동체를 아름답게 보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민족공동체', `지역공동체', `이념공동체', `생명공동체', `생활공동체', `교회공동체', `마을공동체' 따위의 공동체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공동체의 형태 역시 매우 다양하고 이상에 가까운 것을 찾아보려고 노력들을 하였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공동체에 문제를 거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로 치부될 때도 있었다. 이미 공동체는 과거나 현재나 변함 없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본으로 상정하여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삶의 본은 때로 지나친 보수주의와 폐쇄주의에 빠지는 것으로 복고주의로 돌아가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지나친 급진주의로 인정되어 어렵게 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우리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좋게 보려는 흐름이 매우 세게 흐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사회를 규정하고 이끄는 자본주의사회는 모든 것을 맘몬의 세계로 보고 따지려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끈끈한 인간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이 좋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의하여 이합집산하는 것으로, 너무 살벌한 경쟁을 벌여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란다. 이른바 이익사회에 대안으로 공동사회, 공동체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익사회도 없고, 이해관계를 넘는 공동체도 없다.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사회라는 사람들의 모둠살이는 이해관계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다. 앞에 내세우는 것은 지역, 이념, 종교, 씨족, 민족, 교육과 같은 추상개념들이지만, 그것들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것일 뿐 내용은 이해득실에 있다. 앞에 내세우는 것을 통하여 이해득실을 명확하게 하자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래서 공동체를 말하면서 앞에 수식하는 개념들을 강조할수록 그 공동체는 알맹이 없는 껍질, 권력을 오래도록 자기 손에 쥐려는 뜻을 감춘 허울과 형식에 가깝다. 껍질이 강한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일사불란하여 훌륭한 공동체로 밖에 드러난다. 그러나 속은 매우 답답하고 정지되어 있다. 생명의 약동함을 거기에서 찾기는 매우 힘들다. 원래 모든 공동체, 모둠살이들이 처음에는 매우 활발하고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그것이 잘 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같이 하는 사람들도 그러하다고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속알보다는 겉껍질이 성성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내용은 표어에 불과하고 조직관리가 내용을 대신하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공동체의 타락이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들은 생명을 잃고 답답함을 느낀다. 이러한 때는 이미 과격하게 그 공동체를 깨버리고 새롭게 할 혁명의 단계에 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상당히 많은 교회들 어디에서도 공동체란 말을 쓰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참여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오고가지 않는 조직, 위계질서가 위와 아래, `하라' 하고 `예' 하는 관계, 끌고 따르는 관계, 존경을 받고 존경하는 층이나 사람이 따로 있는 모양은 공동체라고 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4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교회 공동체는 깨지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였단다. 맞다고 생각한다. 그 말 속에는 공동체는 생명의 역동성을 생명으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공동체의 가장 가깝고 긴밀한 것을 가족으로 보는 수가 많지만, 전통가족은 결코 서로 인격을 존중하는 생명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피와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매우 튼튼한 조직체계에 불과하였다. 그에 반하여 교회는 원래는 모든 것을 초월한, 선생과 제자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왕과 신하의 관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관계, 부자와 가난한 자의 관계, 아는 것이 많은 자와 무식한 자의 관계, 몸이 건강한 자와 아픈 자의 관계에서 그냥 보통 일상에서 일어났던 관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회가 조직이 되면서, 정치가 되면서 이 관계는 새롭게 일반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조직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유지하게 되었다. 이제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여야 할 단계다.
함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각자 사람 속에 있고 없음을 나누고, 낮고 높은 자가 서로 섬기고, 한 사람과 사회가 통합이 되고, 거룩한 것과 바쁜 일상생활이 통일 되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일치된 상태로 나타나게 하는 삶의 본이 교회생활이 돼야 할 것이다. 말씀과 생활이 일치하고, 진리와 현실이 통일되는 모습을 교회라는 공동체가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교회라는 울타리나 틀을 넘어서 일상생활에서 말씀이 실현되는 모습으로 교회가 나가야 바람직할 것이다.
한남대 사회과학대학 학장
◎ 홈페이지:http://www.deulsoritimes.co.kr
[1029]교회와 공동체
우리 사회에서는 언젠가부터 공동체를 아름답게 보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민족공동체', `지역공동체', `이념공동체', `생명공동체', `생활공동체', `교회공동체', `마을공동체' 따위의 공동체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공동체의 형태 역시 매우 다양하고 이상에 가까운 것을 찾아보려고 노력들을 하였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공동체에 문제를 거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로 치부될 때도 있었다. 이미 공동체는 과거나 현재나 변함 없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본으로 상정하여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삶의 본은 때로 지나친 보수주의와 폐쇄주의에 빠지는 것으로 복고주의로 돌아가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지나친 급진주의로 인정되어 어렵게 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우리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좋게 보려는 흐름이 매우 세게 흐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사회를 규정하고 이끄는 자본주의사회는 모든 것을 맘몬의 세계로 보고 따지려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끈끈한 인간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이 좋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의하여 이합집산하는 것으로, 너무 살벌한 경쟁을 벌여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란다. 이른바 이익사회에 대안으로 공동사회, 공동체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익사회도 없고, 이해관계를 넘는 공동체도 없다.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사회라는 사람들의 모둠살이는 이해관계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다. 앞에 내세우는 것은 지역, 이념, 종교, 씨족, 민족, 교육과 같은 추상개념들이지만, 그것들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것일 뿐 내용은 이해득실에 있다. 앞에 내세우는 것을 통하여 이해득실을 명확하게 하자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래서 공동체를 말하면서 앞에 수식하는 개념들을 강조할수록 그 공동체는 알맹이 없는 껍질, 권력을 오래도록 자기 손에 쥐려는 뜻을 감춘 허울과 형식에 가깝다. 껍질이 강한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일사불란하여 훌륭한 공동체로 밖에 드러난다. 그러나 속은 매우 답답하고 정지되어 있다. 생명의 약동함을 거기에서 찾기는 매우 힘들다. 원래 모든 공동체, 모둠살이들이 처음에는 매우 활발하고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그것이 잘 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같이 하는 사람들도 그러하다고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속알보다는 겉껍질이 성성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내용은 표어에 불과하고 조직관리가 내용을 대신하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공동체의 타락이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들은 생명을 잃고 답답함을 느낀다. 이러한 때는 이미 과격하게 그 공동체를 깨버리고 새롭게 할 혁명의 단계에 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상당히 많은 교회들 어디에서도 공동체란 말을 쓰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참여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오고가지 않는 조직, 위계질서가 위와 아래, `하라' 하고 `예' 하는 관계, 끌고 따르는 관계, 존경을 받고 존경하는 층이나 사람이 따로 있는 모양은 공동체라고 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4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교회 공동체는 깨지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였단다. 맞다고 생각한다. 그 말 속에는 공동체는 생명의 역동성을 생명으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공동체의 가장 가깝고 긴밀한 것을 가족으로 보는 수가 많지만, 전통가족은 결코 서로 인격을 존중하는 생명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피와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매우 튼튼한 조직체계에 불과하였다. 그에 반하여 교회는 원래는 모든 것을 초월한, 선생과 제자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왕과 신하의 관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관계, 부자와 가난한 자의 관계, 아는 것이 많은 자와 무식한 자의 관계, 몸이 건강한 자와 아픈 자의 관계에서 그냥 보통 일상에서 일어났던 관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회가 조직이 되면서, 정치가 되면서 이 관계는 새롭게 일반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조직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유지하게 되었다. 이제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여야 할 단계다.
함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각자 사람 속에 있고 없음을 나누고, 낮고 높은 자가 서로 섬기고, 한 사람과 사회가 통합이 되고, 거룩한 것과 바쁜 일상생활이 통일 되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일치된 상태로 나타나게 하는 삶의 본이 교회생활이 돼야 할 것이다. 말씀과 생활이 일치하고, 진리와 현실이 통일되는 모습을 교회라는 공동체가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교회라는 울타리나 틀을 넘어서 일상생활에서 말씀이 실현되는 모습으로 교회가 나가야 바람직할 것이다.
한남대 사회과학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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