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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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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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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newsnjoy.co.kr/rnews/pastorate-1.asp?cnewsDay=20030825&cnewsID=10
영성,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 존재에 침투

▲"하나님은 행하시고 영혼은 갈망한다." - 에크하르트.
ⓒ뉴스앤조이 신철민
영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목사에게 한 의사가 물었다. "당신은 영혼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영혼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영혼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혹은 영혼의 냄새를 맡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 모든 질문에 목사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의사가 "당신은 영혼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목사는 "예, 참으로 느꼈지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다섯 가지 감각 중에서 네 감각은 영혼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목사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의학박사이지요. 당신의 일은 사람의 고통을 다루는 것이지요. 그러면 당신은 환자들의 고통을 언제 한 번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아니지요? 당신은 단지 고통을 느꼈을 뿐입니다. 한 감각 이외에 네 가지 감각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나 당신과 나는 고통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중요한 이유는 보고, 듣고, 맛보고, 듣거나 냄새 맡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느낄 수 있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 한 영성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토대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이다. 우리는 영혼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영혼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영혼
에크하르트는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신비의 언어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행하시고 영혼은 갈망한다. 하나님은 힘을 가지고 계시고 영혼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 영혼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서 탄생하시게 하고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탄생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혼이 당신과 닮게 되도록 계획하신다.
영혼은 합일과 하나님의 보호를 갈망하며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탄생하게 하시고 자신이 하나님 안으로 자라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본성이 영혼의 빛 안으로 부어지며 그 안에서 영혼이 보존된다." 영성은 바로 이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 존재의 침투로 말미암아 형성된다.
우리말 영성은 영어의 Spirituality를 번역한 용어이다. 이 단어는 Spiritualitas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그것은 영적인 존재의 상태나 속성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이라는 번역어는 그 본래 뜻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영성의 본질을 생각해볼 때 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이 용어는 영성을 마치 영혼이 지닌 하나의 속성으로 이해하도록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성을 지성, 감성, 이성 등과 같이 인간이 지닌 영역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게 된다. 만약에 이 단어에서 풍기는 것처럼 영성이 인간 영혼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성이라는 용어는 영성이해나 수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혼과 물질, 몸과 마음,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 등 이분법적 사고로 이 양자간의 관계나 소통을 애써 무시하던 이전의 세계관에서 모든 실재를 상호 유기적이고 관계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상황 속에서 영성은 인간의 총체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본 뜻이 인간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지만 인간의 총체적인 삶 속에서 형성되고 성숙되고 표현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대마다 달라진 영성 이해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영성은 시대마다 달리 이해되어왔다. 초대교회는 영성을 그리스도의 신비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경험은 세례를 통해 인증된 믿음 속에서 시작하여, 주의 만찬 속에서 나눔으로 더 풍요로워졌고,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사랑 속에서 표현되었다.
영성이라는 용어는 5세기 처음 등장하는데, 이때 하나님의 영과 만나는 생명의 감각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그 이후 이 용어는 수세기 동안 사용되면서 의미가 점점 변하여 12세기부터는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 이 영성이라는 용어는 헌신된 삶을 의미했다. 1950년대부터 이 용어는 헌신, 동정, 내적인 생명, 영의 생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보더라도 그리스도교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열려 있는 용어다.
영성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각 역사와 시대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되고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을 단일하고, 통합된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영성을 특정 교파나 교단의 이해로 축소시켜 편협하게 할 위험이 있다.
영성은 내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다양하고 역동적인 관계에서 체험되고 표현되는 항상 열려진 개념인 것이다. 영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 그 자체를 문제삼을 수 없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와 정의에도 불구하고 가장 핵심적인 이해는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은 구원사건 체험으로 형성되며 이 체험은 영혼을 생명 있게 함으로써 인간의 생명력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출발은 지금도 구원사건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우리 영과의 만남을 통해 시작되며, 그 열매는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우주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어 있는 통전적이고 총체적인 영성이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는 한 영성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모습이며 필연적인 드러남이다. 영혼이 뿌리라면 영성은 열매이며, 영이 열매라면 영성은 맛이고, 영혼이 맛이라면 영성은 향기다. 영혼이 얼굴이면 영성은 표정이고, 영이 표정이라면 영성은 미소다. 영성은 영의 존재방식이다.
영혼이 지하수라면 영성은 거기서 나오는 샘물
영혼이 지하수라면 영성은 그 지하수로 말미암은 샘물이다. 영이 몸통이라면 영성은 몸에서 퍼져 나오는 울림이다. 우리의 영성은 우리 영혼의 되비침이다. 진정한 앎 없이 지성이 유지될 수 없듯이 영혼 없이 영성은 존재할 수 없지만, 앎(知)이 지성(知性)이 아니듯이 영 그 자체가 영성은 아니다. 숫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관계론적으로 영혼과 영성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롤하이저는 건강한 영혼, 곧 살아 있는 영성은 현실의 삶 속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활력이 넘치게 해주며, 활기차게 인생의 풍미를 즐기며 살게 해주고, 인생은 궁극적으로 아름답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어 소망으로 가능하도록 우리의 동맥에서 어떤 불꽃을 일으켜야 한다. 우리 속에서 이런 것이 느낌을 갖게 해주어 소망을 가득 차게 해주어야 한다. 우리 속에서 이런 것이 무너질 때는 언제든지 우리의 영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다. 냉소와 절망, 비통함 또는 좌절은 우리의 에너지를 마르게 하며 영혼을 손상시키기도 한다.
둘째, 건강한 영혼은 우리를 하나로 접착시켜주어야 한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의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혼란스러운 상태로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의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비틀거리며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 건강한 영혼은 바로 거기에서 통합시켜주는 원리로 작용한다.
우리는 인간의 영성을 눈으로 보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또 귀로 들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성을 추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영역으로 취급하려 한다. 그러나 영성은 형태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삶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느끼며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듯 영성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영성 안에 있다. 영성은 그저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작동시킨다.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영성 안으로 침투하며 우리를 변화시킨다.
한 알코올 중독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영성이 저에게 무엇을 줄까요?"
스승이 대답했다.
"알코올 없는 취기(醉氣)."
알코올 중독자는 알코올의 힘을 빌어 살아간다. 그 힘 없이는 마음이 불안하고, 삶의 기운도 차릴 수 없다. 그저 그 알코올 기운에 의지하여 취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중독에까지 이른 것이다. 알코올 없이도 취한 기운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알코올 중독자에게 하나의 복음(福音)이다. 그가 가장 의지하는 그 취기를 위해 몸과 마음을 망치고 있는 알코올 없이도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영성이 지닌 변화의 힘을 보여주는 비유다.
영성은 인간과 사물과 사건, 그리고 이 우주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며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동력이다. 참 영성은 새로운 인간다운 삶의 가치와 양식 속에서 자유와 기쁨의 맛을 알게 한다. 깊고 맑은 영성은 나 자신뿐 아니라 사회와 자연, 나아가서는 우주까지도 변화시켜낼 것이다.
"영성이 저처럼 세속적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사업가가 물었다.
"더 가지도록 도와줄 것이오." 스승이 말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덜 가지고 싶도록 가르쳐줌으로써."
김진 목사 / 크리스챤아카데미 상임연구원
엔크리스토출판사에서 기획한 '김진의 영성 이야기' 10권 중에서 첫 권 [그리스도교 영성]을 연재합니다.
영성,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 존재에 침투

▲"하나님은 행하시고 영혼은 갈망한다." - 에크하르트.
ⓒ뉴스앤조이 신철민
영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목사에게 한 의사가 물었다. "당신은 영혼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영혼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영혼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혹은 영혼의 냄새를 맡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 모든 질문에 목사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의사가 "당신은 영혼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목사는 "예, 참으로 느꼈지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다섯 가지 감각 중에서 네 감각은 영혼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목사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의학박사이지요. 당신의 일은 사람의 고통을 다루는 것이지요. 그러면 당신은 환자들의 고통을 언제 한 번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아니지요? 당신은 단지 고통을 느꼈을 뿐입니다. 한 감각 이외에 네 가지 감각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나 당신과 나는 고통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중요한 이유는 보고, 듣고, 맛보고, 듣거나 냄새 맡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느낄 수 있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 한 영성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토대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이다. 우리는 영혼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영혼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영혼
에크하르트는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신비의 언어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행하시고 영혼은 갈망한다. 하나님은 힘을 가지고 계시고 영혼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 영혼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서 탄생하시게 하고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탄생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혼이 당신과 닮게 되도록 계획하신다.
영혼은 합일과 하나님의 보호를 갈망하며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탄생하게 하시고 자신이 하나님 안으로 자라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본성이 영혼의 빛 안으로 부어지며 그 안에서 영혼이 보존된다." 영성은 바로 이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 존재의 침투로 말미암아 형성된다.
우리말 영성은 영어의 Spirituality를 번역한 용어이다. 이 단어는 Spiritualitas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그것은 영적인 존재의 상태나 속성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이라는 번역어는 그 본래 뜻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영성의 본질을 생각해볼 때 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이 용어는 영성을 마치 영혼이 지닌 하나의 속성으로 이해하도록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성을 지성, 감성, 이성 등과 같이 인간이 지닌 영역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게 된다. 만약에 이 단어에서 풍기는 것처럼 영성이 인간 영혼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성이라는 용어는 영성이해나 수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혼과 물질, 몸과 마음,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 등 이분법적 사고로 이 양자간의 관계나 소통을 애써 무시하던 이전의 세계관에서 모든 실재를 상호 유기적이고 관계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상황 속에서 영성은 인간의 총체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본 뜻이 인간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지만 인간의 총체적인 삶 속에서 형성되고 성숙되고 표현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대마다 달라진 영성 이해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영성은 시대마다 달리 이해되어왔다. 초대교회는 영성을 그리스도의 신비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경험은 세례를 통해 인증된 믿음 속에서 시작하여, 주의 만찬 속에서 나눔으로 더 풍요로워졌고,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사랑 속에서 표현되었다.
영성이라는 용어는 5세기 처음 등장하는데, 이때 하나님의 영과 만나는 생명의 감각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그 이후 이 용어는 수세기 동안 사용되면서 의미가 점점 변하여 12세기부터는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 이 영성이라는 용어는 헌신된 삶을 의미했다. 1950년대부터 이 용어는 헌신, 동정, 내적인 생명, 영의 생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보더라도 그리스도교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열려 있는 용어다.
영성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각 역사와 시대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되고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을 단일하고, 통합된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영성을 특정 교파나 교단의 이해로 축소시켜 편협하게 할 위험이 있다.
영성은 내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다양하고 역동적인 관계에서 체험되고 표현되는 항상 열려진 개념인 것이다. 영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 그 자체를 문제삼을 수 없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와 정의에도 불구하고 가장 핵심적인 이해는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은 구원사건 체험으로 형성되며 이 체험은 영혼을 생명 있게 함으로써 인간의 생명력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출발은 지금도 구원사건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우리 영과의 만남을 통해 시작되며, 그 열매는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우주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어 있는 통전적이고 총체적인 영성이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는 한 영성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모습이며 필연적인 드러남이다. 영혼이 뿌리라면 영성은 열매이며, 영이 열매라면 영성은 맛이고, 영혼이 맛이라면 영성은 향기다. 영혼이 얼굴이면 영성은 표정이고, 영이 표정이라면 영성은 미소다. 영성은 영의 존재방식이다.
영혼이 지하수라면 영성은 거기서 나오는 샘물
영혼이 지하수라면 영성은 그 지하수로 말미암은 샘물이다. 영이 몸통이라면 영성은 몸에서 퍼져 나오는 울림이다. 우리의 영성은 우리 영혼의 되비침이다. 진정한 앎 없이 지성이 유지될 수 없듯이 영혼 없이 영성은 존재할 수 없지만, 앎(知)이 지성(知性)이 아니듯이 영 그 자체가 영성은 아니다. 숫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관계론적으로 영혼과 영성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롤하이저는 건강한 영혼, 곧 살아 있는 영성은 현실의 삶 속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활력이 넘치게 해주며, 활기차게 인생의 풍미를 즐기며 살게 해주고, 인생은 궁극적으로 아름답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어 소망으로 가능하도록 우리의 동맥에서 어떤 불꽃을 일으켜야 한다. 우리 속에서 이런 것이 느낌을 갖게 해주어 소망을 가득 차게 해주어야 한다. 우리 속에서 이런 것이 무너질 때는 언제든지 우리의 영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다. 냉소와 절망, 비통함 또는 좌절은 우리의 에너지를 마르게 하며 영혼을 손상시키기도 한다.
둘째, 건강한 영혼은 우리를 하나로 접착시켜주어야 한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의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혼란스러운 상태로 거울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의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비틀거리며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 건강한 영혼은 바로 거기에서 통합시켜주는 원리로 작용한다.
우리는 인간의 영성을 눈으로 보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또 귀로 들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성을 추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영역으로 취급하려 한다. 그러나 영성은 형태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삶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느끼며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듯 영성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영성 안에 있다. 영성은 그저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작동시킨다.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영성 안으로 침투하며 우리를 변화시킨다.
한 알코올 중독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영성이 저에게 무엇을 줄까요?"
스승이 대답했다.
"알코올 없는 취기(醉氣)."
알코올 중독자는 알코올의 힘을 빌어 살아간다. 그 힘 없이는 마음이 불안하고, 삶의 기운도 차릴 수 없다. 그저 그 알코올 기운에 의지하여 취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중독에까지 이른 것이다. 알코올 없이도 취한 기운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알코올 중독자에게 하나의 복음(福音)이다. 그가 가장 의지하는 그 취기를 위해 몸과 마음을 망치고 있는 알코올 없이도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영성이 지닌 변화의 힘을 보여주는 비유다.
영성은 인간과 사물과 사건, 그리고 이 우주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며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동력이다. 참 영성은 새로운 인간다운 삶의 가치와 양식 속에서 자유와 기쁨의 맛을 알게 한다. 깊고 맑은 영성은 나 자신뿐 아니라 사회와 자연, 나아가서는 우주까지도 변화시켜낼 것이다.
"영성이 저처럼 세속적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사업가가 물었다.
"더 가지도록 도와줄 것이오." 스승이 말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덜 가지고 싶도록 가르쳐줌으로써."
김진 목사 / 크리스챤아카데미 상임연구원
엔크리스토출판사에서 기획한 '김진의 영성 이야기' 10권 중에서 첫 권 [그리스도교 영성]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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