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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현실교회에 대한 진단

수필칼럼사설 김기원 목사............... 조회 수 3099 추천 수 0 2003.09.15 11: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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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들소리신문 2003.2.26

김기원 목사는?
장위제일교회 담임목사로 활동중인 김기원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미국 루이지아나 크리스천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구 금천중앙교회, 의성덕은교회 담임목사와 서울남영교회에서 8년간 위임목사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총회신학원 상담학교수, 동경신학원, 미국 버밍햄 신학교, 미국 비젼 신학교 객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세계기독교 선교협의회 부회장, 기독교문화예술 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현실교회에 대한 진단

복음과 문화의 관계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속도문화와 성급한 체질이 급성장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하룻밤 사이에 자란 콩나물이 씨앗을 맺는 채소가 될 수가 없고, 삽질 한번 해서 펑펑 솟아나는 물이 생수일 수는 없듯이 이미 예상했던 결과가 한국교회에 노출되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좀 과격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날치기 목사안수 졸업식만 거창하게 하는 비양심, 비신앙적인 신학교 운영도 문제의 핵심 부분일 수도 있고, 세상학문이나 이력서는 당당하게 갖추었으나 영성은 골다공증 환자와 같은 탈 영성, 무 영성, 반 영성, 위장 영성 지도자들이 기독교지도자 역할을 해온 결과도 상당부분 원인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고, 직설적이라 기분 나빠도 도리 없이, 적어도 저가 보고 느낀 결과는 그렇게 봅니다만, 필자가 속이 좁아서 왜곡된 판단이 되었으면 하는 맘 간절합니다.
 성경의 질서는 회개한 베드로가 회개를 외칠 때 3천명이 회개했고, 회개한 요나가 회개를 외칠 때 니느웨성 전체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충만한 사도바울이 안수할 때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충만을 체험했던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적인 성공개념이 교회내에 깊숙히 뿌리내려 꿩잡는 것이 매라는 논리가 통하는 교회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경우가 절대 다수이겠지만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것도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건전한 종교(종교학에서는 고등종교)의 전성기는 언제나 도덕수준의 상승과 맥을 같이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역시 윤리나 도덕의 종교는 아니지만 그러나 교회 전성기는 역시 회개와 윤리 생활의 향상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령의 역사나 1907년도 우리나라 성령의 바람은 바로 회개의 역사였고 뜨거운 복음의 열풍이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지금의 성령운동, 영풍운동, 영성운동은 아무래도 그것이 아닌데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정착되고 크리스찬들이 복음적인 문화인으로 거듭나야 되는데 예수는 믿어도 문화는 기독교 문화가 아니기에 기독교의 전망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본받거나, 따라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따라오도록 하는 능력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기독교는 사양길에 있지만 그러나 문화는 기독교 문화로 이미 뿌리내려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화가 거듭나서 복음적인 문화인으로 확산되어 나아갈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게 될 것이고, 복음의 거룩한 것들은 이어져 갈 것입니다. 불교나 유교가 오랜 역사속에 이어져가는 것은 우리 나라의 문화가 그들의 문화를 정착시켰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문화가 거듭날려면 지도자들이 거듭나야 가능하지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훈련된 기드온 300용사와 제자가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성전건물이 적거나 없어서 망한것도 아니고, 사람이 적게 모여서 예수님의 의분과 눈물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정착은 기도와 말씀으로 가득채워진 슬기로운 다섯처녀의 등과 같은 영성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현실교회에 대한 진단(2)/복음과 성화의 관계 측면에서  
 장로교회는 칼빈의 5대교회를 중요시합니다. 그것은 칼빈이 창작해 낸 교리가 아니라 성경에 있는 것을 그가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라는 말보다는 칼빈이 정리한 성경의 교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칼빈이 정리한 5대교리는
 (1)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 전적무능
 (2)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4)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효과적 소명
 (5)성도의 궁극적 구원과 보호(Perseverance and Presvation of the saints) 입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의 영성론에서 칭의와 성화 즉 경건을 중요시 합니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크게 구별하지 아니했습니다. 즉 칭의가 순수하다면 그것은 외적으로 효력있는 성화로 연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와 칭의를 신앙의 이중 열매로 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속에서 하는 일이 적지 않지만 은밀히 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는 부분도 상당합니다. 또한 메스컴이 비판적인 것만 노출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면 우리 스스로가 반성하고 자각해야 될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경건과 성화가 따르지 않는 크리스찬은 기독교의 가치와 외적인 기능을 추락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경건은 독실한 생활, 헌신적 생활, 종교적 생활을 의미하지만 경건이 지닌 폭넓은 의미는 성화와 관계된 것이고 인간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사회 생활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벧후1:7).
 구원은 무조건적인 선택의 은혜로 되어지지만 경건과 성화는 원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됩니다. 그리고 세상과 죄와 자신과의 싸움과 부단한 훈련과 노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주의 일이나 선한 일은 힘써야 되는 것이기에 바울이 디모데를 소개하기를 “주의 일에 힘쓰는 자”라고 했습니다. 타락하고 속화되는 일은 가만히 있어도 되지만 경건은 연습(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성서의 윤리는 우리를 은혜의 내적인 역사에 관한 외적인 증거에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면 인간 앞에서 우리들이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땅의 윤리를 인격의 기준으로 삼듯이 신앙의 인격도 기독윤리의 기준에 의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기준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찬들을 이 세상의 윤리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십니다(딤전4:12, 약1:27).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고 어두움을 비치는 빛이 되어야 하고 모든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정직과 성실은 크리스찬의 중요한 덕목이요, 모든 삶의 원동력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본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인간의 범죄한 상태와 인간에게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성결과 정직은 복음의 영광입니다.
 한국교회의 양적인 부흥은 세계기독교 역사에 보기드문 현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속도문화와도 관련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열매요, 우리 믿음의 열조들의 순교의 피를 거름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적인 부흥은 아직 초신자 단계에서 머물고 있는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찾는 계속적인 노력보다는 상품종교화 되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곳에든지 크리스찬이 많이 섞여있지만 있다는 표가 나지 않는 것은 복음과 생활이 하나되지 못한 우리의 무능을 회개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뿌리깊이 내린 전시적 교회행정과 떠벌림, 오히려 사회보다 더 앞장서가는 명예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잘못된 성공주의에서 교회본질의 자세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성령의 역사요, 성령의 역사는 회개의 역사요, 회개의 역사는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맺음으로 핍박은 받았으나 비난은 받지 않고, 칭송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바로 회개운동이었고, 크리스찬들의 삶의 변화와 열매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반성하고 새롭게 개혁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현실교회에 대한 진단(3)/한(恨)의 문화에서 복음문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고, 민족의 혼과 원류를 연구하는 자들이 9천년 역사라고 합니다만 문자가 없던 시대의 역사를 정확하게 계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그 내용이 황당한 경우도 적지않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의 과거사 속에는 찢기고 할퀴어진 역사의 반복과 풍류민족의 흐름 속에 바람문화가 그때 그때마다 지배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결정치, 한풀이 정치, 낙하산 인사의 난무와 장인정신이 무시당하고 지나간 과거를 보복과 공격의 재료로 삼는 풍조는 한(恨)의 문화요, 복수문화요, 심리학적으로는 보상심리에 대한 절제력을 잃은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늦었지만 해야 될 일은 그 많은 역경과 찢기고, 조이고, 억압당한 환경 속에 살아남은 숭고하고도 끈질긴 민족의 혼과 그 정신, 그 문화는 살리되 한풀이 문화는 하루속히 청산해야할 민족적 대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430년간 애굽의 지배 속에 사는 과정에 한의 문화가 정착되어 원망과 불평 속에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100% 다 따라 나왔습니다. 그러나 광야 40년간의 연단 속에서도 종의 사상이나 생활습성은 수정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같이 따라나온 잡족들. 즉 종들이 원망과 불평의 바람을 먼저 일으킨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무조건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을 과감히 수정하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하루속히 한풀이 문화 또는 종의 문화를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한풀이 문화가 낳은 정치는 보복정치요, 보복심리로 가득 찬 정치는 결국 대화정치가 아닌 대결정치요, 타협정치가 아닌 힘의 정치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한의 문화에서 나온 부족심리는 정치 뿐 아니라 경제, 교육, 종교 모든 영역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부족심리는 결국 채워도 채워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자족이나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목표 지향적인 투지와 인내는 대단한 장점이 있으나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여유와 베품, 나눔, 아량이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종의 문화로 형성된 인격이기에 리더쉽의 빈약이 여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종은 은혜를 잘 잊어버리는 체질이며 과거를 미화하기 위해 역사를 없애 버리거나 바꾸어 버립니다. 또 자신은 해결할 능력은 없으면서 타인이 해 놓은 일에 원망이나 불평을 잘하는 체질입니다. 쉽게 동요되는 체질입니다. 즉 군중심리의 지배를 많이 받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판단할 건전한 이성의 부족입니다. 종은 부정적인 체질입니다. 그 중에 반복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역사를 무시해 버립니다.
 이 시간 기독교계에 수많은 교파나, 연합이 잘 안되는 것, 심지어 목회 스타일에까지 이 한의 문화 또는 종의 문화의 영향이 각자의 체질 속에 배어 있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유지하지 못하고 심지어 왕 같은 제사장에 대한 해석까지도 잘못 하고 잘못 적용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종의 문화는 거부하고, 반항하는 일에는 집단적 에너지가 대단하지만 협력해야 하고 화합해야 할 때는 집단적 에너지가 조종에 의해 쉽게 산산조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땅 베들레헴 출신이요, 나사렛에서 자랐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그런 성장의 역사속에서도 그는 조금도 부족심리가 없었으며 베풀고 나누고 때를 기다리는 위대한 인격과 지도자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강자에게는 더 강하게 도전하고 약자를 보살피며 가롯유다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기회를 주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한의 문화에서 복음문화로 거듭나지 못하고 한의 문화를 충족시켜주는 부산물이 될 때 기독교는 샤마니즘화 될 위험성이 있고 이가봇 교회현상이 되어버릴 것이며 결국은 위조지폐처럼 무능한 종교로 들통이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시대가 악하기에 요나의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교회로 과연 다르다고 수근수근거리게 해야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한알의 밀알,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었습니다. 자신이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고 행복하게 하겠다는 프로젝트를 가지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민족은 종교계나 정계나 서민들 할 것 없이 민족의 한을 풀어주러 올 이땅의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했기 때문에 저들의 실망이 참메시야를 보지 못하고 죽이게 된 것입니다.


현실교회에 대한 진단(4)/교회는 세상의 빛·소금  
복음이 말하는 본질적인 교회는 어느시대에서나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간 지역이나 나라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높아지게 되었고 그 나라의 정치, 교육, 경제, 사회, 문화가 놀라우리만큼 발전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말씀이 설교를 통해 바로 전해지고, 바로 전해지는 말씀에는 필연적으로 강한 성령의 역사가 동반하여 깨달음과 회개 그리고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게 되고, 결혼의 신성함과 법과 질서의 의무를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 솔선수범하게 되었습니다.
또는 모든 분야에 높은 공중도덕을 지키는 문화인으로 갱신되고,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크리스찬에게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문화를 복음문화로 거듭나게 하라는 명령이요 또한 사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라고 할때는 대표적으로 물질문명과 정신 문화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류에서 볼 수 있는 행동양식 중 유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 습득되고 전달받은 것 전체를 포괄적으로 총칭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심판하여 선악을 분류하기 전인 지금 이 세대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시대이기에 세계를 지배하는 제 세력은 타락한 악마적인 힘에 의해 조종당하고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과 충돌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를 그리스도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테르틀리아누스의 견해나 클레멘트의 견해인 문화의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가 아닌 문화 위의 그리스도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기독교를 참된 문화의 육성자로 보는 종합론자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칼빈이나 웨슬레처럼 그리스도안에서 문화와 사회를 변형시켜야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계속적으로 말씀의 씨앗의 능력에 의하여 거듭나고, 회개하고 변화되고 세상속에서 점점 변화된 삶이 성숙되어 익은 열매가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성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통한 깨달음과 회개와 능력이 없이는, 즉 옛사람의 죽음과(롬6:6), 새사람의 창조(골2:12, 3:1∼2) 없이는 뿌리깊이 내린 사상이나 체질이 죽어지거나 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무능한 교회로 전락해버리게 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고질적인 문제, 거짓과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는 이미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려 체질화되고, 문화화 되어버렸으며 민주화의 바람이나, 햇볕 정책이라는 바람을 타고 더욱 더 거짓과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전성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이기 보다 낙하산 인사, 위조지폐 같은 인격이 오히려 득세하는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 왔고, 이런 시대적 흐름에 교회는 조금도 저항하거나 독자적인 좁은 길을 선택하지 않고 도리어 상부상조하는 자세를 위해 왔음을 시인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정직해야 할 지식까지도 황금으로 매수하여 자기의 것으로 호적을 바꾸어 버리는 지경까지 왔으니 얼마나 빛 잃은 교회가 되었으며 맛이 변질되어 버린 크리스찬이 되어 버렸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 성찰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복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성공주의, 인기주의 거드름 피우는 행동, 이중적인 삶의 스타일이 체질화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는 과정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크리스찬은 시대의 파숫꾼이기에 불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도 모든 책임을 저들이 스스로 지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실교회에대한진단(5)/`죄를 잊으라'는 메시지  
 뉴에이지운동을 신신비주의라고 합니다. 뉴에이지의 최종 목표는 “죄를 잊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죄를 회개하라. 회개로 용서함받고 청산하라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조가 죄로 인한것인데, 그러기에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죄문제인데 죄에 대해 신경쓰거나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기독교를 가장한, 근본적으로는 기독교가 아닌것입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싫어하는 헤롯이나, 스데반의 설교에 이를 가는 자들과 같은자들입니다. 거룩문화가 바로 그리스도의 문화입니다. 그리스도의 문화는 바로 하나님께 영광, 이웃에게 사랑, 모두에게 믿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나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나라요, 사랑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그 일이 바로 선교입니다. 네덜란드의 신학자 호켄다이크는 “선교는 희망의 감염이다”고 했습니다. 희망의 감염은 바로 문화선교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업도, 재능도, 학문도 기술도, 예술도, 문학도 모두 선교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고, 선교로 통해 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구가 급성장하는 부흥은 있었으나 모든 문화영역에 선교적 열정을 가지고 참여하는 기독교문화 형성을 이루지 못했기에(예술, 문자문화나 영상문화까지) 결국은 교회도 거듭나지 못한 대중문화의 홍수속에 빠져 혼미, 혼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7%의 기독교 인구가 로마 대제국을 기독교국가로 바꾸어 놓았는데 우리는 25%의 기독교 인구를 자랑하면서 무능을 스스로 자인할 수 밖에 없는 현실교회의 모습이 되어 버린데 대해 염려하면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릭프롬이 `인생과 사랑'에서 종교의 참패 이유로 진화론이 창조론을 압도하고 있고 설교는 되어지나 실천은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떤분은 현대교회에 대해 지적하기를 번영의 시작, 교회문화 세속화, 개교회주의 또는 교파주의, 성령의 감동이 없는 예배 등으로 지적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문화 세속화는 너무나 심각할 정도인데 반해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죄의 경계선이 없어지거나, 혼선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말라기 선지자가 사라진 이후 선지자 없이 400년간 이어온 유대종교는 하나의 기술의 종교요, 형식의 종교였지 능력의 종교는 아니었으며 율법의 의미보다 율법의 형식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민족문화, 또는 전통문화라는 까운을 입고 우상과 샤머니즘 문화의 뿌리를 보존하고 있으며 또한 상업주의 논리를 바탕으로 문화 장사꾼들이 만들어낸 상품화된 문화가(자극적인 문화상품) 인간의 죄성의 기질을 자극하므로 중단 없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삶의 질을 높이는 문화나 복음문화는 상업주의 논리에는 힘이 없기에 기가 죽어 있게 되어 버렸습니다. 방종문화는 한탕주의의 저의를 가진 자들에게 가장 승산 있는 문화상품이며 그래서 타락문화를 생산해 놓고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 문화의 자유라는 그럴듯한 가면의 이론을 앞세우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침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는데 교회마다 앞다투어 copy conform 하고 있습니다.
 대중문화의 폭력성, 음란성, 반기독교성은 오염된 공기와 같아서 문화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우리 크리스찬들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영적인 싸움과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며 속도보다는 방향이요, 양 이전에 질이 더 중요함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사회가 `친구'나 `조폭 마누라' 영화가 더 인기가 있듯이 교회가 대중문화를 copy하므로 이 세상을 책임진 문화 대리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문화를 이루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회복의 목적이 정체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교인'의 상태에 있을 것이 아니라, `교회밖에 교인'으로 능력 있는 자들이 되어 이 땅에 복음문화를 뿌리내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성령의 능력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켄터베리 대주교 도날드 코간 박사의 말처럼 기독교 목사들은 “염소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 아니라, 양들을 먹이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라는 말을 명심해야 하고 또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실교회에 대한 진단(6)-복음문화로 거듭나지 못한 골동품죄  
 인간의 삶과 문화와의 관계는 불가분리의 관계이듯이 신앙생활과 문화와의 관계 역시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문화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들이 형태와 모양으로 보는 견해와 제도적인 구조와 기능으로 보는 경향속에서 사회조직이나 경제체계 교육 등을 통해 또는 종교와 신앙을 통해 발전해 오고 습관화 되어 정착된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 상품의 혜택을 받는 차원의 문화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인 그리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땅에 신앙문화를 정착시키지 못한 여러 가지 원인과 신앙문화인이 되어지지 못한 부분을 교회 정체의 원인 중에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섹스피어의 문학에서 표현된 인간은 인간상실, 대화상실, 구원상실, 인간관이나 까뮈의 고통하는 인간, 방황하는 인간관은 성경의 인간관과 일치하는 점도 있으나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주입시킴으로 인격체가 되었으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이 되었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야만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존재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 삶의 근본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생의 본분을 다해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또한 인류구원을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 사명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영혼구원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전통문화(우상, 샤머니즘, 타종교)의 체질화와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인 요소들로 형성된 습관화된 기질적인 죄(일명 골동품죄-필자의 표현)를 청산하는데 집중하지 못한 크리스찬의 양육이 결국 비정상적인 양육이 되어버린 현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육체적인 죄는 곧잘 회개하고 돌아와 착하고 유익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기질상의 죄는 좀처럼 수정되지 못한 가운데 계속적으로 이어져서 교회가 교회 부흥을 가장 많이 막고 있고 크리스찬이 크리스찬을 가장 많이 비판하고, 서로 정죄하고, 시기하고, 파당과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삶의 결과로 본질적인 교회의 빛깔은 퇴색되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교회는 교회다워야 된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노력해야 되며, 동시에 성도가 성도다워야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좀 생각할 문제는 교회를 비판하는 자가 교회를 알고 있는가? 즉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교회를 알고 있는가? 성경을 얼마나 묵상하고 있으며 올바른 신학을 공부해서 신학이 정립되어 있는가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문화나 제도, 유행의 추종자가 아니라, 교회로서의 기본 규범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좋아하고 만족해 하는 교회가 목표이지 바리새인 적성을 맞추는 것도 불신자가 좋아하는(불신자의 적성에 맞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닌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나 바울 사도의 선교에 가장 오랜 걸림돌이나 핍박자는 불신자이라기보다는 전통교회 즉 유대교 열성분자들이었습니다. 기질적인 죄인 골동품죄의 습관에서 회개로 체질개선이 되지 않는 한 이 땅에 복음문화의 정착은 아직도 모연하며, 이것은 오직 성령의 강한 역사로만이 가능하지 오늘날 성령의 역사가 없는 떠드는 성령운동으로서는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현실교회에 대한 진단(7)/건강한 교회 목표냐? 큰교회 목표냐?  
 작은 교회라고 건강한 교회라는 의미도, 큰 교회라고 건강한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의식구조나 문화가 외형문화 즉 내용보다 보이는 것, 큰 것을 선호하는 의식구조가 대다수인 것만은 기정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먼저 몇 평, 몇 명을 묻게되고 거기에 대답은 부풀린 허수 통계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큰 교회 집사, 큰 교회 장로라는 이상한 자부심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예외도 분명히 있음을 미리 언급합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건강한 교회라야 큰 교회가 가능하기도 합니다만, 우리의 현실은 큰 교회를 목표한 역기능적인 돌진 때문에 거기에 따른 비도덕성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건강한 교회였고, 건강한 교회는 성령충만한 성도와 직분자들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신앙과, 건강한 인격, 그리고 건강한 사역에서 이루어 진다고 봅니다. 건강한 신앙은 개혁주의 생활 원리인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일 때 가능하며 건강한 인격은 예수님의 온유, 겸손과 사랑과 섬김으로 가능한 줄 믿습니다. 물론 거기에 해박한 지식과 샘솟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또한 봉사라고 말할 때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노력봉사이든, 지식봉사이든, 물질봉사이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사용되어져야 함을 전제로 해야 참된 사랑의 봉사가 될 것입니다.
 건강한 사역 없이 건강한 교회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건강한 사역 역시 건강한 신앙과 건강한 인격에서 산출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체험적 고백이 없는 메시지나, 바른 성경관이 결여된 사역은 건강한 사역 일수가 없고 중생의 증거와 보수 신앙의 바탕에서 건강한 시간관리, 가정관리, 건강관리, 물질관리가 이루어져야 되는 줄 압니다. 오래전 읽은 글 중 비판성이 강하지만 저에게 상당한 도전을준 글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없는 철학은 주둥이를 닫아라. 사랑이 없는 종교는 지옥 밑창이나 떨어져라. 아름다움이 없는 예술은 더 이상 분칠하지 말아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저는 붙여쓰기를 “행함이 없는 학문은 영안실이나 공동묘지에나 가라. 성령 없는 목사는 마귀하고 의형제하라. 하나님 영광을 목표하지 않는 교회는 돌 하나도 돌위에 남지 않고 빨리 망해 버려라”고 했습니다. 물론 지상교회 중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교회가 없다고 완전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목표는 분명해야 하고, 끝없이 갱신을 노력하고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리적이고, 독선적인 스타일이나 아니면 일종의 스토아주의(Stoicism)의 한 형태인 초연형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세상 안에서의 삶은 분리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어거스틴이나 칼빈이 말한 변혁의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범죄로 인간과 세상이 타락하였기 때문이며 타락한 본성이 모든 문화나 삶의 영역에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구속과 인간 회복을 이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요구에 순종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건강한 교회를 위해 먼저 교회 자체의 체질갱신에 앞서야 하고, 신앙 형태와 껍데기 문화에서 복음적 화육이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의 신앙적 표현으로 성숙되어야 우리 문화속에 흐르는 악순환의 요소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승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지는데 기여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현실교회에 대한 진단(8)/바리새인 따라 잡기 소금기둥으로 서 있기  
 성도는 언제나 은혜의 바다에 헤엄치는 생활, 즉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도가 은혜받지 못하면 타락한 죄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종교적 폐품이 되고, 성도가 은혜가 고갈되면 영적 실업자가 될 것이 뻔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올바로 수신(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땅의 모든 문화, 특히 미디어 문화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에 상당수가 크리스찬의 삶을 위협하고 혼란하게 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선하게 쓰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선과 악의 기준보다 상업주의와 선전성, 쾌락성, 폭력성이 지배하는 오염이 심한 대중문화의 거대한 물결 앞에 고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교회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여러 가지 도구(언어, 종교적 자료, 문화적 도구)가 신격화되어서 메시지가 목적이 아니라 전달 매체가 절대화 되는 우매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중생의 체험 없이 음악적 소질 하나만으로 열린예배란 방송언어를 도입하여 예배가 진행된다든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진리를 무시하고 감정에만 호소하며 일시적인 감정의 기복에 만족하므로 또다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현상이라든지, 또는 사회적 음향이나 풍조에 길들여진 분위기나 청각에 맞아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걷잡을 수 없는 기복이 심한 형태의 신앙 스타일은 결국 도구는 어디까지나 도구, 즉 메시지가 될 수 없는 도구가 메시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바리새인 따라잡기, 즉 바리새인의 수제자가 되어 가고 있는 기독교현실과 향락문화의 미련은 녹는 소금이 아닌 소금기둥이 되는 고고학적 재료를 남기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누차 언급이 됩니다만 인간의 본성이 죄로 어두워진 관계로 윤리나 종교적인 영역에 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 성령의 역사로 중생하여 범죄 전 아담의 의식 상태로 회복되고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계속 하나님의 지식과 사고 방식이나 재능이 조명을 받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마23:3에 “말은 하되 행하지 않는 자들” 이었습니다. 저들은 성문율법외에 구전율법 즉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는 율법을 가르치면서 내용보다 형식에 길들여져 있었고, 교만하고 대접받기 좋아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저들의 손안에 영성 판매장으로 상품성전이 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도구를 메시지화했고 의미보다 전달매체인 의식이나 도구를 신격화, 절대화 해버리는 오류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예수그리스도의 자유하는 복음은 그들이 고수해온 율법주의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새로운 종교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상은 상업주의와 선전성, 쾌락성, 폭력성이 지배하는 대중문화 속에서 잠식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속에서 어떻게 하면 문화의 저급성과 개인주의, 소비주의, 세속주의화 된 악의 개념을 경계하고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손에 들려진 기름과 포도주가 되며 칭찬받은 종의 손에 맡겨진 달란트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죄가 모든 부분에 역사하며, 사단은 도깨비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심판 때까지 세상을 활동무대로 삼을 것입니다. 또한 중생한 크리스찬의 의 속에서도 죄의 역사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기에 부단히 성경의 가르침에 합하도록 수정하고 보충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여 확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시몬의 시대가 아닌 베드로의 삶이 여전하도록 성령충만한 삶으로 바람직한 인격형성, 책임감있는 시민 양성, 사회 속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생활화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장위제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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