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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들꽃편지 제349호 읽을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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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 주고받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눔'이 되겠지요.
그러나 '나눈다'는 말에는 조금 위험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나누는 일에 주체와 객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서로 마주 보게
되고, 그때 자칫 받는 쪽은 고개를 숙이고 주는 쪽은 고개를 세우는 서글픈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진짜 나눔에는 '나눈다'는 말은 물론 그런 의식(意識)도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숨을 쉬면서 나무하고 산소 또는 탄소를 주고 받습니다만, 그러고 있다는(나누고 있다는) 생각을 따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나무와 진짜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지요. 주고 나서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게 곧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어떻게 마주 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이른바 '나누는 일'에 동참한다는 우리 자의식에 숨어 있는 위험 요소를 알아두는 일이 '나누는 일' 못지 않게, 어쩌면 더욱 중요하겠다고 여겨져서입니다.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무엇을 나눈다는 일은, 그러지 않고 챙기는 일에 견주어, 백배 천배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도 물론 누구에게 무엇을 나눠준 적이 있겠지요. 또 가만히 생각하면 그런 '일'이 한두 가지 기억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저는 약간 부끄럽습니다. 왜냐하면, 어쨌거나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선생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가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분이 당신의 것(?)을 저에게 나눠주신 이야기로 대신할까 합니다. 사실은 그 이야기도 묻어두고 싶지만, 벌써 다른 데서 제가 밝힌 바도 있고 해서 여기 이렇게 옮겨봅니다. 그분은 저보다 몇 살 나이가 많은 여자인데 혼자 사는 분이고 시골에서 작은 약방을 운영합니다.
그분이 어느 날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 계신 곳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좀 한번 만나자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얼마 뒤, 마침 기회가 생겼기에 초면인 그분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당시로서는 난생처음 만져보는 큰돈을 내어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목사 글을 읽고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다. 이 돈은 당신을 생각하면서 일 년 가까이 모은 것이다.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저는 그분의 검소하다 못해 궁색함이 느껴질 정도인 단칸방에 앉아, 낡은 전기곤로 위에서 끓고 있는 밥솥을 보며, 짝도 맞지 않는 컵으로 냉수를 마시며, 두툼한 현금 봉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분께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이 돈은 김 아무 집사가 이 아무 목사에게 주는 돈이 아니다. 이 점을 서로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이 돈은 김 아무 집사 속에 계신 하느님이 이 아무 목사 속에 계신 하느님께 건네주는 돈이다. 따라서 이 일에 당신과 나는 아무 한 일이 없다."
그분도 제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랬던 일이 기억나는군요.
불경(佛經) 어딘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바히야여, 보는 일에는 보는 자도 보이는 것도 없어야 한다. 오직 '봄'이 있을 따름이다."
저는 이 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붙여봅니다.
"바히야여, 나누는 일에는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없어야 한다. 오직 '나눔'이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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