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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낮 달

수필칼럼사설 임의진............... 조회 수 2931 추천 수 0 2003.09.22 21: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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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살며 생각하며

낮 달
임의진/ 목사, 남녁교회

고추, 가지 모종이랑 토마토 모종을 사와 점심 때 닿도록 부지런히 심었다. 후북하게 물까지 길어주고 머리 숙여 합장하며 잘 자라주길 비나리했다. 찬물 말은 밥에 된장을 담뿍 찍어 먹는 풋고추 한 밭이면 입맛 빼앗는 더위 아니라 올 여름에는 더위 할애비라도 무어 두려우랴.

내가 즐겨하는 토마토는 여름 내내 군것질감으로 오질 것이다. 길가 밭에 심은 것이라 마을아이들은 먹어라 말아라 하지 않더라도 알아서들 잘 따먹을 것이고, 손님들도 알알이 탐스럽게 영글었다며 매만지고 또 매만지리라.

고추와 토마토 모종은 키 작은 나무깽이를 꽂아 끈으로 묶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무깽이는 혼자서는 똑바로 설 수 없는 모종에게 얼마나 든든한 이웃이 되어주는가. 나무깽이를 한 개씩 붙여주지 않는다면, 몇 시간도 채 못 가 어린 모종들은 허리가 꺽이고 숨마저 타들 것이다. 누군가 옆에 서서 기댈 어깨를 내어주고 고단한 한 시절을 나눠 갖는 저 모습에서 이 어려운 시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삽과 호미를 놓고 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차디찬 식혜 한 그릇으로 땀을 식히는데, 신발 끝에서 키 작은 제비꽃이 한가롭게 살랑거린다. 자목련이 저렇게 하들하들 피었고 모란은 또 얼마나 눈부신가. 저 멀리 논두렁마다는 자운영꽃이 무더기로 흐드러져 눈을 어지럽히는데, 유독 제비꽃 한 송이가 내 눈에 띈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눈을 내려뜨리며 제비꽃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땅에 착 달라붙어 밑바닥 인생들과 어깨를 나누라는 하늘의 일깨움인가?

제비꽃을 보노라니 누군가 나를 지켜본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고운 눈빛으로 '우주의 눈'이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나를 관심하며 나를 떠나지 않는 내 님이 말이다.

내가 있기에 당신이 있는 곳
나를 사랑하여 당신이 찾아온 곳
내가 있기에,
당신이 떠나지 못하는 곳

살랑거리는 바람에 감기우려는 눈을 어찌 못하며 평상에 드러누웠는데 …… , 아, 어느 하늘이 저토록 맑고 푸르리야. 제주도로 날아가는 비행기와 쨍볕을 식혀주는 구름 한 뭉치가 떠내려간다. 또 해님의 저 모퉁이에는 낮달이 은은히 떠 있다.

낮달. 거 한번 오랜만이었다. 심심하던 차 잘 되었구나. 한지잠을 자고 있는 낮달을 깨워 말을 한번 걸어보았다.

"너는 왜 우리별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거니?"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사랑하니까 그렇지."

"그럼 만유인력의 법칙은 뭔데?"

"사랑은 한마디로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지. 사랑이나 그거나 같은 말 아닌가?"

달이 하는 말을 듣고 보니 가슴자리가 뻐근해 왔다. 어려울 때 곁에 있어주는 것이 진짜 친구라는데, 저렇게 변함없이 지구별의 동무가 되어주고, 해를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되어 빛마저 거둔 저 낮달을 보며 나는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린 모종의 곁에서 동무가 되어준 자잘한 나무깽이들, 또한 우리들이 사는 초록행성을 떠나지 않고 낮이나 밤이나 이웃이 된, 저는 잠들지 않으면서 등불이 되어주는 달이 없다면, 그리고 나를 아끼고 사랑하여 변함없이 벗이 되어주는 당신이 없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언제였던가. 유성우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저건 별이 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일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해 B612 혹성으로부터, 너를 사랑해 명왕성으로부터, 너를 사랑해 백조자리 고향별로부터, 너를 사랑해 사랑해 …… .

언제였던가. 산길 들길의 꽃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었더랬다. 등꽃이 말했지 사랑해 임의진 어깨춤. 쌀밥 담긴 복그릇처럼 옹송옹송 모여 핀 아카시아꽃이 말했지 사랑해 어깨춤. 질경이꽃도 흰 부추꽃도 말했지. 붉은색 립스틱을 바른 동백꽃도 귓속말로 속삭였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어깨춤.

그때 나는 알았지. 꽃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보낸 편지라는 걸. 하느님이 쓰신 연애편지란 걸. 나는 너를 떠나지 않고 내내 함께 있을 거야, 약속하마 내민 하느님의 새끼손가락이라는걸. 아, 그래 도장도 찍어야지. 저 아름드리 나무는 내 도장이야. 큰 나무도장. 꽝, 꽝, 찍을게.

잊고 살았구나, 그랬었구나. 그걸 잊고 쓸쓸해 했었구나. 외로워 했었구나. 바보 같으니라구.

한번쯤 내 주의를 둘러보아야 했다. 나에게 지금 누가 있는지. 내 이름을 알고 있고 내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아야 했다. 그럼 나는 또 누구를 떠나지 않고 있는가? 내가 연연해하며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하나둘 헤어본다.

너무 소홀했지 않았는가, 그래 그랬어. 우물바닥에 솟아나는 물방울처럼 미안함이 빠금빠금 솟구쳤다. 가슴에 푸른 멍이 드는 사랑병, 그 병이 무서워 나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 나날이 너무 길고 많았던 게야. 심하게 물리치고 잊어버리려 했던 사람이 너무 많았어. 해도 정도껏 했어야 옳은데, 그랬지 않아? 알래스카에서 받아온 심장인가, 이 심장은. 가슴을 이렇게 치면 녹을까, 이 차디찬 심장은. 어머니랑 노시다 읍내 가는 버스를 타러 나오신 진등 윤집사님이 "우리 수염쟁이 목사님 배꼽 다 보이네" 하면서 평상에 않으셨다. "백원 내고 보세요. 너무 비싼가요?" "그라네요. 총각 배꼽도 아닌디." 집사님 재치있는 대답, 끌끌. "어디 가세요?" "미장원 딸네집에요." "뭐하시려고요?" "에미가 딸 보고자워 딸네집 가는디 뭔 이유가 있당가요?" 맞어 맞어, 어머니가 사랑하는 딸집에 가는데 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사랑에는 국경도 없지만 이유도 까닭도 없지. 죽고 못 사는 연인들의 사랑, 부모자식지간 지극지대한 사랑을 보아. 낮달처럼 변함없는 저 사랑들을 보아. 저 흔들리지 않는 도타운 사랑을 보아.

이제 여름이군. 아니 벌써 여름이었는지도 모르지. 계절에도 삼팔선이 그어진 건 아닐 테니까. 머잖아 멀리서 새 쫓는 깡통 소리가 들릴 게야.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는 새들을 팔에 앉히고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아.

"주인 없을 땐 몰래 와서 먹으렴, 너희들도 먹고는 살아야지. 하지만 주인이 있을 땐 나 좀 봐줘라. 응?"

새들은 허수아비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허수아비를 사랑하기 때문에, 논주인네가 있을 때만 허수아비 위신을 세워주는 것이지. 몰랐지? 이 비밀.

그만 들어가봐야 되겠구나. 호미를 씻고 삽을 씻었다. 등물을 하고 싶은데, 아직은 찬물이 그렇군. 둘러보니 등물해 줄 사람도 보이지 않고 말이야. 이렇게 혼자 살아간다면 서럽겠다 서럽겠어.

젖가슴이 축 늘어진 할머니의 등에 할아버지가 부어주는 물 한바가지, 두 분의 오랜 사랑과 의지가 그때만큼 아름답게 피어날라구. 그래서 짝을 잃으면 불쌍해진다니깐.

땀을 씻고 식혜 그릇도 씻고 토방에 앉아 신문지를 접어 부채질을 하면서 고요함을 듣는다. 잎이 무성한 나무가 옆에 서 있는 나무에게 부채질을 해주는군. 시원하니? 그래, 시원해 고마워. 나무들이 나무들에게 서로 부채질을 하는군. 그 나뭇가지 어디에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

쯔즈즈즈즈즈지지지지지 …… .

매미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운다
사랑하고 싶다고
매미 가슴에서 하느님이 노래한다
하느님의 노래는
사랑 빼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사랑을 빼고 나면 도대체
무엇을 노래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이 빠진 노래는
매미도 안 부르는데

나무에 걸린 낮달, 그 언저리로 바람 타고 흘러오는 저 매미소리를 듣는다. 낮달을 보고 가슴이 저어하여 부르기 시작한 매미의 사랑노래인가? 낮달처럼 지고지순 사랑하고 싶다고, 당신만을 오래오래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밖에 난 모른다고, 난 당신밖에 없다고 ……

(최근에 도서출판 이레가 펴낸 '참꽃피는 마을'에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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