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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좌 : 생명운동과 생물 평등성

생명환경자연 유정길............... 조회 수 2929 추천 수 0 2003.09.22 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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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제2강좌 : 생명운동과 생물 평등성

생명운동, 확장된 환경인식의 페러다임

- 환경문제는 운동에 대한 발상의 전복을 강제한다.

유정길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사무국장)

1. 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카오스'시대의 운동론

운동은 모든 생명의 특징이다. 그것은 어쩌면 운동이라는 이름보다 변화와 요동을 의미할수도 있다.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무엇이 운동이고 무엇이 운동이 아닌가를 변별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작은 개인이라도 그것의 행위는 선하든 악하든 어떠한 형태로든 주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반드시 집단화되어야만 운동을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혼자 의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이 감동을 주어 주변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꼭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해도 의미있는 사회적 운동인 것이다. '북경에서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 태풍을 불게한다.'는 카오스이론의 나비효과는 집단화된 조직을 통해서만이 사회에 의미있는 것이라는 관점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렇게 볼 때 조직화된 운동만을 의미체계에 넣어서는 안될 것이다. 불교에서 기도나 염불, 좌선과 간경등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개인의 변화를 도모하는 행위나 개인적 수행이나 도를 닦는 것은 기존의 관념대로 운동의 의미체계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무시된다면 크게 잘못되는 것이다. 운동이 아니라고 상대를 타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인식의 경박함을 탓해야 한다.

사회의 과제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화된 자발적 체계만을 운동적의미로 본다면 최근 유럽이나 미국의 사회운동가들에게 붐으로 일고 있는 요가, 좌선, 채식, 명상관련운동은 의미있는 것으로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운동가와 운동적 삶

따라서 운동단체에 있는 것만이 운동가라고 보지 않는다. 운동가라는 이름없이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헌신하면서 운동적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이말은 뒤집어서 운동단체에 있다고 운동가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가가 반드시 운동적 삶은 사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운동가는 아닐지라도 운동적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운동이라는 이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운동성이라고 생각된다. 운동가라는 직분이 자칫 다른 사람과는 다른 결연한 신념을 갖는 관념적 우월자 인양 느끼게 하여 행여 그것이 운동하는 개인들의 보상의식을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회 속에 선의지를 모으고 조직화하는 것은 운동적 연대의 확장을 도모하고 활동영역이 확장되는 것을 의미하며 운동을 바라보는 관점과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 총칼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투가 아니다. 이를 위해서 밥짓고 빨래하는 것도 전투인 것이다. 단지 사소한 하나라도 그것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 하느냐에 따라 운동일 수 있고, 설령 전투를 한다해도 운동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운동은 스스로 운동가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운동이어야 한다.

이제 다시 '운동'을 생각해보자.

필자는 위의 논지를 중요하게 간주하면서도 일단 이 글에서 이후 '운동'이라는 표현은 "현실의 과제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자발성에 기초하여 조직화된 집단의 장기적인 행동형태"라는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겠다.

1920년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사회주의운동은 사회주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이라는 현실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념적 선택이었다. 이념이 목적이 아니라 이념은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했는가? 90년대 당시 사회주의 붕괴는 80년대 무수한 많은 운동가들에게 신념을 붕괴시키고 의미세계를 좌절하게 만들어 결국 진영으로서 운동은 그 이후 하향곡선을 긋게 되었다.

다시 말하건데 운동의 전통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념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들은 이념을 목표화했고, 따라서 그 이념이 붕괴되는 것은 목표를 상실로 간주했던 것이다. 모순과 과제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담는 이념은 뒤를 따르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념속에 현실을 조합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붕괴되어도 현실의 모순과 과제는 남아 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면 운동은 지속되어야한다. 그러나 당시 운동가 개인들에게 '미래는 불투명한데, 현실은 구체적인' 즉 삶을 던지고자 했던 비전은 안개 속인데 반해 생계라는 현실적 요구는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로 인해 다음 준비를 약속하면서 조직적 퇴각을 하지 않고 단지 개별적으로 개인의 거취를 결정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사회운동은 수많은 운동의 지도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운동의 역사속에 뼈아픈 경험이었고, 우리 운동역량과 전통의 빈약함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운동했던 과거는 치기어린 젊은 날의 추억으로 돌리면서, 늦기 전에 살길 찾자며 이력서를 펄럭이며 그토록 비난해 마지않았던 재벌의 취업문을 두드리던가, 아니면 연령에 관계없이 볼 수 있는 고시시험 바람에 동참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권장할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문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운동은 다양한 부문에서 진행되어야 하고 따라서 다양한 직업과 계층, 분야속에서 진지하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운동의 가능영역을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된 현실과 변하지 않은 현실 - 새로운 페러다임의 등장

86년, 87년의 과정은 운동가들에게 가슴설레는 희망, 성취감에 흠뻑 젖었던 기간이었다. 당시에 인식된 현실은 운동적으로 대단히 많은 자신감을 주었고 머지않은 장래에 곧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 현실화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90년초반을 관통하면서 현실의 모순은 그대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꿈과 희망은 전망의 부재와 운동의 동력의 상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현실은 거기 그대로 그렇게 언제나 흘러가고 있었을뿐이었다. 실제 변화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는 도구들(tools)의 적실성이었다. 맑시즘만을 도구로 바라본 사람에게는 그러한 현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념은 현실을 해석하는 도구일 뿐이다.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현실을 인식하는 도구가 충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90년을 전후한 세계의 흐름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그 변화의 내용은 약 2-300년간 인류의 자산과 가치에 대해 통째로 전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가치에 대한 전복이었다. 이렇게 2-300년의 당위적 논리를 뒤집은 것은 다름아닌 환경문제였다. 어쩌면 환경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환경위기를 앞세워 등장한 생태주의적 페러다임인 것이다.

인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진보와 보수의 구도와 전선을 새로짜야 했다. 그리고 진보, 그 자체에 대한 규정을 포기해야 했으며, 인류의 비전을 수정해야 했다. 생태위기를 단순히 노동, 농민, 교육, 복지, 여성문제 등의 하나의 부문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정신차려야 할 사람이다. 변화하고 있는 가치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환경문제는 그저 원상복귀와 정화, 보존정도의 문제의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공해반대운동이나 환경운동으로 국한되는 운동의 장르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사상적 사조와 페러다임적 전환을 알리는 전령사임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변화된 시대에 새로운 운동을 바라볼 수 있다.

진보에 대한 문제제기

생태주의 페러다임은 그동안 진보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질 것이라는 사고가 바로 진보였고, 그 척도는 생산력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생산력의 고도화가 인류에게 재앙이 된 것이다. 생산력주의의 가치는 이제 폐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페러다임의 핵심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이제 '그놈이 그놈인' 것이다. 그동안 인류는 자본주의라는 구조, 혹은 사회주의라는 구조의 구현으로 인류의 유토피아를 꿈꿔왔다. 그러나 인류는 생산력주의를 발전의 기준으로 표방하고 있는 두 체제가 바로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안내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왜냐하면 오늘 같은 인류 위기의 원인이 바로 생산력주의였음을 확인한 것이다. 인류의 비전은 이제 반생산력주의에서 만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는 90년대 이후 온통 전지구적으로 환경문제가 초미의 관심으로 등장하고 방송이나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환경켐페인을 시작하고, 기업은 녹색이미지와 녹색상품을 광고하기 시작하고, 정부는 환경우선적 정책으로, 세계의 무역질서는 그린라운드라는 새로운 지평으로의 바뀌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나도 환경, 생명, 녹색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진보'라는 개념에 심대한 전복을 동반했다. 무엇이 진보란 말인가, 이토록 인류를 위기로 몰았던 것이 진보였단 말인가, 과연 진보라는 것이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따위를 성찰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그러한 성찰의 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는 직선적 시간관과 성장에 대한 수직적 발전의식의 발로였으며, 이는 바로 창조로부터 최후의 심판으로 향해가는 기독교의 직선적 시간관에 근거한 진보관에 기초한 역사인식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간의 변화를 측정한 것이 시간일 뿐, 그 흐름은 직선적이지만은 않다는 물리학의 성과가 그러한 신념체계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이제 진보는 진화일 뿐이며, 흐름이자 변화일 뿐이다. 앞서가는 것이 나은 것이고 뒤에 있는 것이 열등한 것이라는 관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불교의 윤회적 시간관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는 또하나의 계기가 된 대목이기도 하다.

2. 이제 다시 새로운 의식화를 위하여

녹색문맹의 극복, 생태적 의식화

현재 생태적위기는 단순히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자'는 의식이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기존의 페러다임적 변화를 강제하는 것이며, 기존 가치관의 전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단순히 일국차원의 변혁이 아니라, 문명적인 변혁을 계획하는 초거대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래서 루돌프 바로 같은 학자는 생태주의를 일국단위의 변화를 도모하는 사회주의와 비견하는 것에 불쾌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 생태적 의식화가 제기하는 철학적 논의는 무엇인가

1) 이원론의 극복

생태적 위기는 본래 구분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데서 비롯된다. 천사와 악마, 선과 악, 천당과 지옥, 나와 남, 인간과 자연, 우리편와 나쁜편, 장점과 단점, 적과 아, 여성과 남성 등, 근대의 과학적사고의 근본이 된 이항대립적 사고는 바로 개체와 개체를 단절시키고, 분절하여 세계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속에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개체와 개체의 경쟁과 대립의 논리가 도출되었다. 경쟁은 본래 너와 내가 구분된다는 사고를 전재로 하고 시작된 사회적 관념인 것이다. 경쟁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립과 경쟁이 지배와 피지배의 근간이며 모든 사회문제와 자연파괴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연원은 바로 이원론적 세계관인 것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세계는 '나눌수 없는 이치', '둘이 아닌 이치', 근본적으로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다.

서양사상의 형식논리학은 양극단의 중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A는 A다라는 동일률. A가 아닌 것은 非A다는 모순율, A가 아니고 非A가 아닌 것은 없다"는 배중율의 형식논리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A이면서 非A라든가, A도 아니면서 非A도 아닌" 것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이원론의 근간이 되고 있는 사유체계이다.

운동에 있어서 적과 아를 구분하고,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며 전선을 가르는 것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의미한다.

2) 과학주의와 유물주의의 지양

양으로 측정 가능한 것이나 보이는 것, 만져질 수 있는 것 등, 眼耳鼻舌身意로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며 그 외의 것은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 정신성, 영성, 직관, 인식을 초월하는 깨달음이 공식논의로 들어올 여지가 없다. 그것은 비과학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과학은 진리의 최소한'일 뿐이다. 그럼에도 과학만이 진리의 전부라고 인식해온 것이 그동안의 사고였다. 현대의 수준에서 확인되지 않았을 뿐 과학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였다. 이념은 앙상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풍부했다. 사회과학으로 정리된 현실만이 현실이 아닌 것이다. 법칙성은 새로 발견된 현실에 의해 언제나 수정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을 신봉했던 근대적 가치를 사회과학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경직된 이념틀에 현실을 짜맞추는 우를 범해온 것이다. 이념을 넘어선 어떤것이 있다는 사고보다는 이념의 틀안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3) 생물평등성 : 인간중심주의의 극복

그동안 자연계의 모든 생명은 인간의 필요에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인간중심적 가치가 바로 다른 생명을 도구화하고, 살육하며 무분별하게 이용하며 착취하게 하였고, 그것이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관점, 나아가 자연과 인간이 둘로 나누어 진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는 관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나아가 만생명의 동등함과 관계성을 통찰하는 관점으로 전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동안 사회운동이 00 중심주의를 지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노동자 중심주의라는 관점은 이제 더 이상 유옹한 도구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계층과 계급의 구분이 전혀 의미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노동자의 이익이 바로 진보임을 뜻하는 관점과의 결별의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도 진보의 중심주체가 노동자라거나, 농민이라거나 하는 의식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 사회주의는 전세계적으로 약자를 위한 이데올로기였고, 그래서 그것이 바로 휴머니티의 상징이데올로기였다. 이제는 휴머니즘의 초월을 요구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4) 반생산력주의 운동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지구를 파멸시킨 이데올로기로 비난받는 것은 바로 그들이 생산력주의를 '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원을 무한한 것으로 신뢰하는 데서 시작된 페러다임이다. 자원은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미국처럼, 유럽, 일본이나 우리나라처럼 살수 있을 것이라고 사고해 왔다. 그러나 소수의 선진국의 인구가 누리는 소비양식이 바로 자원소모를 촉진하고 그것이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된 것이다.

"인도와 중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 한국인의 소비수준으로 산다면 이 지구는 얼마 안가서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20%밖에 안되는 잘 사는 나라 인구가 전세계 자원의 82%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써야할 자원을 끌어 당겨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끌어당겨 살고 있습니다.

인류의 80%가 그토록 굶주리고 병들고 초라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와 같은 삶의 방식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엄연한 자기 존재의 바탕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은 어떠한 가치, 어떠한 사랑, 어떠한 도덕, 어떠한 목표도 그것은 허구하며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박노해의 시 '나 하나의 혁명이')

"자원은 무한하다"는 미망을 토대로 구축된 문명을 끌어안고 온 결과 인간은 지금같은 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자원은 유한하며 유한한 가치속에서 많은 것보다 적은 것이 좋은 것이며,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좋은 것이고, 빠른 것보다 천천히 사는 것이 중요한 삶의 가치로의 변화를 강제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생산력주의와는 대비되는 반생산력주의, 즉 자발적인 가난, 주체적인 청빈을 도모하고 그것이 '선'인 가치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청빈하게, 그러나 정신적으로 풍요를 추구하는 것, 이는 바로 불교의 본래가르침, 근본가치로 회귀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5)생존경쟁와 약육강식의 정글논리에서 상호의존과 상호보완의 세계로

다위니즘은 자연을 생존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처절한 투쟁이 일상화된 정글의 구조로 인식했다. 그러나 다위니즘적 자연관은 그대로 자본주의의 사회논리로 전화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이후는 없으며 자본주의가 가장 자연성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의 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현대의 생태학은 개체와 개체간의 관계로 보면 경쟁과 투쟁의 측면이 강하지만, 전체 생태계를 전일적으로 볼 때, 상호의존과 상호보완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실제 자연계는 한 종이 멸종하면 먹이사슬의 연관속에 다른 종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하여 전체생태계에 교란을 초래한다. 실제의 생태질서는 서로 의존하고 보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긴밀하게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돌연변이와 종의 분화로 다양성 유지되고 이것이 생태계를 안정화시키며, 연관과 의존, 상호 보완구조를 본래 성격으로 하고 있다. 종 다양성은 기후나 조건의 변화속에서 생명이 살아남는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운동이 단지 하나의 기조로만 이루어진다면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생물처럼, 운동은 상황적응력을 잃고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운동에서의 다양성은 운동영역을 보호하고 유지, 발전하는 중요한 기재가 된다.

6) 생명운동적 가치의 사회화를 위하여

생태주의를 사회화한 생명운동은 관계성, 순환성, 다양성, 영성을 그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수평적으로 대등한 것이 아니다. 이중 영성이라고 말해지는 정신적 깨달음의 표현형이 바로 관계성, 순환성, 다양성인 것이다.

생명운동으로 표현되는 운동은 목표지향적 가치가 아니라 과정과 관계지향적 가치이다. 그리고 과거의 사회운동이 맑시즘이라는 진리에 대한 배타적 독점성을 강조했다. 이는 "나는 진리이고 너는 비진리이며, 진리를 알고 있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며, 나는 전위이며 너는 후위, 나는 의식화되었고 너는 계몽되어야 할 대상" 등, 관념적 배타적 우월성을 신념구조로 이는 마치 '하나님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우상'이라고 보는 기독교의 종교성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직선적 역사관에서 순환적 시간관으로, 나와 남의 연관 관계로와 모든 자연계는 윤회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고야 말로 정신적 깨달음(영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인 것이다.

3. 우리는 정말 진보적인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보'라는 용어를 이렇게 사용해서는 안되겠지만, 일단 위험이 있더라도 사용해보자, 당신은 정말 진보적인 사람인가? 오히려 변화된 가치보다는 변화하지 않는 측면을 주목하고, 변화하지 않는 과거의 가치관만이 객관적 실제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에게는 '보수'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맑시즘만이 유일한 가치이며 노동운동이 역시 사회의 흐름의 축이며, 모든 운동은 정치권력의 변화를 중심으로 사고한다면 그는 다시 의식화되어야 할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침몰되고 있는 타이타닉호 안에서 의자를 배열을 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다고 그 사람이 여성문제에 진보성을 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문화와 교육 등에 진보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더욱이 생각은 그렇다해도 실제 그러한 생각을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는가와는 별개의 것이다.

생태위기는 그야말로 인류에게 주어진 수많은 난제와 수평적으로 대등한 하나의 운동장르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다시 눈을 씻고 생태적사고가 제시하고 있는 진정한 메시지에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필자는 다른 운동이 중요하지 않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태위기를 수평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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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수필칼럼사설 대형교회와 다중교회 이철재 감독 2003-09-15 2779
325 수필칼럼사설 주일학교 전문교회를 세우자 이철재 감독 2003-09-15 2944
324 수필칼럼사설 디지털 시대와 교회 이철재 감독 2003-09-15 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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