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
출처/http://www.chtoday.co.kr/template/news_view.htm?code=lif&id=1668
기억상실증
서로에 대해 과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자
큰 아이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틈만나면 책을 읽는다. 어려서부터 익힌 습관이다. 집에서 아빠와 엄마가 늘 책을 읽은 것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 결과 큰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지만 친구들의 여러 문제들을 상담하며 나름대로 대안 제시도 하여 주고 있다고 하니 제법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 아이는 이와는 정반대다. 책을 읽으라면 읽는 척만 하니 말이다. 학교에서 독서 숙제를 내주면 책 전체를 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책의 한 단원을 읽고는 다 읽었다며 독서 확인을 해 달라고 엄마를 조른다.
이런 둘째 아이는 틈만나면 텔레비전(television)을 켠다. 책보다 텔레비전을 좋아한다. 정말 둘 째 아이야말로 ‘TV는 나의 목자’이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텔레비전 리모콘을 찾아 텔레비전을 켜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는 일도 텔레비전을 켜는 일이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텔레비전을 즐긴다. 그 중에서도 만화와 함께 드라마(drama)와 코미디(comedy)를 즐겨 본다. 요즘은 텔레비전이 다채널로 되어 있어 수 십개의 채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보는 시대가 되었다.
둘째 아이는 코미디 부분에 있어서만은 지나간 방송을 몇 번이고 다시 보고 또 본다. 말 그대로 재방송이다. 그 영향 이어서인지 둘째 아이는 야단을 맞고도 금새 언제 야단맞았느냐는 식이다. 속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속이 없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런 아이를 향해 ‘또 그거냐? 어제 본 것을 또 보냐, 본 것은 더 이상 보지마! 빨리 다른 데로 돌려, 아니면 꺼라.’고 나무란다. 그러면 아이는 ‘에이’ 하면서 부모의 권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다.
하지만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울라치면 어김없이 재방송으로 되돌아 간다. 보고 또 보는 아이와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는 부모의 실랑이는 숨박꼭질하듯이 뫼비우스의 띠 위를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사실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코미디가 즐거운 아이에게 코미디를 보고 또 본들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부모인 나의 마음은, 아이가 지나간 방송을 습관적으로 보는 사이 지나간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습관이 형성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제동을 건다. 지나간 방송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아이의 마음이 어느새 과거 지향적으로 형성된 듯 하여 가능한 새로운 방송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새롭게 제공되는 방송을 보아야 내일은 어떤 방송이 제공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내일을 마음에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지나간 것을 자꾸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이 꺾여서는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 방송의 ‘타임~’이라는 프로그램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고 다시 한 번 지난날을 회상하는 유익함도 있는 방송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을 과거에 묶어 두는 것 같고 내일에 대한 꿈을 상쇄시키는 것같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하지만 이 때에도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인다. 아이들은 이 프로그램이 재미있다며 꼭 보아야겠다고 작심을 하고 부모에게 사정을 한다. 하지만 음식이 몸에 영향을 끼치듯이, 무엇을 보느냐 듣느냐 배우느냐에 따라 그것이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세계관을 이룬다. 또한 삶의 모양을 만든다.
최근 사스(SARS/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라는 신종 괴질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미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가 발생했고, 도시가 마비되고 각 나라마다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사스의 감염은 경제,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영향력은 가히 다이너마이트(dynamite)급이다.
그런데 이 괴질 사스의 원인균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개에게서나 발생하는 바이러스가 변종이 되어 사람에게 폐렴 등을 일으키며 발생하게 된다고 한다. 문제는 숙주다. 바이러스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바이러스의 숙주인 물체에 바이러스가 침입했을 때, 비로소 바이러스는 그 존재를 드러내며 활동을 시작한다.
사실 바이러스는 자신이 너무 강해도 안되고 약해도 안된다. 자신이 너무 강하면 자신의 집과 같은 숙주가 죽게 되고, 너무 약하면 숙주의 면역체에 의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그 나름대로의 절묘함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인 숙주를 괴롭히는 것이 바이러스의 소망이다.
이처럼, 그냥 넘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부모 입장에서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는 하나의 바이러스가 생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듯이, 방송 프로그램 하나가 인생을 좌우할 수 도 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본다. 아는 만큼 산다. 안다는 것은 결국 사람 안에 담겨진 것의 드러남을 의미한다. 담겨진 것들이 지식 또는 지혜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삶 속에 가치관을 이루며 문화와 습관을 형성하고 표현한다.
재방송을 보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과거 지향적으로 고착화할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염려(念慮)일수 있으나 가능성(可能性)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아이들과 채널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될성싶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과거(過去)문제로 시끄럽다. 정부의 모 부서 장을 임명하는데, 거론된 사람의 과거가 임명의 원인이 되는가 하면, 임명 반대의 원인이 되고 있다. 과거에 어떤 말을 했느냐, 어떤 이념적 성향을 지녔느냐, 어떤 글을 썼느냐, 어떤 행동을 했느냐 등 과거의 모든 것이 발목을 잡기도 하고 길을 열어 주기도 한다.
이처럼 과거(過去)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므로 과거를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역사란것도 과거 아닌가. 학문에서 고고학도 과거를 찾는 학문이다. 현재라는 것도 시간의 퇴적(堆積), 즉 과거 위에 세워진 시간으로 동일과정(同一過程)의 법칙(法則)을 이룬다.
다시말하면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가 된다. 현재는 과거를 전제한다. 현재의 나의 모습, 삶, 꿈, 사고, 판단, 설정, 관계 등 모두 과거라는 자궁에서 잉태되어 해산된 것이다. 때문에 과거는 현재의 나와 불가분의 관계다.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존재, 아니라고 해서 아닌 것이 아닌 실상이다.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다음으로 큰 상인 심사 위원상을 거머쥔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 감독의 ‘과거가 없는 남자’(The Man without a past)에서, 기억 상실로 과거를 잃어버린 주인공에게서 볼 수 있듯이, 과거가 없는 사람은 직장을 구하거나 집을 구하는 일마져 쉽지 않다. 직장이란게 이력서를 기초 서류로 하기 때문인데, 이력서라는게 그의 과거아닌가? 과거란 결국 현재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도 곧바로 과거가 된다. 사람들은 이렇게 과거를 묻고 또 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현재의 삶에 성실해야 한다. 과거는 사라진 현재이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은 내일의 가능성이다. 물론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이것은 놀라운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책임있는 오늘이어야 한다. 내일이 오늘로 올 때, 결국은 어제인 오늘로 평가되어 서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이 과거이듯이 내일 또한 오늘이다. 비록 과거로 흘러가지만 언제든지 내일인 오늘에 약이 되고 독이 될 것이다. 구약 성경 창세기 1장은 ‘날’이라는 오늘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증거한다.
그렇다. 오늘이라는 날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이유는 선물한 사람 때문이다. 선물을 함부도 내 팽개치면 그것은 곧 선물을 준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가 된다. 선물을 은혜다. 기쁘게 받은 선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하여야 옳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오늘, 사랑하며 사는 오늘, 믿음으로 행동하는 오늘, 소망이 넘치는 오늘, 나눔이 있는 오늘, 친절한 오늘, 인내하는 오늘, 화평을 이루는 오늘, 충성하는 오늘, 절제하는 오늘, 게으름 없는 최선을 다한 오늘이어야 한다. 그런 오늘이야말로 내일을 진정 값지게 하며 축복되게 한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가 볼 필요가 있다. 때로는 중심에서 보다는 사물을 주변에서 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한다. 과거를 보고 내일을 맡기는 것이 지금까지 관례이지만, 그 관례를 깨뜨릴 때, 더 나은 아름다운 내일을 창조한다.
사람은 저마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아는 것 만큼 보는 것이 사람이다.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그것은 마음껏 그 실력을 발휘한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잘 안되는 것이 고정관념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고정관념의 문제에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수니 진보니하는 대립도 동일한 고정관념의 집단들이 자신의 고정관념을 관철시키고자 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형성된 고정관념의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내면의 기억 장치에 가지고 있다. 그 고정관념은 지극히 과거적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형성된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자신의 무기도 되지만 동시에 자신의 올무도 된다. 자유를 위해 노예가 되는 모순이다. 문제는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이 타인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지배한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하여 이미 자신 안에 형성된 고정관념으로 타인을 지배한다. 오래전부터 보아왔던 타인에 대한 모든 정보가 고정관념으로 고착되어 타인을 바라볼 때, 그 정보에 의해 타인을 습관처럼 판단하고 상대하게 된다. 심지어 만나기도 전 상대방의 이름만으로 결론을 이미 내리고 상대하는 누를 늘상 범한다.
결국 그 정보를 가지고 있는 한 그는 타인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는 스스로의 아이러니에 빠진다. 자신이 정의하고 그 정의에 고통당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은 쉴새없이 반복 교환된다. 너나 할 것없이 누구나 기준의 잣대가 과거에 형성된 정보에 의한다면 그 표적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모두의 포로가 되어 있다.
‘뭐하던 사람이야?’, ‘그 사람 뭐했던 사람이었어!’ 이런 말 한 마디에 사람을 만나 상대를 알기도 전에 이미 마음에 고리를 걸어둔다. 그리고 그를 경계하며 만난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대화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과거라는 산물을 토대로 하여 서로를 거래한다면 진정한 가치와 가능성을 성취할 수 없으며, 더 좋은 교제는 물론 파트너(partner)도 맴버(member)도 될 수 없다.
함께 내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항구에 묶인 배처럼 과거에 묶인채 서로 과거만을 확인하고 쓸쓸히 헤어질 뿐이다. 항구에서 닺을 걷어 올린 배만이 넓은 바다로의 항해를 할 수 있다. 쉽지는 않지만 이제 우리 서로는 과거 기억상실증이라는 질병에 걸릴 필요가 있다. 서로에 대한 어제를 잊고 오늘 처음 만난 사람으로 매일같이 이웃 앞에 서야 한다.
‘어제 먹은 것 참 맛있었어요.’ ‘당신 예전에는 그랬다면서요?’ 보다는 ‘만나서 참 반갑습니다.’ ‘무엇을 좋아 하십니까?’‘자 함께 해 봅시다.’ 등 서로의 어제의 것을 들추어 재론하지 말고 신선한 아침같은 만남과 대화 그리고 바라보는 삶이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지난 과거를 잊고 만나는 만남이야말로 새롭고 창조적인 만남이 된다. 발전적 만남이 된다. 놀라운 가능성을 함께 공유한다.
서로에 대하여 과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자.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모두 잊자. 그것이 용서이고 십자가이다. 그리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 오늘 처음 소개받은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자.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축복들이 내게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잊지않는 만큼 고통은 지속된다. 그러나 잊는다면 그만큼 희망이다. 어렵지만 과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자. 그럴 때, 새로운 관계,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광야에 길이 나고, 사막에 강이 흐른다.
“너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라히리 이제 나타낼 것이라 정녕히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장 18,19)
용서는 아름답다. 오늘도 잔잔히 마음에 걸치는 말씀을 되새질하며 집을 나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글/ 계인철(안산초원침례교회 담임목사)
기억상실증
서로에 대해 과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자
큰 아이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틈만나면 책을 읽는다. 어려서부터 익힌 습관이다. 집에서 아빠와 엄마가 늘 책을 읽은 것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 결과 큰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지만 친구들의 여러 문제들을 상담하며 나름대로 대안 제시도 하여 주고 있다고 하니 제법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 아이는 이와는 정반대다. 책을 읽으라면 읽는 척만 하니 말이다. 학교에서 독서 숙제를 내주면 책 전체를 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책의 한 단원을 읽고는 다 읽었다며 독서 확인을 해 달라고 엄마를 조른다.
이런 둘째 아이는 틈만나면 텔레비전(television)을 켠다. 책보다 텔레비전을 좋아한다. 정말 둘 째 아이야말로 ‘TV는 나의 목자’이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텔레비전 리모콘을 찾아 텔레비전을 켜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는 일도 텔레비전을 켜는 일이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텔레비전을 즐긴다. 그 중에서도 만화와 함께 드라마(drama)와 코미디(comedy)를 즐겨 본다. 요즘은 텔레비전이 다채널로 되어 있어 수 십개의 채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보는 시대가 되었다.
둘째 아이는 코미디 부분에 있어서만은 지나간 방송을 몇 번이고 다시 보고 또 본다. 말 그대로 재방송이다. 그 영향 이어서인지 둘째 아이는 야단을 맞고도 금새 언제 야단맞았느냐는 식이다. 속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속이 없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런 아이를 향해 ‘또 그거냐? 어제 본 것을 또 보냐, 본 것은 더 이상 보지마! 빨리 다른 데로 돌려, 아니면 꺼라.’고 나무란다. 그러면 아이는 ‘에이’ 하면서 부모의 권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다.
하지만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울라치면 어김없이 재방송으로 되돌아 간다. 보고 또 보는 아이와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는 부모의 실랑이는 숨박꼭질하듯이 뫼비우스의 띠 위를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사실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코미디가 즐거운 아이에게 코미디를 보고 또 본들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부모인 나의 마음은, 아이가 지나간 방송을 습관적으로 보는 사이 지나간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습관이 형성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제동을 건다. 지나간 방송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아이의 마음이 어느새 과거 지향적으로 형성된 듯 하여 가능한 새로운 방송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새롭게 제공되는 방송을 보아야 내일은 어떤 방송이 제공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내일을 마음에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지나간 것을 자꾸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이 꺾여서는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 방송의 ‘타임~’이라는 프로그램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고 다시 한 번 지난날을 회상하는 유익함도 있는 방송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을 과거에 묶어 두는 것 같고 내일에 대한 꿈을 상쇄시키는 것같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하지만 이 때에도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인다. 아이들은 이 프로그램이 재미있다며 꼭 보아야겠다고 작심을 하고 부모에게 사정을 한다. 하지만 음식이 몸에 영향을 끼치듯이, 무엇을 보느냐 듣느냐 배우느냐에 따라 그것이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세계관을 이룬다. 또한 삶의 모양을 만든다.
최근 사스(SARS/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라는 신종 괴질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미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가 발생했고, 도시가 마비되고 각 나라마다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사스의 감염은 경제,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영향력은 가히 다이너마이트(dynamite)급이다.
그런데 이 괴질 사스의 원인균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개에게서나 발생하는 바이러스가 변종이 되어 사람에게 폐렴 등을 일으키며 발생하게 된다고 한다. 문제는 숙주다. 바이러스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바이러스의 숙주인 물체에 바이러스가 침입했을 때, 비로소 바이러스는 그 존재를 드러내며 활동을 시작한다.
사실 바이러스는 자신이 너무 강해도 안되고 약해도 안된다. 자신이 너무 강하면 자신의 집과 같은 숙주가 죽게 되고, 너무 약하면 숙주의 면역체에 의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그 나름대로의 절묘함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인 숙주를 괴롭히는 것이 바이러스의 소망이다.
이처럼, 그냥 넘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부모 입장에서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는 하나의 바이러스가 생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듯이, 방송 프로그램 하나가 인생을 좌우할 수 도 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본다. 아는 만큼 산다. 안다는 것은 결국 사람 안에 담겨진 것의 드러남을 의미한다. 담겨진 것들이 지식 또는 지혜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삶 속에 가치관을 이루며 문화와 습관을 형성하고 표현한다.
재방송을 보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과거 지향적으로 고착화할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염려(念慮)일수 있으나 가능성(可能性)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아이들과 채널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될성싶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과거(過去)문제로 시끄럽다. 정부의 모 부서 장을 임명하는데, 거론된 사람의 과거가 임명의 원인이 되는가 하면, 임명 반대의 원인이 되고 있다. 과거에 어떤 말을 했느냐, 어떤 이념적 성향을 지녔느냐, 어떤 글을 썼느냐, 어떤 행동을 했느냐 등 과거의 모든 것이 발목을 잡기도 하고 길을 열어 주기도 한다.
이처럼 과거(過去)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므로 과거를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역사란것도 과거 아닌가. 학문에서 고고학도 과거를 찾는 학문이다. 현재라는 것도 시간의 퇴적(堆積), 즉 과거 위에 세워진 시간으로 동일과정(同一過程)의 법칙(法則)을 이룬다.
다시말하면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가 된다. 현재는 과거를 전제한다. 현재의 나의 모습, 삶, 꿈, 사고, 판단, 설정, 관계 등 모두 과거라는 자궁에서 잉태되어 해산된 것이다. 때문에 과거는 현재의 나와 불가분의 관계다.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존재, 아니라고 해서 아닌 것이 아닌 실상이다.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다음으로 큰 상인 심사 위원상을 거머쥔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 감독의 ‘과거가 없는 남자’(The Man without a past)에서, 기억 상실로 과거를 잃어버린 주인공에게서 볼 수 있듯이, 과거가 없는 사람은 직장을 구하거나 집을 구하는 일마져 쉽지 않다. 직장이란게 이력서를 기초 서류로 하기 때문인데, 이력서라는게 그의 과거아닌가? 과거란 결국 현재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도 곧바로 과거가 된다. 사람들은 이렇게 과거를 묻고 또 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현재의 삶에 성실해야 한다. 과거는 사라진 현재이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은 내일의 가능성이다. 물론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이것은 놀라운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책임있는 오늘이어야 한다. 내일이 오늘로 올 때, 결국은 어제인 오늘로 평가되어 서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이 과거이듯이 내일 또한 오늘이다. 비록 과거로 흘러가지만 언제든지 내일인 오늘에 약이 되고 독이 될 것이다. 구약 성경 창세기 1장은 ‘날’이라는 오늘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증거한다.
그렇다. 오늘이라는 날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이유는 선물한 사람 때문이다. 선물을 함부도 내 팽개치면 그것은 곧 선물을 준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가 된다. 선물을 은혜다. 기쁘게 받은 선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하여야 옳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오늘, 사랑하며 사는 오늘, 믿음으로 행동하는 오늘, 소망이 넘치는 오늘, 나눔이 있는 오늘, 친절한 오늘, 인내하는 오늘, 화평을 이루는 오늘, 충성하는 오늘, 절제하는 오늘, 게으름 없는 최선을 다한 오늘이어야 한다. 그런 오늘이야말로 내일을 진정 값지게 하며 축복되게 한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가 볼 필요가 있다. 때로는 중심에서 보다는 사물을 주변에서 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한다. 과거를 보고 내일을 맡기는 것이 지금까지 관례이지만, 그 관례를 깨뜨릴 때, 더 나은 아름다운 내일을 창조한다.
사람은 저마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아는 것 만큼 보는 것이 사람이다.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그것은 마음껏 그 실력을 발휘한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잘 안되는 것이 고정관념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고정관념의 문제에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수니 진보니하는 대립도 동일한 고정관념의 집단들이 자신의 고정관념을 관철시키고자 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형성된 고정관념의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내면의 기억 장치에 가지고 있다. 그 고정관념은 지극히 과거적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형성된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자신의 무기도 되지만 동시에 자신의 올무도 된다. 자유를 위해 노예가 되는 모순이다. 문제는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이 타인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지배한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하여 이미 자신 안에 형성된 고정관념으로 타인을 지배한다. 오래전부터 보아왔던 타인에 대한 모든 정보가 고정관념으로 고착되어 타인을 바라볼 때, 그 정보에 의해 타인을 습관처럼 판단하고 상대하게 된다. 심지어 만나기도 전 상대방의 이름만으로 결론을 이미 내리고 상대하는 누를 늘상 범한다.
결국 그 정보를 가지고 있는 한 그는 타인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는 스스로의 아이러니에 빠진다. 자신이 정의하고 그 정의에 고통당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은 쉴새없이 반복 교환된다. 너나 할 것없이 누구나 기준의 잣대가 과거에 형성된 정보에 의한다면 그 표적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모두의 포로가 되어 있다.
‘뭐하던 사람이야?’, ‘그 사람 뭐했던 사람이었어!’ 이런 말 한 마디에 사람을 만나 상대를 알기도 전에 이미 마음에 고리를 걸어둔다. 그리고 그를 경계하며 만난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대화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과거라는 산물을 토대로 하여 서로를 거래한다면 진정한 가치와 가능성을 성취할 수 없으며, 더 좋은 교제는 물론 파트너(partner)도 맴버(member)도 될 수 없다.
함께 내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항구에 묶인 배처럼 과거에 묶인채 서로 과거만을 확인하고 쓸쓸히 헤어질 뿐이다. 항구에서 닺을 걷어 올린 배만이 넓은 바다로의 항해를 할 수 있다. 쉽지는 않지만 이제 우리 서로는 과거 기억상실증이라는 질병에 걸릴 필요가 있다. 서로에 대한 어제를 잊고 오늘 처음 만난 사람으로 매일같이 이웃 앞에 서야 한다.
‘어제 먹은 것 참 맛있었어요.’ ‘당신 예전에는 그랬다면서요?’ 보다는 ‘만나서 참 반갑습니다.’ ‘무엇을 좋아 하십니까?’‘자 함께 해 봅시다.’ 등 서로의 어제의 것을 들추어 재론하지 말고 신선한 아침같은 만남과 대화 그리고 바라보는 삶이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지난 과거를 잊고 만나는 만남이야말로 새롭고 창조적인 만남이 된다. 발전적 만남이 된다. 놀라운 가능성을 함께 공유한다.
서로에 대하여 과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자.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모두 잊자. 그것이 용서이고 십자가이다. 그리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 오늘 처음 소개받은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자.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축복들이 내게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잊지않는 만큼 고통은 지속된다. 그러나 잊는다면 그만큼 희망이다. 어렵지만 과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자. 그럴 때, 새로운 관계,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광야에 길이 나고, 사막에 강이 흐른다.
“너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라히리 이제 나타낼 것이라 정녕히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장 18,19)
용서는 아름답다. 오늘도 잔잔히 마음에 걸치는 말씀을 되새질하며 집을 나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글/ 계인철(안산초원침례교회 담임목사)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