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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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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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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9]다원주의, 동의 못한다
우리 모두가 종교 이전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각기 낡은 종교지상주의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이상 나는 종교다원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교들간의 각기 이상한 복색과 언행을 하면서 `나무 관세음 아멘!'을 하거나 `석가·예수·모하멧의 이름으로 기도하노라'해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인가. 또 종교들간에 화해를 하고 `얼씨구'를 한다는 것인가.
종교들 모두는 제각각이다. 서로는 서로를 존중해야 할만큼 그 출입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다. 문화사의 도움을 받아 말한다면 고등종교에 해당한다. 그들이 진실로 고등종교이면 종교들간에 결의를 하지 않아도 화해를 말하고 일치를 말하면서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휴먼 스토리를 만들지 않아도 평화로운 것이다.
우리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타종교, 즉 불교나 유교(?)등과의 만남보다 기독교 자체 안에서의 이해관계들을 조심스럽게 아우르는 작업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힘이 남거든 같은 셈족의 종교인 이슬람과 어떻게 하면 좀 더 가까운 이해로 만날 수 있는가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불교나 그 밖의 농경문화 출신의 종교나 사상들과의 만남은 직접이해의 부딪침이 없으니 만나면 되는 것이고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라는 의미는 목적이 같은 것이 종교들의 지향점이니 각기 종교의 발생적 동기에 상관없이 하나일 수 있다고 하는데, 인류의 종교의 출발점이 목축문화와 농경문화간의 차이점이 있고, 이들의 종교문화 양식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일원론과 이원론 및 다신론의 차이 만큼이나 된다고 할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또 모를까. 예수 이전의 종교지상주의 시대에 머물어 있는 종교들이 다원주의자, 각각 다양한 원리를 가지고 있으나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아서 목탁 치면서 찬송하자는데 그건 아무리 잘 보아줄려고 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목탁치지 말고 찬송을 하지 않으면 각기의 종교들의 고유복장도 벗어 던지고 평범한 일상복을 입고 애국가를 부르고 농부가를 부르면서 만난다면 모를까. 그 마음속에는 자기 우월감에 취해 있으면서 달콤한 말로 `예배·미사·염불'을 함께 드리자 할 때는 자칫 우스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정서 아래서는 종교들간에 다원주의적 발상에 의해서 만나자고까지 할 필요없다. 우리는 다원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1919년 3월 1일, 기독교·불교·천도교가 힘을 합하여 민족자존을 위하여 합심 협력했던 아름다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같은 수준과 방식이 상식 그 이상의 아름다운 종교들의 덕목이지, 뿌리가 같으니 또 목적도 같아라 하면서 휴머니즘의 발상에 의한 `다원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만나자 함에는 그 속에 혼합주의와 영지주의적 함정이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와 싸워서 힘겨운 인내를 했으며, 지금도 하고 있는 기독교는 다원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 인간사회 안에서 공생을 하면서 종교적 이해를 떠나서 서로 간에 친교와 유대 또는 필요한 협조를 하는 것과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철학(종교)적 장치를 해 놓고 만나자는 행위는 순수한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각 종교들마다 자기가 배운대로 행동을 하면 인류의 공동선을 향해 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나 오히려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거미줄 전략 같은 방식이면 부작용이 더 많을 것이다.(無然)
출처/2003.6.25 들소리신문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62
우리 모두가 종교 이전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각기 낡은 종교지상주의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이상 나는 종교다원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교들간의 각기 이상한 복색과 언행을 하면서 `나무 관세음 아멘!'을 하거나 `석가·예수·모하멧의 이름으로 기도하노라'해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인가. 또 종교들간에 화해를 하고 `얼씨구'를 한다는 것인가.
종교들 모두는 제각각이다. 서로는 서로를 존중해야 할만큼 그 출입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다. 문화사의 도움을 받아 말한다면 고등종교에 해당한다. 그들이 진실로 고등종교이면 종교들간에 결의를 하지 않아도 화해를 말하고 일치를 말하면서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휴먼 스토리를 만들지 않아도 평화로운 것이다.
우리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타종교, 즉 불교나 유교(?)등과의 만남보다 기독교 자체 안에서의 이해관계들을 조심스럽게 아우르는 작업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힘이 남거든 같은 셈족의 종교인 이슬람과 어떻게 하면 좀 더 가까운 이해로 만날 수 있는가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불교나 그 밖의 농경문화 출신의 종교나 사상들과의 만남은 직접이해의 부딪침이 없으니 만나면 되는 것이고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라는 의미는 목적이 같은 것이 종교들의 지향점이니 각기 종교의 발생적 동기에 상관없이 하나일 수 있다고 하는데, 인류의 종교의 출발점이 목축문화와 농경문화간의 차이점이 있고, 이들의 종교문화 양식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일원론과 이원론 및 다신론의 차이 만큼이나 된다고 할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또 모를까. 예수 이전의 종교지상주의 시대에 머물어 있는 종교들이 다원주의자, 각각 다양한 원리를 가지고 있으나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아서 목탁 치면서 찬송하자는데 그건 아무리 잘 보아줄려고 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목탁치지 말고 찬송을 하지 않으면 각기의 종교들의 고유복장도 벗어 던지고 평범한 일상복을 입고 애국가를 부르고 농부가를 부르면서 만난다면 모를까. 그 마음속에는 자기 우월감에 취해 있으면서 달콤한 말로 `예배·미사·염불'을 함께 드리자 할 때는 자칫 우스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정서 아래서는 종교들간에 다원주의적 발상에 의해서 만나자고까지 할 필요없다. 우리는 다원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1919년 3월 1일, 기독교·불교·천도교가 힘을 합하여 민족자존을 위하여 합심 협력했던 아름다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같은 수준과 방식이 상식 그 이상의 아름다운 종교들의 덕목이지, 뿌리가 같으니 또 목적도 같아라 하면서 휴머니즘의 발상에 의한 `다원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만나자 함에는 그 속에 혼합주의와 영지주의적 함정이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와 싸워서 힘겨운 인내를 했으며, 지금도 하고 있는 기독교는 다원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 인간사회 안에서 공생을 하면서 종교적 이해를 떠나서 서로 간에 친교와 유대 또는 필요한 협조를 하는 것과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철학(종교)적 장치를 해 놓고 만나자는 행위는 순수한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각 종교들마다 자기가 배운대로 행동을 하면 인류의 공동선을 향해 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나 오히려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거미줄 전략 같은 방식이면 부작용이 더 많을 것이다.(無然)
출처/2003.6.25 들소리신문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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