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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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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습으로 말한다. 교회는 예수의 현재요 그 육신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말하여 뜻을 밝히면 된다.
교회는 그래서 존엄이다. 성령 하나님의 활동이 구체화되면서 교회의 가치는 제3위 하나님 안에서 그 분의 충만 중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를 말할 때 용기가 나지 않음을 어찌하랴.
들으라. 옥토의 교훈을 주실 때, 어떤 씨앗은 길바닥에, 돌밭에, 가시밭에, 그러나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는다. 이 말씀 후 예수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23) 하시는 데 말씀의 기록 문서 앞에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들을 귀가 따로 있다 하시는구나. `아무나 와도 좋다' 하시더니 `귀가 있는 자만이 듣는다' 하신다. 그렇다. 창세기 12장 초두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때도 사실은 당시에 많은 아브람이 있었으나 ‘귀 있는 아브람’이 말씀을 들었다 할 수 있다.
오늘의 교회는 그러므로 ‘교회’는 단수 취급을 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있고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이 있으나 이 모두를 복수가 아닌 단수로 취급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 한 교회가 될 수 있고, 이는 한 분 성령 안에서 모두가 자기 낮춤을 이룬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의 현재이면서 또 ‘없음’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시던 그 말씀을 해석한다면 교회는 어떤 의미로는 ‘없음’이 되기도 한다. ‘없음’을 티끌 같은 겸손으로 바꾸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이 땅의 교회들아, 신자들아, 스스로 자기를 성도라, 또는 성인이라 하고 싶은 자들아. 교회의 존엄을 알았거든 그 앞에 무릎을 꿇으라. 스스로의 모습이 또 교회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의 일부가 되었으니 ‘자기의 존엄’ 마저도 터득하는 기회가 오늘이었으면 한다.
예수 배우자, 하면서 허공을 치지 마라. 예수 내 눈에는 너의 곁에 지금 계시는데 너는 예수를 비껴 가는구나. 귀 있는 자 들으라. 눈 있는자가 보리라. 보고 듣는 자여 붙잡으라. 붙잡히라.
오늘의 세상에는 신자가 많다. 10억이 넘는다. 대한민국에도 1천만 명이다. 하나님은 단 하나 예수(독생자)일 때도 ‘십자가’라는 극한의 승부를 하셨다. 단 하나 뿐인 그때, 하나님은 사단과 정면 대결을 시키셨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기독교 자원은 많다. ‘나’ 하나를 들어 사단과 정면승부를 하게 하신들 아주 큰 모험은 아니다. 물론 사단과 일대일 대결을 해야 하는 나는 하늘 아래서 ‘단 하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자여, 교회여, 예수의 현재여, 또 모든 것이 되는 이들이여, 자기 자신의 진실 곧 실존이라고도 하는 신자의 진실을 걸고서 하나님 말씀 앞에 정면으로 서 보고 싶지 않은가.
모세는 그리스도가 아니었기에 ‘뒤통수대결’을 했으나 예수는 ‘정면승부’를 했었다. 예수의 사람들아, 예수의 육신들아, 교회들아, 신자들아, 이 말이 들리는 귀를 가진 자들아.
(無然)
2003.8.27 들소리신문 홈페이지: http://deulsoritimes.co.kr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68
교회는 그래서 존엄이다. 성령 하나님의 활동이 구체화되면서 교회의 가치는 제3위 하나님 안에서 그 분의 충만 중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를 말할 때 용기가 나지 않음을 어찌하랴.
들으라. 옥토의 교훈을 주실 때, 어떤 씨앗은 길바닥에, 돌밭에, 가시밭에, 그러나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는다. 이 말씀 후 예수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23) 하시는 데 말씀의 기록 문서 앞에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들을 귀가 따로 있다 하시는구나. `아무나 와도 좋다' 하시더니 `귀가 있는 자만이 듣는다' 하신다. 그렇다. 창세기 12장 초두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때도 사실은 당시에 많은 아브람이 있었으나 ‘귀 있는 아브람’이 말씀을 들었다 할 수 있다.
오늘의 교회는 그러므로 ‘교회’는 단수 취급을 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있고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이 있으나 이 모두를 복수가 아닌 단수로 취급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 한 교회가 될 수 있고, 이는 한 분 성령 안에서 모두가 자기 낮춤을 이룬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의 현재이면서 또 ‘없음’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시던 그 말씀을 해석한다면 교회는 어떤 의미로는 ‘없음’이 되기도 한다. ‘없음’을 티끌 같은 겸손으로 바꾸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이 땅의 교회들아, 신자들아, 스스로 자기를 성도라, 또는 성인이라 하고 싶은 자들아. 교회의 존엄을 알았거든 그 앞에 무릎을 꿇으라. 스스로의 모습이 또 교회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의 일부가 되었으니 ‘자기의 존엄’ 마저도 터득하는 기회가 오늘이었으면 한다.
예수 배우자, 하면서 허공을 치지 마라. 예수 내 눈에는 너의 곁에 지금 계시는데 너는 예수를 비껴 가는구나. 귀 있는 자 들으라. 눈 있는자가 보리라. 보고 듣는 자여 붙잡으라. 붙잡히라.
오늘의 세상에는 신자가 많다. 10억이 넘는다. 대한민국에도 1천만 명이다. 하나님은 단 하나 예수(독생자)일 때도 ‘십자가’라는 극한의 승부를 하셨다. 단 하나 뿐인 그때, 하나님은 사단과 정면 대결을 시키셨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기독교 자원은 많다. ‘나’ 하나를 들어 사단과 정면승부를 하게 하신들 아주 큰 모험은 아니다. 물론 사단과 일대일 대결을 해야 하는 나는 하늘 아래서 ‘단 하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자여, 교회여, 예수의 현재여, 또 모든 것이 되는 이들이여, 자기 자신의 진실 곧 실존이라고도 하는 신자의 진실을 걸고서 하나님 말씀 앞에 정면으로 서 보고 싶지 않은가.
모세는 그리스도가 아니었기에 ‘뒤통수대결’을 했으나 예수는 ‘정면승부’를 했었다. 예수의 사람들아, 예수의 육신들아, 교회들아, 신자들아, 이 말이 들리는 귀를 가진 자들아.
(無然)
2003.8.27 들소리신문 홈페이지: http://deulsoritimes.co.kr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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