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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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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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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81
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2003.12.17
진실한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새삼스럽지도 않은 자문을 해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천하만국의 교회는 한길로 통한다. 서로가 만나게 된다. 서로가 모두 하나임을 저마다 깨닫게 된다.
모로코의 이슬람 여행가 이븐바투타는 30여 년 동안 지구를 일곱 바퀴 돌만큼 모험에 찬 순례를 했었다. 아직은 해양술이 미미했던 13세기의 일이니 그의 초인적인 인내를 쉽게 알만하다.
그가 이렇듯 스케일이 큰 여행을 수십년 동안 해낼 수 있었던 배경은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의 형제애의 열매였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어디를 가거나 무슬림들이 있는 지역에 가면 그곳에서 그의 필요를 모두 채울 수 있었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전대에 담고, 병들면 치료하고, 배고프면 밥을 얻고, 쉴 곳이 없으면 거처를 제공받는다.
저들 이슬람 공동체의 파격적인 연대감이다. 아프리카 맛사이들이나 마찬가지로 이슬람이 나그네 대접에 탁월했던 것은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나그네 대접하다가 천사(하나님일 수 있음)대접을 하여 축복 받았던 데서 연유함을 우리도 안다.
이런 관습은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승복를 입은 자가 절에 찾아들면 하룻밤은 무조건 OK, 신분이 확인되면 열흘이고, 그 이상도 편안히 쉬고 여비를 얻기도 하며 그 밖의 수행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모두 공급받는 관습이 1천여 년이 넘은 한국불교에 있다.
이는 한 길을 가는 도반이면 마땅히 나누는 기본적인 생활 관습이었다. 그러면 기독교(신교)는 어떤가? 맨 몸으로 어디까지 여행할 수 있는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같은 예법의 차이는 기독교의 이기심과 개인주의에서의 결과이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절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프로테스탄트는 바로 이것이 태생적 한계일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우 탐욕적이다. 목표를 위해서 무자비한 경쟁을 한다. 상식적인 규범이 외면 되고 있다. 까마귀들도 저들끼리는 관대하건만 기독교는 매우 계산적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자기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상대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투자를 하지 않으려 한다.
매우 곤란한 버릇이다. 빨리 고쳐야할 질병, 더 심한 경우는 마치 종양과도 같은 질환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이들이면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인생들이 내 형제요 자매이며 부모이며 또 자식이어야 한다. 이만한 관용이 없이 누가 그를 크리스찬이라 하겠는가.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삼가, 삼가라! 탐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사단의 사슬에 묶여 헤어나오지 못한다. 널리 세계를 이롭게 하라. 모세가 시나이 광야에서 호연지기를 익혔듯이 크리스챤은 모두 하늘 아래서 한 핏줄임을 믿어 서로를 대하면 즐거워하라. 이름, 성도 모를 경우라해도 신자이고 목회자인줄 알게 되면 친정어머니가 시집살이하다 온 딸자식 대하듯 하고, 잃었던 형제를 만난 것처럼 할 수 있는 포부를 가지라.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세계화의 기초임을 알아야 한다.
〈無然〉
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2003.12.17
진실한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새삼스럽지도 않은 자문을 해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천하만국의 교회는 한길로 통한다. 서로가 만나게 된다. 서로가 모두 하나임을 저마다 깨닫게 된다.
모로코의 이슬람 여행가 이븐바투타는 30여 년 동안 지구를 일곱 바퀴 돌만큼 모험에 찬 순례를 했었다. 아직은 해양술이 미미했던 13세기의 일이니 그의 초인적인 인내를 쉽게 알만하다.
그가 이렇듯 스케일이 큰 여행을 수십년 동안 해낼 수 있었던 배경은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의 형제애의 열매였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어디를 가거나 무슬림들이 있는 지역에 가면 그곳에서 그의 필요를 모두 채울 수 있었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전대에 담고, 병들면 치료하고, 배고프면 밥을 얻고, 쉴 곳이 없으면 거처를 제공받는다.
저들 이슬람 공동체의 파격적인 연대감이다. 아프리카 맛사이들이나 마찬가지로 이슬람이 나그네 대접에 탁월했던 것은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나그네 대접하다가 천사(하나님일 수 있음)대접을 하여 축복 받았던 데서 연유함을 우리도 안다.
이런 관습은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승복를 입은 자가 절에 찾아들면 하룻밤은 무조건 OK, 신분이 확인되면 열흘이고, 그 이상도 편안히 쉬고 여비를 얻기도 하며 그 밖의 수행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모두 공급받는 관습이 1천여 년이 넘은 한국불교에 있다.
이는 한 길을 가는 도반이면 마땅히 나누는 기본적인 생활 관습이었다. 그러면 기독교(신교)는 어떤가? 맨 몸으로 어디까지 여행할 수 있는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같은 예법의 차이는 기독교의 이기심과 개인주의에서의 결과이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절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프로테스탄트는 바로 이것이 태생적 한계일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우 탐욕적이다. 목표를 위해서 무자비한 경쟁을 한다. 상식적인 규범이 외면 되고 있다. 까마귀들도 저들끼리는 관대하건만 기독교는 매우 계산적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자기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상대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투자를 하지 않으려 한다.
매우 곤란한 버릇이다. 빨리 고쳐야할 질병, 더 심한 경우는 마치 종양과도 같은 질환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이들이면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인생들이 내 형제요 자매이며 부모이며 또 자식이어야 한다. 이만한 관용이 없이 누가 그를 크리스찬이라 하겠는가.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삼가, 삼가라! 탐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사단의 사슬에 묶여 헤어나오지 못한다. 널리 세계를 이롭게 하라. 모세가 시나이 광야에서 호연지기를 익혔듯이 크리스챤은 모두 하늘 아래서 한 핏줄임을 믿어 서로를 대하면 즐거워하라. 이름, 성도 모를 경우라해도 신자이고 목회자인줄 알게 되면 친정어머니가 시집살이하다 온 딸자식 대하듯 하고, 잃었던 형제를 만난 것처럼 할 수 있는 포부를 가지라.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세계화의 기초임을 알아야 한다.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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