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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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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계간 <나다> [2000년-여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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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바로 거기다
원주인(原住人)을 자처하시던 무위당(武爲堂) 장(張) 선생님이 어느 날 저에게 유수식견(唯須 息見)이라는 붓글씨를 주시면서 ‘이현주 도인(道人) 시상(是賞)’이라고 말미에 적어주셨습니 다. 그 무렵 저는 기독교 목사가 된 지 얼마 안되어 제 이름 아래 아무개 목사라고 써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도인(道人)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내심 의아스럽 고 어색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며칠 뒤에 선생님께 여쭈었지요. “선생님 제가 어떻게 도인(道人)입니까? 아무래도 어색하군요.” 그러자 선생님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면서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그러고 하시는 말씀이, “자네는 길가는 사람 아닌가?” “그게 그런 뜻입니까?” “그럼, 무슨 다른 뜻이 있겠나? 사람이란 누구나 다 도인(道人)인 게야.” 말씀을 듣는 순간 도인(道人)이라는 단어가 주던 어색하고 낯선 분위기가 말 그대로 안개처 럼 걷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내가 길가는 사람이라는, 그러니까 길을 닦는 것 말고는 내가 따로 할 일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과연입니다. 인생이란 그 자체가 수도(修道)요 수행(修行)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느냐, 무슨 공(功)을 이루었느냐 그런 것은 궁극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탑을 쌓아 도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젠가 허물어져 없어질 테니까요. 그것이 모든 존재물의 숙명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던가요? 아마도 그래서 긴지스강 모래알 만큼 많은 칠보(七寶)로 보시(布施)를 해도 금강경 한 구절 독송하느니만 못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요컨대, 몸으로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해도 그 몸을 맑고 깨끗하게 닦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 은 없다는 뜻이겠지요. 공자님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말씀하시면서 모든 일에 수신(修身)이 본(本)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장이 집안을 다스리고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고 천자가 천하를 평정하는데 그 모든 일이 수신(修身)에서 나와 수신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국회 의원이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 자기 몸(과 마음)을 닦는 일이요 대통령 이 청와대에서 해야 할 일의 가장 근본이 자기 몸 닦는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천하를 손에 넣은들 그러고서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겠냐고 말 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목숨’이라는 게 단순히 육신의 존속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역시 그분도 우리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성취보다 그것을 이루는 우리 자신의 참된 존재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가 성인(聖人)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그분들의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거나 외면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한 태도 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러겠다는 사람들한테는 더 할 말이 없군요. 아무튼 그래서 저는, 인생이란 수도(修道)요 수행(修行)이라고, 그것이 아닌 인생은 헛수고일 뿐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가 닦아야 할 도(道)와 행(行)은 무엇일까요? 어디 가 야 그것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이것입니다. “그것(道)은 내 몸과 마음이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내가 어디를 가든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누구도 이 엄연한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수도를 위하여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로 가야 할 이유가 없으며, 그래서는 수도를 할 수도 없습니다. 길을 떠나서 어찌 길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흔히 입산수도(入山 修道)라는 말을 씁니다만 입산(入山)이 곧 수도는 아닙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강화도 온수리교회(성공회)에서 성경읽기를 함께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동서 울 버스 터미널에서 충주행 표를 사고 시간이 조금 남아 책을 읽고 있는데 누가 가까이 다 가오는 듯하더니 제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어요. 쳐다보니 모르는 얼굴입니다. 그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제게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엉겹결에, “강화도에서 옵니다.” 대답을 해놓고 이 사람을 어디서 보았더라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 었지요.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강화도 무슨 산(山)이오?” 머리로는 계속 그가 누군지 생각을 더듬으며 입으로 대답합니다. “산이 아닌데요?” 그러자 그가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묻더군요. “그래요? 그럼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밖에요. “교회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가 완전히 실망한 얼굴로 대꾸하는데, “그래요? 도(道)닦는 분 아니슈?”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부싯돌 불똥처럼 화가 나더군요. 세상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 런 실례를 저지르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도(道)에 관심깨나 있다는 친구가 말입니 다. 저의 대답이 곱게 나올 리 없지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저는 앉아 있고 그는 서 있었습니다) 말했습니다. “내가 도로공사 사장인줄 아시오? 도를 닦게.” 내 말투에 가시가 돋힌 줄 알았는지 그가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등을 돌렸습니다. 저는 얼른 손을 내밀어 그의 허리띠를 움켜 잡았지요. 그가 고개를 돌리며 왜 그러냐는 얼굴로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의 허리띠를 밀고 당기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말이오, 내 생각에는 바로 이게 도(道)요. 도(道)가 여기 있는데 도 닦으러 산 에는 얼빠졌다고 가는 거요?” 그러자 그가 정말 얼빠진 표정으로 “그건 그렇지요” 하면서 저의 말에 수긍을 하는 것이었 습니다. 화도 좀 풀리고 또 더 무슨 할 말도 없기에 손을 놓았더니 마치 방생된 물고기가 꼬리를 저으며 사라지듯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가더군요. 잠깐 스치듯 지나간 짧은 인연이었습니다만, 그는 저에게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을 확인시켜 준 스승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도하러 산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산에 들어가야 수도를 한 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道)는 내가 있는 지금·여기에 있고 지금·여기에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유일한 도장(道場)은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이 자리인 것입니다. 신라 진덕여왕 시절, 유명한 재가신도(在家信徒)였던 부설거사(浮雪居士)의 게(偈)에 이런 것 이 있습니다. 평등(平等)을 좇아 깨닫고 무등(無等)을 행하며 무연(無緣)에 닿아 깨치고 유연(有緣)을 헤아리며 둥근구슬 손에 잡고 단청(丹靑)을 분별하며 맑은 거울 높이 걸고 오랑캐와 중화인을 비친다. 참(眞)에 맞게 처세(處世)하니 마음은 드넓고 집안에 있어 도(道)를 이루니 몸은 뜸직하다. 색(色)과 성(聲)을 얻었으나 어디에도 걸리지를 아니하니 깊은 골에 오래 앉을 까닭이 바이 없다. 그리고 아래의 것은 제가 며칠 전 기차로 여행을 하다가 문득 쪽지에 적어본 것입니다. 그림자에 속지 말아라 있는 듯 보이지만 실(實)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그늘을 아니 밟고서 어느 열매인들 손에 넣으랴?
원주인(原住人)을 자처하시던 무위당(武爲堂) 장(張) 선생님이 어느 날 저에게 유수식견(唯須 息見)이라는 붓글씨를 주시면서 ‘이현주 도인(道人) 시상(是賞)’이라고 말미에 적어주셨습니 다. 그 무렵 저는 기독교 목사가 된 지 얼마 안되어 제 이름 아래 아무개 목사라고 써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도인(道人)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내심 의아스럽 고 어색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며칠 뒤에 선생님께 여쭈었지요. “선생님 제가 어떻게 도인(道人)입니까? 아무래도 어색하군요.” 그러자 선생님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면서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그러고 하시는 말씀이, “자네는 길가는 사람 아닌가?” “그게 그런 뜻입니까?” “그럼, 무슨 다른 뜻이 있겠나? 사람이란 누구나 다 도인(道人)인 게야.” 말씀을 듣는 순간 도인(道人)이라는 단어가 주던 어색하고 낯선 분위기가 말 그대로 안개처 럼 걷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내가 길가는 사람이라는, 그러니까 길을 닦는 것 말고는 내가 따로 할 일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과연입니다. 인생이란 그 자체가 수도(修道)요 수행(修行)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느냐, 무슨 공(功)을 이루었느냐 그런 것은 궁극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탑을 쌓아 도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젠가 허물어져 없어질 테니까요. 그것이 모든 존재물의 숙명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던가요? 아마도 그래서 긴지스강 모래알 만큼 많은 칠보(七寶)로 보시(布施)를 해도 금강경 한 구절 독송하느니만 못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요컨대, 몸으로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해도 그 몸을 맑고 깨끗하게 닦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 은 없다는 뜻이겠지요. 공자님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말씀하시면서 모든 일에 수신(修身)이 본(本)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장이 집안을 다스리고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고 천자가 천하를 평정하는데 그 모든 일이 수신(修身)에서 나와 수신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국회 의원이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 자기 몸(과 마음)을 닦는 일이요 대통령 이 청와대에서 해야 할 일의 가장 근본이 자기 몸 닦는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천하를 손에 넣은들 그러고서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겠냐고 말 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목숨’이라는 게 단순히 육신의 존속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역시 그분도 우리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성취보다 그것을 이루는 우리 자신의 참된 존재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가 성인(聖人)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그분들의 가르침을 가벼이 여기거나 외면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한 태도 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러겠다는 사람들한테는 더 할 말이 없군요. 아무튼 그래서 저는, 인생이란 수도(修道)요 수행(修行)이라고, 그것이 아닌 인생은 헛수고일 뿐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가 닦아야 할 도(道)와 행(行)은 무엇일까요? 어디 가 야 그것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이것입니다. “그것(道)은 내 몸과 마음이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내가 어디를 가든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누구도 이 엄연한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수도를 위하여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로 가야 할 이유가 없으며, 그래서는 수도를 할 수도 없습니다. 길을 떠나서 어찌 길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흔히 입산수도(入山 修道)라는 말을 씁니다만 입산(入山)이 곧 수도는 아닙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강화도 온수리교회(성공회)에서 성경읽기를 함께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동서 울 버스 터미널에서 충주행 표를 사고 시간이 조금 남아 책을 읽고 있는데 누가 가까이 다 가오는 듯하더니 제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어요. 쳐다보니 모르는 얼굴입니다. 그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제게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엉겹결에, “강화도에서 옵니다.” 대답을 해놓고 이 사람을 어디서 보았더라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 었지요.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강화도 무슨 산(山)이오?” 머리로는 계속 그가 누군지 생각을 더듬으며 입으로 대답합니다. “산이 아닌데요?” 그러자 그가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묻더군요. “그래요? 그럼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밖에요. “교회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가 완전히 실망한 얼굴로 대꾸하는데, “그래요? 도(道)닦는 분 아니슈?”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부싯돌 불똥처럼 화가 나더군요. 세상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 런 실례를 저지르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도(道)에 관심깨나 있다는 친구가 말입니 다. 저의 대답이 곱게 나올 리 없지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저는 앉아 있고 그는 서 있었습니다) 말했습니다. “내가 도로공사 사장인줄 아시오? 도를 닦게.” 내 말투에 가시가 돋힌 줄 알았는지 그가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등을 돌렸습니다. 저는 얼른 손을 내밀어 그의 허리띠를 움켜 잡았지요. 그가 고개를 돌리며 왜 그러냐는 얼굴로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의 허리띠를 밀고 당기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말이오, 내 생각에는 바로 이게 도(道)요. 도(道)가 여기 있는데 도 닦으러 산 에는 얼빠졌다고 가는 거요?” 그러자 그가 정말 얼빠진 표정으로 “그건 그렇지요” 하면서 저의 말에 수긍을 하는 것이었 습니다. 화도 좀 풀리고 또 더 무슨 할 말도 없기에 손을 놓았더니 마치 방생된 물고기가 꼬리를 저으며 사라지듯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가더군요. 잠깐 스치듯 지나간 짧은 인연이었습니다만, 그는 저에게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을 확인시켜 준 스승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도하러 산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산에 들어가야 수도를 한 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道)는 내가 있는 지금·여기에 있고 지금·여기에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유일한 도장(道場)은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이 자리인 것입니다. 신라 진덕여왕 시절, 유명한 재가신도(在家信徒)였던 부설거사(浮雪居士)의 게(偈)에 이런 것 이 있습니다. 평등(平等)을 좇아 깨닫고 무등(無等)을 행하며 무연(無緣)에 닿아 깨치고 유연(有緣)을 헤아리며 둥근구슬 손에 잡고 단청(丹靑)을 분별하며 맑은 거울 높이 걸고 오랑캐와 중화인을 비친다. 참(眞)에 맞게 처세(處世)하니 마음은 드넓고 집안에 있어 도(道)를 이루니 몸은 뜸직하다. 색(色)과 성(聲)을 얻었으나 어디에도 걸리지를 아니하니 깊은 골에 오래 앉을 까닭이 바이 없다. 그리고 아래의 것은 제가 며칠 전 기차로 여행을 하다가 문득 쪽지에 적어본 것입니다. 그림자에 속지 말아라 있는 듯 보이지만 실(實)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그늘을 아니 밟고서 어느 열매인들 손에 넣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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