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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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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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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계간<나다> [2000년-여름호]
통계로 본 영성살이- 오래된다고 속이 익지는 않더라
얼마 전 한미준(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 활 동과 신앙 의식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 조사 내용 중에 신앙 생활과 세상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일치한다고 생각하는지 알아본 결과, 개신교인들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응답보다 일치한다는 응답이 높았다. 하지만 35.5%는 일치하지 못한다고 답해 신앙과 현실, 종교와 삶이 이원화 된 채 생활하는 개신교인들이 적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그림 1-1) 이렇게 신앙 생활과 일상에서의 생활의 불일치 극복을 위해 교회에서 도움 받고자 하는 내용으로는 기도, 설교, 성경 공부와 교육 등의 요구가 높았다. 그러나 놀라 운 것은 '필요 사항이 없다' 또는 무응답 비율이 전체의 74.2%를 차지하고 있어 신앙 생활과 일상 생활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교회로부터 도움 받을 필요성이 대체로 없는 것으로 나타나,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삶이 이중적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갈등하지 않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 한다는 것은 이미 신앙적으로 무감각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마치 문둥병 자가 이미 병이 깊어져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 것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평가 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또 급속한 양적 성장의 부작용으로 그 동안의 외형적인 고속 성장이 속도를 멈추고 최근 성장 둔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심심찮게 그리스도인들의 좋지 않은 기사가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그들의 일상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듯 보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상황은 외형적인 성장 이면에 감추어졌던 내면적 인 성장에 대하여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신앙이 성숙되는 자리 교회에 다닌 지 오래된 사람들, 그들의 신앙을 점수로 환산할 수 있다면 몇 점 정도 될까? 신앙년수가 오래 된 사람들 외에도 담임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학생 등 교회 구성원들 모두의 신앙심 또는 신앙성숙도를 채점할 수 있다면(그런 채 점 도구만 있다면) 아마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년수나 직급에 따라 신앙심 순위가 매겨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되고 직분을 맡았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이 성숙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성숙한 신앙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신앙이 성숙하고 영적인 만족감 을 갖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신앙은 늘 우리 삶의 자리와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는 곳에서 성숙한다.
그러나 이 만남이 무조건적인 신앙 성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신앙 성숙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할 때 생기는 갈등, 즉 자기 희생과 포기가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따를 것인가 아닌가의 갈등에서 시작한다. 이 갈등에 대하여 말씀에 의해 성찰하는 기준을 얻고 그 성찰의 시간을 통하여 성령의 조명을 받게 된다. 이 때 우리는 성령의 조명에 대해 수용과 거부라는 선택의 기로 에 서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신앙 성숙에 있어서 전 환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결단한 바대로 실천에 옮기고 그 경험을 주관적으로 종합하여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에 대 한'(about God) 지식이 실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of God) 아는 지식으로 변화되 는 것이다. 영적 성숙은 바로 이렇게 말씀이 생활 속에 적용되며 말씀의 힘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과정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상황 속에 늘 존재하는 갈등의 요소 를 말씀에 비추어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될 때 일어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년수가 오래될수록 이러한 신앙의 성숙을 당연히 기 대하게 된다. 그러나 통계조사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기대가 막연한 바램 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리앎 : 내면적 종교성 이 글에서는 신앙 성숙의 기준을 내면적 종교성에 둔다. 앨포트(G. Allport)에 의 하면 인간의 신앙 가운데 가장 중심적이고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가리켜 종교 성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인간이 절대자 를 향한 욕구가 자신의 본능적인 충족이나 자기중심적인 경향에 매어 있을 경우를 외면적인 종교성이라고 한다. 종교를 자신의 욕구의 분출 통로로 사용하여 도구처 럼 여기는 것이다. 억눌린 감정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해소하려는 것이나, 자신의 명 예욕을 충족시키려는 도구로 종교적 직분을 사용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런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모습이 매우 다 르다. 반면 내면적 종교성이란 개인의 생활에서 신과의 관계성이 최고의 가치나 대상 이 되는 것을 말한다. 순수한 종교적인 자세를 가지고 자기의 모든 삶을 아무 대가 없이 봉헌한다. 우리가 영적 성숙이나 신앙적 성숙을 말할 때는 바로 이 내면적 종교성이 얼마나 성숙했는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내면의 동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행동 유형도 질적인 내용 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단순하게 명분을 위한 의례적인 여전도회 봉사활동이나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헌금 등은 내면적인 종교성이 성숙하는 데 는 별 도움이 안된다. 외면적 종교성과 내면적 종교성을 일직선상의 좌우에 놓았을 때 내면적 종교성 쪽으로 향할수록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한결같이 한쪽에만 머물지는 못한다. 수시로 왼쪽과 오른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방황하고 갈등하게 마련이다. 단지 방황의 폭과 갈등의 횟수가 적어지도록 추구할 뿐이다.
통계로 본 영성살이- 오래된다고 속이 익지는 않더라
얼마 전 한미준(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 활 동과 신앙 의식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 조사 내용 중에 신앙 생활과 세상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일치한다고 생각하는지 알아본 결과, 개신교인들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응답보다 일치한다는 응답이 높았다. 하지만 35.5%는 일치하지 못한다고 답해 신앙과 현실, 종교와 삶이 이원화 된 채 생활하는 개신교인들이 적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그림 1-1) 이렇게 신앙 생활과 일상에서의 생활의 불일치 극복을 위해 교회에서 도움 받고자 하는 내용으로는 기도, 설교, 성경 공부와 교육 등의 요구가 높았다. 그러나 놀라 운 것은 '필요 사항이 없다' 또는 무응답 비율이 전체의 74.2%를 차지하고 있어 신앙 생활과 일상 생활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교회로부터 도움 받을 필요성이 대체로 없는 것으로 나타나,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삶이 이중적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갈등하지 않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 한다는 것은 이미 신앙적으로 무감각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마치 문둥병 자가 이미 병이 깊어져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 것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평가 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또 급속한 양적 성장의 부작용으로 그 동안의 외형적인 고속 성장이 속도를 멈추고 최근 성장 둔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심심찮게 그리스도인들의 좋지 않은 기사가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그들의 일상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듯 보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상황은 외형적인 성장 이면에 감추어졌던 내면적 인 성장에 대하여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신앙이 성숙되는 자리 교회에 다닌 지 오래된 사람들, 그들의 신앙을 점수로 환산할 수 있다면 몇 점 정도 될까? 신앙년수가 오래 된 사람들 외에도 담임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학생 등 교회 구성원들 모두의 신앙심 또는 신앙성숙도를 채점할 수 있다면(그런 채 점 도구만 있다면) 아마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년수나 직급에 따라 신앙심 순위가 매겨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되고 직분을 맡았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이 성숙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성숙한 신앙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신앙이 성숙하고 영적인 만족감 을 갖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신앙은 늘 우리 삶의 자리와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는 곳에서 성숙한다.
그러나 이 만남이 무조건적인 신앙 성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신앙 성숙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할 때 생기는 갈등, 즉 자기 희생과 포기가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따를 것인가 아닌가의 갈등에서 시작한다. 이 갈등에 대하여 말씀에 의해 성찰하는 기준을 얻고 그 성찰의 시간을 통하여 성령의 조명을 받게 된다. 이 때 우리는 성령의 조명에 대해 수용과 거부라는 선택의 기로 에 서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신앙 성숙에 있어서 전 환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결단한 바대로 실천에 옮기고 그 경험을 주관적으로 종합하여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에 대 한'(about God) 지식이 실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of God) 아는 지식으로 변화되 는 것이다. 영적 성숙은 바로 이렇게 말씀이 생활 속에 적용되며 말씀의 힘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과정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상황 속에 늘 존재하는 갈등의 요소 를 말씀에 비추어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될 때 일어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년수가 오래될수록 이러한 신앙의 성숙을 당연히 기 대하게 된다. 그러나 통계조사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기대가 막연한 바램 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리앎 : 내면적 종교성 이 글에서는 신앙 성숙의 기준을 내면적 종교성에 둔다. 앨포트(G. Allport)에 의 하면 인간의 신앙 가운데 가장 중심적이고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가리켜 종교 성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인간이 절대자 를 향한 욕구가 자신의 본능적인 충족이나 자기중심적인 경향에 매어 있을 경우를 외면적인 종교성이라고 한다. 종교를 자신의 욕구의 분출 통로로 사용하여 도구처 럼 여기는 것이다. 억눌린 감정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해소하려는 것이나, 자신의 명 예욕을 충족시키려는 도구로 종교적 직분을 사용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런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모습이 매우 다 르다. 반면 내면적 종교성이란 개인의 생활에서 신과의 관계성이 최고의 가치나 대상 이 되는 것을 말한다. 순수한 종교적인 자세를 가지고 자기의 모든 삶을 아무 대가 없이 봉헌한다. 우리가 영적 성숙이나 신앙적 성숙을 말할 때는 바로 이 내면적 종교성이 얼마나 성숙했는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내면의 동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행동 유형도 질적인 내용 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단순하게 명분을 위한 의례적인 여전도회 봉사활동이나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헌금 등은 내면적인 종교성이 성숙하는 데 는 별 도움이 안된다. 외면적 종교성과 내면적 종교성을 일직선상의 좌우에 놓았을 때 내면적 종교성 쪽으로 향할수록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한결같이 한쪽에만 머물지는 못한다. 수시로 왼쪽과 오른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방황하고 갈등하게 마련이다. 단지 방황의 폭과 갈등의 횟수가 적어지도록 추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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