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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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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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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나무와 그 가지는 `하나'
어른 신자들이 유년 주일학교 시절에 배운 성경공부 중 포도나무와 그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신 요한복음 15장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여 말문을 여신 예수는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하여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신다.
놀라긴 누가 놀라는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을 말씀하시니 그거야 뭐, 그런 상식을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라. 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를 거듭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나무와 그 가지가 무엇인가? 예수와 나의 관계는 또 무엇인가?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 같이 생명의 하나를 이루라.
생명의 하나, 하나에서 나무의 몸체와 가지의 상호 역할을 한다. 본질(본성)이 같다. 이는 `교리'가 아니고 `관념' 또한 아니다. 어찌 하려는가? 하나라고 한다. 하나에서 출발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품에서 나온 하나님이시고 또 사람이기에 그 아들이시다. 우리 또한 성령 하나님의 기운으로 거듭 태어난 동일한 생명이다. 이 둘 사이에 아무런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여기 이 대목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나님이시여, 그러면 그 나무의 그 가지인 우리는 어찌하여 초라하게(?)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곧 달려온다. 나의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더 큰 일도 하리라. 하신다. 또 말씀 하신다. 나 너희를 차별한 일 없다. 내 아들 예수처럼 너희도 사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 예수는 요한복음 12장에서 면담 요청을 하는 헬라인들에게 간접 답변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하신 말씀을 믿으라. 믿으면 믿는 그 사람 또한 한 알의 밀알이어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라 하시며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12:26∼27) 하시는 비장한 순간을 보라.
민망하여라. 참으로 민망하다. 이렇듯 외롭게 죽어가는 예수의 심정을 아는가? 그리고 이같은 민망이 예수의 몫인가? 우리 믿는 자의 몫은 없는가?
바로 여기서 기독교의 함정이 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인류는 예수를 봄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헤아려야 하고, 또 인류는 그를 믿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예수를 만나는 길 밖에 달리 길이 없거늘 믿는다 하면서 그 얼굴이 주님의 얼굴 일 수 없으니 절망이 아닐 수 없다. 인간들아! 예수를 믿는다 하여 주여, 주여,를 하는 것이면 나의 책임이 끝나는가? 진실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無然〉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87
나무와 그 가지는 `하나'
어른 신자들이 유년 주일학교 시절에 배운 성경공부 중 포도나무와 그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신 요한복음 15장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여 말문을 여신 예수는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하여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신다.
놀라긴 누가 놀라는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을 말씀하시니 그거야 뭐, 그런 상식을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라. 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를 거듭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나무와 그 가지가 무엇인가? 예수와 나의 관계는 또 무엇인가?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 같이 생명의 하나를 이루라.
생명의 하나, 하나에서 나무의 몸체와 가지의 상호 역할을 한다. 본질(본성)이 같다. 이는 `교리'가 아니고 `관념' 또한 아니다. 어찌 하려는가? 하나라고 한다. 하나에서 출발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품에서 나온 하나님이시고 또 사람이기에 그 아들이시다. 우리 또한 성령 하나님의 기운으로 거듭 태어난 동일한 생명이다. 이 둘 사이에 아무런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여기 이 대목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나님이시여, 그러면 그 나무의 그 가지인 우리는 어찌하여 초라하게(?)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곧 달려온다. 나의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더 큰 일도 하리라. 하신다. 또 말씀 하신다. 나 너희를 차별한 일 없다. 내 아들 예수처럼 너희도 사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 예수는 요한복음 12장에서 면담 요청을 하는 헬라인들에게 간접 답변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하신 말씀을 믿으라. 믿으면 믿는 그 사람 또한 한 알의 밀알이어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라 하시며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12:26∼27) 하시는 비장한 순간을 보라.
민망하여라. 참으로 민망하다. 이렇듯 외롭게 죽어가는 예수의 심정을 아는가? 그리고 이같은 민망이 예수의 몫인가? 우리 믿는 자의 몫은 없는가?
바로 여기서 기독교의 함정이 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인류는 예수를 봄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헤아려야 하고, 또 인류는 그를 믿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예수를 만나는 길 밖에 달리 길이 없거늘 믿는다 하면서 그 얼굴이 주님의 얼굴 일 수 없으니 절망이 아닐 수 없다. 인간들아! 예수를 믿는다 하여 주여, 주여,를 하는 것이면 나의 책임이 끝나는가? 진실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無然〉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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