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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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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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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나?
교회사에 벌어진 평신도 설교 논쟁 - 루터에서 칼 바르트까지
이형기 hkrhee@pcts.ac.kr
마틴 루터, "남성 뿐 아니라 여성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어"
중세기의 사회와 교회는 계층질서적인 구도 속에 있었다. 중세 봉건주의 사회체제에 있어서 왕과 귀족, 기사와 지주, 그리고 농노는 하향식 계층질서를 이루고, 교황과 추기경과 대주교, 주교와 사제와 부제(副祭) 역시 교황을 꼭지점으로 하는 피라밋 체제였다.
이와 같은 사회와 교회의 구조에 있어서 평신도와 여성의 자리는 허용될 수 없었다. 중세기는 이와 같은 사회질서와 교회질서가 하나님의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믿었으니,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the universal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은 매우 혁명적이었다. 사회와 교회에서 평신도와 여성의 자리 매김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는 계층질서나 상하부 구조가 없는 초기 교회로의 복귀 선언이다. 신약시대의 사도와 전도자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목사와 교사, 장로와 감독은 결코 평신도들을 지배하거나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 구조가 아니었다.
1520년에 쓴 루터의 세 저서(「독일귀족에게 주는 글」, 「교회의 바벨론 포로」, 「기독자의 자유」)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은 '만인제사장직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모든 평신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할 수 있고, 세례와 성만찬을 베풀 수 있으며, 상호 죄를 고백하고 용서할 수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 할 수 있다고 한 것이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이 그렇게도 혁명적인 이유는 중세 교회의 생각으로는 절대로 이와 같은 직분이 평신도들에게 허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남성 평신도뿐만 아니라 여성 평신도에게도 허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는 이와 같은 '만인제사장직론'이 신학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으나, 만약에 그것이 실천될 경우 교회 안에서 혼란이 초래될 것을 내다보았다. 그는 '일반 교역직론'(general ministry)을 전제하는 '특수 교역직론'(special mnistry) 혹은 '안수례 받은 교역지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교회 내의 무질서와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각 개교회는 회중 가운데 누가 특수 교역직을 수행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나를 심사숙고하여, 그를 투표로 선출하여 신학교육을 시켜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칼빈은 직제론에 관해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의 영향보다는 바젤의 종교개혁자 외코람파디우스와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틴 부쳐'로부터 크게 빚지고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는 4중직(목사·장로·교사·집사)을 주장하였다. 그는 1536년 초판 「기독교 강요」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 '만인제사장직론'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격파 종교개혁자들'에게 와서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은 꽃 피어났다. 즉, 이들은 중세 교회의 계층질서와 루터파(적어도 1526년 이후)와 개혁파의 친국가적 교역직에 반대하여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을 극단화시켰다. 이들은 개교회주의적 회중교회와 평신도 중심주의를 지향하였다.
19세기에는 평신도인 장로가 '설교·축도·만찬' 베풀어
16∼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시기에 루터교와 개혁교회는 모두 직제의 경직화 경향을 보였다. 그러던 중,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은 18세기 경건주의 전통과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선교활동, 그리고 19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에서 부활하였다. 특히 18∼19세기 복음전도 활동에서 평신도들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특수 교역직'의 중요성은 결코 망각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복음전도 활동에 있어서도 특수한 경우, 아직 안수례 받지 않은 평신도들의 설교가 가능한 바, 이는 특수 상황에서 평신도가 다른 평신도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복음주의 전통의 맥락에서 장로교에서 평신도들의 대표요, 평신도들의 지도자인 장로가 종종 설교하고 축도하며, 성만찬도 베풀 수 있는 사례가 허용되어온 것이다. 칼빈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으나, 개혁교회의 전통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에큐메니칼 운동, "평신도가 하나님나라 구현에서 중요한 역할"
'신앙과 직제' 전통의 금자탑인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Text(세례 성만찬 직제 문서)는 제2바티칸 공의회(1962-1965) 문서(특히, Lumen Gentium)와 더불어, '일반 교역직'(general ministry)을 전제하는 "특수 교역직"(special ministry 혹은 ordained ministry)을 주장하였다. 이 문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일반 교역직을 강조하면서도, 사도들의 특수 교역직에 근거한 '안수례 받은 교역직'의 특수성을 역설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평신도의 위치를 격상시키는 이유는 삶의 현장과 문화의 최전선에 있는 평신도들이 하나님나라 구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 '일반 교역직'이라는 '오늘날의 공동체' 근거 마련
바르트는 화해론을 논하는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성령론과 교회론을 함께 논한다. 교회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삼중직(제사장직 왕직 예언자직)을 통하여 이미 완성하신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화해(de iure)를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수용한 신애망(de facto)의 공동체다.
교회란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칭의(제사장직)를 받아들인 '부름 받은 공동체'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성화(왕직)를 받아들인 '세움 받은 공동체'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종말론적인 약속(예언자직)을 받아들인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공동체'다. 그런데 이 교회 공동체는 종말론적인 만인 구원(Erloesung)을 소망하는 잠정적인 공동체이다. 교회 공동체는 장차 구원받을, 아니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된 인류를 대표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르트의 공관복음서 이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사장직에 상응하여 사도들을 부르셨고(죄가 있는데도 이신칭의 하심), 그의 왕직에 상응하여 사도들을 세우셨으며(제자의 길을 가는 성화), 부활하시어 사도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셨다(화해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소망)고 한다. 즉, 파송 받은 사도들은 다름 아닌 부름 받고, 세움 받았으며, 파송 받은 교회를 대표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파송 받은 교회 공동체'를 모든 평신도들의 '일반 교역직'으로, 그리고 '파송 받은 사도'를 '특수 교역직' 혹은 '안수례 받은 교역직'으로 이해하는 바,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근거를 마련하였다고 보인다.
평신도 설교 '교육과 훈련' 전제돼야
우리는 루터로부터 바르트에 이르는 개신교 교역직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평신도들도 설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고, 역사적으로 평신도 역시 설교를 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대체로 루터로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에 이르는 신학에서 '특수 교역직' 혹은 '안수례 받은 교역직'의 특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적어도 설교와 성례전 집례, 그리고 교회의 감독권과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특수 교역직'에 대한 주장이 오늘날에도 타당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말로 선포하는 말씀설교가 아니라 말씀을 삶과 행동으로 선포하는 평신도들, 그리고 삶과 직업의 현장에서, 나아가서 역사와 문화의 최전선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평신도들이기는 하지만, 교육과 훈련은 전제돼야 한다.
'파송 받은 교회'는 '파송 받은 사도들'에 의해서 교육되어야 하고 훈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와 예배, 교회와 세상의 관계,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는 분명 필요하다.
이형기 / 장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2004년 06월 10일 15:03:
교회사에 벌어진 평신도 설교 논쟁 - 루터에서 칼 바르트까지
이형기 hkrhee@pcts.ac.kr
마틴 루터, "남성 뿐 아니라 여성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어"
중세기의 사회와 교회는 계층질서적인 구도 속에 있었다. 중세 봉건주의 사회체제에 있어서 왕과 귀족, 기사와 지주, 그리고 농노는 하향식 계층질서를 이루고, 교황과 추기경과 대주교, 주교와 사제와 부제(副祭) 역시 교황을 꼭지점으로 하는 피라밋 체제였다.
이와 같은 사회와 교회의 구조에 있어서 평신도와 여성의 자리는 허용될 수 없었다. 중세기는 이와 같은 사회질서와 교회질서가 하나님의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믿었으니,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the universal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은 매우 혁명적이었다. 사회와 교회에서 평신도와 여성의 자리 매김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는 계층질서나 상하부 구조가 없는 초기 교회로의 복귀 선언이다. 신약시대의 사도와 전도자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목사와 교사, 장로와 감독은 결코 평신도들을 지배하거나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 구조가 아니었다.
1520년에 쓴 루터의 세 저서(「독일귀족에게 주는 글」, 「교회의 바벨론 포로」, 「기독자의 자유」)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은 '만인제사장직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모든 평신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할 수 있고, 세례와 성만찬을 베풀 수 있으며, 상호 죄를 고백하고 용서할 수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 할 수 있다고 한 것이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이 그렇게도 혁명적인 이유는 중세 교회의 생각으로는 절대로 이와 같은 직분이 평신도들에게 허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남성 평신도뿐만 아니라 여성 평신도에게도 허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는 이와 같은 '만인제사장직론'이 신학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으나, 만약에 그것이 실천될 경우 교회 안에서 혼란이 초래될 것을 내다보았다. 그는 '일반 교역직론'(general ministry)을 전제하는 '특수 교역직론'(special mnistry) 혹은 '안수례 받은 교역지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교회 내의 무질서와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각 개교회는 회중 가운데 누가 특수 교역직을 수행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나를 심사숙고하여, 그를 투표로 선출하여 신학교육을 시켜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칼빈은 직제론에 관해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의 영향보다는 바젤의 종교개혁자 외코람파디우스와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틴 부쳐'로부터 크게 빚지고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는 4중직(목사·장로·교사·집사)을 주장하였다. 그는 1536년 초판 「기독교 강요」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 '만인제사장직론'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격파 종교개혁자들'에게 와서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은 꽃 피어났다. 즉, 이들은 중세 교회의 계층질서와 루터파(적어도 1526년 이후)와 개혁파의 친국가적 교역직에 반대하여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을 극단화시켰다. 이들은 개교회주의적 회중교회와 평신도 중심주의를 지향하였다.
19세기에는 평신도인 장로가 '설교·축도·만찬' 베풀어
16∼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시기에 루터교와 개혁교회는 모두 직제의 경직화 경향을 보였다. 그러던 중, 루터의 '만인제사장직론'은 18세기 경건주의 전통과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선교활동, 그리고 19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에서 부활하였다. 특히 18∼19세기 복음전도 활동에서 평신도들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특수 교역직'의 중요성은 결코 망각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복음전도 활동에 있어서도 특수한 경우, 아직 안수례 받지 않은 평신도들의 설교가 가능한 바, 이는 특수 상황에서 평신도가 다른 평신도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복음주의 전통의 맥락에서 장로교에서 평신도들의 대표요, 평신도들의 지도자인 장로가 종종 설교하고 축도하며, 성만찬도 베풀 수 있는 사례가 허용되어온 것이다. 칼빈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으나, 개혁교회의 전통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에큐메니칼 운동, "평신도가 하나님나라 구현에서 중요한 역할"
'신앙과 직제' 전통의 금자탑인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Text(세례 성만찬 직제 문서)는 제2바티칸 공의회(1962-1965) 문서(특히, Lumen Gentium)와 더불어, '일반 교역직'(general ministry)을 전제하는 "특수 교역직"(special ministry 혹은 ordained ministry)을 주장하였다. 이 문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일반 교역직을 강조하면서도, 사도들의 특수 교역직에 근거한 '안수례 받은 교역직'의 특수성을 역설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평신도의 위치를 격상시키는 이유는 삶의 현장과 문화의 최전선에 있는 평신도들이 하나님나라 구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 '일반 교역직'이라는 '오늘날의 공동체' 근거 마련
바르트는 화해론을 논하는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성령론과 교회론을 함께 논한다. 교회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삼중직(제사장직 왕직 예언자직)을 통하여 이미 완성하신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화해(de iure)를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수용한 신애망(de facto)의 공동체다.
교회란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칭의(제사장직)를 받아들인 '부름 받은 공동체'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성화(왕직)를 받아들인 '세움 받은 공동체'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종말론적인 약속(예언자직)을 받아들인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공동체'다. 그런데 이 교회 공동체는 종말론적인 만인 구원(Erloesung)을 소망하는 잠정적인 공동체이다. 교회 공동체는 장차 구원받을, 아니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된 인류를 대표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르트의 공관복음서 이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사장직에 상응하여 사도들을 부르셨고(죄가 있는데도 이신칭의 하심), 그의 왕직에 상응하여 사도들을 세우셨으며(제자의 길을 가는 성화), 부활하시어 사도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셨다(화해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소망)고 한다. 즉, 파송 받은 사도들은 다름 아닌 부름 받고, 세움 받았으며, 파송 받은 교회를 대표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파송 받은 교회 공동체'를 모든 평신도들의 '일반 교역직'으로, 그리고 '파송 받은 사도'를 '특수 교역직' 혹은 '안수례 받은 교역직'으로 이해하는 바,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근거를 마련하였다고 보인다.
평신도 설교 '교육과 훈련' 전제돼야
우리는 루터로부터 바르트에 이르는 개신교 교역직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평신도들도 설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고, 역사적으로 평신도 역시 설교를 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대체로 루터로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에 이르는 신학에서 '특수 교역직' 혹은 '안수례 받은 교역직'의 특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적어도 설교와 성례전 집례, 그리고 교회의 감독권과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특수 교역직'에 대한 주장이 오늘날에도 타당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말로 선포하는 말씀설교가 아니라 말씀을 삶과 행동으로 선포하는 평신도들, 그리고 삶과 직업의 현장에서, 나아가서 역사와 문화의 최전선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평신도들이기는 하지만, 교육과 훈련은 전제돼야 한다.
'파송 받은 교회'는 '파송 받은 사도들'에 의해서 교육되어야 하고 훈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와 예배, 교회와 세상의 관계,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는 분명 필요하다.
이형기 / 장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2004년 06월 10일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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