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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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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치민시 인민위원회 광장에서. 우리의 광화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채희동 목사다. 사진제공 고난함께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은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바그다드 하늘에는 전투기가 날고 포성이 멈추지 않았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무고한 생명이 테러로 죽어 가고, 언제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는 포탄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전쟁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일까? 우리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이 전쟁 밖에는 없는 것일까?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 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단 말인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땅에서 과연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선교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몸을 평화의 번제물로 드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 갈라서고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정한 하늘의 평화를 전하기 위해, 그리고 이 땅에 주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기의 모든 것을 평화의 도구로 쓰여지기를 원하는 이들이 만든 모임이 있다. '감리교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하 '고난 함께')이라는 이 단체는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서 갇히고 묶기고 갈라서고 죽어간 이들의 한을 풀어 주님의 평화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일해 왔다.
다시 끔찍한 전쟁에 참여하려는 한국
'고난 함께'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으로 세계가 온통 불안에 떨고 있고, 그 전쟁에 우리 군대를 파병하는 문제를 놓고 나라가 분열하고 있는 상황에서, 40여 년 전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 한국 군대를 파병하여 베트남 사람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던 바로 그 베트남을 우리의 두 발로 걷고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지금 베트남인들이 안고 살아가는 전쟁의 상처는 무엇이며, 저들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왔는지, 한국 군대에 의한 베트남인들의 상처는 무엇이며, 또 저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우리 일행이 베트남으로 떠나기 하루 전(11월 1일)에도 서울역 광장에서는 시민 대학생 노동자들이 모여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를 열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우리 군대를 파병하여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던 우리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그것을 반복하려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는 그런 부끄러운 역사를 남길 수 없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는 외세에 침략을 당한 상처받은 역사요, 외세의 침략에 동조하여 상처를 준 역사이다. 지금도 그 상처가 민족 분단이라는 아픔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우리 민족은 제국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또 제국의 손에 이끌리어 다른 민족에게 상처를 주었던 뼈아픈 역사의 사슬을 끊고, 인류 앞에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일행은 베트남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지금 우리 민족이 인류 앞에, 그리고 평화의 왕이신 주님 앞에 이제는 전쟁을 통해 남에게 상처를 주는 부끄러운 역사를 쓰지 말 것은 간절히 기도했다.
베트남의 참 모습을 보고 가세요
우리 일행 7명이 호치민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주일 저녁 11시 50분이었다. 공항 문을 빠져나오자 소박한 호치민 공항에는 마중 나온 이들과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로 빽빽했다. 그 틈으로 이번 평화 기행에 함께 할 현지 선교사 부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우리가 묵을 숙소로 이동하면서 선교사는 우리에게 "이곳 베트남에 있는 동안 베트남의 참 모습을 보고 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과연 베트남의 참 모습이란 무엇일까. 그래서 그런 지 그는 우리에게 "저에게 베트남에 대해 질문할 때에는 비본질적인 질문은 삼가 해 주시고 본질적인 질문만 해 주십시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간혹 목회자 부부들이 베트남에 와서 쇼핑을 목적으로 하거나, 음식 타령을 하거나, 민족 우월주의 빠져 있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한심하고 부끄러워, 다시 짐 싸들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 일행이 묵을 숙소로 향하면서 창문 너머로 바라 본 거리는 12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활기차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 행렬. 이 늦은 밤에도 베트남인들은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살아 꿈틀거리는 그 무엇을 느낄 수가 있었다.
외국의 배낭족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거리에 자리잡은 숙소는 작지만 깨끗했다. 각각 방을 배정 받아 쉬려하는데, 아래 방에 묵고 있는 홍순일 목사는 벌써부터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이 늦은 시간에 뭘 찍고 있냐고 물어 보니, 자기 방벽에 붙어있는 달력이란다. 달력을 유심히 보니 예사롭지 않다. 비키니를 입은 예쁜 여자의 사진이 있는 달력이다. 셔터를 누르면서 홍 목사는 "목사님, 여기 사회주의국가 맞아요? 사회주의 국가에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이런 그림이 있으니, 아직은 어리둥절합니다." 나도 한 장 찍어 두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과 미래를 열어 가는 사람들
우리 일행은 어제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레임이 우리의 피곤을 이겨낸 모양이다. 이른 시간에 숙소에서 제공하는 빵과 커피 한 잔으로 소박하지만 맛있게 아침 식사를 했다. 바삭거리는 바게트는 베트남에 있는 동안 우리의 입맛을 돋우어주었다. 맛있게 아침식사를 하는데, 숙소에서 써빙을 하는 여자 종업원 하나가 맑은 미소를 띠며 우리 일행에게 관심을 표했다. 그녀는 자기는 한국에 관심이 많고, 한국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숙소에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해 우리를 도와 주었다.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고난함께' 총무인 진광수 목사는 선물로 가지고 온 '고난 천 달력'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면서 한국인의 마음과 베트남의 마음은 이렇게 따뜻하게 서로 통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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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 전 프랑스인들에 의해 지어진 바실리카 성당. 사진제공 고난함께 |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베트남인들이 호감을 갖는 나라는 프랑스이고, 그 다음이 미국이며, 한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좋아하는 나라들은 하나 같이 자기 나라를 침략했던 나라들이다. 프랑스는 19세기에서 20세에 걸쳐서 베트남을 식민지배 했고, 미국과 한국은 1964년 베트남 전쟁에 침략군으로 참여했던 나라들이다. 이들은 역사 의식도 없단 말인가. 자기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한 나라를 미워하기는커녕 좋아하고 가고 싶어하는 나라란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우리는 과거의 아픔 역사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만 메어있지 않습니다. 과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요, 미래입니다."라고 말한다. 과거에 자기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나라라 하더라도, 지금 평화를 위해 함께 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에 대한 베트남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었기 때문에 책임이 없고, 또 김대중 대통령이 정식으로 사과를 했으며,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양국간의 우호와 협력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베트남의 힘일까? 과거는 잊지 않지만, 다시는 과거를 묻지 않고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서로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베트남 사람들. 그렇다. 평화는 과거에 나의 적이었던 이들과 지금 여기에서 손을 잡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베트남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선교사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치민 시내에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려고 숙소 앞에서 서 있는데, 우리가 묵었던 숙소 안에서 무척 크고 시끄러운 베트남말이 우리의 귀를 따갑게 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그쪽으로 돌려보니, 우리의 선교사가 숙소의 주인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따지고 있는 것이다. 요지는 처음 숙소를 정하고 계약을 할 때는 아침을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우리 일행에게 아침 밥값을 받은 것은 잘못 된 것이란다. 그런데 그가 주인에게 따지는 것을 볼 때, 선교사는 엄청 화가 난 모양이다. 우리가 말려도 듣지 않는다. 한 참만에 진정하고 돌아온 선교사에게 우리는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그냥 작은 목소리로 해도 해결될 일이지만, 요즘 베트남은 자본주의의
못된 것을 본받아 돈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사람을
속이는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베트남은 진실된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지금 함께 하는 선교사는 진심으로 베트남을 사랑하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그는 혼신을 다해 그렇게 자기의 사랑을 표현했던 것이다. 우리가 베트남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식당 주인이 제 값보다 더 많이 청구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선교사는 강한 어투로 식당 주인에게 정정당당하게 장사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베트남을 더욱 베트남 되게 하는 길이고, 그것이 베트남을 살리는 길이라고.
서로 많이 닮은 한국과 베트남 사람들
베트남을 자기 조국처럼 진실되게 사랑하는 선교사를 바라보는 우리 일행은 모두가 흐뭇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숙소를 벗어나 호치민 시내로 들어서자 우리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은 길게 늘어선 오토바이 행렬이다. 벌떼처럼 오토바이 무리가 도로 가득 밀려오고, 엔진 소리가 시내를 가득 메워도 베트남은 활기차고 살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오토바이 떼 사이로 오고가는 자동차가 대부분 국산차들이라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호치민 시내를 달리는 대부분의 택시가 국산 마티즈와 프라이드라는 것과 심지어는 한글 상표 그대로 쓰여진 국산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
지금 우리가 기행할 베트남은 어떤 나라인가. 베트남 국가의 정식 명칭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다. 한반도 3배 크기의 국토를 가진 베트남은 한국처럼 국토의 80%가 산악지대로 되었다. 베트남 인구는 약 80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낀족' 이외에 54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졌다. 수도는 북부에 있는 하노이이고,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호치민시는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옛날 사이공이다. 호치민시의 공식적인 인구는 450만 이지만 실제로는 850만에 이른다. 베트남국민 년 평균소득이 400불에 불과하지만, 호치민시는 3000불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것은 호치민시가 베트남 정부의 시장경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로 인해 베트남 역시 한국처럼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베트남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순수 몽골 혈통을 이어받아 다정다감한 심성이 우리와 같고, 부지런하며 책임감이 강하고 교육열 또한 뜨겁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베트남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는 불교가 60%, 카톨릭 10%, 나머지 종교는 기독교를 포함해 기타 종교로 분류된다.
진정한 선교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베트남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선교된 시기는 대략 1910년경으로 오랫동안 중국과 프랑스 식민지배에 있던 베트남은 불교와 카톨릭의 영향을 깊이 받아 기독교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더우나 기독교는 미국의 종교라는 인식이 강해 미국의 베트남 전쟁 이후 기독교 선교는 더욱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 베트남 선교가 활기를 띠어 선교에 매진한 결과 괄목할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베트남감리교단'은 현재 37개의 교회를 가지고 있으며, '베트남가정교회 연합'은 복음전파 100년이 되는 2011년까지 1000만 신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타 해외선교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베트남에 와서 선교활동을 펼치는 선교사들 역시 베트남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전도해서 기독교인 숫자를 늘리는데 주목적을 가지고 있다. 결과 중심주의에 갇혀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의 큰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아 물질을 나누어주어 호감을 사고, 또 건물을 지어 사람들을 모으려는데 급급하다. 진정한 선교는 베트남인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깨닫고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서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자기의 삶과 역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베트남 선교의 첫 걸음은 바로 베트남과 베트남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는데서 시작된다. 선교는 눈으로 보이는 숫자와 건물, 결과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처럼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선교가 아닐까.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동지, 미국과 한국
우리가 이곳 베트남에 와서 제일 먼저 간 곳은 땅굴로 유명한 '구찌'이다. 호치민시에서 1시간 30분 가량 달리자 '구찌땅굴'에 도착했다. 구찌에 도착하자 '린'이라 구찌 가이드는 그 당시 전쟁 비디오와 땅굴 조감도를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미군이 평화스러웠던 구치의 모든 것을 파괴했고, 자신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싸왔다는 이야기이다. 1948년부터 파기 시작한 땅굴은 20년 동안 팠으며, 현재 발굴된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땅굴의 총 길이는 250km에 이르고, 땅굴의 깊이는 10m이며, 땅굴 안에는 지휘본부는 물론이요, 참호, 식당, 병원, 저장창고, 심지어는 우물도 있다. 그리고 미군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구멍으로 땅굴을 만들었으며, 미군이 들어온다고 해도 곳곳에 함정을 파 놓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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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찌땅굴. 미군들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크기다. 사진제공 고난함께 |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비좁고 깜깜한 땅굴을 들어가 보았다. 우리 일행이 좁은 땅굴을 낑낑거리며 오리걸음으로 때로는 기면서 가는데, 우리 뒤를 따르던 미국인으로 보이는 여행객들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한 참 동안 미로처럼 이어진 땅굴을 가는 동안, 반세기 전 미군과 맞서 싸웠던 베트남 사람들의 용맹스러움과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이드 '린'이 한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미군 장교가 이런 말을 했어요. 베트공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어디에나 다 있다."
'구찌땅굴'에서 옛날 전사들이 먹었다는 설탕이 들어있지 않은 떡과 찐 마를 먹으면서 우리 일행은 베트남 전쟁으로 죽어간 이들을 기리는 '전사위령비'를 방문하고 호치민시로 돌아왔다. 호치민시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에게 선교사는, "구찌땅굴을 보고 베트남 사람들의 용맹스러움을 느낄 수 있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잘 나서 미군을 물리치고 이긴 것이 아니라,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미국이 진 것뿐입니다. 당시 국민의 5% 밖에 지지를 얻지 못한 정권을 지키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미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켜 억울한 사람들만 죽게 했습니다." 선교사의 말을 들으면서 베트남 종전 후 4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미국은 다시 이라크를 침공하고 지루한 전쟁을 하고 있다. 저들은 지금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한국은 똑같이 40년 전의 그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쓰려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쟁이란 이토록 참혹한 것이란 말인가
호치민시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컴승'이라는 베트남 음식은 그 맛이 매콤한 것이 우리 음식과 비슷해 우리 일행은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호치민 시내에 있는 '전쟁잔악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동안 선교사는 갑자가 호치민시에서 가장 크다는 카바레를 가리키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글쎄 말이에요. 얼마 전에 일본인들 수백 명이 중국에서 매춘관광을 했다고 야단이었잖아요. 한국 사람 80명이 바로 이 곳 카바레에서 베트남의 젊은 여자들을 상대로 매춘관광을 하다가 공안에 적발되어 망신을 당한 적이 있어요."
전쟁 당시 사진들을 주로 전시해 놓은 박물관은 사진만으로도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미국이 살포한 고엽제로 살아있는 생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잿더미 위에서 한 남자아이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울부짖는 사진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또한 포르말린 병 속에 있는 고엽제로 사산한 태어나지 못한 두 아기의 모습은 우리 일행을 울부짖게 했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란 말인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것, 이것이 전쟁이란 말인가. 이런 전쟁이 지금도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온 몸에 소름이 돋게 했다.
이 박물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포탄 연기가 자욱한 전쟁터에서 전쟁 소식을 취재하다가 숨진 종군기자들이 찍었다는 사진을 모아 놓은 곳이다. 미국 기자는 물론 유럽의 기자, 심지어 일본 기자의 모습도 있지만, 한국 기자의 모습은 한 사람도 없다. 베트남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놓고 우리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전쟁터의 소식을 들었단 말인가.
자본주의를 닮아 가는 사이공
전쟁 박물관에서 받은 충격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대통령궁으로 향했다. 우리가 관람하고 있는 대통령궁은 과거 사이공 정권이 몸담았던 곳으로 1974년 4월 30일 소련제 탱크 두 개가 이곳 대통령궁 철문을 부스고 들어오던 날, 이 날을 베트남 사람들은 민족해방절로 기념하고 있다. 대통령 직무실을 비롯하여 접견실, 심지어는 비밀 아지트까지 보고 온 우리 일행은 정권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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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30일 이 탱크가 대통령궁 정문을 폭파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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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궁을 떠나 시내 중심가로 들어서자 업무 종료시간이 오후 4시가 넘어서 인지, 대로에는 오토바이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린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탄 사람들을 중에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들은 '아오자이'를 입고 허리를 곱게 세운 베트남 여인들이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탈 때에는 허리를 곧게 세워야한다는 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참으로 멋스러운 모습이다. 어느덧 함께 한 동료 중에 박순웅 목사는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인들에 흠뻑 빠져있었다.
벌써 어둠은 어디선가 밀려오고, 사이공의 밤이 왔다. 옛날 프랑스 총독부였던 지금의 호치민시인민위원회 앞에 있는 분수대에는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사이공의 밤을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수대를 중심으로 고급스런 호텔과 고층빌딩들이 당당하게 서 있고, 사이공의 밤은 우리를 사회주의 공화국에 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중심부인 뉴욕에 온 것은 아닌가할 정도로 깊은 착각 속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동상에 갇힌 호치민의 정신
'컴승'이라는 베트남 음식을 먹고 우리는 찻집에 둘러앉아 선교사로부터 베트남의 최고 지도자였던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최근의 베트남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듣는 일행들의 눈에는 빛이 났고, 홍순일 목사는 일일이 메모를 하며 베트남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호치민은 프랑스가 지배한 식민지 시대인 1890년에 태어나 20살 때 조국을 구하기 위해 사이공을 떠났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가 머문 곳은 자신의 나라를 지배하는 프랑스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낮에는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조국 독립의 길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그는 그 길이 사회주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시 조국에 돌아온 호치민은 1930년에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45년 9월2일에 호치민은 인민민주공화국을 창설함과 동시에 북부에서 항불투쟁을 계속하고, 1954년에 마침내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틈을 타 1년 만에 베트남은 17도를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은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정권이 들어서고, 남쪽은 미국이 침공하여 세운 괴뢰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1961년에 미국은 북쪽 공산당을 자극하여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부터 대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으로 그 당시 4000만 명 베트남 인구 중에 800만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를 포함하면 온전한 가정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 전쟁에 우리나라 군대가 파병하여 5000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호치민은 1969년 서거하였다. 호치민은 자기가 죽으면 화장해서 세 등분한 자신의 유해를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달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자신을 숭배하지 말고 자기의 정신을 살려 인민을 위해 살아달라고 유언을 했다. 그러나 내가 본 베트남은 이것 역시 지키지 않은 듯했다. 우리 일행이 가는 곳곳마다 호치민 동상이 우람하게 세워져 있었고,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숭배하고 있었다. 시장경제체제에 들어온 베트남 사람들, 자본이 주는 쾌감을 조금씩 맛보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호치민이 남긴 살아있는 정신은 사라지고, 결국 자신들의 영웅을 동상 속으로 박제화시키고 말았다. 깊어 가는 사이공의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우리 일행은 베트남의 힘을 느끼면서 한편으로 베트남의 서글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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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치민 선생이 죽었을 당시 북한에서 만든 호외판 신문. 사진제공 고난함께 |
사상과 이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이게 평화라면 말이다.
베트남 3일째 아침, 역시 빵과 커피 한 잔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우리 일행은 베트남 남부 지역인 '메콩델타' 지역을 여행하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현대자동차 마크가 선명하게, 그것도 한글로 그대로 적혀있는 버스였다. 이 버스에는 우리 일행 말고도 일본 여행객, 유럽의 각 국에서 오선 서양 사람들이 가득하다.
3시간을 달린 버스에 내려 배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강줄기를 따라 우리 일행이 다다른 곳은 "세오꾸잇 원시림"으로, 이곳은 옛날 베트공들이 배를 타고 우거진 밀림을 헤치고 작은 수로를 따라 미군과 맞서 싸운 곳이란다. 작은 배에 몸을 싣고 그 때 그 길을 따라 가보았다. 그 날의 총성과 비명 소리는 간데 없고, 맑은 새소리와 노 젓을 때 물이 닿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리, 아주 작지만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와 닿는 노 젓는 베트남 여인의 노래 소리가 더 없이 우리를 평화롭게 해 주었다. 평화란 이런 것일까. 총성이 사라지고 새소리, 바람 소리, 사람들의 노래 소리가 가득한 곳, 우리 일행은 40여년 전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상처를 주었던 바로 이 곳에서 평화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사상과 이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게 평화라면 말이다.
여행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어떤 부모는 자식들에게 더 많은 여행의 기회를 주기 위해 자기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도 팔아 세계여행을 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여행을 하면서 더 없이 좋은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새로운 세계를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행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세오꾸잇 원시림' 체험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는데, 우리와 동석한 서양 여인이 있었다. '슈'라는 이 여인은 잉글랜드인으로 혼자 여행을 하는 중이며 캄보디아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 중에 김명엽 사모(고난함께 실무 간사)는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예쁜 목소리에 영어로 그 여인과 인사를 나누더니 금방 친구가 되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국경도, 언어도, 인종도, 종교의 장벽도 금방 넘어 하나가 되고, 너와 나 사이에 평화의 강이 흐르게 하는 힘이 있는 모양이다. 김명엽 사모와 '슈'라는 잉글랜드 여인이 친구가 되더니, 이제는 다른 쪽에서 진광수 목사(고난함께 총무)가 일본의 젊은 여행객들과 한국말로, 영어로 몇 마디 대화를 하더니 서로 주소를 주고받고 기념품으로 가지고 온 '고난 천 달력'을 주더니 금방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 친구가 되었다. 어느새 점심식탁 위에서 우리 일행과 잉글랜드 여인, 일본의 젊은이들, 이 모두가 친구가 되어 우리의 점심식사 시간은 행복하고 유쾌하고 즐거운 만찬이 되었다.
그들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우리 일행이 1시간 30분 가량 달려 '안양'이라는 곳에 잠시 머문 뒤에, 다시 한 시간 반 가량 달려 도착한 도시는 '짜우독'이다. '짜우독'을 향하는 동안 차창 너머로 보이는 베트남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이제는 너무나 친근하게 다가온다. 마치 우리가 언제나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후반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베트남 학생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운동장이 없이 교실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학교이지만, 정겹기 그지없다. 옆에 있던 박순웅 목사는 자기가 책에서 보았다며, 한국 정부와 기업이 베트남 중부지역에 50여 개의 학교를 세워주었노라고 말했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렇게 라도 빚진 것을 갚을 수 있다면, 그 빚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고, 또 사랑의 빚을 지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머니와 같은 강, 메콩강
지방의 아주 작은 도시, '짜우독'의 자그만 여관에서 고한 잠에 깨어 우리가 간 곳은 메콩강을 어머니의 젖줄로 여기며 사는 수상가옥 마을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베트남 남부지역에 삼각형으로 펼쳐져 흐르는 메콩강에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강줄기가 흩어져 흐른다. 강물에 함께 흘려 쌓인 침전물이 농토를 비옥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곳 베트남 사람들은 메콩강을 '강'이라 부르지 않고 '수로'라 한다. 그것은 메콩강 주변의 작을 강줄기는 베트남 사람들이 손수 파서 만든 물길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하늘이 준 자연조건을 스스로 이용할 줄 아는 지혜 있는 민족이었다. 홍수가 난다고 원망하지 않고, 가문다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잘 살려 모두를 이롭게 하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메콩강 일대에 사는 사람들은 강가에 수상가옥을 짓고 배를 교통수단으로 삼으며, 강에서 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메콩강에 배를 타고 둘러보니 강에는 없는 것이 없다. 강 위에는 주유소도 있고, 배를 타고 다니며 잡화를 파는 상인도 있다. 메콩강의 사람들은 강에서 고기도 잡고 빨래도 하고 밥 짓는 쌀도 씻고 세수도 하고 큰 일도 본다. 저들에게 메콩강이야말로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받아주는 어머니와 같은 강인 것이다. 메콩강 강물을 바가지로 떠먹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고 우리 일행은 저렇게 해도 괜찮나 걱정을 했지만, 저 아이에게 메콩 강물은 어머니의 젖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 일행은 배에서 내려 베트남 사람들이 사는 농가를 방문했다. 벼농사를 짓거나 바나나와 같은 각종 열대 과일을 따다 파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그런데 우리 일행의 눈길을 끄는 것은 집집마다 앞마당에 죽은 부모나 형제를 장사지낸 묘지가 있으며, 그들을 추모하는 자그만 사당(추모의 집)을 마련해 놓고 향을 피우는 모습이다. 그 사당은 조상신을 모신 곳이며, 또 물과 불의 신을 모시고 복을 비는 곳이란다. 그것은 베트남 마을 깊숙이 남아있는 무속신앙이다. 믿는 것은 다르지만, 이들의 종교성은 우리 민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평화기행이란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베푸는 것
어제부터 우리와 한 팀이 되어 여행을 하던 스웨덴 가족이 있었다. 부모는 어린 자매에게 아시아를 배우게 하기 위해 이번 여행을 했다고 했다.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싱가포르로 갈 예정인 이들 가족 중에 '틸러'라는 14살의 작은 딸 아이는 호기심이 매우 많은 친구다. 그는 우리에게 시종 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우리 일행과 함께 한국식 놀이에도 함께 참여했고, 한국을 알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틸러'가 더위를 먹고 탈이 난 모양이다. '껑터'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녀의 부모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것이 영역했고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다른 나라 사람들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걱정도 잠시 수지침을 배운 적이 있다는 정미혜 사모는 침착하게 그 아이의 곁에 앉더니, 몸을 따뜻하게 해 주고 정성을 다해 손 마사지를 해 주었다. 그 아이의 몸이 따뜻해지고 회복되자 다시 몸의 이곳저곳을 두드려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두 시간 동안 그 아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온 정성을 다 해 보살피는 정미혜 사모의 모습을 보고, 스웨덴 부모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시간 이후로 스웨덴 가족과 우리 일행은 한 식구처럼 더 없이 가까워졌고, 호치민시에서 헤어질 때에는 서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처럼 서로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이야말로 나와 너를, 나라와 나라를 하나로 잇게 하는 힘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베트남 평화기행은 무슨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을, 곧 자기 희생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평화기행을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다만 인민이 되고자 했던 호 아저씨
'껑터'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식당에서 바라본 호치민 동상은 너무나 우람해서 거부감까지 들었다. 호치민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으며 아이들이 자신을 '아저씨'로 부르는 것을 좋았단다. 그래서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호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베트남과
결혼하여 베트남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는 손수
서민들이 신고 다니는 고무로 만든 슬리퍼를 신었고 자전거를 끌고 다녔으며, 자전거
바퀴에 빵구가 나면 손수 수리해서 타고 다녔단다. 굴림 하는 호치민이 아니라 모든
베트남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동상 속에 그의 자상한
얼굴과 인민을 사랑하는 맑은 정신은 갇혀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십자가를
우상화하면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듯, 교회에서 목사를 우상화하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듯, 동상 속에 호치민은 더 이상 호치민이 아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자신을 우상화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당신의 말씀 대로 살기를 원하셨다. 당신이
지셨던 십자가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지기를 원하셨다. 어쩌면 '예수는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우상화하는 것이 라니라, '예수를 사는 것'이 아닐까. '껑터 공원'에
우뚝 솟은 동상에 갇혀 있는 호치민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오늘날 십자가는 있고
예수라는 이름은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삶이 없는 한국교회를 생각하면서
그저 안타까움 이는 것을 왜 일까.
선교는 사랑이다
'껑터'를 떠나 우리 일행은 2박3일 동안의 메콩델타 여행을 마치고 호치민시로 돌아왔다. 호치민시에 돌아와 마지막 사이공의 밤을 맞이했다. 일찍 '퍼'라는 베트남 전통음식인 쌀국수로 저녁식사를 하고, 평화 공원에 둘러앉아 잠시 기도를 한 우리 일행은, 우리는 왜 베트남에 왔으며 무엇을 느꼈고, 이 땅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했다. 분명한 것은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를 감싸 안고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며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베트남의 힘이 아닐까.
그러나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 때 파병한 한국 군인들에 의해 상처받고 버림받은 베트남 여인들이다. 국내 언론은 그 베트남 여인들에 의해 태어난 한인 2세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흥밋거리로 삼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정작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것은 베트남 여인들이다. 한인 2세들은 베트남 내 안에서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았다. 다만 그 당시 모든 베트남 사람들이 다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지, 한인 2세들만 어렵게 산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들은 한국 군인들로부터 버림받고 조국 베트남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일생을 고생을 하며 눈물로 살아온 여인들이다. 이들을 위해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과 한국교회가 평화사업을 해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의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저 구호로 만들어 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님의 복음은 사랑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선교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나누는 것이 진정한 선교가 아닐까.
우리는 베트남 평화기행을 하면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한 '참 좋은 선교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곳 베트남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구호로 만들어 부르짖는 것 보다,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돈을 받아 건물을 짓고 사람을 끌어 모아 과시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그러면 저들은 사랑의 힘으로 변할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를 받아 드리고, 사랑의 사도들이 되어 베트남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이루어진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 일행 모두는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수록 사이공의 밤도 깊어 가고 환한 달님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한반도 평화의 길 - 남한과 북한은 하나입니다
한국으로 향하기 위해 베트남 비행기에 몸을
싣자, 베트남을 떠나기 전 잠시 방문했던 '호치민박물관'에서 본 호치민이 했다는
말들이 떠올랐다.
"10년의 이익을 위해서는 나무를 심고, 100년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심어라."
"살아있는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열어간다."
"우리 남북 백성은 하나이다."
호치민의 이 말이 베트남의 정신이 되었고 힘이 되었다. 어쩌면 나라도, 사회도,
교육도 교회마저도 돈이면 다 되는 이 끔찍한 세상에서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것,
세계 모든 나라와 평화의 손을 잡기 위해 과거를 망각하지 안 되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살아간다는 것, 남북 분단을 즐기는 무리들이 있는 이 땅에서 남과 북은 하나다라는
진리를 일깨 준 이 말은, 지금 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돈의 노예가 되어 가는 우리에게,
그리고 남과 북의 분단되어 평화가 아득히 멀기만 우리에게, 또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전쟁터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려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호 아저씨'의 말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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