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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목회메뉴얼 제3권 영성목회 (한국장로교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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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총회목회정보정책연구소 편 | 출판사 : 한국장로교출판사 판매가 : 10,000원 → 9,000원 (10.0%, 1,000↓) 지금 한국교회는 목회를 표준화하고 좌우로 치우칠 목회적 실수를 예방하며 교회 내의 불필요한 갈등과 혼선, 그리고 방황을 사전에 차단하여 모든 목회자들이 건강하게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는 표준화된 목회매뉴얼의 필요를 절감한다. 따라서 신앙적 전통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전통과 목회 상황을 고려하여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정할 필요가 있으며, 성서와 교단의 신학적 정통성에 입각한 목회적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하고 목회자가 수행하는 목회의 전반적인 영역에 있어서 목회 행동과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가 필요하다. 이러한 현실적 요청이 이 목회 매뉴얼을 기획하고 발간하게 된 이유이다.이 목회 …[더보기▶] |
영성목회를 위한 이론적인 틀
1장 영성의 정의
2장 개혁교회의 영성
3장 영성목회
4장 영성훈련
1장 영성의 정의
1. 일반적 정의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대나 교회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언급할 때 흔히 '영성이 결핍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너무 포괄적이고,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논란은 영성을 특정한 종교나 전통을 해석해 주는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전통이나 교리적 해석을 덧붙이지 않은 채, 영성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추구한다면 보다 보편적인 이해와 공감대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순하게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으로부터 영성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다니엘 헬미니악(Daniel A. Helmi -niak)에 의하면,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된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것이므로 하나님보다는 인간 자신을 먼저 들여다봄으로써 영성의 객관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성 아래에서 인간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칼뱅이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방법론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영성의 의미를 추구하고자 한다.
2. 영성에 대한 성경적 정의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영성에 대한 의미도 다양해진다. 먼저 구약에서 영성을 생각한다면 창세기 2:7에서 그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성경은 흙으로 빛은 어떤 모양에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생령, 혹은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여기서의 '영혼'이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된 전체를 의미한다. '영혼'이라는 용어는 실제로 '생명'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시 88:3; 욥 33:28). 실제로 '네페쉬' 라는 말은 '영혼'이라는 의미보다는 '생명'이라는 말로 더 자주 번역되고 있으며, 구약성서 속에서 그 말은 흔히 '생명' 또는 '생명 현상'이라는 말과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 곧 땅의 먼지로부터 만들고 그 속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사람은 '살아 있는 영혼' 이 되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이 말하고 있는 '영혼'이란 형체 없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이미 보이는 형체 안에 담겨진 어떤 존재(생명)를 의미한다. 따라서 '네페쉬'라는 단어는 '활력에 차 있는 생명 현상'을 나타내며, 인간이나 동물처럼 형체 안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의 원리'를 말한다.
창세기 2 : 7에서 흙으로 빚어진 어떤 형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은 보이는 형체에 생명이라는 숨결을 공급했다는 의미이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살아 있는 실체로 나타났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성적인 존재라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 존재가 지속적으로 지탱되고 유지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숨결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지속적인 숨결을 통해서 스스로의 현존감을 인식한다면, 그는 하나님과의 교류를 경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포괄적인 의미의 영성은 인간이 호흡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근간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아인식을 하고 있는 생명이 곧 영성의 뿌리임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적인 삶 자체가 영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인간관을 말할 때 사람들은 자주 인간 존재의 구성요소들을 기능적으로 설명하면서 특정한 영역만을 영성이라는 범주에 넣으려 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인간을 향한 다양한 표현은 인간의 구성요소들을 설명하려는 것보다 통합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면서 전인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각각의 특징들을 '영적', '육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울신학에서 인간을 정의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큰 틀의 용어로서 '영적' 이라는 말과 '육적' 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바울은 육체를 지닌 한 개인을 때로는 육적인 것, 즉 세상적인 것을 향하고 또 때로는 영적인 것, 즉 하나님의 것을 향하는 존재라고 보고 있다. 바울이 육적이라는 말을 영적이라는 말과 대조해서 사용할 때 전자는 죄악의 경향을 말하고, 후자는 순결하고, 거룩하고, 성스러운 경향을 말한다.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지닌 존재를 '영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2~50에서 육적(σάρκινον), 혼적(ψυχικόν), 영적(πνευματικόν), 육체적(σωματικόν)이라는 네 용어들을 동시에 모두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니는 각각의 특성을 설명하는 기능적인 용어이지, 인간을 구성하는 어떤 요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육체를 지닌 존재로서 그것이 육적으로 또는 혼적이나 영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육적이라 함은 죄악적인 속성을 지향하는 것을 말하며, 인간이 영적이라 함은 한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지향하는 속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유형의 모습을 지녔든지 간에 인간은 육체적(σωματικόν)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 육체 안에서 모든 것이 통합될 때 그런 존재를 비로소 인간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보여 주고 있는 실체의 의미와 일치한다. 그는 이데아만이 실체라는 플라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온갖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라고 했다. 형상은 여러 실체 속에 반복적으로 깃들 수 있으며, 그것이 수적으로 셀 수 있는 뚜렷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질료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것도 실체이면서 형상과 질료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실체 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바울은 '영'(πνεῢμα)이라는 말과 '영혼'(ψυχή)이라는 말을 중립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그 둘을 '몸'(σϖμα)이라고 하는 단어 속에 통합시키고 있다. 바울은 인격성의 진정한 실현의 모습을 '영혼의 몸'이라고 하기보다는 '영의 몸'으로 표현한다. 고린도전서 15:44에서 바울은 이를 육의 몸(영혼의 몸, σϖμα ψυχικόν )에서부터 영의 몸(σϖμα πνευματικόν)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육체라는 동물성이 비육체적인 신성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로 형성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변형되고 있는 육체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영과 육의 완전한 통합의 가능성을 씨로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영혼의 몸이라는 가능태로부터 영의 몸이라는 현실태로의 이행 과정을 함축적으로 '영성'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성서와 바울신학이 동시에 보여 주고 있는 인간이란 완성되어져 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내적인 능력으로 자아의 완숙을 이루어 갈 수는 없으며, 성령에 의해서 고양되고 정화되고 조명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그가 비록 동물적인 속성 외에 그 속성을 초월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 초월성을 제한적인 육체 안에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성령의 개입이 필연적이다(롬 8:16).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여되는 성령의 이끄심에 응답해 가며 자기성숙을 이루어 가는 육체를 '영적인 사람'이라 하며, 그러한 과정을 포괄적으로 '기독교 영성' 이라 말할 수 있다.
3. 의식적인 경험으로서의 영성
영성에 대한 그동안의 연역법적인 접근으로부터 귀납법적인 접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은 사람이 버나드 로너건(Bernard Lonergan)이다. 그는 영성과 의식을 상호 교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두 종류의 인간 의식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있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인식하는 그 주체를 인식하는 의식이 있다고 제시했다. 예를 들면 소리를 듣는 것을 인식하지만, 동시에 소리를 듣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도 한다. 색을 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색을 보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침내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이며, 그 색깔이 무슨 색깔인지를 인식하게 된다. 전자를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의식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주관적인 대상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대상에 대한 주체적인 관찰이고, 후자는 결코 관찰의 대상일 수 없으며 경험으로 알려질 뿐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전자를 반추적 의식(reflecting consciousness)이라 하며, 후자를 비반추적 의식(nonreflecting consciousness)이라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반추적 의식과 비반추적 의식은 동시적이며 상호 수반적으로 일어나는 의식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할 때 우리는 대상으로서 책을 인식하고 동시에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을 인식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인식하는 그 대상과 일치함으로써 그 책에 담긴 지식을 얻는다. 이러한 활동을 계속하면서 스스로를 끝없이 인식의 주체로 만들어 가는 실존을 '영'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영은 어떤 대상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대상화하면서 인식하도록 하는 그 어떤 경험적인 실존이라 할 수 있다. 즉, 영이란 우리로 하여금 비반추적 경험을 하도록 허락하는 그 무엇이다. 그 경험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영적 본질을 경험하고, 영은 비반추적 경험이 표현하는 그것이다. 영은 어떤 내용을 말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수용성을 지닌 실존이다.
이러한 인간의식의 속성을 정리해 볼 때, 의식 혹은 영은 의식적인 의도성, 역동성, 개방성, 자기 초월성, 진정성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영은 그 영의 궁극적인 목적, 즉 모든 실재를 완전히 장악하고 도달하였다고 할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재평가하고 재조정해 가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의식 혹은 영은 인식, 이해, 판단, 결단을 향하여 움직이는 끝없는 인간의 실존이며 의식적인 의도성이다. 이 러한 인간의 영은 구조적일 뿐만 아니라 규범적이다. 의식이 경험하고 이해하며 판단하고 결단한다는 것은 인간됨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구조화된 인간의 영이 인간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 그 움직임은 일관성과 완전성을 기대한다. 즉, 알려져야 하고 사랑받아야 할 것들을 향해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인간이 된다는 것'에는 '그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한다'는 규범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영의 일이다. 그래서 로너건은 인간 의식과 영을 경험적인 차원에서 서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는 영성을 인간학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며,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해 주는 데 기여하고 있다.
4. 통합적인 영성의 이해
지금까지 보여 준 영성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그 무엇이며, 그러한 과정들을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인간이 인간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단순히 '하나님과 나'라는 존재가 '나와 당신'의 관계로 발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어떤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이런 관계가 지속되어 가는 동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며,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가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에 의해 인간은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과한 지체를 이루게 되며, 그것이 인간을 보다 인간 되게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전통에서 영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과정을 통해 육체를 지닌 인간은 점점 영성적인 존재가된다.
여기서 영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특성을 말하기 보다는 조화롭고 온전한 전인이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게리 하보(Gary L. Harbaugh)는 인간이 전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인 존재로서, 사고하는 존재로서, 감성적인 존재로서,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를 실현해 가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전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육체적, 정신적, 감성적, 사회적인 영역이 성령의 개입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조화롭게 통합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총체적으로 영적인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영성을 인간 존재의 어느 한 부분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이루어 가는 모든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첫째, 과거적인 물음으로써 "나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둘째, 현재적인 물음으로써 "나의 처한 상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셋째, 미래적인 물음으로써 "나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한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이것은 윤리적 명령이라기보다는 성령 안에서 성숙을 향한 자발적인 물음들이다. 그러므로 영성과 성령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2장 개혁교회의 영성
1. 현대 개혁교회에 대한 도전적 요소
다원주의라는 문화적 상황에서 '영성' 이라는 말은 매우 급속하게 퍼져 나가고 있으며, 이제는 매우 자연스럽게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영성'이란 말은 오늘의 교회 현실을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상징적인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도날드 블러쉬(Donald G.Bloesch)는 그의 저서, 경건의 위기(TAe Crisis of Piety)라는 책에서 현대 개혁교회가 점점 생명력을 상실해 가는 주된 원인을 경건생활의 결여라고 진단한다. 이런 경향은 개혁교회 노선에 속한 교회일수록 더욱 심화되어 있다고 블러쉬는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이 개혁교회의 특성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인지, 아니면 그 특성에 대한 편협한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살펴보면 진정한 개혁교회의 영성을 이해할 수 있다.
2. 개혁교회의 영성
개혁주의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영성'이라는 용어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는 영성이라는 말을 물질적인 생활이나 현실적인 삶과 분리되는 또 다른 영역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영성이란 깊은 사고보다 느낌을 더 선호하는 감정주의적 성향이 짙으며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주관주의와 자기도취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조화의 문제이다. 영성이 감성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사실이나 결코 지성적인 작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조화로운 영성이란 내면과 관련된 어떤 것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 통합되는 삶의 방식이며,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지성적이고 객관적인 통찰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성'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자연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자체가 뚜렷하게 개인적이기보다는 공동체적이고, 감성적인 체험보다는 객관적인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투쟁하는 수도자의 영적인 움직임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목사들의 관점'으로부터 출발되었기 때문이다(Fritz Busser).
영성을 논할 때 그 중심점은 흔히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후기 중세 시대, 특히 스콜라 시대의 영성의 관심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면, 개혁가들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느냐?"에 그 관심을 두고 있었다. 개혁가들의 영성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 주도권이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있었다.
중세적인 분위기의 영성이 하나님 그 자신을 추구하고 열망했던 것에 비하여 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소명의식을 강조했다. 존 리스(John H. Leith)에 의하면, 개인적인 영성의 변화나 성장보다는 하나님의 계약백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의 소명의식 실현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개혁교회 영성은 신앙적인 확신에 의하여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감당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개혁교회 영성은 내면적인 전인성을 추구하는 영성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영성- 으로서의 이해를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만으로 개혁교회 영성을 단정해버린다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비교적 경험과 지식의 양쪽 측면을 견지하고 있는 종교개혁가 칼뱅의 신학을 통하여 다른 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 곳곳에서 영성이라는 말 대신에 '경건'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칼뱅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모든 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경건은 그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요 중간이요 끝이다. 그것이 완성되는 곳에 부족한 것이란 없다."라고 말했듯이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의 어디에서도 '경건'이라는 항목을 따로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의 저서 전체를 통하여 경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강요를 출판하면서 프랑스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는 글에서도 그것을 쓰는 목적은 '종교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게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기독교강요 초판의 제목을 "경건의 개요와 구원의 교리에서 알 필요가 있는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기독교강요(1936년 라틴어판)라고 붙였다. 즉, 칼뱅 자신은그의 저서 기독교강요를 '신학의 총서'(summa theologiae)라기보다는 '경건의 총서'(summa pietatis)라고 했다. 그의 신학적인 사고의 바탕에는 경건에 대한 열망과 가르침이 깊고 넓게 깔려 있다.
칼뱅은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인 기독교강요의 저술 목적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알고, 그와의 일치된 삶을 향해 순례여행을 하는 동안 영적투쟁을 겪어야 할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일치의 삶이란 외적인 경건뿐만 아니라 내적인 신비적 경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성도들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된 삶을 '성령의 내주하심' 혹은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으로 표현하고 있다. 칼뱅은 영성생활의 최고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머리와 지체들과의 결합, 즉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최고로 중요시한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내주하는 방식에 대해서 칼뱅은 "아버지와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신성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의 안에서 우리도 신성 전체를 소유한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믿음을 통해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존재 안으로 날마다 스며들어 성화되어져 가는 과정이다. 이 신비적 연합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의적인 개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믿음 안에서 저절로 되어지는 수동적인 일만도 아니다. 칼뱅은 칭의론을 다루기에 앞서 기독교강요 중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라는 제하의 제3권 제1-9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서 자기를 부정하고 내세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허무한 현세생활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적극적인 성화와 그리스도와의 존재론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개혁교회 영성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경건에의 경험과 실천이다. 즉, 공동체 안에서 소명을 실현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하는 것이다. 이 외적인 경건의 실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경건은 내면적인 하나님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계시에 대한 인지와 주관적인 하나님 체험, 그리고 지성적인 추구와 동시에 감성적인 경험이 조화를 이룬 것이 본래 개혁교회 영성의 진면모인 것이다.
3장 영성목회
본 목회매뉴얼에서 '영성목회'란 목회의 한 분야를 가리킨다. '목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이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 정체성에 걸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면, 하나님 체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영성'은 모든 목회 활동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는 영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영성목회'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성목회는 목회의 한 분야로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도록 돕는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영성목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영성목회는 성도들 안에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회 안에 공동체적으로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전제로 한다. 창조의 영, 생명의 영, 구원의 영이신 성령님은 모든 영적 체험의 근원이 되신다. 성령님은 믿음을 주시고, 치유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며, 감동시키시고, 능력을 주신다. 성도들 안에 일을 시작하신 성령께서는 계속 성도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고, 성도들 안에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영적여정의 단계에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성목회는 성도들이 일상 속에서 계속 성령님께 주목하도록 격려한다.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부르심이 있는지,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이 있는지,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감동이 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게 한다. 특별히, 현대교회는 성령님의 역사와 관련해서 '은사'를 새롭게 인식하고 경험하고 있는데,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도록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은사들이 성도들 안에 어떻게 부어졌는지를 관찰한다. 그래서 그 은사들이 공동체 안에서 균형 있고 적절하게 사용되도록 감독한다. 그리고 은사들이 남용되거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다른 한편으로 성령님을 통해 오는 '은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갈 5:22~23)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은사는 공동체의 사역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지, 영적 성숙과는 무관하다고 보았다. 즉, 은사를 받았다고 인격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저절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목회에서는 영적 성숙 여부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성령의 인격적 열매를 무척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인격적 열매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 은사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가도록 안내해 주지 못하는 은사와 능력은 오히려 성도들의 인격을 시험에 빠뜨리고 공동체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음을 목회자는 유의해야 한다.
둘째, 영성목회의 대상은 성도들이며, 영성목회는 그 대상인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지에 계속해서 관심을 갖는다. 영성목회의 대상은 이미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성도들이다. 영성목회의 대상은 불신자가 아니다. 불신자는 전도목회 또는 선교목회의 대상이다. 그러나 영성목회의 대상은 이미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성령께서는 부르신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불어넣어 주신다. 이 갈망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추구하게 한다. 이런 갈망을 소유한 사람들이 영성목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갈망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처음에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갈망이 있었지만, 교회 안팎의 시련과 실망 때문에 그 갈망을 상실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처음부터 신실하게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키워 가는 사람도 있다. 영성목회는 이모든 성도들의 영적여정이 어느 단계에 있든지 그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영성목회가 목회 현장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첫째 영성목회는 다양한 목회 영역에서 영성적 관점을 제시해 줌으로써 변화가 일어나게 해 준다. 영성목회를 목회 영역들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하는지에 대한 실례로 영성목회 전문가인 헨리 나우웬(Henri Nouwen)과 하워드 라이스(Howard Rice)를 볼 수 있다. 우선 나우웬은 「영성의 씨앗」(Creative Ministrv)에서 목회의 다섯 가지 전문 영역과 영성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 다섯 가지 영역들은 교육, 설교, 상담, 사회 참여, 그리고 예전이다. 영성은 이 다섯 가지의 전문적인 목회영역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라이스는 The Pastor as Spiritual Guide(「영성목회와 영적지도」)에서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 또는 영성안내(spiritual guidance) 라는 영성훈련의 원리를 역시 다섯 가지 목회 영역에 적용하고 있다. 그 다섯 가지 영역들은 영혼의 돌봄, 예배, 교육, 사회 참여, 그리고 행정이다. 나우웬과 라이스의 이러한 시도는 영성이 전문적인 목회영역들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확신을 일으켜 준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그 확신을 공유하고 있다.
셋째, 영성목회는 다양한 목회 영역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독교 영성 전통 안에 있는 영성훈련들을 소개하고 안내하며 감독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영성훈련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넷째, 이러한 영성목회를 위해서는 영성목회를 주도해 나가는 목회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목회자는 먼저 영성 지도자(spiritual director) 또는 영성 안내자(spiritual guidance)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영성생활을 통해 자신의 영성을 잘 관리해 나가야 한다. 또한, 목회자는 다양한 기독교 영성전통들 및 영성훈련들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영성훈련이나 영적체험에 대한 의미를 해석해주고, 바른 영적 분별력을 제공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목회를 지향하는 목회자들을 지지해 주기 위한 교단 총회 차원의 계속교육 프로그램과 영성지도 시스템의 구축이 절실히 필요하다.
4장 영성훈련
기독교 영성생활이란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에서 성육신적인 삶을 역사의 현장에서 실현해 가며 하나님을 향한 계속적인 영적 여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영성생활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곧 '영성훈련'이다. 그런데 '영성훈련' 이란 말은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의 은총을 배제한 인간의 능동적인 행위를 우선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 영성의 특징에 비추어 보면 더욱이 용납하기가 어렵다. 개혁교회의 전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을 선행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총'이란 우리가 무슨 조치를 취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은 말 그대로 처음부터 우리 행위의 정당성을 배제한 것이다. 그저 기다려서 얻을 수 있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영성훈련이란 말을 아예 사용하기를 꺼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훈련'이란 말은 요즘 교회에서 끊임없이 사용되는 유행어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이란 말을 부정적인 측면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 의미를 제대로 찾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혁교회에서의 영성훈련이란 두 가지 측면을 만족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측면은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문제를 영성훈련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요, 두 번째 측면은 '성화'(聖化)의 문제이다. 이신칭의와 성화를 영성훈련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개인으로 하여금 이신칭의에 이르도록 하는 영성훈련을 '영성적 개발(開發)'이라고 한다면, 성화에 관한 영성훈련을 '영성적 개발(開發)'이라는 말로 구분하여 그 의미를 세분화할 수 있다.
먼저, 영성적 '계발'(illumination)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교리야말로 개혁자들이 성서에서 재발견해 낸 가장 위대한 깨달음 중의 하나이다. 이 교리는 인간이 부여받은 영성적 심성에 대한 무기력함을 고발한 것이며, 동시에 깊은 모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에게 확고한 평화를 안겨 준 사건이기도 하다. 개혁교회에서는 이것이 영성형성의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둘째는 영성적 '개발'(development)인데, 이것은 첫 번째를 토대로 하여 점진적인 과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실제적으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재현해 감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려는 노력을 말한다.
이제까지 한국교회의 현실은 적극적인 의미의 영성훈련이라기보다는 '이신칭의'라는 자각적인 의미에서의 영성 계발에 주안점을 두어 왔다. 말하자면 구원받은 백성을 만드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지만,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의 형성에 대해서는 다소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라는 신학적인 용어를 빌려 당시 독일 루터교회의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즉, 이는 적극적인 영성훈련을 하나의 '공적사상'으로 치부해 버림으로써 개혁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한 모호한 태도를 취한 당시의 신학적인 입장이 빛어낸 '값싼 은혜'에 대한 반성의 소리를 촉구한 말이다.
사실 루터는 '믿음에 의한 의인화'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은 성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루터의 입장에서 보면 성서에서 빠져 주었으면 하는 성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종교개혁자 칼뱅은 야고보서를 믿음으로 인한 의인화와 대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칼뱅은 믿음을 강조한 바울과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를 대립적인 인물이 아닌 대화와 조화의 인물로 다루고 있다. 야고보가 이 글을 쓰게 된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서 이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즉, 믿는 자가 마땅히 행할 일을 소홀히 하면서도 거짓으로 믿는다고 자랑함으로써 그 불신앙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당시의 어리석은 자들을 지적한 것이 바로 야고보서라고 말하고 있다. 내용 없는 믿음의 모양만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방탕한 생활에 자신들을 내맡기고도 태연했던 그 어리석음을 폭로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믿음은 결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진정한 이신칭의란 성화와 나란히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개혁영성에 비추어서 영성훈련이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고 실현해 가기 위한 능동적인 영성활동을 말한다.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는 것이 아무 표징도 볼 수 없는 내용 없는 교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영성적 '계발'과 '개발'의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영성 계발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경험적으로 양심의 평화와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정서적인 개발을 도와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서적인 확신이 없는 지적인 인지란 아무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말뿐이라는 것이다.
의인화는 개혁가들의 이신칭의 교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능동적으로 단계적인 성장을 꾀한다는 의미에서 영성적 개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은 이신칭의의 경험을 자기의 삶에서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서툴 수 있다. 행위가 없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면의 경험을 행위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마치 부부간의 사랑도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적합한 표현을 배울 때만이 내면의 사랑이 바르게 표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영성훈련의 이론적 배경은 '믿음에 의한 의인화'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자각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실제적인 삶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모든 조치를 말한다. 특히 개혁교회적인 영성훈련이란 이신칭의를 통해서 적극적인 성화를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며, 또한 역으로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거듭 이신칭의에 대한 확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영성의 문제는 기능적인 수행훈련의 부족이라기보다는 내면의 존재 형성에 대한 미숙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영성운동을 대중운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동일한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제조업체처럼 대량으로 영성적인 인간을 찍어 내려 한다. 이는 신학교육이나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이 일방통행식이라는 말이다. 한쪽은 강압적이고, 다른 한쪽은 반추의 여지없이 수동적으로 수용해야만 한다. 이런 주입식 훈련방식으로 각각 다른 인격적인 주체에 효과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신비적이고 독특하고 개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격 대 인격의 만남만이 존재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즉, 기성복식 영성훈련은 대강의 영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존재 형성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며, 따라서 상황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할 수도 없다.
두 번째 문제는 한국교회에서 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온 성경공부운동의 한계성이다. 분명 성경공부 운동은 한 시대를 담당한 영성훈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인 생활공동체로 충분히 연결되지 못했고, 지나친 지적인 훈련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은 지성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제대로 된 가치판단과 더불어 가치에 따른 행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감성적인 훈련이 없는 지적인 훈련은 무모함 내지 무능력이다. 지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가 제대로 조화를 이루어 훈련되어질 때 그 사람은 정의적(情意的) 혹은 감성적(affective)인 영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곧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세 번째 문제는 영적성장에 대한 개별적인 영성식별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중적인 영성운동이 주는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뿌리기는 하나 그것이 적합하게 자라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각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성품에 따라 각각 다른 영적성장의 패턴을 취하게 되어 있다.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영적성장의 패턴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각각 자기의 존재 형성을 위한 효과적인 선택과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외부적인 선물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인도이다. 내적인 인도를 식별하고 그것에 적절하게 반응하게 될 때 건전한 영적성장을 꾀하게 된다. 훈련된 영적지도자와의 영적인 담화를 통하여 식별을 도움받고 개인에게 적합한 영성의 길을 취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은 대중적이고 지적 훈련의 방향에서 선회하여 개인적인 특성을 인정하고 감성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방통행적이고 주입적인 영성훈련에서 벗어나 그를 확인하고 식별할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장치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전문적인 목회 상담가가 있는 것처럼 영성식별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영성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영성훈련의 일차적인 주안점은 특수한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적이고 전문적인 훈련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 형성에 두어야한다. 개혁교회 영성적인 의미로는 '살아 있는 의인화에 대한 확신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영성훈련이다.
목회메뉴얼 제3권 영성목회 (한국장로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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