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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목회메뉴얼 제3권 영성목회 (한국장로교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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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총회목회정보정책연구소 편 | 출판사 : 한국장로교출판사 판매가 : 10,000원 → 9,000원 (10.0%, 1,000↓) 지금 한국교회는 목회를 표준화하고 좌우로 치우칠 목회적 실수를 예방하며 교회 내의 불필요한 갈등과 혼선, 그리고 방황을 사전에 차단하여 모든 목회자들이 건강하게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는 표준화된 목회매뉴얼의 필요를 절감한다. 따라서 신앙적 전통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전통과 목회 상황을 고려하여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정할 필요가 있으며, 성서와 교단의 신학적 정통성에 입각한 목회적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하고 목회자가 수행하는 목회의 전반적인 영역에 있어서 목회 행동과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가 필요하다. 이러한 현실적 요청이 이 목회 매뉴얼을 기획하고 발간하게 된 이유이다.이 목회 …[더보기▶] |
영성목회(영성훈련)의 실제
1장 하나님과의 관계
2장 자기와의 관계
3장 타자와의 관계(개인, 사회,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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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하나님과의 관계
1) 관계 - 하나님의 본질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만나는 인격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독교 영성의 가장 큰 특징이다.
최근 신학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에 대한 주제가 새로운 관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런 관심은 기독교 영성과 특별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실천적 삼위일체에 대한 관심에서 초기 교회의 영적 경험 안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사유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 신조는 하나님을 스스로 존재하는 삼위일체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고백했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험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그 시대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신에 대한 이해와 구별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들과 관계되어 있는 가장 독특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세계가 자신이 존재하는 장소일 뿐아니라 근원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 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라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든 것의 창조자로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인 분으로 모사하고 있다.
기독교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성령의 경험 속에서 체험되고 발견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한 신앙은 그 출발부터 기독교만의 독특성을 나타낸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이 삼위일체의 영성인 것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단순한 추론의 조각들이 아니라 기독교적 삶의 참된 근거이다. 삼위일체의 신앙은 하나님이 다른 것으로부터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에 대한 가르침이며, 우리가 서로 더불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나누는 사랑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분리된 기독교가 있을 수 없듯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기독교인은 상상할 수 없다. 사실 계시의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관계가 가능하도록 인간이 되어 내려오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둘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일정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관계를 제안하시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초대에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가 이해할 수 일게 드러내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주시기 위해서 연기와 불 가운데 내려오셨다(출 19:18~19).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사들과 왕들을 통해 그의 백성을 위해 일하셨다. 하나님은 예언자와 역사가, 그리고 시인들을 통해 그분의 행동과 말씀을 성경 안에 기록하셨다. 성경이 기록된 말씀이라면, 예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셨고,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드러내셨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2) 기도-하나님과의 관계의 핵심적 요소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기도이다. 영적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고, 그분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든지 기도는 우리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활동하셔서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우리가 연약한 중에 우리를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며 친히 간구 하신다"라고 말씀한다(롬 8:26).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며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핵심인 '기도'(prayer)는 라틴 동사 '프레카리'(precari)로부터 왔는데, 그 의미는 '빌다', '간청하다' 이다. 이 단어는 사람과 관련하여 사용할 수도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기도는 히브리어로 '히파렐'이며, 헬라어로 '프로슈케'인데 그 의미는 역시 청원 또는 간구의 표현이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는 기도가 간구 또는 청원,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2:1은 기도를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로 표현한다. 기독교 초기 신학자들은 이네 가지를 기도의 다른 형태로 이해했다. 그리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경배, 고백, 헌신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마 6:9~13; 눅 11:2~4). 구약성경의 시편 역시 기도의 중요한 텍스트로 초기교회부터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한 것처럼 기도는 아주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근원적으로 기도는 청원이라는 특별한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넓은 의미로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기도가 교제라는 것은 기도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관계이다. 사람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지만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대화 시간이 많아야 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솔직한 태도와 진실한 내용을 담은 대화가 이루어져야 관계가 깊어진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닳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과 교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기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도는 대화이다. 이것은 곧 성경에 나타난 삼일일체 하나님이 '대화적 존재' 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분이요 인간의 말을 듣기 원하시는 분이다. 마태복음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친구처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
2. 하나님과의 대화-말씀 드리기
1) 한국교회와 통성기도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는 단연 통성기도일 것이다. 통성기도와 더불어 새벽기도, 철야기도는 한국교회의 기도와 영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대표적인 기도이다. 이 세 기도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부터 기인한다. 주지하는 바처럼 길선주 목사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은 초기한국교회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거룩한 영적사건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3년 하디 선교사에 의해 촉발된 원산 기도부흥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의료선교사인 하디는 한국선교 실패의 원인으로 자기의 교만과 백인 우월주의를 고백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회개의 영이 원산에 임하였다. 그런 흐름 속에서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평양에서 1907년 부흥사경회를 준비하였다. 길선주는 1906년 가을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는데 500여 명이나 참석하는 큰 기도 모임이 되었고, 선교사들은 이 새벽기도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907년 당시 현장에 있던 선교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통성기도의 시작과 절정은 다음과 같았다. 1907년 1월 14일 월요일 저녁설교 후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는 회중들에게 통성기도를 요청하였다. 이 선교사가 "나의 아버지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자, 비상한 힘이 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온 회중을 사로잡은 듯하였다. 이 힘의 나타남은 폭공적(暴恐的)이었다. 참석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애절한 침통에 사로잡혔다. 각 사람은 마음에 자기의 죄가 자기를 정죄하고 판결하는 느낌을 가지며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통성기도는 저녁 8시부터 이튿날 새벽5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한국교회에는 '새벽기도' 와 '통성기도' 그리고 밤을 새는 '철야기도' 가 연속적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하였다. 이 세 가지 기도는 지금까지 한국교회 영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통성기도라고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위 주여 삼창(三唱)이다. 통성기도를 시작하면서 손을 위로 향하며 '주여' 부르짖는 것이 일반적인 통성기도의 형태이다. 이것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성경적 근거로 다니엘 9:19을 꼽는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이 말씀은 유명한 다니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여 삼창이 기도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다니엘은 포로 된 땅 바벨론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포로 된 이유와 70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하게 될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알게 된 다니엘은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첫 번째 '주여!'는 다니엘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간구하는 부르짖음이요, 두 번째 '주여!'는 조상들의 죄와 민족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부르짖음이다. 세 번째 '주여!'는 다니엘의 기도를 들어주시사 하나님의 구원하는 경륜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단순히 통성기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사용하는 '주여 삼창'과는 다르다. 세 번 '주여!' 부르는 다니엘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하나님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하나님의 용서와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다니엘은 단순히 목소리를 높인 것이 아니라 간절함을 드린 것이다. 이런 면에서 '주여 삼창'은 '원초적 언어'(primary speech)라고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답답한 일이 있으면 소리치고 싶은 본능이 있다. 부르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본능적인 일이다. 고난당한 사람이 기도하는 일반적인 자세가 부르짖는 것임을 시편 102편은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표제는 '고난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이다. 또한 예레미야 33:3에서도 부르짖는 기도의 강력한기도 능력을 말해 준다. 부르짖는 것은 그만큼 다급하다는 것이고, 간절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심어 주신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삶의 욕망들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은 그 원초적인 언어를 통하여 우리를 만나주신다. 우리는 계속되는 기도 속에서 성숙해지며 변화되어 간다.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욕구를 정화시키셔서 내 필요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게 하신다. 결국 기도란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아뢰는 원초적 언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원초적 실존이라는 것이다.
아마 통성기도는 한국교회가 존재하는 동안 계속될 것이다. 통성기도는 한국교회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성기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첫째, 통성기도의 발단이 되었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약 1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100여 년 동안 통성기도의 형식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때의 간절함, 진지함, 절박함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둘째, 통성기도는 형태상 청원기도 중심의 기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깊은 내면 성찰을 위해서는 침묵과 묵상이 필요하다. 또한 통성기도를 하다 보면, 기도 중에 하나님에 대한 간청이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강렬한 통성기도와 함께 고요한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침묵과 기다림도 필요하다.
2) 방언기도
한국교회 교인들이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기도는 무엇일까? 몇 년 전 한 연구소에서 여러 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기회가 되면 가장 배우고 싶은 기도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질문하였다. 그 결과는 방언기도로 나타났다. 목회와 신학(2007년 9월호)에 실린 설문에 의하면 한국교회 교인 중에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절반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방언기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방언기도'가 성령 은사의 증거이며, 하나님 체험의 증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설문조사에서 신비한 기도 체험으로 꼽은 것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낀 것이며, 두 번째는 방언기도로 나타났다. 많은 경우 방언기도는 성령의 강력한 체험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방언기도는 은사를 사모하는 이들이 경험하고 싶어 하는 미지의 세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방언 은사가 은사의 모든 것도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다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고전 12:28~3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방언기도에 관심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방언기도는 일반적으로 부르짖는 기도 즉, 통성기도 형식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며 각기 다른 언어로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고 놀라워하였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의 방언이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온 교회가 모여서 방언을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방언하는 이들을 미쳤다고 오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고전 14:23). 이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방언은 소리기도 형태로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방언기도는 개인적으로 조용히 침묵하면서 할 수도 있다.
방언기도의 의미는 영으로 비밀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고전 14:2). 모든 기도가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이지만 방언은 특히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일반 언어를 사용한다. 말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러나 말은 언제나 표현의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언어로 진정한 마음의 상태나 느낌을 다 표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영의 언어인 방언으로 기도하면 종종 인간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방언기도가 하나님과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는 점에서 많은 지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방언기도의 장점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에 보다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 또한 기도가 깊어지는 만큼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이 그 기도의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소리쳐 기도해도 비밀이 보장될 수 있다. 또한 성령이 임하는 기도이기에 강력하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방언기도에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방언은 대부분 정상적인 언어 형태가 아니기에 방언의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비정상적인 상태로 보기 쉽다는 점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 방언 은사가 없는 이들에게 방언은 '새 술에 취한 사람으로 조롱'받거나(행 2:13) '미쳤다'고 조롱받기도 했다(고전 14:23). 즉, 불필요한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도하는 의미나 뜻도 모른 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할 수도 있다. 혹은 방언이 성령의 은사인데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방언을 전수하거나 교육하려는 노력은 자칫 잘못된 영적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방언 은사를 주시고 안 주시고는 전적으로 성령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방언기도에 대해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먼저 방언의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고전 14:1). 또한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면 소멸하지 않도록 계속 기도해야 한다(살전 5:19). 그러나 예배 중에 방언이 나올 때는 전체 분위기를 파악하고 남들에게 오해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전 14:23). 방언할 때는 질서를 따라 하고 통역하는 자와 함께하는 것이 좋다(고전 14:27~28). 분명한 것은 방언은 성령의 은사이므로 사모하여 방언과 더불어 하나님과 더 깊은 영적교제를 나누어 가야 할 것이다.
3) 중보기도
'중보기도'는 영어로 'Intercession'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간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과 어려움 당한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들어 기도하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나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로 무게 중심이 바꿔다. 그런 의미에서 중보기도는 이타적인 기도이다. 중보기도의 성경적 근거는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하실 수 있는 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시다(딤전 2:5).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롬 8:34). 모든 기도가 그러하듯 중보기도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 내 몸 하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지만 인간의 약함과 필요를 아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대표적인 중보기도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롯을 위해 한 기도이다(창18:22~33). 이 기도는 소돔 가운데 의인 50명에서 10명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결정적으로 빛나는 것은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살리신 것'(창 19:29)이다. 그 밖에 중보기도는 모세의 기도(출 17:8~13) 에스더의 기도(에 4:13~16), 민족을 위한 다니엘의 기도(단 9장), 사도 바울의 중보기도 요청 (골 4:2~4)등 다양하다.
기도를 혼자서 하기도 하고 집단으로 하기도 한다. 중보기도 역시 개인적으로 할 수도 있고, 집단으로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교회를 일컬어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 (눅 19:46)이라 하셨다. 중보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연합하여 기도할 때 힘이 난다. 기도하되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보기도의 응답이 빨리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다. 응답이 더디면 우리는 지치고 낙심되어 기도를 중단하곤 한다. 모든 기도가 그러하지만 특히 중보기도는 오랜 인내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가르쳐 주신 것처럼(눅 18:1)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중보기도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인가?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위대한 설교가요, 기도의 사람인 조지 버트릭(George A. Buttrick)은 원수들을 위한 기도부터 시작하라고 권한다. 그는 "제가 어리석게도 원수라고 생각하는 아무개를 축복하옵소서. 제가 잘못한 아무개를 축복하옵소서. 그들을 주님의 은혜로 지켜 주시고 저의 쓰라린 상처를 떨쳐 버리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권한다. 중보기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커다란 주제부터 지도자나 기업인, 탈북자, 가족이나 친구 등 개인을 위하기까지 다양하다.
중보기도는 아주 훌륭한 기도이지만,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중보기도 팀을 만들어 교육시키고 활용하고 있다. 이때 유의할 것은 중보기도 팀원들이 특권의식을 가져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중보기도자들은 필요에 의하여 선택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지만, 특권의식을 갖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인 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중보기도자들끼리 집단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중보기도자들이 일반 교인들과 이질감을 갖지 않도록 당사자들과 지도자들이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4) 중보기도의 실제
중보기도는 개인이나 단체로 할 수 있고, 그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안한다.
첫째, 중보기도는 준비가 필요하다.
· 중보기도의 필요성을 본인이 깊이 숙지하고 깨닫는다.
·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중보기도의 사명과 능력 있음을 확신하라.
· 지속적, 효과적으로 중보기도하기 위하여 중보기도 팀 을 구성하라.
· 중보기도 팀 구성을 위한 초기 단계에 중보기도 간증 이나 성경긍부로 동기부여를 하라.
․ 중보기도가 지속되도록 기도 모임의 장소와 시간을 정 하라.
․ 중보기도를 이끌거나 섬길 몇련 리더를 구성하라.
둘째, 중보기도는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행할 수 있다.
· 중보기도 할 기도제목을 모은다. 기도제목은 개인, 교 회, 나라와 민족, 선교사, 특정 사역, 사역자 등과 관 련하여 다양하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는 찬양을 먼저 드리라. 노래와 찬양이 시작될 때 여호와께서 역사하시기 시작 하셨다(대하 20:22).
·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계심 을 믿고 묵상하라. 성경은 주님께서 "항상 살아 계셔 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라고 말씀을 주신다 (히 7:25).
·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약속 하셨고,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고 말씀해주신다(롬 8: 26).
· 숨은 죄를 고백함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우리의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 하셨다(시 66:18).
․ 기도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 때로는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이기도 하다. 준비된 기도제목이 나 요청받은 제목을 가지고 합심하여 확신을 가지고 기 도하라. 주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함 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
․ 악한 영을 대적할 필요가 있을 때 원수 마귀를 강력하 게 대적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라.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약속하셨다(약 4:7).
· 합심하여 기도한 다음 성령께서 더 기도하기 원하시는 것이 없는지 잠시 잠잠히 기다리라. 성령님께서 강권 하시는 기도가 있으면 좀 더 기도하며 기도의 부담이 사라질 때까지 개인이나 상황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 하라.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과 기대를 감사드리며 기도를 마무리하라.
· 기도 모임을 마친 후에도 생활 중에 중보기도에 대한 민감함을 유지하라.
3. 하나님과의 대화-말씀 듣기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소통이다. 소통은 한쪽의 일방적 독백이 아니라 상호 인격적 관계이다. 또한 기도는 서로의 관심과 기대, 그리고 친밀감을 나누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도는 말하고, 듣는 소통의 과정이다. 기도는 단지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본질은 오히려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답하는 태도에 있다. 듣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듣는 기도는 일방적인 청원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듣는 기도는 하나님께 간청한 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나아가 듣는 기도는 광범위한 기도의 자세로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참된 근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영적 성숙에 매우 중요하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이다. 영의 눈과 귀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마음을 통해 물질적인 세계를 넘어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이유
우리 인생은 날마다 결단을 요구받는다. 우리는 날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고, 결정을 위한 지침이 필요하다. 일상생활 가운데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어떤 물건을 사야 하는가? 어떤 직장을 선택해야 하는가? 헌금을 얼마나 내야 하는가?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하는가?"와 같은 수많은 질문을 대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더 나은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삶의 정황 속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는 날로 더해만 간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의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켜 가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환경과 삶에 대한 하늘의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국익이라는 문제를 놓고 갈등한다. 사회는 경제, 정의와 인권의 문제를 놓고 갈등한다. 가정은 부부와 자녀간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힘들어 한다. 수많은 갈등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경험과 지성을 동원하지만 더 이상 진전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그분의 생각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에 참여하고 성경말씀을 읽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알 뿐 아니라 믿는다. 그렇지만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경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고민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되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 성경말씀이 이해될 뿐 아니라 삶 속에 실현되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이해를 도우시고, 우리의 생각을 바꿔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나를 변화시키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시 37:7)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가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병들었을 때 어떤 병원, 어떤 의사를 만나야하는가? 어떤 약을 먹고, 어떤 수술을 받아야 하는가? 때때로 생사가 달린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다. 우리는 급한 마음에 친척이나 친구, 그리고 교회의 식구들 가운데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찾는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어려움과 위험 가운에 처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
2)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실제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망하느니라"(요 10:3~5).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 하나하나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양들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그렇다면 독특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양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을까?
첫째,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기대는 다가올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선 하나님의 성실성에 기초를 둔 기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는 언약의 말씀에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듣는 자의 기본자세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삶을 보여 주셨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말씀하셨고, 아버지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일에 집중했다. 예수님의 모든 지혜와 말씀은 하나님께로 나온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의 분주함으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못할 때가 많다. 또한 우리는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개인적 필요보다 먼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개인적 요구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찾기보다 하나님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조용하게 기다려야 한다. 시편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도를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기도에 자기 필요를 청원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인간의 요구사항을 보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듣지 않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그래서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필수요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다리는 시간과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초기교회부터 수많은 신앙인들이 사막과 고요한 수도원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잠시 시끄러운 세상과 문명을 뒤로하고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왕상 19:12).
셋째,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모든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걷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적인 감정과 욕망, 그리고 세속적인 추구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어렵다. 우리의 머릿속이 일과 돈, 자녀 문제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음성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마음에 모실 때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신다.
자기의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순종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고 싶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비결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넷째,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육체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죄에서 돌이켜 바르고 정직한 삶, 즉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셨다. 시편은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불의함과 외식을 꾸짖으시고 정직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교만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한 영으로 그분을 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 수 있다.
다섯째, 믿음으로 나아갈 때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길을 인도하시며 갈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믿음으로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필요한 모든 답을 가지고 계신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지를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판단과 바른 결정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고 교제를 통해 그분의 뜻을 전달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즉각적인 음성으로 들려주지 않으실 때가 종종 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즉시 응답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천천히 응답하실 때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응답을 받을 분량에 이르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배려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종종 기다림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라신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응답을 늦추기도 하시고 당기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섯째,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간구한 내용이나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들려올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으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을 원하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바라지만, 때론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한다. 디모데후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씀한다. 기도하는 자가 열린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기도 한다. 항상 우리가 소망하는 것만 듣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을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며,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일곱째,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섬겨라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마태복음에서 마지막에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에서도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라고 말씀하신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위에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영적인 삶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린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현대인들은 보이는 객관적인 실체를 보고 느끼는 과학적인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에 영적 존재의 임재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가장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다. 나의 생각과 의식의 흐름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마음으로 살피며, 그분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마음의 눈과 귀로 하나님을 보고 듣는 데 첫 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4. 몸으로 듣는 기도하기
1) 몸에 대한 이해
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다.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사상의 영향으로 몸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어 왔지만 여전히 기독교는 인간의 몸을 소중히 생각한다. 인간에게 '몸'이란 단순히 영혼을 담는 그릇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 즉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영혼육의 전인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영혼육의 다양한 측면에서 하나님을 인지하고 알아 갈 수 있다. 또한 영혼육의 다층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의 계시에 주목할 수 있다. 우리는 듣고, 보고, 느끼는 몸의 감각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는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육체적 감각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끼게 하거나 상기시키신다. 우리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들에 핀 한 송이의 꽃을 보고, 새들의 노랫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다. 어떤 이는 십자가와 성경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인식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만든 세계 속에서 우리는 몸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보다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향'(intention)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향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기를 원하는 열망으로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침묵하며 하나님을 묵상하거나 소리 내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의향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찬양하면서 손을 높이 들거나,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주실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시로 손바닥을 찻잔모양으로 만들어 내민다. 또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하나님께 하루를 축복해 달라
고 기도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몸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드러내기도 하고, 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받아들이기도 한다. 우리는 몸을 통해 얼마든지 우리의 의향을 드러내는 기도를 드리거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2) 몸으로 기도하기
기도는 우리의 전인적 활동이다. 기도가 단순히 영의 활동만이라든지 몸의 활동만은 아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영혼육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마치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하신 것처럼 기도는 영적인 일이며, 정신적인 일인 동시에 몸적인 일이다. 기도는 일차적으로 몸으로 드린다는 의미에서 물리적인 일이다. 나아가 지정의(知情意)의 활용이기에 정신적인 일이기도하다. 또한 기도는 영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영이 드리는 것이기에 영의 일이기도 하다. 기도 중에 영혼육의 역할을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하는 중에 영적인 부분이 더 활동적일 수 있고, 혹은 정신적인 부분이나 몸적인 부분이 좀 더 강조되는 경우가 있다.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라고 말한다. 몸이 성령의 전이라면 몸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나의 나 됨을 일차적으로 몸을 통하여 인지한다. 우리는 몸을 통하여 나의 이목구비가 형성되고 목소리를 통하여 나의 의사를 표현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몸을 돌보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몸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느끼곤 한다.
사실 우리의 육체는 우리 맘에 들든지 들지 않든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몸은 평생 동안 '나'를 담고 다닐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아름다움, 사랑과 우정의 기쁨, 성장과 변화의 선물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 몸과 함께 먼 곳을 여행했고, 가정의 편안함을 누렸다. 그리고 이 몸과 함께 우리는 성공의 기쁨과 실패와 좌절의 아픔을 맛본다. 우리 몸은 때로 상처받고 치유되고 병들고 건강을 회복하곤 했다. 우리는 이 몸 안에서 태어났고, 이 몸 안에서 병들고 죽을 것이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몸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기도의 실제
기도와 몸은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예컨대 우리 몸이 졸리든지 잠들어 있다면 정상적인 기도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몸의 건강한 컨디션이 건강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건강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충분히 잠을 자라고 권면한다. 수면 부족 상태에서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어쩌면, 헛것을 본 것일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몸의 컨디션뿐만 아니라 몸의 자세 즉, 몸짓도 기도에 영향을 준다.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기도하는 것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결코 같은 기도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무릎을 꿇는 자세에서 잘 드러난다. 때로는 몸짓 자체가 곧 기도이기도 하다. 다윗이 법궤 앞에서 춤추는 것은 곧 기도였다.
이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자세를 취해 보면서 몸으로 기도드리거나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기를 권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믿음으로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몸을 내어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10분에서 20분 정도가 적당하며 혹은 그 이상이어도 좋다. 몸을 통하여 무엇인가 영적인 것이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적당한 시간이면 된다.
․ 십자가 아래에서 조용히 무릎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기 다려 보라.
․ 십자가 아래에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이 들려주실 음 성이나 손길을 느껴 보라.
· 십자가 아래에서 두 손을 쭉 편 채로 엎드려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몸짓을 드려 보라. 그리고 들려주시는 음 성이나 위로를 느끼고 깨달아 보라.
․ 예배당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손바닥을 편채로 어느 정도 머물러 보라.
· 하나님께 간절함을 올려 드리는 마음으로 두 손을 잡 아 가슴에 언고 시간을 가져 보라.
·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 보라.
·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펴고 얼굴도 하늘을 바라보라.
· 또한 그때그때 마음에 강동이 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다양한 자세를 취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기도의 실제
사무엘하 6:6-21의 말씀을 가지고 실례를 들어 보자.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다윗 왕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동안 기뻐 춤을 추면서 두려움 없이 온몸으로 예배드렸다. 아내 미갈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확신했다. 성경에서도 종종 심오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몸짓과 움직임으로 참된 자아를 표현했다.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가져 보라.
· 방해받지 않고 몸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고요한 장소를 찾으라.
· 다윗과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라.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기쁨이든 슬픔이든 자신의 내면 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내라. 만일 내면에서 다른 감정이 솟아오른다면 그러한 감정도 몸 동작으로 표현 해 보라.
· 몸 동작은 천천히 걷기, 무릎 꿇기, 두 손을 하늘로 향 하기, 땅바닥에 엎드리기, 혹은 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볼 수도 있다. 그때그때 내면의 감정에 따라 몸을 움 직여 보라.
· 때로는 내면의 감동을 따라 춤을 추어 보라. 춤을 추 는 것이 어색할 수 있지만, 춤은 몸과 마음을 자유롭 게 하는 힘이 있다. 몸의 움직임과 함께 마음의 흐름 도 인지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가도록 움직여 보 라.
· 몸과 마음이 평안해질 때까지 자신의 감정과 몸의 움 직임에 충실하라.
·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거나 느끼게 하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몸으로 감사드리고 기도를 마친 후 그것을 기록하라.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실제 (자연묵상기도)
시편 19편은 다윗의 시편이다. 일찍이 C. S. 루이스는 "이 시편은 모든 시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이며, 가장 위대한 서정시 중의 하나다."라고 극찬하였다. 시편 19편의 전반부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광대함과 오묘함을 잘 그려 준다. 칼뱅은 자연을 하나님이 지은 극장이며 하나님을 정관(靜觀)할 수 있는 거울로 본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찬 야외극장을 자연인들은 눈이 어두워서 볼 수 없지만, 기독교인들은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감상하여야 한다(롬 1:20). 여기에서 자연묵상과 자연과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위대한 많은 영성가들은 자연묵상을 깊이 하였다. 성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나 로렌스형제의 "나목의 묵상"은 자연묵상의 가능성을 잘 보여 준다.
시편 104편 역시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시편 104편을 중심으로 자연묵상기도에 대한 지침을 살펴보자.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시편기자는 땅과 하늘에 있는 피조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달과 별, 바다와 땅과 산들, 그곳에 살고 있는 각각의 동물들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오감과 상상력을 통해 자연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완전함에 감탄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피조세계를 묵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그를 찬양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 자연을 묵상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으라.
․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마음껏 보고, 느끼고, 인식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라.
·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높이는 찬송을 조용히 부르며 마음을 가다듬으라. "참 아름다워라"와 "주 하나님 지 으신 모든 세계"와 같은 찬송이 좋은 예이다.
·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묵상할 준비가 되었으면 천천히 걷거나 한곳에 머물러 자연을 관찰하며 그 안에 숨겨 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느껴 보라(롬 1:20).
· 이때 우리 몸의 오감각인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을 다 동원해 보라. 마음과 몸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 럽게 관찰하라. 나무나 꽃을 자세히 보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향기를 맡거나, 색깔과 빛을 보거나, 크고 작음을 볼 수 있다. 혹은 크고 작은 소리를 듣거나, 높은 하늘이나 낮은 땅을 볼 수도 있다. 혹은 단단함 과 부드러움을 만져 보고 느낄 수도 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이미지를 마음에 떠올 리면서 오감을 통하여 맛보고, 냄새 맡고, 듣고 느낀 것들을 마음에 담고 숙고하며 묵상하라. 찬송가 "참 아름다워라"의 2절 가사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침 해 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과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잘 드러나 있음을 고백한 다. 3절 가사에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 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을 듣는다고 고백하고 있 다.
· 감사함으로 기도를 마무리하라.
· 묵상하며 깨닫거나 느낀 것들을 노트에 적어 보라, 그 것은 시나 수필이 될 수 있고, 그림이나 노래가 될 수 도 있다.
· 가능하면 묵상의 대상을 한 번만 묵상하지 말고 시간 을 두고 연속적으로 묵상하라. 그러면 또 다른 변화 속에서 더 깊은 묵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신성을 보고, 느끼고, 깨닫게 된다.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렉시오 디비나)
1) 렉시오 디비나란 무엇인가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즉, '무엇을 구하는것'과 '누구를 구하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 기도가 '청원기도'라면 후자의 대표적기도가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이다.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읽다, 필요한 것을 선택하다'라는 뜻의 'lectio'와 '신성한, 신적인'이라는 뜻의 'divina' 의 결합어이다. 우리말로는 '영적독서'(spiritual reading), '성독(聖讀)', 혹은 '말씀묵상기도'나 '말씀으로 기도하기'라고 할 수 있다. 렉시오 디비나의 기원은 초기교부와 사막교부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며 최초의 문헌기록은 6세기의 '베네딕트 규칙'이다. 규칙서 48장은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렉시오 디비나를 할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렉시오 디비나란 일반 독서가 아니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렉시오 디비나의 성경적 배경은 신명기 6:4~9의 '쉐마' (들으라)와 수문 앞 광장의 사경회라 불리는 느헤미야 8장에 있다. 에스라는 특별히 제작된 나무 강단에 서서 말씀을 낭독하였다. 이전에 유대인들은 나무 단에서 희생제물을 불태우며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이때부터 말씀을 읽고 들으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희생제물 대신 말씀낭독이라는 새로운 예배형식이 등장한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의 공식적인 첫 설교가 등장한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낭독하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라고 하셨다. 이것은 700년 전 구약의 말씀을 '오늘의 말씀'으로 현재화시킨 것이다.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한 의미는 어제의 말씀을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오늘의 말씀'으로 현재화시키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현재화될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땅에서 하늘까지 잇닿은 사닥다리 꿈을 꾸었다. 곧 하늘사다리를 꿈꾼 것이다. 이 사닥다리 꿈은 후대의 많은 이들에게 깊은 묵상의 소재가 되었다. 야곱의 꿈은 어떻게 하면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을 뵐 수 있을까, 하늘 사닥다리는 무엇일까라는 숙제를 남겨 두었다. 많은 영성가들과 신학자들이 이 사닥다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12세기 인물로 카르투지오회 원장을 지낸 귀고(Guigo) 2세는 묵상 중에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네 단계로 깨달았다. 본래 렉시오 디비나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귀고 2세가 정리한 네 과정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전해진다.
귀고는 '독서'는 온힘을 집중하여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것이며, '묵상'은 이성을 가지고 감추어진 진리에 대한 지식을 찾는 정신의 적극적인 활동이라 했다. 또한 '기도'는 선을 얻고 악을 막아 내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헌신이며, '관상'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져 거기에 머무는 단계로 이때 "영혼은 한없는 감미로움의 기쁨을 맛보게된다."고 말한다. 특별히 여기에서 '관상'이란 말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체험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림, 지성소 체험, 하나님과 깊은 연합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기도자가 하나님과 점점 하나 되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 임재 체험을 인간의 단어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기독교 전통에서는 '관상'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곤 하였다. 이렇게 렉시오 디비나란 성경말씀을 읽고, 그것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케 하는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2) 말씀으로 기도하기(렉시오 디비나)와 큐티(Q.T.)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한다는 점에서 '큐티'와 렉시오 디비나는 비슷하다. 성경을 덮어놓고 기도하는 '일반적인 기도'에 비해 큐티와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한다는 점에서 큰 차별성이 없다. 그러나 두 기도가 지향하는 바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두 기도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 렉시오 디비나는 초기교부와 사막교부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이것이 유럽 수도원 전통으로 통하여 이어져 왔다. 반면 큐티는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 무디의 영향을 받은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의 경건훈련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한국교회 상황에서 큐티는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을 실용적으로 단순화시킨 면이 있다.
둘째, 두 기도가 추구하는 모델이 약간 다르다. 큐티는 주로 PRESS, SPACE 방법을 사용한다. PRESS는 '짧게 기도하기' (Prayer for amoment), '말씀 읽기' (Read His Word), '말씀묵상' (Examine His Word) '말씀의 결과로 다시 기도하기' (Say back to God), 발견한 사실 나누기' (Share with others what you have found)의 머리글자이다. 즉, '짧은 시작기도, 말씀 읽기, 묵상, 기도, 발견한 사실 나누기와 적용' 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큐티의 지향점은 적용이라는 구체성, 즉 삶과 사람과 땅을 향한다. 따라서 이것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구체성이라는 한계를 또한 갖기도 한다. 반면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 읽기, 묵상, 기도, 관상이라는 흐름을 갖는다. 렉시오 디비나가 추구하는 것은 구체적인 적용보다는 관상이라는 초월성, 즉 하나님 자신을 찾는 경향이 강하다. 두 기도의 차이점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셋째, 큐티가 몰입 성향의 기도라면 렉시오 디비나는 초월 성향의 기도이다. 모든 기도자는 '몰입'과 '초월'의 관계에서 고민한다. 몰입과 초월은 한마디로 자기를 뛰어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몰입형 기도는 자기 생각을 정당화시키며 자기 생각에 집착하려 한다. 큐티가 적용이라는 구체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성경이 자기주장의 정당화를 위한 근거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래서 유해룡은 "진정한 기도는 부적절한 집착(inordinate attach -ment)에서 벗어나서 참된 애착(authenticattachment)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렉시오 디비나는 초월 지향적인 성향의 기도이다. 렉시오 디비나에서 기도자가 지향하는 것은 구체적인 적용보다는 하나님 자신이다. 렉시오 디비나는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무엇을 깨달을까? 내 삶의 무엇을 변화시킬까? 어떻게 설교 준비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더 머물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는다. 즉, 내가 말씀을 묵상하고 쪼개기보다는, 말씀이 나를 쪼개고 관통하게 하는 기도이다. 이런 점에서 큐티가 훌륭한 말씀묵상기도인 것은 틀림없으나,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깊은 임재 안에 머물게 하는 관상적 큐티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3) 말씀으로 기도하기(렉시오 디비나)의 실제
렉시오 디비나는 흔히 '독서(말씀 읽기), 묵상, 기도, 관상'의 네 단계로 진행된다. 또한 기도를 마친 후 기도를 되돌아보는 반추를 할 수 있다.
◉ 독서
성경말씀을 읽는 방법은 통독과 속독, 묵독과 낭독, 다독과 정독 등 다앙하다.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성경 읽기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준비와 과정이 필요하다.
· 장소와 시간 : 성경 읽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공 간을 정한다. 시간은 최소한 30분 정도로 앞뒤로 방해 되지 않는 시간을 정한다.
․ 준비기도(마음가짐) :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을 갖는다. 외적 고요보다도 내적 고요함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사모하는 갈급한 마음을 갖는다. 고요한 마음 을 갖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찬송을 한두 곡 조용히 부 르거나 십자가를 조용히 응시해도 좋다.
◉ 성경 읽기
성경을 읽을 때 정해진 절대적인 원칙은 없다. 전통적인 렉시오 디비나에서는 소리 내어 읽기를 권한다. 그러나 성경 읽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소리 내어 읽거나(음독,音讀)혹은 소리 없이 조용히 묵독(默讀)할 수 있다.
· 정해진 본문을 작은 소리로 반복해서 3~5번 읖조리며 읽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묵독할 수도 있다.
․ 소리가 귀를 통해 마음으로 전달되도록 읽는다. 마치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듯이 천천히 읽는다.
· 성경말씀 중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나 이미지 가 있기까지 계속 읽는다.
◉ 묵상
· 마음에 와 닿은 구절, 단어, 이미지의 의미와 뜻을 깊 이 숙고한다.
· 묵상하는 과정에서 마치 손의 압점에 수지침을 놓듯이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다면 그 점에 특히 유의한 다.
·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통해 이해력과 기억력과 상상 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으려는 자세를 가져 라.
◉ 기도
· 묵상하는 동안 마음에서 느껴지고 깨달아진 것을 있는 그대로, 영혼이 공명되듯이 오롯이 하나님께 올려 드 린다.
· 회개나 반성에 대한 것이라면 회개의 영을 올려 드린 다.
· 기쁨이나 새로운 결심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올려 드린 다.
◉ 관상
· 깊은 기도 중에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기쁨, 감사, 임재를 깊이 누리며 맛본다.
· 이때는 대개 수동적인 상태이므로 고요히 하나님의 이 끄심 안에 머무는 것이 좋다.
◉ 기도 돌아보기-기도반추(祈禱反芻)
기도반추는 말씀으로 기도하기의 끝 부분에 드리는 마무리 부분이다. 기도는 일회적으로 마치기도 하지만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반추의 일차적 의미는 기도의 마무리이며 이차적 의미는 다음에 이어서 기도할 수 있는 특별한 기도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다.
․ 주기도나 감사기도 혹은 찬송으로 기도를 마친 후에 기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간략하게 기록한다.
· 나에게 특별히 다가온 단어나 말씀이나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지 기록한다.
· 이때 어떠한 느낌이나 깨달음, 혹은 내면의 움직임이 무엇인지 기록한다.
· 다음 기도에서 다시 반복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기 록하였다가 이어서 기도한다.
· 나에게 다가온 은혜의 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삶으 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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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기와의 관계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내면의 골방에 계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내면세계로의 여행을 해야 한다. 우주여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여행이다. 피상적인 삶에서 떠나 내면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야 우리는 참된 자기를 발견하고 진정한 삶(authentic life)을 살 수 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은 고독과 침묵, 기도와 성찰 등이다. 자신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치유와 내적 정화를 경험한다. 치유와 정화는 자기가 온전히 회복되어 가는 과정이자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가능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이다.
1. 자기와의 관계 : 핵심원리
1) 영적 삶의 핵심으로서의 내면성의 추구
영적 삶의 핵심은 내면성의 추구이다. 내면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과 유리되어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삶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을 말하거나 자신의 내면에만 관심을 두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밖을 향하던 우리의 시선이 우리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나와 이웃과 세상을 만나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시각으로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삶은 우리 마음 안에 들어가 우리의 내면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나를 돌아보고 성찰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존재의 중심으로서의 마음
'마음'은 성서에 나오는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고 통일하는 중심기관을 상징하는 개념이다. 마음은 우리존재의 중심으로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이 만나는 자리이다. 성경은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 또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전이요, 성령이 거하시는 장소이다(고전 3:16).
교부 어거스틴은 내면의 성소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신다. 우리는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골방에 숨어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요한 카시안은 골방을 ‘마음’으로 이해한다. 내면의 골방인 마음으로 들어가 그곳에 계신 아버지와 친밀한 사귐의 기도를 드리라는 것이다.
현대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마음이 깊고 넓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우리의 의식 세계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요, 무의식의 세계는 그보다 훨씬 깊고 넓다. 어쩌면 무의식의 세계는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를 다 포함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내면세계로의 여행은 신비롭고 무한한 것이다. 인간의 자아를 심리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거짓 자아'(false self)와 '참 자기'(true self)로 말할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죄로 인해 타락한 자아, 옛 본성에 사로잡힌 자아가 있다(엡 4:22). 이 거짓 자아는 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세상의 헛된 영광(vain glory)을 추구한다. 그런데 참 자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자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게 된다. 우리는 이 거짓 자아를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new self)를 덧입어야 한다(엡 4:24).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참 자기를 발견하기 위하여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3)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의 상관관계
칼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발점은 인간의 마음이다. 왜냐하면 참 자기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당신을 알게 하시고, 나 자신을 알게 하소서!"(Noverim te, noverim me)라고 한 뜻은 참 자기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야 나를 알 수 있으며, 참 나를 발견해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곧 참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 발견과 참 자기의 발견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내면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단순히 나만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닦아 청결한 마음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대로 나의 본래적인 모습과 이웃을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 만나는 이웃은 나와 분리된 이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로 연결된 자매와 형제로서의 이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긍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4)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오솔길
숲 속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있듯이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오솔길이 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든 성령님의 주도적인 인도하심을 헤아리며 믿음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단 하나가 아니라 매우 다양하고 많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어떤 특정한 길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각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독창적인 자신만의 오솔길을 선택하여 그 길을 통해 내면의 성소에 이를 수 있다. 각자 자기 고유의 여정을 걸을 수 있지만 교회 전통 안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취하는 내면의 오솔길이 있다. 그것은 고독과 침묵, 자아성찰이다. 이제 마음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을 살펴보려고 한다.
2. 고독과 침묵
현대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표현한다면 '소음', '분주함', '군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분주하고 복잡한 사회에 살면서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내가 내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일이나 행사, 또는 인간관계에 이끌려 살아간다. 언론과 대중매체도 수많은 말을 만들어 내지만 진실된 말은 별로 없고, 대부분은 빈말, 거짓말, 피상적인 말뿐이다. 우리는 친구와 이웃과 수많은 말을 하지만, 거기에는 진실이 없고, 힘이 없어 빈말로 돌아올 때가 많다. 이 모든 것은 고독과 침묵이 결여되어서 오는 결과이다. 결국 우리는 소음과 분주함, 복잡함 속에서 하나님을 잃고, 자신을 잃고, 동료 인간을 잃어버렸다.
1) 역사적 근거
성경은 고독과 침묵에 대하여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모세는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생활했다. 광야는 고독의 장소이다. 모세는 깊은 고독 속에서 내면의 소리를 들었고, "내 백성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받았다(출 3:1~5).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이긴 후, 이세벨 왕후의 위협이 두려워 호렙산까지 도망갔다. 그는 절망과 무기력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바람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불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고 '세미한 소리' 가운데 계셨다. 엘리야는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왕상 19:11~12).
신약성경에서 세례 요한은 어린 시절을 광야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눅 1:80). 그는 고독과 침묵 가운데서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았다(눅 3:2). 예수님도 고독과 침묵을 좋아하셨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소명을 받았고(눅 4:1), 분주한 사역 중에도 자주 한적한 곳(원어, 광야)을 찾으셨다(눅 4:42, 5:16, 6:12, 11:1).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상에로의 '전진'과 세상으로부터 '퇴수'(retreat) 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막의 교부들에게 고독은 절대적으로 중요하였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고 순교가 끝난 시기에, 교부들은 날마다 죽는 순교의 삶을 살기 위하여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은 고독과 침묵만이 흐르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내면이 더 잘 드러난다. 교부들은 자신의 죄와 정욕과 싸우면서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힘썼다. 그 결과 내면에 정화가 일어났으며 '진정한 인간' (authentic human)으로 변화되었다.
2) 고독과 침묵의 영성 이해
고독(solitude)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홀로 머무는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홀로 머무는 공간은 광야일 수도 있고 산 속일 수도 있으며, 도시 한가운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홀로 머무는 공간과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홀로 머무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또한 내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자신을 대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주함, 복잡함과 소음 속에서는 내면으로 들어갈 수도, 자신을 살필 수도 없다.
고독과 비슷한 것은 외로움(loneliness)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홀로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둘은 서로 다르다. 노인들의 외로움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혼자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버림받은 느낌이다. 외로움은 절망과 무기력을 낳고, 우울증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고독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자신과 동료 이웃과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침묵(silence)은 일차적으로 말 없는 상태 또는 말의 중지를 말한다. 우리는 말이 없기 위하여 소음에서 떠나고, 고요함 가운데 머무를 수 있다. 그런데 엄밀히 보면 침묵도 하나의 말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침묵은 '언표(言表)되지 않은 말'이라고 하였다. 침묵은 표현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말이다. 침묵이 표현될 때 말이 된다. 따라서 침묵과 말은 상반되지 않는다.
침묵은 말을 길러 내는 장소다. 침묵 속에서 말이 길러지고 정제된다. 침묵 속에서 나오는 말은 참되며, 진실 되며, 힘이 있다. 그러나 침묵이 없는 말은 빈말이고, 잡담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보다 바른말을 하기 위하여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의 목적은 보다 깊은 데 있다. 침묵은 단순히 말하지 않거나 참된 말을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침묵은 우리 마음의 생각을 잠잠히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 세계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심지어 육신이 잠을 잘 때도 생각은 멈추지 않고 일어난다. 침묵은 이런 생각과 잡념을 멈추게 한다. 그래서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집중하게 한다. 우리의 의식이 하나님께 집중할 때, 침묵 속에 떠오르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다. 그 음성을 듣기 위하여 침묵하는 것이다.
고독과 침묵이 영성생활에 주는 유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침묵한다.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 계신다. 중세의 한 신학자는 "하나님은 침묵 자체이시다."라고 하였다. 침묵 가운데서 떠오르는 소리는 분명 하나님의 음성이다. 목회자에게 가장 큰 유혹은 말은 많이 하는 것에 있다. 말을 많이 함으로써 내면의 영적 열기가 빠져나가 버리고, 결국은 탈진하게 된다. 따라서 목회자는 침묵 속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말로 가다듬어야 한다. 그럴 때 목회자의 말이나 설교는 진정성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이다.
둘째, 침묵은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다. 우리는 외적침묵(고요한 장소와 시간)과 내적침묵(생각의 멈춤)을 통하여 내면세계로 들어간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참 자아가 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참 자기를 만난다. 즉, 하나님 발견과 자기 발견을 위하여 침묵하는 것이다.
셋째, 고독과 침묵은 우리의 자아를 변형(transformation)시킨다. 우리 자아의 대부분은 사회에 의해서 강요되었다. 성공과 출세, 탐욕은 사회에 의해서 강요된 자아요, 조작된 자아요, 거짓 자아(false self)이다. 고독은 이런 거짓 자아와 투쟁하는 장소이다. 고독 속에서 거짓 자아는 헛된 영광임을 안다. 고독 속에서 거짓 자아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자아(new self)가 태어난다. 그러므로 고독은 자기변형(self transformation)이 일어나는 용광로라고 할 수 있다.
넷째, 고독과 침묵은 자비로운 사람을 만들어 낸다. 자비심(compassion)은 고독 속에서 길러진다. 우리가 고독 속에 머물수록 친절하고, 남을 돌보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모든 사물에 눈이 뜨이게 되고 주변에 있는 것들에 애정을 갖게 된다. 어떤 인간도, 피조물도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고독 속에서 돌 같은 마음이 살같이 부드러워지고, 닫힌 마음이 고통 받는 이웃과 피조물에게 열린다. 그래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더욱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비로운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고독과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한 거기서 얻은 사랑과 자비심을 가지고 나갈 때,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
고독과 침묵의 실제
다음과 같은 준비와 방법론으로 고독과 침묵을 훈련해 볼 수 있다.
첫째, 침묵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라. 교회, 작은 방, 사무실 등 홀로 머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좋다.
둘째, 고독의 침묵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라. 새벽은 방해받지 않고 그런 시간을 갖는 데 아주 유익하다. 만약 새벽기도의 시간을 고요와 침묵의 시간으로 삼는다면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자는 말씀을 짧고 간단하게 전한다. 말씀 속에서 기도할 제목을 찾는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고 필요한 간구의 기도를 드린다. 충분한 간구 또는 대화의 기도를 드린 후 침묵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고요한 음악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음악은 기도하는 사람이 내면의 깊은 고요로 이끌림을 받고 침묵 가운데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큰 볼륨이나 강렬한 음악은 감정을 자극하여 오히려 마음의 고요를 깨뜨릴 수 있다.
만약 아침 시간에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면 하루에 두 번 정도시간을 정하여 고요한 장소에 머물면서 한다.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눈을 감는다. 성령께서 침묵의 기도를 인도해주시도록 도움을 구한다. 어떤 특별한 형식이나 형태에 매인 침묵기도를 드리기보다 마음의 골방으로 내려가 그곳에 은밀히 계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고요하게 머문다. 어떤 특정한 생각이나 개념을 넘어 우리의 마음의 수준에서 영적교통이 일어나고 있음을 믿고 머물도록 한다. 생각이 떠오르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 시간은 약 20분 정도이다. 20분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데 걸리는 최소한의 시간이다. 침묵 속에 마음의 느낌을 의식해 본다.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주로 평화, 안정, 감사, 만족 등을 느꼈다고 한다.
혹 낮 시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혼자서 어디로 이동할 때도 고독과 침묵을 훈련할 수 있다. 그때 조용히 마음의 침묵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고 성령님께 기도를 도와 달라고 요청한다. 눈을 감고 우리의 의식을 마음으로 집중한다. 그리고 숨을 천천히 고르게 쉬어 본다.
밤 시간을 고독과 침묵의 시간으로 가져볼 수도 있다. 저녁식사 후 공원이나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우리의 의식을 걸음걸이에 집중한다. 밤이 주는 포근함과 여유를 느껴 본다. 밤하늘의 별을 응시한다. 별은 무한한 상상력을 일으킨다. 밤은 침묵의 시간이다. 밤의 침묵은 휴식과 평안함, 포근함을 가져다준다. 이것을 위해 먼저 컴퓨터나 TV를 끄고 밤을 보내 보라. 그렇게 하면서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살펴보라. 단순하고 조용한 가운데 잠자리에 들면서 그 기분을 느껴 보라. 그렇게 잠든 후 아침에 일어날 때 기분이 어떠한지 점검해 보라. 그러면 아마 일상의 날과 다른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저녁 시간과 아침 시간은 서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셋째, 성경 한 구절을 정하여 말씀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라. 예를 들어,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라는 말씀이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눅 18:13)라는 말씀으로 기도한다고 해 보자. 먼저 숨을 들이쉴 때 앞 구절을, 내어 쉴 때 뒷구절을 암송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입술로 반복한다. 입술로 하다가 마음이 암송할 때까지 계속한다. 마음이 암송하면 입술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현존이 내 안과 주변에 가득함을 느낄 것이다.
넷째, 자연묵상은 고독과 침묵 훈련의 좋은 장이며 자원이다. 쉬는 날 하루는 야외로 나간다. 자연이 있는 곳은 어디나 좋다. 산, 나무, 시냇물, 꽃, 들풀 등과 같은 것을 천천히 응시해 보라. 그리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연과 대화를 해 보라. 무엇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 어디에나 계신다. 자연과 함께 머물 때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느껴 본다.
다섯째, 목표점검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 일 년에 한두 번은 기도원이나 수양관에 머물면서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한다. 고요한 곳에서 앞으로의 미래를 계획해 보되, 1년, 5년, 10년 단위로 작성해본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 계획을 확인해 보면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여섯째, 말씀묵상을 하면서 침묵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먼저 성경을 읽은 후 고요히 10분 정도를 머물러 있으라. 그리고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기를 조용히 기다리라. 산책이나 운동할 때 읽은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되새김질해 보라.
일곱째, 영적일기를 쓰는 것도 침묵과 고독의 좋은 훈련이다. 영적일기는 고독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적는 시간이다. 내게 일어났던 사건과 함께 나의 느낌을 적어 본다. 영적일기에서는 기쁨이나 슬픔, 만족이나 아쉬움, 분노와 같은 느낌을 솔직하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내면에 있는 생각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적어 보라.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지 살펴보며 그것을 일기에 정리하여 기록하라.
고독과 침묵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a way of life)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계속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무엇보다도 하루의 일과 속에서 고독의 자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 년에 한두 번은 기도원이나 수양관과 같은 곳에 올라가 모든 삶의 분주함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피정 기간을 가져 보라. 이때는 주로 침묵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도 고독과 침묵이 삶에 체득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3. 성찰의 기도
1) 성찰의 기도에 대한 이해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활동하심을 살피고 그분께 응답하는 영적 실천을 '성찰의 기도' , 또는 '의식성찰'(examination of consciousness)이라고 부른다. 기독교 전통은 성령의 빛에 의지하여 자신의 내면과 삶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 실천을 강조해 왔다. 시편에 보면 자리에 누워 마음을 살피라는 가르침이 나온다. 이것은 곤란 가운데 처한 성도로 하여금 삶의 복잡한 상황에서 한 발 물러서서 마음을 성찰하라는 영적가르침이다. 다윗은 곤경 속에 있었지만 침상에서 잠잠히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과 평안, 신뢰를 체험하게 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노래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God knowled -ge)과 나를 아는 지식(self knowledge)이 경건생활의 중심이 된다고 강조한다. 나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통한 매일의 성찰이 습관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칼뱅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이란 자신을 살펴 이제부터는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며 지배하는 자기부정에 있다고 말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참된 목자」(TAe Reformed Pastor)에서 목회자들이성찰을 실천해야 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오,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정욕과 열정과 세상적인 것의 추구를 떠나서 믿음과 사랑으로 열심히 살아가야 하며 가정에서 많은 시간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마음을 보살피지 않고 부패케 하는 것을 정복하지 아니하며,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이러한 작업을 평생을 두고 꾸준히 해 나가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어긋나게 되어 당신의 마음은 굶주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성찰은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적 실천이다. 의식성찰은 하루 중 15분에서 20분 정도 조용한 시간을 내어서 내면(의식)의 흐름에 관심을 두면서 하루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내적 흐름을 관찰하여 하루 동안에 하나님이 어떻게 나의 삶속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셨는가를 살피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루 동안 나의 존재와 삶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이 바로 의식성찰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에 대하여 성찰한다고 했을 때 양심성찰을 생각한다. 양심성찰은 하루의 생활 속에서 내가 범한 잘못들을 찾아내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의식성찰은 양심성찰과 달리 잘 잘못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하심을 살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임재하여 활동하셨으며, 또 임재하고 활동하신 하나님께 내가 어떻게 응답하며 살았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나의 본래적인 관계 안에서 나의 삶과 내면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결국 의식성찰은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어떻게 더 응답할 것인가?"라는 관계의 관점에서 행하는 영성훈련이다.
우리가 자신을 성찰한다고 해서 자기 분석이나 자아 인식이 이 기도의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이다. 그러므로 성찰은 우리의 내면을 향해 서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이다.
2) 성찰의 기도를 위한 지침
첫째, 감사의 기도로 시작하라.
성찰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 시작한다. 왜 성찰을 감사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본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존재이다. 내가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존재와 나의 삶,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가 더 깊은 믿음의 삶을 살아갈수록, 우리는 더욱 가난해지며,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채워지게 된다. 이런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우리 안에서 의식의 일부가 되어야한다. 그래서 이런 감사를 우리의 의식적인 앎의 차원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이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오늘 하루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아마도 그 은혜들이 주어지는 순간에도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 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매우 다른 관점으로 그 선물들을 보게 된다. 선물이 크고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으며, 아니면 작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성찰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점점 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 참으로 마땅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가를 항상 의식하며 사는 것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점차적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며, 이런 앎만이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둘째, 성령의 조명을 위하여 기도하라.
성찰의 기도의 두 번째는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것이다. 성찰은 단순히 자신의 자연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하루를 돌아보며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삶 속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은 영적인 일이다. 영적인 것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이성과 상식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온전히 알고 나의 존재 가능성을 다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내 자신의 신비에 대하여 보다 더 잘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찰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깨닫는 문제요, 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응답하는 문제이다.
셋째, 하루 동안의 내 자신과 삶을 성찰하라. 성찰은 하루의 모든 시간과 사건 안에서 살아온 내 자신과 그 안에서 활동하신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하루 동안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은 두 단계로 실시할 수 있다. 먼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동안에 내가 경험한 사건들, 내가 행한 일들, 만남들, 대화들을 영화 필름을 돌리듯이 성령의 조명을 구하면서 살펴보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짧게는 1분이나 2분이면 가능하다. 여기서 어떤 분석적인 시각으로 대화나 삶을 면밀히 성찰할 필요는 없다.
그 후 위와 같이 오늘 하루 삶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그려지면,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하루의 삶을 돌아본다. 오늘 하루 동안 내가 행한 일들, 만남들, 대화들 가운데 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 성찰을 통해 감사, 기쁨, 평화, 불안, 염려, 원인모르는 침체, 분노, 원망 등 다양한 감정들이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내면의 움직임들을 본다고 했을 때, 모든 느낌이나 감정들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다양한 내면의 움직임들 중에서 특별히 어떤 강한 감정이나 느낌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경우는 강렬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내면의 어떤 흐름을 볼 수 있게 된다.
성찰에서 감정이나 느낌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의 섬세한 흔적을 보고자 함이다. 이는 감정이나 느낌이 자신 내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말이나 행동은 쉽게 포장할 수 있다. 생각도 어느 정도는 조종할 수 있다. 그러나 느낌이나 감정은 자발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내면의 감정이나 느낌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하심에 내가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또한 처한 상황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 주는 내면의 거울과도 같다.
이 내면의 흐름에 대한 성찰은 보이는 행동의 잘못이나 결과를 넘어서 우리의 경험이나 행동의 배후에 어떤 뿌리가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복된 악습이나 계속해서 범하는 잘못에 접근하여 다룰 때에는 그 행동이나 결과만을 보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극복할 힘을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치유되기 위해서는 그 문제의 뿌리를 파헤치고 다루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내면 성찰을 통해 바로 이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에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느낌이나 감정의 흐름에 주목할 때 우리의 관심을 끄는 어떤 감정이나 느낌을 발견했다면 이제 주님 앞에서 물어볼 수 있다. 내가 오늘 경험했던 어떤 감정이나 느낌의 출처는 어디인가? 만약에 내가 오늘 깊은 감사와 마음의 고요를 가졌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그때의 감사와 평강의 출처는 바로 임재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어려운 삶 안에서도 소망을 느꼈었고 삶의 의지를 경험했었다면 바로 그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겠는가?
또한 우리는 내면 성찰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슬픔이나 아픔을 느낄 수도 있다. 비록 현실에서는 우리가 그 감정이나 느낌의 출처가 되는 어떤 문제로 인해 아파했을지라도, 성찰 중에 주님과 함께 그 아픔이나 상처들을 바라볼 때는 다른 마음으로 그 문제들을 대할 수 있게 된다. 성령님께서 우리로 그 문제의 근원을 바로 직면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마음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이어서 우리의 아픔 가운데 함께해 주시면서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내면의 깊은 흐름을 살펴보는 성찰을 통해 우리는 분명하게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임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가 있다.
넷째,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주신 은총에 감사하라.
하루 동안 내면의 흐름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하심으로 우리는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성찰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과 활동하심에 어떻게 응답하였는가를 보면서 뉘우침과 용서를 구하고, 깨달음을 주신 주림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린다. 용서 구하기에서 중요한 점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이 예수님 앞에 서서 그 사랑의 현존을 느끼면서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했듯이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죄로 인해 아파하고 새로운 삶을 갈구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다.
다섯째, 내일을 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구하고 주기도문으로 마 무리하라.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며, 내일을 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구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주님이 주신 기쁨, 감사, 평강,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주기도문' 으로 성찰을 마친다.
3) 성찰의 기도의 실제
의식성찰
먼저 하루 중 고요한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15분에서 20분 정도의 시간이 적당하다. 낮 동안 직장에서도 잠시 시간을 내어 실천할 수 있고, 저녁때는 집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실천할 수 있다. 의식성찰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갖는다.
· 감사기도 드리기 : 오늘 하루 동안 나를 돌보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린다. 또한 성찰을 위한 거 룩한 공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나의 모든 존재와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성찰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깨달아 감사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한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나의 의식의 일부가 되 고, 감사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한다.
․ 성령의 조명 구하기 : 성령님은 어두운 내 영혼의 방을 환히 밝혀 주시는 등불과 같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 야 그 안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이 보이듯이 하나님께 서 우리와 항상 항께 계시더라도 성령께서 불을 비춰 야 볼 수 있다. 겸손하게 성령의 조명을 구한다.
․ 하루의 삶의 성찰 : 성찰은 두 단계로 나누어 실천한 다. 첫째 단계에서는 하루 동안 내가 경험한 사건이나 내가 만난 사람, 대화나 행동들을 하나님의 임재와 활 동하심의 관점에서 돌아본다. 둘째 단계에서는 하루 동안 내면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내면의 흐름을 통하 여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있었는가를 살펴본다. 또한 하나님의 활동하심에 내가 어떻게 응답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살펴본다.
․ 뉘우침과 용서를 구하는 기도 : 성찰을 통하여 발견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여기서 단순히 내가 죄에 빠지고 넘어졌다는 사실보다는 우리 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마음에 서 우러나온 진심어린 통회의 기도를 드린다.
․ 내일을 준비하는 기도 : 내일을 위하여 필요한 은총을 구하고 주님의 기도로 마친다.
말씀 안에서 하루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
'말씀 안에서 하루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은 아침시간에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결단했던 내용에 비추어 내가 어떻게 하루를 살아왔는지를 살피는 기도시간이다. 먼저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이나 밤에 고요한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 감사기도 드리기 : 성찰기도를 위한 공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또한 하루를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은혜와 여러 여건들에 대해 감사기도를 드린 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의 기본적인 자세이 다.
․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기 : 성령님은 어두운 내 영혼의 방을 환히 밝혀 주시는 등불과 같다. 성령님에서 내 모습과 삶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서 오늘 하나님의 말 씀을 따라 살고자 했던 나의 삶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볼 수 있도록 성령님의 조명을 구한다.
․ 하나님의 말씀 기억하기 : 오늘 아침에 내가 하나님께 로부터 받은 말씀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하고 그것을 기록한다.
․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하루의 살을 돌아보기 : 아침 에 받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오을 나의 삶에서 구 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그 말 씀에 비추어서 내가 오늘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펴본 다.
․ 감사와 용서의 기도드리기 : 하루 동안의 삶 속에서 베 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에 온전 히 응답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하나님의 용 서를 구한다.
․ 마무리 기도 : 하루를 마무리하는 감사기도와 주의 기 도를 드림으로 성찰기도를 마친다.
4. 치유와 정화
1) 하나님과 친밀한 영적 사귐의 조건으로서의 치유
원래 인간은 에덴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있었으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자신의 참된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의 단절을 초래하였다. 하나님과 함께 에덴을 거닐며 행복하게 살던 인간이 소외되고 상처받은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우리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놓으신 하나님과의 화해를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 안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어 일그러진 성품이 변화되어야한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쓴 뿌리들이 깊이 박혀있다. 예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내면의 상처까지도 치유하신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육체의 질병을 고치실 뿐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하셔서 그를 온전하게 하셨듯이, 우리를 고치시되 온전히 고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치유하기 원하신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시는가?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는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깨닫고 뉘우쳐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방향 전환이다. 회개란 단순한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행위와 삶의 변화를 포함한다. 하나님 밖에 머무르는 나의 모든 생각과 삶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어야한다.
우리는 거짓된 자신의 모습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피상적인 차원의 변화만으로는 완전히 새로워질 수 없다. 이러한 치유와 정화는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야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는데, 눈에 보이는 부분만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 존재하는 어두운 기억과 상처들, 문제의 뿌리까지 다 드러내고 치유해 가신다. 그 과정을 통해 개인은 점차 더 깊은 수준까지 치유되고 회복되어진다. 치유를 통한 정화와 하나님과의 친밀한관계의 회복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하지만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정화되며 치유함을 선물로 받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치유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믿음으로 그 은혜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실천을 요구한다.
2) 치유와 정화를 위한 훈련의 실제
하나님께 분노를 표현하는 기도
첫째, 화의 감정과 만나라.
기도할 자세를 취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구한다. 화가 나면 이에 수반하는 신체적 반응이 일어나는데, 어깨가 경직되거나 얼굴이 굳어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호흡이 거칠어진다. 이때 심호흡을 천천히 크게 몇 번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 안에 있는 화를 주목하여 바라본다. 화의 감정과 만나기를 할 때, 화난 감정을 빨리 없애거나 무시, 또는 억압하지 않는다. 화나게 한 사람의 얼굴과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 본다. 화나게 한 사건을 떠올림으로 화의 감정과 만난다. 억울하고 화난 심정을 기록하는 것도 화를 깊이 만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 화를 깊게 대면하라.
화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을 읽는 것이 화와 만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데 화를 표현하는 성경말씀을 읽는 것은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토로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말씀을 묵상하여 교훈을 얻고 그것을 적용함으로 화난 감정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분노를 표현했던 욥이나 시편 저자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화난 감정을 있는 그대로 깊게 경험함으로써 묵상과 토설하는 기도를 준비한다. 화를 표현하는 성경말씀으로는 욥기 16:8~17; 시편 10:1~18; 13:1~6; 17:1 ~15; 22:6~21, 28, 31, 35; 54편; 55:1~8; 61:1~2; 109:1~31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많은 말씀을 읽기보다 마음에 와 닿는 몇 절을 반복하여 읽고, 그 말씀과 함께 머무르면서 나의 감정과 깊이 만나도록 한다. 감정이 충분히 경험되면 토로하는 기도와 묵상이 가능해진다.
셋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묵상하라.
화를 깊게 대면하고 그것을 느낀 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나를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느끼시는지를 상상해 본다. 예수님의 심령과 나의 심령이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낄 때, 자연스럽게 화난 상황과 심정을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본다. 아무 말을 못한다 하더라도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느끼면서 십자가의 주님 앞에 충분한 시간 동안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십자가의 주님 앞에 머물러 있으면 어느덧 내 안에서 분노와 원한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임재와 평강, 그로 인한 영혼의 자유와 기쁨이 나를 충만히 채우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과 평강으로 우리를 채울 때까지 충분히 주님 앞에 머물러본다.
넷째, 주님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고 주님의 기도로 마무리하라. 묵상을 통해 주님이 내게 주셨던 은혜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헤아려 보면서 감사를 드린다. 이때 다시 주님께 아뢸 것이 있으면 아뢰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주님께 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 끝을 맺는다.
마음의 상처나 아픈 기억을 치유하는 기도
과거의 고통이나 상처, 아픔 또는 슬픔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한 단계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가질 수 있다.
· 마음에 상처를 준 사건 가운데 무엇을 가지고 기도할 것인가를 정하라.
· 상처를 경험한 그때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그 장면으로 돌아가라.
· 그때의 경험이 충분히 되살아나면 주님을 그 자리에 초청하라. 주님께서 어떻게 그 사건 속에 계셨는지, 주님이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는지, 주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물으며 묵상한다. 지금 주님이 나에게 하 시는 말씀을 들어 본다.
․ 또는 마음에 상처를 준 사건은 떠올린 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이때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본다. 십자가의 주 님을 바라볼 때 주님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자 연스럽게 주님과 대화한다.
․ 내면의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올라오도록 하라. 아픈 과거의 기억은 가지고 묵상하며 기도할 때 부정적인 감정들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주님 께 대한 분노, 원망, 불평하는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 다. 이때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 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올라올 수 있 도록 한다.
· 주님의 치유를 경험하면서 마음에서 감사와 기쁨, 평 강이 임할 때까지 기도를 반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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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타자와의 관계 (개인, 사회, 자연)
1. 타자와의 관계의 핵심원리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변화는 나와 내 자신과의 관계의 변화를 유발한다. 이는 세상과 나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부여하는 정체성을 겸비하게 받아들여 '참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참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과 딸이며, 하나님의 기쁨인 자'이다. 나는 나를 정죄하는 최후의 심판관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바울 사도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나를 판단하실 이는 오직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무조건적 수용을 받아들여 나와 나 자신 사이의 화목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참 나'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 변화, 즉 이타적 관계로의 변화라는 열매를 산출한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타자와의 관계의 변화라는 열매가 없다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 그리고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의 변화의 진실성은 의심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확증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만 입증될 수밖에 없다는 성경의 증언이다. 즉,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하는 유일한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어떤 종교적 행위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즉 타인과의 이타적 관계를 맺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입증하는 징표인 것이다.
이타적 중심성을 지닌 타자와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를 핵심원리로 삼고 있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두 가지 핵심원리가 관철되고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첫째는 소위 황금률로 알려진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타자와의 관계는 바로 이 황금률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타자를 위한 행위를 식별하는 방법론은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이다. 그러므로 타자에게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그 행동을 식별해 보아야 한다. 그 행동이 참으로 타자가 내게 행했을 때 내가 받고자 원하는 행동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다'는 식별의 결과를 동반한 행동은 이타적인 행동이 된다. '그렇지 않다'는 식별의 결론이 나오면, 그 행동은 실행에 옮기지 말아야 한다. 바로 황금률에 따른 식별을 거친 행동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요구하는 것, 그보다 정확하게는 예수의 산상수훈의 결론에 부합된다.
또 다른 원리는 바울 사도가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이다. 이 행동 원리는 바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이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행동의 동기에 작용하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반드시 관철되어야 하는 원리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취해지는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시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가의 관점에서 식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재하실 때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난 것이며,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 타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으심, 선하심, 사랑, 긍휼, 온유, 겸손, 용서 등을 발견하여 기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그만큼 더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모든 행동을 식별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론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모든 행동의 목적이기도 한다. 개혁교회의 종교개혁자 칼뱅의 모토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ha)이다. 그의 모든 신학적 사유, 목회적 활동,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개인적 삶을 관철하는 핵심적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반드시 관철되어야 할 핵심원리이다.
2. 개인과의 관계
1) 긍휼
타자와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즉, 개인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이다. 먼저 개인과의 관계에서 황금률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식별의 통로를 통해 흘러나올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긍휼(compassion)이다. 긍휼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최고의 미덕 중 하나이다. 긍휼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정(pity)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향한 자신의 행동이 긍휼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동정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긍휼은 긍휼의 행위자와 대상자가 서로 동등한 것이다. 긍휼의 행위자와 대상자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긍휼을 실천하는 자가 "나도 당신과 동일한 사람이다."라는 마음을 긍휼의 대상자에 대해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걸하는 노숙자를 향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동전이나 지폐를 던져 주는 것은 동정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은근히 "나는 당신과 다르다. 적어도 당신보다는 낫다."라는 생각을 전제하거나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긍휼은 노숙자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 같은 공간에 함께 서서 끌어안는 것이다.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 또한 동정보다 긍휼을 받기 원한다. 이 점에서 긍휼은 황금률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인 인간에게 동정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긍휼을 보이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생활의 한 원리는 긍휼, 즉 자기를 비워 타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 긍휼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 가운데 장막을 치고 인간과 함께 생활하신 것이다. 자기를 온전히 비워 인간과의 거리를 없애시고 친히 인간이 되어 인간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휼하시는 분, 즉 긍휼 그 자체이신 분으로 소개한다. 그러므로 긍휼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 안에 임재하시고, 역사에 참여하시고, 인간과 깊이 연대하셔서 인간의 고난의 삶에 찾아오시는 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 보인 분이다. 이 점에서 긍휼의 참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긍휼을 실천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이 개인, 역사, 피조 세계 전체를 포함한 것처럼, 우리의 긍휼의 실천 또한 개인 대 개인의 차원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적이며 역사적 차원을 포함해야 한다. 즉, 긍휼의 실천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죄악과 탐욕에 바탕을 둔 불의한 사회적 구조에 의해 야기된 인간의 고난과 고통을 직면하여 그것들을 해결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이러한 긍휼의 실천이 이루어질 때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하민'이다. 그 의미는 어머니의 떨리는 자궁을 뜻한다. 어머니는 태아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자궁의 떨림을 통해서 태아와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긍휼은 타자에 대해 공감적 정서로 밀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긍휼은 타인과 동일한 자리에 서서 타인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은 자신과 함께 진정 기뻐하고, 자신과 함에 슬퍼해줄 사람을 발견하지 못해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여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긍휼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과부와 고아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을 참된 경건이라 말씀하고 있다.
긍휼은 타인의 연약함과 고난에 마음이 이끌리게 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긍휼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손실이나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능력이다. 긍휼은 타인과의 교제와 연약한 자와의 연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게 만든다. 따라서 긍휼은 오늘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경쟁이란 가치를 넘어선다. 경쟁은 남보다 낫다는 것을 입증함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이기에, 경쟁을 통한 자신의 존재가치의 실현은 쉽게 무너진다. 참된 존재가치는 남보다 낫다는 우월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하나님, 타인과의 교제, 타인을 섬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는 경쟁으로 가득한 거짓 자비의 집인 베데스다 행각의 38년 된 병자를 연못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게 해 주는 방식, 즉 경쟁의 논리에 따라 치유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치유하심으로 참된 자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이렇듯 참된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경쟁이 아닌 긍휼인 것이다.
2) 환대
환대란 용어는 손님과 주인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라틴어 호스페스(hospes)에서 유래되었다. 이 라틴어의 배후에는 '환영을 받은 혹은 환영을 하는 나그네, 이방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제노스(xenos)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환대는 나그네,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실한 은혜를 의미하며, 상호성을 그 특징으로 지닌다. 헨리 나우웬은 환대를 "낯선 이가 들어와서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환대는 우선 낯선 이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안에 당신을 위한 공간이 있습니다. 당신도 우리 안에 속할 수 있습니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대는 낯선 이를 우리의 공간 안에 받아들여 우리의 방식대로 그를 돕고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환대는 독일어로는 '가스프로인트샤프트'(Gastfreundschaft)인데, 이 말의 의미는 '손님을 위한 우정'이다. 네덜란드어로는 '하스토레이하이트'(Gasforijheid)인데 '손님의 자유'라는 뜻이다. 따라서 환대는 우리의 공간 안에 낯선 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그 공간 안에서 낯선 이가 자신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지내면서 우정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대는 낯선 이를 집 안으로 맞아들인다는 일차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이 동료 인간에 대해 지녀야 할 기본적인 관계적 태도를 뜻한다.
환대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중요한 신앙적 의무라고 성경은 말한다.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그네를 환대하라고 명한다. 그 근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제사장들이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제사장들에게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라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유리하는 나그네, 아람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율법은 명한다. 이는 바로 너희가 누구였는가를 잊지 말고,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것이다.
신약성경도 환대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하늘의 도성 새 예루살렘을 참 본향으로 여기고 그 참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요, 순례자이다. 나그네와 순례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대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말고 나그네를 잘 환대하여야한다. 환대는 초대교회의 감독이 지녀야 할 자격 요건 중 하나였다. 또한 신약성경은 환대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비전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환대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이웃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환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길이 된다. 그러므로 타인은 적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타인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복된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적극적으로 환대를 개인 관계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실천해야 한다
3) 영혼의 친구 되기와 영성지도 실천
개인과의 관계에서 긍휼과 환대를 종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바로 '영혼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영혼의 친구는 영성지도의 켈틱 전통에 따른 표현이다. 산드라 슈나이더스에 따르면 영성지도는 일대일 관계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능한 영성지도자는 개인적 만남을 통하여 동료 그리스도인이 영적생활의 영역에서 성숙해 가도록 돕는다. 영성지도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지도자와 피지도자와의 인격적 만남은 오직 피지도자의 영적성숙을 분명한 목적으로 삼는다. 월리엄 코놀리와 월리엄 베리의 정의에 따르면 영성지도는 "한 그리스도인에 의해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도움"이다. 이 도움은 동료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의사소통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도록, 또한 의사소통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성숙해 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결과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여기서 영성지도를 구하는 동료 그리스도인(피지도자)은 영적 여정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피지도자는 영적 여정의 순례자다. 하나님과의 보다 친밀한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대이다. 환대가 없다면 순례자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영성지도는 영성지도자가 영적여정의 순례를 하고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초대하여 물리적, 그리고 영적공간을 만들어 영혼의 친구가 되어 주고, 동료 그리스도인이 그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주의를 집중하여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도록 도와주고, 발견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여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친구(피지도자=순례자)를 맞이하는 따뜻한 '환대의 마음', 영혼의 친구의 신발을 신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긍휼', 오직 영혼의 친구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이타적 마음'이다.
이 따뜻한 환대의 마음을 가진 영성지도자가 있을 때에 비로소 영성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에 신뢰관계가 생기고, 그 신뢰관계로 말미암아 피지도자가 자신의 내면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연대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영혼의 친구의 신발을 신고 피지도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긍휼은 지도자의 공감적 경청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피지도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지도자의 이타적 마음은 피지도자로 하여금 자신의 하나님체험을 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돕는 지도자의 이끌어내는 경청을 가능하게 해 주며, 또한 피지도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지도자의 관조적 경청을 가능하게 해 준다.
3. 사회와의 관계
그리스도인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실현해야 할 핵심원리인 황금률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은 개인적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관철되어야할 원리이다. 사회 안에서의 이 원리들의 실천 방안으로 우선 네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이웃의 재발견과 이웃 사랑,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하향운동, 관조적 의사결정이다.
1) 이웃의 재발견과 이웃 사랑의 실천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축약될 수 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어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는 오직 그 사람이 이웃 사랑을 행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성경은 하나님 사랑의 참된 증거가 종교적 예식과 행위들에 있지 않고 이웃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웃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 4:20). 그렇기에 참된 하나님 사랑의 증거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예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고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므로, 결국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징표도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 즉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재발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웃이 누구인가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말이다. 보통 이웃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웃에 대한 이해는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님은 그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되묻는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의 질문에는 이웃의 정의가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웃사촌이란 말도 결국에는 자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서 발견되는 이웃은 자신을 중심으로 정의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웃은 강도 만난 자를 중심으로 정의된다.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 것이다. 그러니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이며 나는 그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나의 이웃은 나와 친분이 있는 자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이다. 강도 만난 자가 자신의 혈족이나 가까운 이웃이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에서 본 강도 만난 자는 모르는 자, 낯선 이, 즉 이웃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 직무 수행 쪽을 택하고 강도 만난 자를 외면했을 것이다.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이며, 우리는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최후 심판에 관한 양과 염소의 비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곧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비를 베푼 것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이 된 자는 양의 편에 속하게 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은 곧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영생에 관한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는 것은 바로 황금률의 실천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강도 만난 자라고 하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다.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므로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황금률의 실천이다. 그리고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이 되는 것이며, 달리 말해 강도만난 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현존을 발견하여 드러내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2)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실천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웃, 즉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과부와 고아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마땅히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한다는 윤리적 당위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열쇠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사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가난한 자가 돌보는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친구가 되어 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일견하는 은총을 제공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다. 하나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본질인즉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열쇠를 얻는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오직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은 탈진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돕는 일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교회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초대교회는 극심한 박해의 시기를 종말론적 희망과 구원의 효과적인 보증으로 강조되었던 형제적 사랑의 실천으로 이겨 냈다. 클레멘트를 포함한 초대 교부들은 구원이란 주제와 함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랑의 실천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부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가난 자체를 칭송하지는 않았지만, 재물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초기 수도원운동 또한 자발적 가난의 실천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초기수도원운동의 가난의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약의 두 말씀은 바로 예수께서 부자 청년을 부르신 말씀(마 19:21)과 형제애의 사랑으로 하나가 된 예루살렘 공동체에 관한 말씀(행 2:44; 4:32~35)이다. 사막의 수도자들에게는 세상의 부에 대한 전적 포기가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악마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다.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난한 사람들과 연결시킴으로써 성도들이 구제에 열심을 내도록 북돋았다. 제롬과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를 상속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상속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리스도와 부를 나누도록 권면했다. 노라의 폴리누스는 그의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볼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면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발견되며, 모든 궁핍한 사람들 안에서 만져지고, 환영받은 모든 나그네들 가운데서 환대받는다고 답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즉,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그리스도와의 연대로 간주해 왔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위한 교회의 자발적 가난의 실천은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에서 제공한 "세 종류의 사람들"의 묵상에 등장하는 세 번째 사람의 부류여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획득한 재물로부터 초연해진 마음을 얻기 원하지만 일평생 아무런 구체적 행동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획득된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초연한 마음을 얻기 원한다. 그리고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며 실제로 그렇게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재물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오라고 하면 이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즉, 이 사람은 재물을 자신이 관리한 채 적당한 양의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재물을 모두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면 거부한다. 세번째 종류의 사람은 획득한 재물에 대한 초연한 마음을 얻기를 원한다. 이 사람은 재물을 자신이 관리하여 사용하든지, 아니면 재물을 포기하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신 바를 따를 뿐이며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는 쪽을 선택할 뿐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자 하는 갈망만이 이 사람이 재물을 사용하거나 혹은 포기하거나 하는 유일한 동기이다.
3) 둘라키(하향)운동의 실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둘라키의 원리이다. 둘라키는 종의 의미를 지닌 둘로스(δοῢλος)라는 헬라어와 위계질서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하이어라키(hierarchy)의 결합어이다. 둘라키의 원리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는 말씀에 기초한 원리이다. 즉, 섬기는 자가 높아진다는 원리이다. 이 둘라키의 원리는 예수께서도 직접 실천하신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장 뛰어난 이름이 된 것은 둘라키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려 왔다고 말씀하셨다. 가장 낮아져 섬긴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둘라키라면 교회의 현존 양식은 상향운동이 아니라 하향운동이 되어야한다. 헨리 나우웬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많이들은 격려의 말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것과 함께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이러한 상향운동을 장려하는 말은 성경에서 일체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단호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한다. 하향운동은 예수께서 자신의 비워 성육신하신 자기 비움(kenosis)의 길이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다. 하향운동은 가난한 사람들, 고난당한 사람들, 주변부 인생들, 죄수들, 난민들, 외국인 노동자들, 고문당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노숙자들, 죽어 가는 사람들, 즉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하나 되는 운동이다.
4) 관조적 의사결정 실천
사회가 경제적으로 양극화되고, 정치적으로도 좌우의 대립으로 인한 양극화가 심화되면 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이 폭력적이 되기 쉽다. 교회는 사회에 비폭력적인 의사결정 과정의 모범을 보이고, 그 방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비폭력적 의사결정 과정의 핵심에는 관조적 의사결정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관조적 의사결정은 침묵의 중요성과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의 추구를 두 축으로 하는 의사결정이다. 또한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된다. 그러나 토론이 격해지면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다시 토론한다. 그러다 다시 토론이 격해지면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토론은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유익되는가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택이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가의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사회에서의 토론은 보다 더 큰 공동선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관조적 의사결정 과정이 사회의 주도적 문화로 자리 잡으면, 사회는 훨씬 비폭력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4. 자연과의 관계
1) 하나님의 영광의 발견
하나님의 영광의 성서적 의미는 고난당하는 백성들 한복판에 현현한 하나님의 임재와 행동이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온전한 극치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한다(고전 10:31). 여기서 영광은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할 목적으로 세상의 허물과 죄악을 공유하기 위해 인간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2세기 주교이며 신학자인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함축하여 "글로리아 데이 비벤스 호모"(Gloria Dei vivens homo)라는 경구를 제시한다. 이 경구는 하나님의 영광은 각 개인을 포함한 전 인류가 왜곡과 억눌림이 없이 온전히 충일한 생명으로 살아가는데서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개념의 확장이 필요하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온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따라서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왜곡과 억눌림 없이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온전한 생명의 충일함으로 살아가는 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말해야 한다. 개혁교회 종교개혁자인 칼뱅은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라고 주장했다. 우주 자연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 만물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며,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준다. 그러므로 자연의 훼손과 그에 따른 피조물들의 신음과 한숨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약화시키며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2) 생명의 연대성 실천
오늘날 기독교 영성이 심각하게 직면한 도전은 모더니즘에서 나온 과장되고 배타적인 인간 중심의 사고이다. 르네상스 이후로 인간은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지구를 대상화시켰다. 마치 인간은 자신이 지구의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을 초월한 존재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지구의 땅을 정복하고 약탈하고 통제하고 조종하고 변경시켰다. 이러한 자연의 파괴와 생명의 신음은 부메랑이 되어 인간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 또한 지구의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 혹은 단일성 안에 속한 한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좀 더 확장하면 태양을 형님, 달을 누이라고 부른 프란시스코의 비전처럼 인간은 우주의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 안에 속한한 가족이라는 의식의 전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범신론적 세계관이나 자연의 힘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는 낭만적인 세계관으로의 퇴행적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의 전환은 참된 성서적 관점의 회복을 의미한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동일성과 상호적 내적 연결성을 지닌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 준다. 그러나 창조 이야기는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성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이 지닌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성은 자연의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성찬적 현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인간은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지탱하시고, 변화시키시는 돌봄의 몫을 나누어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피조세계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피조세계의 한 일부이면서 동시에 피조세계를 위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세계의 청지기일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의 동반자(companion)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세상을, 즉 모든 피조세계를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이에 맞는 인간과 자연은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과 구원의 연대성을 지닌 동반자라는 인식을 강화하고 그 인식에 걸맞는 실천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목회메뉴얼 제3권 영성목회 (한국장로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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