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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성경에 근거한 21세기 정직회복운동 (1)3無와 제2의 종교개혁
한국교회허와실 연합공보............... 조회 수 3221 추천 수 0 2004.12.14 22:19:00| 출처 : | 연합공보 2004.11.10 http://www.iyeonhap.com/kr/ViewNews.asp?jsc=j01c05&DIdx=2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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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성경에 근거한 21세기 정직회복운동
“Sola Deo, Sola Scriptura”
삶을 유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희망이다. 그 희망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소박한 것이었다. 최소한의 생존의 몸부림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언젠가부터 정직이 손해라는 인식이 만연되고 있다. 우리 국민 스스로에게 “당신은 정직하게 살 것인가?”라고 질문하면 응답자의 73% 이상이 “정직하게 살면 손해”라고 말한다.
지금 현대 사회도 성공과 변화를 위해서는 ‘정직’이 필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직은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덕목으로, 거짓과 허식이 없이 마음이 바르고 곧은 것 또는 순수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직을 잃은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영국의 문학가 존 릴리(John Lyly)는 말했다.
정직은 불변하는 진리 차원으로, 창조주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본래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려는 존재들이다. 타락한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찾아야 될 것이 바로 정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삶 속에서 이 정직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리고 현재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과 사건, 현장 등을 11회에 걸쳐 찾아가본다. <편집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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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無와 제2의 종교개혁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살 길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순기능적인 측면보다는 역기능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어 세상의 인정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배척을 당하는 현실이 됐다. ‘늘 개혁되어야 한다’는 한국교회는 스스로 개혁할 힘을 잃어버려 이제는 사회와 국가로부터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 한국교회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축복을 받은 한국교회가 마침내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성경 속에 담겨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고 오히려 만담과 개그를 들을 수 있는 교회가 많아졌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상달되는 기도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고, 성경지식으로 머리만 커져 행함이 없는 죽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득실거리게 됐다. 또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교리와 교회법과 성지자의 권위주의라는 잣대로 형제들을 판가름하고, 돈과 정치적인 잣대로 이단, 삼단 운운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에 누구나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한국교회. 그러나 구체적으로 개혁해야 할 환부를 지적하거나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을 회복하고 예수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거짓된 인간인 목사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정직의 근본이신 예수께서 주인이 되는 교회여야만이 살아있는 교회로 회복될 수 있다. 이런 교회만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살아있는 교회만이 구원과 하나님 나라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 앞에 정직한 목회자와 교회여야만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디에서든 짠 맛을 느끼게 하는 바닷물은 3%의 소금 때문이라고 한다. 단 3%의 소금이 온 바닷물을 짜게 만드는 것처럼 단 3%의 크리스천이라도 정신차려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다면 우리는 정치와 사회 등이 썩어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직한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정직한 사람만이 성공하고 정직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사람앞에 축복받고 인정받는다”는 의식개혁이 필요한 때다.
이제 우리는 2000년전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았던 예수께로 돌아가는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불신을 정직한 신앙으로 전환하는 개혁의 출발이다.
예수의 삶이 없는 한국교회의 병폐 3가지
개혁의 대상으로 떠 오른 한국교회에 없는 것 3가지를 손꼽자면 말씀과 기도와 행함이다.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될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신 말씀과 예수께서 하늘에 올린 기도, 그리고 예수께서 생명을 던져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이라는 행함이 바탕을 이룬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살아계신 예수를 삶 속에서 드러내야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술로만 믿는다고 자청하고 있다. 예수가 사셨던 삶을 재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으로 포장된 자본주의와 축복지상주의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말씀과 기도, 행함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이미 죽은 교회나 다름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없다
현재 국내에 있는 목사들의 수는 대략 6만 여명이며, 여기에 한 해 배출되는 목사의 수는 3천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세계 어느 곳을 봐도 이렇게 축복받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이렇게 차고 넘치는 목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구 사회와 국가로부터 지탄과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다음과 같은 예화가 그 이유를 암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심 깊은 장로가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의 지극한 환대를 받고 기뻐 날뛰는 중이었다. 그 장로가 바라보니 목사 한 사람이 천국으로 오는데, 예수께서 목사를 끌어안고 반가워 어쩔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에 장로가 ‘세상에서도 늘 목사와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천국에서도 목사와 차별대우하시다니 정말 섭섭합니다’라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 사람아 내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렇다네. 목사는 2000년만에 처음일세’라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번쯤 들었던 얘기일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가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존경은 커녕 비난의 대상이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의 계속되는 파행과 침체의 원인이 바로 잘못된 설교에 있다’는 지적들이 많다. 이는 목사들이 본질에서 벗어난 목회를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입맛에 맞는 쉽고 대중적인 설교에만 집중하다보니, 설교가 만담이나 개그가 되버린 형국이다. 그러다보니 설교는 언술이나 제스처, 의상 등에 치우치게 됐다.
이런 설교마저도 물량주의적 축복관에 젖어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외면하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을 중심으로 한 신앙고백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교회가 사람의 만담과 거짓말로 가득한 세속화된 공동체로 전락해버렸다.
참된 신학과 말씀 선포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문제이다. 참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얼마나 유명한 학교에서 공부했느냐’가 좋은 목회자 또는 좋은 신학자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됐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우리 자신을 비추어 살펴야 하는 견고하고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사라지고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목사들의 말에 의해서 성도들의 심령골수가 썩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기도가 없다
기도하면 한국교회 성도만큼 열심인 나라가 없을 것이다. 특히 새벽기도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좋은데, 기도를 악세사리로 여긴다는 점이다. 예전에 부흥회나 기도원을 다녀오면 으레 걸걸한 쉰 목소리가 나야 은혜 받은 것으로 간주했고, 부흥사가 되기 위해 탁성(濁聲 : 쉬거나 흐린 목소리)을 연마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통성 때문에 쉬어버린 목소리가 은혜의 징표(?)로 여겨졌던 것이다.
더불어 기도를 내 뜻과 소원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다.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 일색이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라고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얘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의 기도를 가리켜 ‘향연’(香煙 : 향의 연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계8:3-5). 다른 천사가 금향로에 담긴 향연을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려보내는 모습을 부여준다.
이는 하나님 뜻에 맞지 않는 기도는 더럽고 썩은 냄새가 나는 쓰레기와도 같아 올라갈 수 없다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리 수많은 기도회를 열고 큰 소리로 부르짓는 개인기도를 했더라도 하늘에 상달되지 못한 기도였다면, 그 교회와 성도는 기도가 중단된 교회이며, 성도인 것이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인 동시에,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이 대화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올바르고 정직한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언 15장 8절에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말씀했고, 잠언 28장 9절에는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기도가 중단됐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중단됐다는 것이요, 숨을 쉬지 못한다는 얘기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에 입각한 기도를 올리지 못하므로, 뇌사상태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를 드러낸 섬김과 행함이 없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머리로만 읽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성경을 읽는다고 말할 수 없다.
야고보서 2장 2절에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그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믿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잃어버렸다. 성경을 읽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것은 잊어버린다. 아니 성경만 많이 읽으면 성도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믿고 있다. 행함은 없고 성경지식으로 머리만 커버린 가분수 크리스천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1200만이라는 크리스천이 한국땅에 있다고 하지만, 결국 무늬만 크리스천인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얘기다. 머리만 크다보니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교만으로 가득차게 되어, 결국 사회와 국가로부터는 질타받는 크리스천들이 됐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을 볼 때, 한국교회는 죽은 성도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수 많은 크리스천들이 있어도 사회의 변화와 빛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그 자체로 ‘준행’(遵行 :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좇아 행하는 것)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 또는 지혜도 아닌, 말씀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 말씀에 무관심하지 말고 말씀을 이용만 하지 말고 명령하신 말씀에 죽더라도 한번 지켜보려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오늘 못 지키면 다음에 지키지 뭐~”, “회개하면 되잖아” 등의 태도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것이요, 하나님을 우리의 원수로 만드는 행위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야 예수를 사랑하는 자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4:21, 출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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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로 돌아가는 개혁운동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義
M. 루터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출생한 루터는 사제 서품을 받고 비텐베르크에서 성경학을 가르치는 동안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자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3원리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만인제사장’이고, 그 중에서도 ‘오직 믿음’의 원리야말로 루터의 신앙을 표명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다.
이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이신득의’(以信得義), 곧 사람이 선행의 공적을 쌓아 구원받거나 의인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믿음과 칭의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얘기다.
당시 교회는 면죄부 판매가 유행하고 있었다. 독일 지방의 면죄부 판매책을 맡은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의 존 테첼은 자기들이 팔고 있는 면죄부는 “죄인들을 세례보다도 더 깨끗하게 만들며, 타락 이전의 아담보다 더 순결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면죄부를 판매하는 자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효력이 있다”고 선전했다. 뿐만 아니라 “헌금함 바닥에 동전이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에 연옥에 갇혀 있던 영혼은 화살처럼 솟아 오른다”고 선전했다.
이에 1517년 루터는 교회가 면죄부 판매를 통해 이익을 얻게 될 고위 성직자들과 강력한 지방 영주들을 성경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95개 신조문’을 작성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문에 게시했다. 이것이 부패한 기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불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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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권위를 가진 성경
U. 츠빙글리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인 츠빙글리는 성경을 기독교 신앙의 원천으로 삼는 스위스 인문주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인간의 내면적 존재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법률이나 말씀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츠빙글리는 성경을 우리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다.
성경을 우리 삶의 유일한 통제원칙으로 여겨, 모든 교리와 의식에 엄격히 적용시켰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개인의 행위와 국가의 윤리 및 교회의 실천을 통제하는 신적 율법으로 파악하고 개혁운동 범위에 국가와 정부를 포함시켰다.
츠빙글리는 이런한 개혁운동을 토론회에서 성경강해를 통해 시작했다. 그는 1923년 취리히시 당국이 마련한 공개토론회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인한 것임을 보여주는 ‘67제기’(提起 : 의견이나 문제를 내어놓음)를 발표하고 시 당국을 설득시켜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도록 인정받았다. 또 시 당국과 개혁자가 협동하여 공동사회의 도덕적 재생을 지향하는 개혁을 실시하게 됐다. 2차 토론회에서는 성화상(聖畵像)과 십자가 등의 폐지를 제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개토론으로 도시내 여론을 수렴하여 개혁을 시도하는 방법은 스위스와 독일 남서부 여러 도시의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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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행동
J. 칼빈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움직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우리들의 생각과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이 보장하는 경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그의 말은 이를 잘 표현해준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인이라면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 모든 사실과 전 삶에 있어서 주의 깊고 절제 있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루터가 개혁의 길을 용기있게 열었던 개척자라면, 제네바의 개혁가 칼빈은 16세기 개혁에 바탕을 둔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한 사상가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기독교 강요」(1536)는 ‘고대로부터 16세기 모든 신학논쟁들에 대해 성경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으로, 종교개혁시대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 조직신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기독교 강요」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죄를 깨닫고 죄에서 벗어나 구원받게 한다는 측면에서 율법과 복음은 연속성이 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3중직으로 오신 분이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칼빈은 이를 바탕으로 종교개혁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1559년 칼빈은 제네바에 신학교를 설립해, 이곳에서 배출된 수많은 설교가들을 통해 교회제도와 신학사상 등을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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