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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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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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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공보 2004.11.25
[연중기획] 성경에 근거한 21세기 정직회복운동 (2)
“Sola Deo, Sola Scriptura”
2004년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담임목사직의 부자세습, 사유화되는 교회와 불투명한 재정운용, 금권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교회 내 선거, 상품화되어 버린 예수, 일방적인 교회성장주의, 기독 사회유력인사들의 부정부패, 끊이지않는 교역자들의 성 스캔들, 교회 내 분쟁과 분열 등 이런 문제들로 인해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다.
한국교회는 교회에 향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을 감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몇몇 단체나 교회들이 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건강한 교회, 바른교회 세우기 운동을 벌이지만 부정직의 길로 떠내려가는 흐름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초대교회 정신이 숨쉬던 한국교회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은 사회적 귀감이 되고 정직과 양심의 대명사였다. 어둡고 암울했던 한국사회를 빛과 희망의 길로 인도한 오피니언 리더들도 기독 인사들이었다.
2004년 현재 한국교회는 전 국민의 20%가 넘은 신자를 두고 있지만, 100년 전만해도 1%도 못 미치는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각성운동이 한국교회에 뚜렷한 성장을 가져다 줬다. 1907년에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70-80년대 일어난 교세성장의 부흥운동과는 달리 한국교회와 사회 전반적인 성장을 유도했다.
한국교회의 1907년 대각성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초대교회의 나눔과 봉사, 희생정신을 갖게 만들었고, 당시 문맹과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사회적 소외자들에게 관심을 돌리게 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수많은 미션학교들이 세워졌고, 활발해진 의료선교 사역은 더 많은 병원을 설립하게 했다.
신앙적 정직이 사라진 한국교회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 상황은 사회로부터 존경은커녕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가 신앙적인 정직을 버리고 외형적인 성장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부흥은 성령의 역사와 인도에 대한 순종, 지도자들의 희생적 사역, 성도들의 봉사사역의 결과였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의식을 망각한 채 계속 경쟁적으로 개교회의 존립과 비대만을 추구하는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되어있다.
수적인 성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절대시한 나머지 교회가 가져야 할 신앙적 가치, 즉 신앙적 정직과 양심 등은 무시되거나 멸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로지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과 기술, 테크닉을 우선시 하다보니 성도들에게 신앙적 삶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목회자 스스로도 영적 지도자로서의 삶보다는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마인드를 갖게 만들었다.
또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한국교회는 소외자들의 입장보다는 가진 자와 기득권의 입장에 서기 시작했고,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얻기 위해 금품으로 매매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부 교회와 목회자는 맘몬주의에 빠져 신앙적 정직과 양심보다는 돈을 추구해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한국교회를 영적 부패로 몰아가는 덫
영적 부패와 타락은 도덕적인 타락을 가져오고 도덕적인 타락은 생활 속에서 부정직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한국교회의 비양심적이고 부정직한 행동들은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한국 사람의 약 25%가 기독교인이고 세계 10대 교회 중 5개가 한국교회라고 한다. 세계교회 역사상 한국교회만큼 급성장하고 인구를 대비해 교회가 많은 나라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부정과 부패, 뇌물로 얼룩져 있는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마저 불의에 타협하고 신앙적 정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주어진 풍요가 불행의 올무와 덫이 되어버렸고 교회의 본질회복이 시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2004년 한국교회의 모습은 오직 말씀·오직 은혜·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가톨릭교회가 걸었던 부패와 타락의 전철을 답습하는 듯하다. 그럼 성장 정체와 사회적 도덕성을 상실하게 만든 한국교회의 덫은 무엇일까?
첫번째 덫, 물질주의와 세속화
지난 30년간 한국교회는 급격한 외형적 성장과 대형화로 인해 세속화와 물질주의가 만연해졌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물질에 대한 관심이 더 앞서고, 하늘의 뜻보다는 땅에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장로가 장로라는 직함을 갖고 교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가 하면, 목사의 아내가 사모라는 직함을 갖고 다단계 판매를 하는 등 교회 안에서 조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고자 한다.
세속화에 너무 빠진 일부 목회자들은 돈의 노예가 되어 금전적 유혹에 신앙적 양심을 파는가 하면, 노름빚을 안 갚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기도하고, 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드는 부정직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행한다.
또한 목회를 기업의 경영으로 생각해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성도를 모으려 했고 외형적으로 좀더 큰 교회를 짓고자 한다. 외형적인 성장과 규모가 목회성공의 잣대가 되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는 곧 재력으로 나타나게 돼, 이렇게 모여진 돈은 교회 지도층의 물욕, 성공욕, 명예욕, 권력욕을 충족시키는데 쓰여 왔다. 이러한 모습 어디에서도 신앙적 정직은 찾아 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물질에 대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이처럼 한국교회는 돈을 숭배하는 ‘탐심’과 ‘세속화’라는 배금주의 우상, 즉 맘몬주의에 빠져 있다.
한국교회에 급속히 퍼져있는 맘몬주의는 교회의 영적 능력을 상실시켰고, 그로 인한 교회의 질적 저하와 사회적 공신력 상실은 지금 한국교회의 양적 쇠퇴와 정체를 초래하고 있다. 즉, 물질주의의 확산이 사회의 도덕성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교회 내의 맘몬주의는 지난 30년간의 양적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역동성과 본질적 영성을 훼손하고 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6-10)
두번째 덫, 성장제일주의
맘몬주의와 함께 가장 큰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성장제일주의라는 덫이다.
지난 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주의에 편승하여 한국교회도 성장주의의 경주에 진입했다. 성장주의에 의한 기독교인의 증가는 곧 대형교회의 형성을 의미하고, 신앙적 내실보다는 교세 확장(양적 성장)과 외적 겉치레에 치중하게 되면서 주님의 지체인 교회가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현재 한국교회 목회자 상당수는 교인들을 신앙적으로 정직하게 양육하고 말씀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교회 건물을 크게 짓고 교인 수를 늘리는 등 크기 경쟁에만 골몰해 있다. 교회의 성장이나 부흥의 모습을 마치 교회의 건물로 나타내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기까지 할 만큼 겉치장에 치중한 나머지 참 신앙이 결여되었다.
한편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재벌기업의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성장제일주의는 교회를 자본주의식 무한 경쟁 속으로 내몰았으며, 일부 대형교회의 문어발식 몸 불리기인 지교회 확장은 미자립 지역교회들에게 적잖은 타격을 안겨줬다.
이처럼 대형화만을 추구해온 한국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인화는 했지만 신앙인으로서 복음화하지는 못했다. 외적인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내적인 성숙에는 등한시 해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는 외형적인 건물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양육되고 신앙적으로 정직하도록 훈련된 거룩한 성도들이다. 외형적으로 한국 전역에 5만여 교회가 있고 세계 10대 대형교회 중 5곳이 한국에 있지만, 정작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교회가 몇이나 되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또한 외형적 성장과 물량주의로 인해 신앙적으로 내실 있는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고전3:16-17)
세번째 덫, 기복주의신앙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흔히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라고 말한다. 마치 예수를 믿으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샤머니즘적 종교로 인식하게 만든다. 과연 그럴까? 성경적 가르침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아담 타락으로 단절됐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되어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게 한다. 그리고 현세의 물질적 축복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갈구하게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 된다는 현세 중심의 기복신앙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 상당수의 교인들을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사회적 성공 등 개인과 가정의 복락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게 만들었다. 또한 하나님께 헌금을 하는 이유도 물질적 보상(복)을 받고자 하는 하나의 투자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기복주의 신앙은 한국교회를 물질만능주의로 몰아간 또 하나의 덫이다.
물질축복을 강조하는 기복신앙은 예수를 믿음으로 따라오는 영적 싸움과 시험과 환난이 닥쳐왔을 때 쉽게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현세의 축복이 아닌 내세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는 내세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인 성장을 위해 현세의 축복을 강조한 결과, 물질과 성장제일주의를 지향하는 한국교회로 만드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한편 기복신앙과 함께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 신비주의다. 물론 기독교 역사 안에서 신비주의나 은사주의를 배척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너무 강하며, 신비주의의 일부 현상인 방언과 치유은사, 안수기도 등만을 강조한다.
부흥집회를 보면 말씀에 대한 선포보다는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몰입하며, 일부 기도원들은 은사주의나 체험주의 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부 신비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 때문에 교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면서 가정이 파괴되고 그로 인해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다.
샤머니즘적이고 과도한 신비주의와 은사주의 신앙은 한국교회의 균형적인 신앙성장을 저해하고 있다. 팽배하고 있는 기복 신앙과 체험위주의 신앙, 신비주의 신앙은 한국교회를 샤머니즘적 기독교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단시간 내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말씀으로 양육하기보다는 신비주의를 동원해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한다.
목회는 양육하는 것이지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목회자들은 심령부흥회나 은사집회 등 외형적인 성장효과라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철저한 성경공부로 성도들을 무장시킬 때다. 바른 말씀과 기도, 봉사생활을 가르침으로서 성도들을 믿음의 반석 위에 서게 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넷번째 덫, 종교다원주의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병들게 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가 종교다원주의다. 종교다원주의는 그 어떤 이단사상보다도 더 위험한 사상이다.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버리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적 평등을 내세운다.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는 모든 문화와 종교에 가능하다는 소위 우주적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곧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종교라는 사상을 버리고 모든 종교는 동일하게 동일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과 사상은 불신자나 타종교 입장에서 볼 때 교회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버리고 종교간 화합을 추구한다며 긍정적으로 반응할지 모르지만,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구원종교가 아닌 수많은 윤리종교 중 하나로 격하시킨다.
지금 한국교회에 종교다원주의 사상은 목회자들에게까지 아주 깊게 침투해 있다. 기독교의 구원의 절대성을 포기한 교회들이 많이 있다. 교회를 하나의 정신적인 위안과 교제하는 장소로 전락시키고 있다. 얼마 전 기독교학교의 교목실장으로 있던 목사가 학교에 예배의 선택권 즉, 종교의 자유가 없다며 목사직을 반납한 경우도 있다.
구원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상실한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데 굳이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적 관점에 교회 내 종교다원주의는 성도들의 신앙을 교란시키는 다른 복음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과거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멀리하고 바알과 아세라 등 가나안 이방신을 섬겼던 것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은 종교적 혼합주의를 경고하셨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그러나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갈1:7-8)
다섯번째 덫, 권력(명예)지향주의
목회자들의 명예지향과 권위주의는 교회타락의 원인이 되고 있다.
목회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과 능력은 영성과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학력과 박사학위로 목회자의 능력을 판단한다. 세속적 판단 기준은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 가짜 박사를 양산해 냈고, 국내 가짜 박사학위자 중 목회학 박사가 가장 많게 만들었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대형화되고 성장하면서 목회자들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권력은 교회 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목회자의 결정을 절대화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해 이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기도 한다.
한편 한국교회는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직책을 권력과 명예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이 권력의 욕심에 눈이 멀면 우정이나 의리는 사라지고 오직 권력 획득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만 하게 된다. 매년 각 교단 총회나 교회연합기구 대표를 뽑을 때만 되면 교권을 잡기 위해 온갖 유언비어와 비방, 금품 살포 등이 난무해 선거가 혼탁해진다. 마치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주교나 교황자리를 놓고 다투는 암투와 성직매매를 연상케 하고 있다.
또한 교인들도 안수집사나 권사, 장로 등 교회 내 직분을 감투나 권력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런 오해는 안수집사나 장로 피택선거를 놓고 온 가족이 선거운동에 올인(All in)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섬김의 직분을 받은 장로가 섬기기는 커녕 지시하고 시키기에 바쁘다.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는 인사받기를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좋아하고 또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니 그들은 더 큰 저주를 받으리라”(눅20:46-47)
여섯번째 덫, 교회 내 차별주의
기독교 복음의 핵심 중 하나가 평등이다. 평등을 지향하는 한국교회 내에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수많은 차별들을 행하고 있다.
목회자나 장로·권사들의 일반 평신도에 대한 차별,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차별, 청소년과 어린이들에 대한 차별, 신체장애인에 대한 차별, 돈 있는 교인들의 돈 없는 교인들에 대한 차별, 신분 높은 사람이 신분 낮은 사람들에 대한 차별, 고학력 출신들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 소위 신앙이 좋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의 초신자와 교회생활을 열심히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 등 수많은 차별행위에 노출되어 있다.
더욱이 교회 제직들을 선출할 때의 지역적 차별은 그 정도가 심각하다. 담임 목사나 교인구성원이 영남권이나 이북출신이 많은 교회에서는 호남권 출신의 교인은 장로 선출에서 공공연히 배제하고 있다. 반대로 호남권 중심의 교회에서는 영남권 출신 교인이 장로가 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한국교회 현실이다.
한편 한국교회의 지역차별과 지역주의는 교회의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다. 각 교파의 교권싸움은 지역파벌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행해야 할 교회가 스스로 사람을 지역이나 신분, 성별, 학력, 인종, 빈부로 차별하고 있다. 교회 내에서 차별이 행해진다는 것은 교회가 신앙적 정직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평등한 교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부정직한 교회구조를 정직하게 만드는 작업의 시작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8-29)
2004년 한국교회는 물질주의(맘몬주의), 물량·성장주의, 기복신앙, 권력지향, 각종 차별, 종교다원주의라는 부정직의 덫을 빨리 끊고 정직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21세기에 사는 한국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2004-11-25] http://www.iyeonhap.com/kr/ViewNews.asp?jsc=j01c05&DIdx=2505
[연중기획] 성경에 근거한 21세기 정직회복운동 (2)
“Sola Deo, Sola Scriptura”
2004년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담임목사직의 부자세습, 사유화되는 교회와 불투명한 재정운용, 금권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교회 내 선거, 상품화되어 버린 예수, 일방적인 교회성장주의, 기독 사회유력인사들의 부정부패, 끊이지않는 교역자들의 성 스캔들, 교회 내 분쟁과 분열 등 이런 문제들로 인해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다.
한국교회는 교회에 향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을 감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몇몇 단체나 교회들이 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건강한 교회, 바른교회 세우기 운동을 벌이지만 부정직의 길로 떠내려가는 흐름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초대교회 정신이 숨쉬던 한국교회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은 사회적 귀감이 되고 정직과 양심의 대명사였다. 어둡고 암울했던 한국사회를 빛과 희망의 길로 인도한 오피니언 리더들도 기독 인사들이었다.
2004년 현재 한국교회는 전 국민의 20%가 넘은 신자를 두고 있지만, 100년 전만해도 1%도 못 미치는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각성운동이 한국교회에 뚜렷한 성장을 가져다 줬다. 1907년에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70-80년대 일어난 교세성장의 부흥운동과는 달리 한국교회와 사회 전반적인 성장을 유도했다.
한국교회의 1907년 대각성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초대교회의 나눔과 봉사, 희생정신을 갖게 만들었고, 당시 문맹과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사회적 소외자들에게 관심을 돌리게 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수많은 미션학교들이 세워졌고, 활발해진 의료선교 사역은 더 많은 병원을 설립하게 했다.
신앙적 정직이 사라진 한국교회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 상황은 사회로부터 존경은커녕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가 신앙적인 정직을 버리고 외형적인 성장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부흥은 성령의 역사와 인도에 대한 순종, 지도자들의 희생적 사역, 성도들의 봉사사역의 결과였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의식을 망각한 채 계속 경쟁적으로 개교회의 존립과 비대만을 추구하는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되어있다.
수적인 성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절대시한 나머지 교회가 가져야 할 신앙적 가치, 즉 신앙적 정직과 양심 등은 무시되거나 멸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로지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과 기술, 테크닉을 우선시 하다보니 성도들에게 신앙적 삶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목회자 스스로도 영적 지도자로서의 삶보다는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마인드를 갖게 만들었다.
또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한국교회는 소외자들의 입장보다는 가진 자와 기득권의 입장에 서기 시작했고,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얻기 위해 금품으로 매매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부 교회와 목회자는 맘몬주의에 빠져 신앙적 정직과 양심보다는 돈을 추구해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한국교회를 영적 부패로 몰아가는 덫
영적 부패와 타락은 도덕적인 타락을 가져오고 도덕적인 타락은 생활 속에서 부정직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한국교회의 비양심적이고 부정직한 행동들은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한국 사람의 약 25%가 기독교인이고 세계 10대 교회 중 5개가 한국교회라고 한다. 세계교회 역사상 한국교회만큼 급성장하고 인구를 대비해 교회가 많은 나라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부정과 부패, 뇌물로 얼룩져 있는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마저 불의에 타협하고 신앙적 정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주어진 풍요가 불행의 올무와 덫이 되어버렸고 교회의 본질회복이 시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2004년 한국교회의 모습은 오직 말씀·오직 은혜·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가톨릭교회가 걸었던 부패와 타락의 전철을 답습하는 듯하다. 그럼 성장 정체와 사회적 도덕성을 상실하게 만든 한국교회의 덫은 무엇일까?
첫번째 덫, 물질주의와 세속화
지난 30년간 한국교회는 급격한 외형적 성장과 대형화로 인해 세속화와 물질주의가 만연해졌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물질에 대한 관심이 더 앞서고, 하늘의 뜻보다는 땅에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장로가 장로라는 직함을 갖고 교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가 하면, 목사의 아내가 사모라는 직함을 갖고 다단계 판매를 하는 등 교회 안에서 조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고자 한다.
세속화에 너무 빠진 일부 목회자들은 돈의 노예가 되어 금전적 유혹에 신앙적 양심을 파는가 하면, 노름빚을 안 갚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기도하고, 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드는 부정직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행한다.
또한 목회를 기업의 경영으로 생각해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성도를 모으려 했고 외형적으로 좀더 큰 교회를 짓고자 한다. 외형적인 성장과 규모가 목회성공의 잣대가 되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는 곧 재력으로 나타나게 돼, 이렇게 모여진 돈은 교회 지도층의 물욕, 성공욕, 명예욕, 권력욕을 충족시키는데 쓰여 왔다. 이러한 모습 어디에서도 신앙적 정직은 찾아 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물질에 대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이처럼 한국교회는 돈을 숭배하는 ‘탐심’과 ‘세속화’라는 배금주의 우상, 즉 맘몬주의에 빠져 있다.
한국교회에 급속히 퍼져있는 맘몬주의는 교회의 영적 능력을 상실시켰고, 그로 인한 교회의 질적 저하와 사회적 공신력 상실은 지금 한국교회의 양적 쇠퇴와 정체를 초래하고 있다. 즉, 물질주의의 확산이 사회의 도덕성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교회 내의 맘몬주의는 지난 30년간의 양적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역동성과 본질적 영성을 훼손하고 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6-10)
두번째 덫, 성장제일주의
맘몬주의와 함께 가장 큰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성장제일주의라는 덫이다.
지난 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주의에 편승하여 한국교회도 성장주의의 경주에 진입했다. 성장주의에 의한 기독교인의 증가는 곧 대형교회의 형성을 의미하고, 신앙적 내실보다는 교세 확장(양적 성장)과 외적 겉치레에 치중하게 되면서 주님의 지체인 교회가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현재 한국교회 목회자 상당수는 교인들을 신앙적으로 정직하게 양육하고 말씀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교회 건물을 크게 짓고 교인 수를 늘리는 등 크기 경쟁에만 골몰해 있다. 교회의 성장이나 부흥의 모습을 마치 교회의 건물로 나타내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기까지 할 만큼 겉치장에 치중한 나머지 참 신앙이 결여되었다.
한편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재벌기업의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성장제일주의는 교회를 자본주의식 무한 경쟁 속으로 내몰았으며, 일부 대형교회의 문어발식 몸 불리기인 지교회 확장은 미자립 지역교회들에게 적잖은 타격을 안겨줬다.
이처럼 대형화만을 추구해온 한국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인화는 했지만 신앙인으로서 복음화하지는 못했다. 외적인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내적인 성숙에는 등한시 해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는 외형적인 건물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양육되고 신앙적으로 정직하도록 훈련된 거룩한 성도들이다. 외형적으로 한국 전역에 5만여 교회가 있고 세계 10대 대형교회 중 5곳이 한국에 있지만, 정작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교회가 몇이나 되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또한 외형적 성장과 물량주의로 인해 신앙적으로 내실 있는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고전3:16-17)
세번째 덫, 기복주의신앙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흔히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라고 말한다. 마치 예수를 믿으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샤머니즘적 종교로 인식하게 만든다. 과연 그럴까? 성경적 가르침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아담 타락으로 단절됐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되어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게 한다. 그리고 현세의 물질적 축복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갈구하게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 된다는 현세 중심의 기복신앙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 상당수의 교인들을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사회적 성공 등 개인과 가정의 복락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게 만들었다. 또한 하나님께 헌금을 하는 이유도 물질적 보상(복)을 받고자 하는 하나의 투자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기복주의 신앙은 한국교회를 물질만능주의로 몰아간 또 하나의 덫이다.
물질축복을 강조하는 기복신앙은 예수를 믿음으로 따라오는 영적 싸움과 시험과 환난이 닥쳐왔을 때 쉽게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현세의 축복이 아닌 내세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는 내세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인 성장을 위해 현세의 축복을 강조한 결과, 물질과 성장제일주의를 지향하는 한국교회로 만드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한편 기복신앙과 함께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 신비주의다. 물론 기독교 역사 안에서 신비주의나 은사주의를 배척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너무 강하며, 신비주의의 일부 현상인 방언과 치유은사, 안수기도 등만을 강조한다.
부흥집회를 보면 말씀에 대한 선포보다는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몰입하며, 일부 기도원들은 은사주의나 체험주의 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부 신비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 때문에 교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면서 가정이 파괴되고 그로 인해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다.
샤머니즘적이고 과도한 신비주의와 은사주의 신앙은 한국교회의 균형적인 신앙성장을 저해하고 있다. 팽배하고 있는 기복 신앙과 체험위주의 신앙, 신비주의 신앙은 한국교회를 샤머니즘적 기독교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단시간 내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말씀으로 양육하기보다는 신비주의를 동원해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한다.
목회는 양육하는 것이지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목회자들은 심령부흥회나 은사집회 등 외형적인 성장효과라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철저한 성경공부로 성도들을 무장시킬 때다. 바른 말씀과 기도, 봉사생활을 가르침으로서 성도들을 믿음의 반석 위에 서게 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넷번째 덫, 종교다원주의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병들게 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가 종교다원주의다. 종교다원주의는 그 어떤 이단사상보다도 더 위험한 사상이다.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버리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적 평등을 내세운다.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는 모든 문화와 종교에 가능하다는 소위 우주적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곧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종교라는 사상을 버리고 모든 종교는 동일하게 동일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과 사상은 불신자나 타종교 입장에서 볼 때 교회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버리고 종교간 화합을 추구한다며 긍정적으로 반응할지 모르지만,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구원종교가 아닌 수많은 윤리종교 중 하나로 격하시킨다.
지금 한국교회에 종교다원주의 사상은 목회자들에게까지 아주 깊게 침투해 있다. 기독교의 구원의 절대성을 포기한 교회들이 많이 있다. 교회를 하나의 정신적인 위안과 교제하는 장소로 전락시키고 있다. 얼마 전 기독교학교의 교목실장으로 있던 목사가 학교에 예배의 선택권 즉, 종교의 자유가 없다며 목사직을 반납한 경우도 있다.
구원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상실한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데 굳이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적 관점에 교회 내 종교다원주의는 성도들의 신앙을 교란시키는 다른 복음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과거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멀리하고 바알과 아세라 등 가나안 이방신을 섬겼던 것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은 종교적 혼합주의를 경고하셨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그러나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갈1:7-8)
다섯번째 덫, 권력(명예)지향주의
목회자들의 명예지향과 권위주의는 교회타락의 원인이 되고 있다.
목회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과 능력은 영성과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학력과 박사학위로 목회자의 능력을 판단한다. 세속적 판단 기준은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 가짜 박사를 양산해 냈고, 국내 가짜 박사학위자 중 목회학 박사가 가장 많게 만들었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대형화되고 성장하면서 목회자들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권력은 교회 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목회자의 결정을 절대화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해 이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기도 한다.
한편 한국교회는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직책을 권력과 명예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이 권력의 욕심에 눈이 멀면 우정이나 의리는 사라지고 오직 권력 획득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만 하게 된다. 매년 각 교단 총회나 교회연합기구 대표를 뽑을 때만 되면 교권을 잡기 위해 온갖 유언비어와 비방, 금품 살포 등이 난무해 선거가 혼탁해진다. 마치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주교나 교황자리를 놓고 다투는 암투와 성직매매를 연상케 하고 있다.
또한 교인들도 안수집사나 권사, 장로 등 교회 내 직분을 감투나 권력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런 오해는 안수집사나 장로 피택선거를 놓고 온 가족이 선거운동에 올인(All in)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섬김의 직분을 받은 장로가 섬기기는 커녕 지시하고 시키기에 바쁘다.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는 인사받기를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좋아하고 또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니 그들은 더 큰 저주를 받으리라”(눅20:46-47)
여섯번째 덫, 교회 내 차별주의
기독교 복음의 핵심 중 하나가 평등이다. 평등을 지향하는 한국교회 내에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수많은 차별들을 행하고 있다.
목회자나 장로·권사들의 일반 평신도에 대한 차별,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차별, 청소년과 어린이들에 대한 차별, 신체장애인에 대한 차별, 돈 있는 교인들의 돈 없는 교인들에 대한 차별, 신분 높은 사람이 신분 낮은 사람들에 대한 차별, 고학력 출신들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 소위 신앙이 좋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의 초신자와 교회생활을 열심히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 등 수많은 차별행위에 노출되어 있다.
더욱이 교회 제직들을 선출할 때의 지역적 차별은 그 정도가 심각하다. 담임 목사나 교인구성원이 영남권이나 이북출신이 많은 교회에서는 호남권 출신의 교인은 장로 선출에서 공공연히 배제하고 있다. 반대로 호남권 중심의 교회에서는 영남권 출신 교인이 장로가 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한국교회 현실이다.
한편 한국교회의 지역차별과 지역주의는 교회의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다. 각 교파의 교권싸움은 지역파벌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행해야 할 교회가 스스로 사람을 지역이나 신분, 성별, 학력, 인종, 빈부로 차별하고 있다. 교회 내에서 차별이 행해진다는 것은 교회가 신앙적 정직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평등한 교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부정직한 교회구조를 정직하게 만드는 작업의 시작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8-29)
2004년 한국교회는 물질주의(맘몬주의), 물량·성장주의, 기복신앙, 권력지향, 각종 차별, 종교다원주의라는 부정직의 덫을 빨리 끊고 정직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21세기에 사는 한국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2004-11-25] http://www.iyeonhap.com/kr/ViewNews.asp?jsc=j01c05&DIdx=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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