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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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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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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종교개혁이 본격 시도된 지 5백여 년 가까운 487년이니 잊을만도 하지만 기독교는 그러지를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종교의 본질이 늘 개혁지향이어야 하기에도 그렇지만, 16세기 개혁은 그 시대의 한계상황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 봉건의 늪에 깊이 빠진 서양의 현실이 그러했고, 아시아 또한 깊은 중세의 잠에 취해 있었기에 개혁이 쉽지 않았다. 루터의 결단이 워낙 단호해서 “만인제사론”을 들고 나오게 되자 당시 농노 계층을 대변하려 했던 토마스 뮨쩌 등의 급진파들이 봉건영주들과 극한으로 치닫는 전쟁으로 발전, 루터는 한 발 물러서는 수 밖에 없었다.
루터를 이어서, 우리가 매우 주목해야할 인물이 등장했는데 그가 곧 재세례파 중흥을 다짐하고 일어선 멘노 시몬스이다. 그는 1496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28세 되던 해 신부가 되었고, 1535년 뮨스터 재세례파 신자들 4백여 명이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수도원에 피하여 있다가 집단 학살을 당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에게, 더구나 같이 개혁을 부르짖는 프로테스탄트가 또 하나의 프로테스탄트 집단을 저렇게 잔혹하게 대하는가. 시몬스는 그때의 정경을 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산 사람들을 그대로 깊은 우물 속으로 집어 던졌고, 그의 형님도 그때 희생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은 멘노 시몬스의 재세례파가 기독교 역사에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점이 의문스럽다. 시몬스는 재세례파의 `평민의 자유' 운동에 뛰어들어 20년동안 내내 현상 붙은 사나이가 되어 운신의 폭이 좁은데도 잡혀 죽지 않고, 재세례파들을 재결집시켜 중흥조의 대접을 받았다.
멘노 시몬스 운동은 450여 년 전 아득한 저 옛날의 운동이었으나 그들의 운동이 정당하였기에, 루터 등의 뒤를 이은 당당한 종교개혁자로 역사가 다시 기록해 줄 날이 있으리라.
필자는 지금 멘노 시몬스의 개혁운동이 우파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기독교 역사가들의 편견 때문에 역사 속에 묻혀가고 있다는 주장을 한다.
멘노 시몬스 뿐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의 주요 대목들이 문제가 있다. AD 325년 콘스탄틴 황제가 주도한 니케아 회의, 그리고 그 시대, 또 하나는 AD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단성론자들의 음모에 희생된 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정죄 추방이 그러하다.
다시 우리는 이슬람의 등장기 역사 기록이나 십자군 전쟁기에 대한 은폐나 편견 등 주요 대목들에 대한 부당한 학문적 독단에 우려를 말하고 싶다.
사실, 필자는 역사 애호가 또는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 정사 기록자들의 편견과 왜곡 부분들을 바로 잡고자 하는 학문의 과정에 있다.
그래서 재야학도라 할 수도 있으나 `우파'나 `정통파'의 명예는 기성 세계가 독차지 하고 있으니 부득이 `좌파'라고 불러준다하여도 괘념치 않겠다. 가까운 시일 안에 기독교 역사에 대한 변명을 할 것이며, 멈출 수 없는 종교개혁사를 써갈 것이며, 나 자신이 개혁의 역사가 되고 싶다. 2004/11/3(수)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23
종교개혁이 본격 시도된 지 5백여 년 가까운 487년이니 잊을만도 하지만 기독교는 그러지를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종교의 본질이 늘 개혁지향이어야 하기에도 그렇지만, 16세기 개혁은 그 시대의 한계상황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 봉건의 늪에 깊이 빠진 서양의 현실이 그러했고, 아시아 또한 깊은 중세의 잠에 취해 있었기에 개혁이 쉽지 않았다. 루터의 결단이 워낙 단호해서 “만인제사론”을 들고 나오게 되자 당시 농노 계층을 대변하려 했던 토마스 뮨쩌 등의 급진파들이 봉건영주들과 극한으로 치닫는 전쟁으로 발전, 루터는 한 발 물러서는 수 밖에 없었다.
루터를 이어서, 우리가 매우 주목해야할 인물이 등장했는데 그가 곧 재세례파 중흥을 다짐하고 일어선 멘노 시몬스이다. 그는 1496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28세 되던 해 신부가 되었고, 1535년 뮨스터 재세례파 신자들 4백여 명이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수도원에 피하여 있다가 집단 학살을 당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에게, 더구나 같이 개혁을 부르짖는 프로테스탄트가 또 하나의 프로테스탄트 집단을 저렇게 잔혹하게 대하는가. 시몬스는 그때의 정경을 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산 사람들을 그대로 깊은 우물 속으로 집어 던졌고, 그의 형님도 그때 희생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은 멘노 시몬스의 재세례파가 기독교 역사에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점이 의문스럽다. 시몬스는 재세례파의 `평민의 자유' 운동에 뛰어들어 20년동안 내내 현상 붙은 사나이가 되어 운신의 폭이 좁은데도 잡혀 죽지 않고, 재세례파들을 재결집시켜 중흥조의 대접을 받았다.
멘노 시몬스 운동은 450여 년 전 아득한 저 옛날의 운동이었으나 그들의 운동이 정당하였기에, 루터 등의 뒤를 이은 당당한 종교개혁자로 역사가 다시 기록해 줄 날이 있으리라.
필자는 지금 멘노 시몬스의 개혁운동이 우파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기독교 역사가들의 편견 때문에 역사 속에 묻혀가고 있다는 주장을 한다.
멘노 시몬스 뿐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의 주요 대목들이 문제가 있다. AD 325년 콘스탄틴 황제가 주도한 니케아 회의, 그리고 그 시대, 또 하나는 AD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단성론자들의 음모에 희생된 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정죄 추방이 그러하다.
다시 우리는 이슬람의 등장기 역사 기록이나 십자군 전쟁기에 대한 은폐나 편견 등 주요 대목들에 대한 부당한 학문적 독단에 우려를 말하고 싶다.
사실, 필자는 역사 애호가 또는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 정사 기록자들의 편견과 왜곡 부분들을 바로 잡고자 하는 학문의 과정에 있다.
그래서 재야학도라 할 수도 있으나 `우파'나 `정통파'의 명예는 기성 세계가 독차지 하고 있으니 부득이 `좌파'라고 불러준다하여도 괘념치 않겠다. 가까운 시일 안에 기독교 역사에 대한 변명을 할 것이며, 멈출 수 없는 종교개혁사를 써갈 것이며, 나 자신이 개혁의 역사가 되고 싶다. 2004/11/3(수)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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