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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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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월)
나도 너를 믿는다
주여, 주여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날들을 매달렸던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이기에 믿고 따르자는 단순한 마음에 머물지 않고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하였을 때 여우도 굴, 공중 새도 둥지 있다 하신 그 말씀의 무게를 내가 잘 알고 있나이다.
죽은 아버지 장례만 치루면 곧 따를 수 있건만 예수여 그 말씀으로 나를 또 울게 하셨죠. 죽은 자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 하심은 인연과 함께 혈연도 끊어야 복음의 길 됨을 가르치심으로 아나이다. 인연보다 혈연이 더 질겨 아직도 떠나지 못하는 자를 용서하소서.
사랑하는 이와 작별인사 나누는 시간도 쟁기 잡은 자의 갈 길에서는 불가능함을 저희는 알고 있나이다. 이렇듯 마치 칼날 위에 선 일상 생활처럼 진리수업을 해야 함을 우리가 진즉 깨달았어야 하거늘 우리는 거기에 다다르지 못했나이다.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마음이 무겁고 주의 이름으로 사는 발걸음이 두려움 뿐이니 어찌하는가. 내가 주를 믿나이다, 하면서 무엇인가 한마디 더 듣고 싶어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데 주여 내가 듣고야 말겠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죠.
‘나도 너를 믿는다!’ 하여 내 가슴 붉게 타오르게 하소서. 나도 너를 믿는다, 하는 그 말씀이 그립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가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나도 너를 믿는다’는 한 말씀이 내게는 목마름입니다.
사람들아, 들어보았는가. 주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는 있지만 그때마다 주가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믿는다’는 음성을 주시던가.
믿음은 쌍방일치가 맞다. 우리가 예수 앞에서 수없이 주여, 주여를 외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주께서 내 이름을 부르셔야 한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오냐, 나다'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열심히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면 그것은 외사랑이요 짝사랑 뿐이지 않겠는가.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 위하여 우리는 부르고 예수께서는 대답하셔야 한다.
그의 음성을 우리는 안다. 말씀으로 답변하지 않는다 하여도 안다. 본디 천불언(天不言)이라 하였으니 말 아닌 것으로 답변 하셔도 믿음이 온전한 자는 안다. 그 음성을 알아듣는다. 때로는 천둥번개로, 또 파도치는 그 소리, 사자가 우는 듯, 여린 음성 마치 풀벌레 우는 소리, 그것도 아니면 마른 하늘의 햇빛과 같은 그저 그런 소리 아닌 소리로 들려주는 음성을 아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해와 결별한다. 시간과의 결별이다. 사실은 만남도 결별도 없음이어야 하지만 우리들은 이 말이 너무 철학적이어서 잘 모른다. 알아도 모른 척 하게 된다.
예수의 감각은 언제나 탁월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하신 말씀과 만날 때는 예수가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신 분, 그러기에 그는 아버지를 안다.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혼자 두지 않으셨다고 단언하신다.
함께 하는가. 그가 나를 안다 하시는가. 항상 그(예수)의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시던가, 분명히 그러하시던가. 〈無然〉
나도 너를 믿는다
주여, 주여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날들을 매달렸던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이기에 믿고 따르자는 단순한 마음에 머물지 않고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하였을 때 여우도 굴, 공중 새도 둥지 있다 하신 그 말씀의 무게를 내가 잘 알고 있나이다.
죽은 아버지 장례만 치루면 곧 따를 수 있건만 예수여 그 말씀으로 나를 또 울게 하셨죠. 죽은 자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 하심은 인연과 함께 혈연도 끊어야 복음의 길 됨을 가르치심으로 아나이다. 인연보다 혈연이 더 질겨 아직도 떠나지 못하는 자를 용서하소서.
사랑하는 이와 작별인사 나누는 시간도 쟁기 잡은 자의 갈 길에서는 불가능함을 저희는 알고 있나이다. 이렇듯 마치 칼날 위에 선 일상 생활처럼 진리수업을 해야 함을 우리가 진즉 깨달았어야 하거늘 우리는 거기에 다다르지 못했나이다.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마음이 무겁고 주의 이름으로 사는 발걸음이 두려움 뿐이니 어찌하는가. 내가 주를 믿나이다, 하면서 무엇인가 한마디 더 듣고 싶어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데 주여 내가 듣고야 말겠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죠.
‘나도 너를 믿는다!’ 하여 내 가슴 붉게 타오르게 하소서. 나도 너를 믿는다, 하는 그 말씀이 그립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가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나도 너를 믿는다’는 한 말씀이 내게는 목마름입니다.
사람들아, 들어보았는가. 주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는 있지만 그때마다 주가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믿는다’는 음성을 주시던가.
믿음은 쌍방일치가 맞다. 우리가 예수 앞에서 수없이 주여, 주여를 외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주께서 내 이름을 부르셔야 한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오냐, 나다'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열심히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면 그것은 외사랑이요 짝사랑 뿐이지 않겠는가.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 위하여 우리는 부르고 예수께서는 대답하셔야 한다.
그의 음성을 우리는 안다. 말씀으로 답변하지 않는다 하여도 안다. 본디 천불언(天不言)이라 하였으니 말 아닌 것으로 답변 하셔도 믿음이 온전한 자는 안다. 그 음성을 알아듣는다. 때로는 천둥번개로, 또 파도치는 그 소리, 사자가 우는 듯, 여린 음성 마치 풀벌레 우는 소리, 그것도 아니면 마른 하늘의 햇빛과 같은 그저 그런 소리 아닌 소리로 들려주는 음성을 아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해와 결별한다. 시간과의 결별이다. 사실은 만남도 결별도 없음이어야 하지만 우리들은 이 말이 너무 철학적이어서 잘 모른다. 알아도 모른 척 하게 된다.
예수의 감각은 언제나 탁월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하신 말씀과 만날 때는 예수가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신 분, 그러기에 그는 아버지를 안다.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혼자 두지 않으셨다고 단언하신다.
함께 하는가. 그가 나를 안다 하시는가. 항상 그(예수)의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시던가, 분명히 그러하시던가.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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