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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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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eulsoritimes.co.kr 2005/2/2(수)
많은 날동안, 부름받아 살아가는 동안 이렇게 쉽게 살아서는 안되는데…하는 안타까움으로 낮과 밤을 지새울 때가 있었다. 예끼 못난 사람,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편했겠는가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 순간 말씀 하나가 내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오른다.
신자는 교회를 대표한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를 대표한다. 교회의 모습에서 예수를 보여줄 수 없다면 이는 하늘의 절망이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묻는다. 예수가 과연 인간을 구원했느냐? 그리고 지금도 구원할 수 있느냐?
이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신자는 무어라고 답변할까? `네, 구원하셨습니다. 지금도 나(당신)를 구원하시며, 하실 수 있습니다. 특별히 당신처럼 관심이 많은 사람을 기쁘게 기다리십니다.' 이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와 보라, 하셨으니 이렇게 담대히 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으로, 또 나의 모습으로 예수를 증거할 수 없을 때의 낭패감을 아는가. 과연 나는 이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 망설임 없이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 교회의 이름으로 예수를 말해야 한다.
두 셋이 모이면 거기에 예수는 자기 이름을 기쁘게 던져 생명의 나눔을 이루어낸다. 그렇다면 사람이 문제다. 사람이 되어 사람 가운데서 사신 이를 우리는 사람들 중에서 만나야 한다.
때로는 교회를 향해 험담을 하고 신자나 목회자를 향해서도 평가하기를 즐기는 날들이 있었다. 그래서는 안된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신자가 중하다. 신자가 모여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가 예수의 모습일지니….
교회가 많다. 신자가 많다. 신자여 교회여, 우리의 모습 그대로 예수일지니 예수 이름을 위하여 희생을 이루자. 예수가 분명 구원이라면 내가 그 구원을 말하자. 그 모습으로 그의 삶의 중심에 내가 지금 있어야 한다.
겟세마네, 거기서 예수 기도하실 때 최선을 다해 길러낸 제자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피같은 눈물 쏟으시며 `아버지여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갔으면' 하실 때에 잠자고 있었다. 골고다에서 죽어가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지막 절규를 하실 때도 제자들은 예수를 위로하지 못했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로 예수를 말하지 못하고 내 삶의 중심에서 예수와 함께 하지 못한다. 가엾은 내 모습, 어느 시간까지 나는 예수를 배반해야 하는가.
이 땅에 무리지어 사는 성도들을 위하여 섬기고 받드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어찌 신자 뿐이냐, 예수께서 대신 죽어 구원하기로 작정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주 하나님의 품으로 이끌어 내자면 내 가슴팍이 너무나 좁구나.
삶이 무엇인가? 인생이, 또 신자가 무엇이며 목사는 또 무엇인가? 목사의 한 평생이면 예수를 온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아! 세월이 가는데, 속절없이 가는데, 이 몸으로 예수를 그려야 하는데 더는 지체할 수 없나니…. 생명이라는 것, 육체에 안긴 생명이라는 그것, 그 유혹에 내가 흔들려서는 안된다.
힘을 구하라. 용기를 원하라. 내가 어찌하여 내 생명의 한복판에서 나의 완전을 향하여 피투성이 된 예수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귀머거리여. 온통 장애로 얼룩진 내 육신이여. 삼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나라. 그 죽음으로 내 생명 한 복판에 있게 하라.〈無然〉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35
많은 날동안, 부름받아 살아가는 동안 이렇게 쉽게 살아서는 안되는데…하는 안타까움으로 낮과 밤을 지새울 때가 있었다. 예끼 못난 사람,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편했겠는가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 순간 말씀 하나가 내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오른다.
신자는 교회를 대표한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를 대표한다. 교회의 모습에서 예수를 보여줄 수 없다면 이는 하늘의 절망이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묻는다. 예수가 과연 인간을 구원했느냐? 그리고 지금도 구원할 수 있느냐?
이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신자는 무어라고 답변할까? `네, 구원하셨습니다. 지금도 나(당신)를 구원하시며, 하실 수 있습니다. 특별히 당신처럼 관심이 많은 사람을 기쁘게 기다리십니다.' 이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와 보라, 하셨으니 이렇게 담대히 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으로, 또 나의 모습으로 예수를 증거할 수 없을 때의 낭패감을 아는가. 과연 나는 이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 망설임 없이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 교회의 이름으로 예수를 말해야 한다.
두 셋이 모이면 거기에 예수는 자기 이름을 기쁘게 던져 생명의 나눔을 이루어낸다. 그렇다면 사람이 문제다. 사람이 되어 사람 가운데서 사신 이를 우리는 사람들 중에서 만나야 한다.
때로는 교회를 향해 험담을 하고 신자나 목회자를 향해서도 평가하기를 즐기는 날들이 있었다. 그래서는 안된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신자가 중하다. 신자가 모여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가 예수의 모습일지니….
교회가 많다. 신자가 많다. 신자여 교회여, 우리의 모습 그대로 예수일지니 예수 이름을 위하여 희생을 이루자. 예수가 분명 구원이라면 내가 그 구원을 말하자. 그 모습으로 그의 삶의 중심에 내가 지금 있어야 한다.
겟세마네, 거기서 예수 기도하실 때 최선을 다해 길러낸 제자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피같은 눈물 쏟으시며 `아버지여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갔으면' 하실 때에 잠자고 있었다. 골고다에서 죽어가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지막 절규를 하실 때도 제자들은 예수를 위로하지 못했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로 예수를 말하지 못하고 내 삶의 중심에서 예수와 함께 하지 못한다. 가엾은 내 모습, 어느 시간까지 나는 예수를 배반해야 하는가.
이 땅에 무리지어 사는 성도들을 위하여 섬기고 받드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어찌 신자 뿐이냐, 예수께서 대신 죽어 구원하기로 작정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주 하나님의 품으로 이끌어 내자면 내 가슴팍이 너무나 좁구나.
삶이 무엇인가? 인생이, 또 신자가 무엇이며 목사는 또 무엇인가? 목사의 한 평생이면 예수를 온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아! 세월이 가는데, 속절없이 가는데, 이 몸으로 예수를 그려야 하는데 더는 지체할 수 없나니…. 생명이라는 것, 육체에 안긴 생명이라는 그것, 그 유혹에 내가 흔들려서는 안된다.
힘을 구하라. 용기를 원하라. 내가 어찌하여 내 생명의 한복판에서 나의 완전을 향하여 피투성이 된 예수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귀머거리여. 온통 장애로 얼룩진 내 육신이여. 삼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나라. 그 죽음으로 내 생명 한 복판에 있게 하라.〈無然〉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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