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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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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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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 말씀은 과연, 이런 말씀을 감히 떠올리며 또 주장할 수 있는 선지자가 누구냐? 이 정도의 포부와 스케일을 가진 자를 우리가 알고 있으며 가까운 벗으로 두었다는 사실이 행복하지 않으랴.
성경의 인물 중 시퍼런 요단강 물을 밟고 가나안을 향하여 걸었던 여호수아, 자기 죄를 회개하는 그 밤들 눈물로 베개를 썩힐만큼의 자기 반성을 할 줄 알았던 다윗, 그들을 뛰어넘을 듯 화려찬란한 큰 뜻을 하늘 아래 펼줄 알았던 이사야가 너무나 좋다. 그가 모든 생명 가진 자들의 삶의 자유를 말했던 이사야 11장 6절에서 8절까지, 그리고 드디어 고난과 대속의 메시아를 제시하는 그의 책 53장, 그리고 오늘 우리가 붙잡은 66장의 이 말씀은 태평양을 7천개 정도 합해서 펼치는 듯 광대무변한 아득한 저 멀리까지 그의 포부를 열었다 할 수 있다.
하늘은 나의 보좌, 땅은 나의 발바닥이라 하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에 비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200, 300개 조각의 교단으로 나누고 또 교회들마다 독자적인 권세를 행사한답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소행들은 마치 미물들의 장난들처럼 보일 뿐이다.
교회여, 목회자들이여, 생각해 보라. 교회가 나뉘고 교파가 제각각 따로 놀때 첨단 광통신 시대 합리·합법의 가치는 어디서 찾으랴.
세계선교, 생각해보라. 200여 개 나라에 선교사들을 내보낸다지만 그들을 단위 높은 시스템으로 묶어 효과적인 관리를 할 수 없다면 그것들이 모래城이 아니고 무엇인가.
북한을 돕는답시고 저마다 인심을 쓰고 있는데 최소한 `통일부'정도의 일관된 정책이 없이 이웃집 뭐 퍼다주듯이 하면서 이용만 당하고 있는 꼴, 차마 보기 힘들다.
북한의 사정을 누가 모른다 하느냐, 또 누가 북한을 어려운 궁지로 몰자 하더냐, 그러나 북한을 향한 한국기독교의 일관된 행동과 기도,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하나(한 창구)로 엮을 수 없다면 기독교의 수준은 초라한 잡배들의 단계일 뿐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보아라.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한가? 자기 이름을 꼭 드러내야만 하는가? 북한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 못난 조상 만나서 조국이 분단되어 60년이다. 살아있는 부모처자, 일가친척들이 지척에 서로를 두고 60여 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 만난다 하여도 그게 온전한 것이더냐.
이같은 민족의 한(限)을 담고 있는 민족사인데 교회라는 것들이, 신자라는 것들이 투전꾼 개평 떼어주듯이 또 첩들에게 용돈주는 잡놈들 처럼 저마다 북한이 굶주리고 있으니 도와야 한다며 장난같은 자비심을 부추기고 있다. 욕잔소리 싫다하지 마라.
지금 한국교회가 어디 교회냐. 하늘은 나의 보좌, 땅은 나의 발바닥이라시며 특별히 내게는 별도의 처소가 따로 없다 하시는 이에게 아프리카 개미 굴 같은 예배당 지어놓고 거기에다 하나님을 모신다니 그게 어디 모시는 것이냐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지, 교회여 한가닥 양심 있거든 고난과 부활의 계절에 회개하자.
〈無然〉
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2005/3/9(수)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39
이 말씀은 과연, 이런 말씀을 감히 떠올리며 또 주장할 수 있는 선지자가 누구냐? 이 정도의 포부와 스케일을 가진 자를 우리가 알고 있으며 가까운 벗으로 두었다는 사실이 행복하지 않으랴.
성경의 인물 중 시퍼런 요단강 물을 밟고 가나안을 향하여 걸었던 여호수아, 자기 죄를 회개하는 그 밤들 눈물로 베개를 썩힐만큼의 자기 반성을 할 줄 알았던 다윗, 그들을 뛰어넘을 듯 화려찬란한 큰 뜻을 하늘 아래 펼줄 알았던 이사야가 너무나 좋다. 그가 모든 생명 가진 자들의 삶의 자유를 말했던 이사야 11장 6절에서 8절까지, 그리고 드디어 고난과 대속의 메시아를 제시하는 그의 책 53장, 그리고 오늘 우리가 붙잡은 66장의 이 말씀은 태평양을 7천개 정도 합해서 펼치는 듯 광대무변한 아득한 저 멀리까지 그의 포부를 열었다 할 수 있다.
하늘은 나의 보좌, 땅은 나의 발바닥이라 하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에 비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200, 300개 조각의 교단으로 나누고 또 교회들마다 독자적인 권세를 행사한답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소행들은 마치 미물들의 장난들처럼 보일 뿐이다.
교회여, 목회자들이여, 생각해 보라. 교회가 나뉘고 교파가 제각각 따로 놀때 첨단 광통신 시대 합리·합법의 가치는 어디서 찾으랴.
세계선교, 생각해보라. 200여 개 나라에 선교사들을 내보낸다지만 그들을 단위 높은 시스템으로 묶어 효과적인 관리를 할 수 없다면 그것들이 모래城이 아니고 무엇인가.
북한을 돕는답시고 저마다 인심을 쓰고 있는데 최소한 `통일부'정도의 일관된 정책이 없이 이웃집 뭐 퍼다주듯이 하면서 이용만 당하고 있는 꼴, 차마 보기 힘들다.
북한의 사정을 누가 모른다 하느냐, 또 누가 북한을 어려운 궁지로 몰자 하더냐, 그러나 북한을 향한 한국기독교의 일관된 행동과 기도,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하나(한 창구)로 엮을 수 없다면 기독교의 수준은 초라한 잡배들의 단계일 뿐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보아라.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한가? 자기 이름을 꼭 드러내야만 하는가? 북한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 못난 조상 만나서 조국이 분단되어 60년이다. 살아있는 부모처자, 일가친척들이 지척에 서로를 두고 60여 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 만난다 하여도 그게 온전한 것이더냐.
이같은 민족의 한(限)을 담고 있는 민족사인데 교회라는 것들이, 신자라는 것들이 투전꾼 개평 떼어주듯이 또 첩들에게 용돈주는 잡놈들 처럼 저마다 북한이 굶주리고 있으니 도와야 한다며 장난같은 자비심을 부추기고 있다. 욕잔소리 싫다하지 마라.
지금 한국교회가 어디 교회냐. 하늘은 나의 보좌, 땅은 나의 발바닥이라시며 특별히 내게는 별도의 처소가 따로 없다 하시는 이에게 아프리카 개미 굴 같은 예배당 지어놓고 거기에다 하나님을 모신다니 그게 어디 모시는 것이냐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지, 교회여 한가닥 양심 있거든 고난과 부활의 계절에 회개하자.
〈無然〉
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2005/3/9(수)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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