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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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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시간에 쫓기며 `생활신앙'을 담당하는 정찬양 기자를 내 방으로 불렀다. 부활 이후 첫 주일 신문을 만드는데 `감격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또 취재 현장의 이야기를 대충 들으며, 기자가 조심해야 할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가장한 휴머니스트(Humanist)들이라고 일러주었다.
세상이 살만하니까, well being이라는 이름의 온갖 행복주의가 판을 치고, 주 5일 근무제 시대를 환호하고, 남에게 자랑할 것, 선전할 것,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속일 것 등까지 동원하여(계속) `잘 살아보세!'식 운동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것들 조심하시오. 속지 마시오. 분별하시오.
당부하면서 기자의 영적(靈的, 神敵) 감각을 주문했다. 늘 열심히 하는 축으로 분류하는 정기자이지만 나는 아직 그가 더 성숙해져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다.
부활절이 지나갔다. 그럼, 2006년에 또 오는가? 그러나 아니다. 부활 이후 성령 강림절까지 지극한 인내와 성심(聖心)을 가지고 기도의 연속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 예수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의 손, 그의 옆구리 못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믿음을 주문하였다.
기독교 신자에게 부할신앙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짠맛을 잃은 소금이 아니겠는가. 부활이어야 한다. 그것도 마지막 날의 부활이 아니라 오늘의 부활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하신 때의 말씀은 `완료문장'이다. 히브리어의 경우 완료는 이루어짐, 과거 또는 현재완료를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부활신앙이 있어야 한다. 부활신앙과 휴머니즘은 다르다. 휴머니즘은 99%이다. 그것은 나머지 1%의 자기 주장을 가지고 상황변수를 노려보는 행위다. 출애굽 시대 모세의 위엄에 열번 굴복했던 바로가 열한번째 배신하는 바로 그것이 `나머지 하나'로써 선과 악의 변수이다. 그러므로 파라오는 사단의 사람이고, 휴머니즘 또한 사실상 `사단의 도구'일 뿐이다. 휴머니즘은 참으로 분별이 난해한 사단의 도구이다. 적그리스도이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이를 분별하지 못하여 실패를 거듭했던 날이 많았음을 교회사 책에서 많이 발견하게 된다.
반드시 부활의 예수를 자기 자신에게서 확인하는 그 시간까지 물러서지 마라. 성령강림의 그날, 교회가 탄생하고 또 그날 나의 신앙이 완전에 이르르게 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경지에 이르르게 된다.
교회 안에서, 또 밖에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때로는 지탄을 받기도 하고 칭송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과 살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서 오는 평가가 되는 것이다.
내 잔소리를 듣고 나가는 정기자의 얼굴이 밝지 않다. 왜 감격이 없느냐? 내가 지금 예수의 충만한 감격을 말해 주었는데 그 감격이 당신의 어디에 있느냐고 추궁했다.
그렇다. 감격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 예수께서 나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또 성령으로 지금 오고 계시는데 감격이다. 감격하라! 감격을 나누라! 넘치게 나누라! 너의 감정(기분)과 관계 없이 예수는 나의 삶의 현재에서 언제나 넘치는 감격이니라. 〈無然〉
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2005/4/4(월)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42
세상이 살만하니까, well being이라는 이름의 온갖 행복주의가 판을 치고, 주 5일 근무제 시대를 환호하고, 남에게 자랑할 것, 선전할 것,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속일 것 등까지 동원하여(계속) `잘 살아보세!'식 운동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것들 조심하시오. 속지 마시오. 분별하시오.
당부하면서 기자의 영적(靈的, 神敵) 감각을 주문했다. 늘 열심히 하는 축으로 분류하는 정기자이지만 나는 아직 그가 더 성숙해져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다.
부활절이 지나갔다. 그럼, 2006년에 또 오는가? 그러나 아니다. 부활 이후 성령 강림절까지 지극한 인내와 성심(聖心)을 가지고 기도의 연속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 예수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의 손, 그의 옆구리 못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믿음을 주문하였다.
기독교 신자에게 부할신앙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짠맛을 잃은 소금이 아니겠는가. 부활이어야 한다. 그것도 마지막 날의 부활이 아니라 오늘의 부활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하신 때의 말씀은 `완료문장'이다. 히브리어의 경우 완료는 이루어짐, 과거 또는 현재완료를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부활신앙이 있어야 한다. 부활신앙과 휴머니즘은 다르다. 휴머니즘은 99%이다. 그것은 나머지 1%의 자기 주장을 가지고 상황변수를 노려보는 행위다. 출애굽 시대 모세의 위엄에 열번 굴복했던 바로가 열한번째 배신하는 바로 그것이 `나머지 하나'로써 선과 악의 변수이다. 그러므로 파라오는 사단의 사람이고, 휴머니즘 또한 사실상 `사단의 도구'일 뿐이다. 휴머니즘은 참으로 분별이 난해한 사단의 도구이다. 적그리스도이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이를 분별하지 못하여 실패를 거듭했던 날이 많았음을 교회사 책에서 많이 발견하게 된다.
반드시 부활의 예수를 자기 자신에게서 확인하는 그 시간까지 물러서지 마라. 성령강림의 그날, 교회가 탄생하고 또 그날 나의 신앙이 완전에 이르르게 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경지에 이르르게 된다.
교회 안에서, 또 밖에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때로는 지탄을 받기도 하고 칭송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과 살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서 오는 평가가 되는 것이다.
내 잔소리를 듣고 나가는 정기자의 얼굴이 밝지 않다. 왜 감격이 없느냐? 내가 지금 예수의 충만한 감격을 말해 주었는데 그 감격이 당신의 어디에 있느냐고 추궁했다.
그렇다. 감격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 예수께서 나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또 성령으로 지금 오고 계시는데 감격이다. 감격하라! 감격을 나누라! 넘치게 나누라! 너의 감정(기분)과 관계 없이 예수는 나의 삶의 현재에서 언제나 넘치는 감격이니라. 〈無然〉
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2005/4/4(월)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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