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레 25:23)
지난해 어느날 달도 뜨지 않은 밤에 강원도 산골짜기를 굽이 돌아 예수원
입구에서 만난 글귀이다. 생전에 대천덕(R A Torrey) 신부께서 이 땅의
국민에게 토지에 대한 성서적인 올바른 개념을 가르쳐 주신 성구가 큼직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악용하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
그의 가르침은 큰 교훈이 되고 있다. 그 옆에는 1965년 이래 영적 불모지와
같았던 태백시에 ‘예수원’을 설립,광야 40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온 몸을 바치다가 2002년 8월6일 주님의
부름을 받은 ‘벽안의 성자’를 못내 아쉬워하며 세워진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고 대천덕 신부님 추모비’가 바로 그것이다. 수도사가 될 자격이
없어 오늘도 수도원을 그리워하며 이곳을 찾은 필자는 이 추모비가 당연히
예수원의 가족들이나 생전에 양육받은 제자들이 세웠으리라 생각하며
추모비의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예수원이 위치한
하사미리 3반 주민의 정성으로 세워진 것이다.
“대천덕 신부님을 추모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시어 세상 모든 이에게 나눔의 기쁨을 가르쳐
주신 님. 님께서는 진정 참어른이셨습니다. 영혼은 하나님 곁으로 가셨지만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늘 밝은 빛으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2002.8.6 하사미리 3반 주민 일동”
‘하사미리’란 특이한 마을 이름.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인가. 분명 다른 뜻이 있겠지만 필자는 순간 이런 영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마 13:57)는 말씀을 떠올렸다.
그러나 벽안의 성자 대천덕 신부님은 그의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하사미리 주민들로부터 ‘참어른으로’ ‘그리운 님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다. 그리고 어느날 홀연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의 조부인 R A 토레이는 성령론의
대가인 유명한 신학자이며 부친 R A 토레이 2세는 이 땅의 장애인을
위한 의수족(義手足) 사업을 창시한 분이다. 그러니까 R A 토레이 3세에
이르기까지 토레이 가문은 3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노동이 기도이고 기도가 노동이다”
예수원 경내의 나사렛동 대예배실 전면 왼쪽에 쓰여져 있는 명구다.
본격적인 수도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네딕투스가 이 영적 슬로건의
원조이지만 예수원이 표방하는 수도원 수칙의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기도’와 ‘노동’이다. 그래선지 예수원의 하루 일과표를 보면 아침예배는
월∼토요일 오전 6시부터 7시까지 조도(朝禱·아침기도)로 되어 있고
점심예배는 월∼주일 12시부터 12시30분까지 대도(大禱?중보기도)로
되어 있으며 12시40분부터 점심식사를 한다. 저녁예배(7시30분∼8시30분)도
월요일의 중보기도와 수요일의 대만도(大晩禱)등 하루일과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감된다. 이와 아울러 삼종(三鐘)이라 하며 아침 6시,낮
12시,저녁 6시 세 차례 종을 치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침묵으로
기도한다. 오후 9시에 소침묵에 들어가 10시부터 다음날 조도시간까지
대침묵에 들아간다.
노동수칙은 기도와 함께 매우 중요하다. 예수원 가족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3시간,오후 3시간 등 하루에 평균 6시간 정도 신성한
노동의 땀을 흘리는데 본인의 적성과 희망에 따라 목각 작업을 비롯해
목장일과 원예,농장일을 하게 된다. 그외에도 부서별 업무에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가전제품·보일러 수리 등)을 맡아 일을 한다. 예수원에는
손님부를 비롯하여 12부서가 있는데 그 중에서 노동과 관련있는 부서가
목각부 목장부 운행부 판매부 원예부 시설부 농장부 등 7개 부서로 전체의
반을 넘는다.

이처럼 예수원의 기본일과는 “노동이 기도이고 기도가 노동이다”는
성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에 따라 하루 세 차례의 예배(기도)와 노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수도원의 역사를
보면 기도와 명상과 노동,이 세 가지는 뗄 수 없는 수도생활의 삼위일체적
덕목이다. 예수원은 ‘노동의 영성’이 살아있는 국내의 드문 수도원이라
할 것이다. 대천덕 신부가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책만으로는 안된다. 실천하고 봉사하는 사명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각 속에 시작한 공동체가 바로 예수원이다. 예수원은 결코 여유롭다
할 수 없는 협소한 계곡의 산비탈에 세워져 있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의
실정을 감안하여 버려두면 쓸모 없는 땅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다는 대천덕 신부의 ‘토지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대천덕 신부 이후의 예수원을 걱정하거나 궁금해
한다. 그만큼 대신부께서 직·간접적으로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행여 대천덕 신부 없는 예수원이 활력을 잃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이 많지만 이런 생각은 기우였다. 일생을 한국 선교에
헌신한 복음의 동역자이신 사모 제인 토레이(Jane Grey Torrey·한국명
현재인) 여사를 중심으로 여전히 활기차게 운영되고 있다. 오히려 대신부를
떠나보내고 난 ‘예수원 가족’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유지를 받들어
더 간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역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최근에는 이곳에서 7년간 사역한 이안 라이트(Ian Wright) 신부께서
다시 복귀하여 연로한 현재인 원장을 돕고 있다. 또한 대천덕 신부의
아드님 벤 토레이(Ben Torrey) 신부도 다음달에 귀국하여 예수원을 이끌
것이라고 한다. 토레이 가문은 이제 4대째 한반도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예수원은 다른 수도원과는 대조적으로 외부의 손님을 금하지 않는다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사랑과 섬김이 넉넉한 대신부 내외는 지난 40여년간 항상 순례자들을
극진히 영접했다. 지난해에도 1만명 정도의 방문객과 장?단기 입소자들이
다녀갔다니 이들의 수고와 희생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천덕 신부께서는
생전에 늘 입버릇처럼 “나는 기초를 놓을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도,사회도 기초가 무너져내리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때에 대신부와 예수원처럼 외진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오늘의 민족 현실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고 땀 흘려 노동을 하며
영적 기초를 놓는 일에 힘쓰는 주의 종과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야 할
때이다. ‘성결한 영성’을 수도원 수칙의 근간으로 하고 있는 예수원같은
영성훈련도장을 통해 한국 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그리고 신학생들이
영적으로 재무장돼야 이 민족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정녕 한국교회와
신학교는 힘을 모아 ‘수도원 모델의 신학교육’을 실시하여 21세기
무공해 청교도같고 수도사같은 주의 종들을 적극 배출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무너져가는 국가와 교회의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한다.
김성영 총장(성결대학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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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2004.02.29, 15:51
http://www.kmib.co.kr/html/kmview/2004/0229/0919332280231111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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