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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요즈음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나 교회가 소위 “영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성 수련”이나 “영성 훈련”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 나가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개인과 교회 전체가 노력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영성 개념이나 이로부터 유래하는 영성 수련이나 영성 훈련의 문제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방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방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낳지 않을 수 없다.

1. 오늘날 “영성” 개념의 문제점들

일반적으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은 요즈음 기독교계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예를 들자면, 이미 오래 전에 프란시스 쉐이퍼 같은 분도 자신의 중요한 경험을 언급하는 “참된 영성”(True Spirituality)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제시하기도 했었고, 많은 이들이 이런 용례를 따라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복음주의권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데 선구적인 작업을 한 사람은 오랫동안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고 복음주의권에서 처음으로 영성 신학의 매뉴얼을 제시했던 리쳐드 러브레이스일 것이고, 가장 큰 기여를 하신 분이 아마 캐나다의 리젠트 컬리쥐의 초대 영성 신학 교수였던 제임스 휴스톤일 것이다. 그를 이어서 영성 신학을 강의한 유진 피터슨과 폴 스티븐스가 아마 복음주의권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1-1.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영성”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상당히 주의하면서 사용해야 할 용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우리 기독교인들만이 사용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말 가르쳐서 “영성의 시대”라고 하는 말이 비기독교권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세속화되는 서구 사회 속에서 20세기 말에 세속적인 삶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영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그들이 말한 의미는 우리들이 복음주의 권에서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그런 모습을 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 세상의 세속적인 삶 이상의 것을 찾는 모든 시도들을 가르쳐서 영적인 시도들이라고 하는 의미였었다. 그리하여 인도의 힌두교적 사상들도 영적인 것이며 영성의 한 측면으로 언급되었고, 요가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불교의 영성 등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여성의 영성을 말하는 한 홈페이지는 불교도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영성 훈련하는 내용과 그런 관점에서의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이슬람에서도 영적 생활 등에 대한 논의가 강조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미국 원주민들의 영성을 다루는 홈페이지도 있고, 호주의 원주민들의 영성을 다루는 홈페이지도 있다. 그리하여 결국 “세계 영성”(world spirituality)을 말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종교의 영성을 언급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하지 않고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올 수 있는 오해는 무수하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영성만을 영성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게이들의 영성, 레즈비언의 영성 등등의 말도 흔히 우리 주변에 나타나고 있다.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여신을 추구하는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가지기도 한다.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오늘 날에는 소위 뉴-에이지적 영성에 대한 강조가 가장 특징적인 것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영성을 매우 강조하며, 우리가 영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영성적인 모습을 지닌 한 표현이 그들이 말하는 어머니 신(母神)인 이 땅을 잘 보호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와 연관하여 지구 영성(earth spirituality)과 마술(witchcraft)을 연관시키는 홈페이지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뉴-에이지적인 영성과 우리가 이야기 하는 영성은 전혀 다른 것이다. 모든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의미의 영성은 참된 영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단어를 왜 당신들만 독점하려고 하느냐고 당신들은 배타적 영성 이해를 가졌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말을 그냥 사용할 때 문제가 새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2. 그러면 기독교와 관련된 이들이 말하는 “영성”만을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이들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것을 다 제쳐 놓고,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음주의권에서, 그리고 이 자리에서 우리가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과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용어가 사용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이것도 그렇게 단순히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영성”을 말하는 이들이 대개 이전 천주교 영성 사상가들이 말하던 바를 토대로 하고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들이 이 단어에 부여한 의미를 배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천주교의 예수회(Jesuits)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료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적인 의미의 “영성”을 생각하고, 특히 “영성을 위한 수련”과 같은 것을 말할 때 그가 말한 “영신 수련”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특히 오늘 날 많이 유행하고 있는 영성 자료 같은 것은 결국 모두 그의 사상과 그로부터 발전한 것들을 제시하고 있는 현실을 보라. 서강 대학교 영성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이그나티우스 료욜라와 그로부터 기원하는 영성 훈련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 하고 있다:

초기에는 매우 단순한 형대로 지도했지만, 시간의 흐르면서 좀더 섬세한 모습으로 이 <원리와 기초>가 제시되었다. <영신수련>을 받고자 하는 지원자의 마음가짐을 오랜 기간 동안 준비시킨 후에, 이냐시오는 피정자에게 <원리와 기초>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고, 동시에 여러 성찰 방법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부터 죄 묵상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리와 기초>는 두 가지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신수련>을 체험하기를 원하면서 오랜 기간 마음 자세를 준비해 온 피정자로 하여금 이 피정을 시작하면서 구원에 대한 통괄적이고 객관적인 지평을 상기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창조와 구원의 역사 안에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이제 시작하는 <영신수련>의 여정을 위해 마음을 준비시키고, 동시에 이 여정의 첫 발을 내딛도록 이끌어 준다.
하지만 <영신수련>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감에 따라서,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영신수련>을 시작했기에 비교적 덜 성공스러운 결과들을 얻게 되는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좀더 충분한 준비 묵상들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리와 기초> 본문을 세분하여 몇 개의 요점으로 나누어 묵상하도록 제시하는 방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냐시오는 인간의 창조 목적, 수단들, 어려움 등의 세 개의 요점으로 나누어 이 묵상을 제시했다. 이냐시오의 동지들과 후계자들 역시 때로는 세 가지, 때로는 네 가지의 요점으로 나누어 <원리와 기초>의 내용을 묵상하도록 제시했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 까니시오(St. Peter Canisius)는 인간의 창조된 목적, 창조물의 목적, 창조물을 사용하는 올바른 자세 등의 세 가지 요점으로 나누었고, 폴랑코(J. Polanco) 신부는 창조와 인간의 목적, 창조물의 목적, 창조물의 사용, 불편심 등의 네 가지로 나누어 제시했다. 물론 <원리와 기초>을 며칠 동안 계속해서 묵상하도록 하는 것은 <영신수련>의 근본 사상에 어긋난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1599년에 공식적으로 출판된 [지침서]는 <영신수련>이 올바로 진행되기 위해서 충분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원리와 기초>의 내용이 몇 개의 요점들로 나누어져 묵상하도록 제시하는 것은 사부 이냐시오의 실천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재천명했다.

그러므로 <원리와 기초>는 <영신수련>을 시작하는 피정자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의 빛에 의해 자신의 삶이 개선되어야 할 필요를 의식하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신앙에 성장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준다. 이러한 열망은 <영신수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피정자가 이미 오랜 준비 기간을 통해 이러한 마음과 열망을 지니고 있으면, <원리와 기초>은 이미 형성된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과 죄스러움을 의식하게 해주면서 첫째 주간의 묵상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피정 지도자는 피정자가 영적 이해력과 성숙에 도움을 주면서, 좋은 피정의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시켜야 한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식의 영성 수련이 일반화 되어 있다. 그래서 심상태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교 영성계에서 전통적으로 ‘수덕적 영성’은 입문 단계인 ‘정화(淨化)의 길’(via purificativa)로부터 시작하여 ‘조명(照明)의 길’(via illuminativa)을 거쳐 ‘일치(一致)의 길’(via unitiva)인 주입적 관상의 단계를 추구하며, ‘신비적 영성’은 초자연 은총의 결과인 주입적 관상과 수동적 정화 및 변형 일치의 영성 생활을 추구한다.

또한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은 초보 단계에서 숙련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는 어두운 밤이 있기 마련이라고 하면서, 이를 통과하면 그는 이제 새롭고 더 깊은 종류의 기쁨인 “주입된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의 기쁨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것에 대해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을 사람의 영과 함께 불꽃 가운데 두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주입(infusion)이라고 묘사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느 단계에로 나아가면 은혜의 주입이 주어지고 그것에 의해 우리를 상승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주교회에서의 영성 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면서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半)-펠라기아누스주의(semi-Pelagianism)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훈련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개신교의 영성 훈련도 기본적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서 응용하고 있다. 비교적 건전한 개신교적 영성 신학을 제시하는 사이몬 챤도 이그나티우스 료욜라의 <영적 훈련들>을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이몬 챤은 비록 복음주의적 시각을 유지하려고 많이 애쓰지만, 천주교의 훈련적(ascetical, 일반적으로 “수덕적”이라고 번역함) 특성을 많이 받아들이고, 은사주의적 강조도 많이 포용하면서 자신의 영성 신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일정한 복음주의적 틀은 유지하면서도 (구원적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영성 문제에 관한 한 상당히 혼합주의적인 내용을 말하고 이곳저곳의 사상과 기법을 다 용인하는 방법을 지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이몬 챤도 “인도 전통의 요가 훈련과 중국의 태극권 기술에서 보이는) 신체 훈련, 직관적 통찰력과 실제적 지혜와 같은 분야에서 "부정적”(apophatic) 전통과 이시아적 전통들로부터 배울 필요로 강조한 틸더른 에드워즈의 영적 지도 방법에 상당히 찬동하면서 이것이 서구적 합리주의적이고 분석적 접근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성 운동을 강조하는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개신교에서는 500년 동안 기독교의 좋은 전통인 수도원 운동을 잃었다고 하면서 그 전통을 복원하는 의미에서 영성 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특히 현대 천주교 영성 사상가들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나 헨리 나우엔(Henry Nouwen, 1932-1996) 등의 영성 개념과 그들이 말하는 영성 훈련 등이 오늘날 논의의 좋은 토대가 되고 있는 현실을 보라. 물론 천주교회에 속한 이들이나 다른 이들이 영성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성서적 영성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각교계가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성서적 영성이라는 의미가 각기 다르다고 하는 것에 우리는 특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특히 영성이나 영성에 관련된 말을 할 때는 천주교에서 온 것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조금 응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천주교적인 것이 오늘날 개신교 영성 훈련에 영향을 미친 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뜨레스 디아스”(Tres Dias) 같은 것이다. 이는 스페인에서 개발된 천주교 영성 수련 프로그램인 꾸르실료에 근원을 둔 것이다. 이를 활용해서 많은 개신 교회들도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상당히 보수적인 복음주의권의 저자는 자신의 책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안식년에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도 한다:

안식년 동안 적지 않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식년의 끝자리를 생소한 여행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워싱턴 근교의 한 수도원에서 일주일을 관상 기도로 보냈습니다. 거의 온종일 깊은 침묵 속에서 기도하며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조용한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태고의 깊은 고요 속 영혼의 평안을 회복했습니다. 때로는 침묵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내게 낯선 친구였음을 확인하며 그와 벗됨을 아픔으로 배워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복음주의적 저자가 천주교적 영성 훈련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은 관상 기도를 하며 유익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상당히 일반화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용한 침묵 가운데서 자신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깊이 성찰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법을 따라 제시되기 전에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늘 힘써 온 바였다. 그러나 그것이 이와 같은 어떤 방법을 따라 제시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방법 자체를 중요시하기 시작하게 된다.

때로는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의 한 부분으로 영성 생활을 언급하는 일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신학의 당파성이 아니라 보편성/구체성, 절대성이나 상대성이 아니라 다원성, 탈세속성이 아니라 세속성을 추구하며 홍정수 박사가 1988년 11월 29일 개원한 세계신학연구원을 1995년 5월 15일에 확대 개편한 신학과 목회 연구소”인 한국 기독교 연구소는 그러한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영성 생활에 대한 많은 도서를 내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도 “영성”이라는 말이 매우 다양한, 때로는 혼합주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에를 들어서 심상태 신부는 오늘날의 영성 운동의 과제의 하나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비슷한 입장을 강조하는 김경재 교수에게 동의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기로 하자:

이러한 대화에서 공동적 묵상, 수행방법의 실시, 잠심, 영적 체험의 심화가 공동 대화를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실천적 그리스도교적 삶의 진정성이 동아시아적 명상적 종교나 아프리카-아메리카적 엑시스타시스적 종교의 체험들을 통하여 확인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기도 안에서 성취되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고유 가치가 드러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그리스도교계와 세계 교회는 불교, 유교, 노장사상, 천도교 등 세계적 종교인들이 체험한 영성 체험들과 깊은 대화를 통해서 영성이 새로워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종교가 자기 종교의 정체성에 충실하면서도 개방성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 종교의 진정한 실력이고 영적 능력입니다”.

이런 혼합주의적 경향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이런 사상이 침투할 때 더욱 더 분별하기 어렵게 한다. 요즈음 일반인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는 책의 하나인 파울로 코넬료(Paulo Coelho)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앞부분 작가 노트에 인용된 천주교 수도사요 영성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토마스 머튼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해 보라:

영적인 삶은 사랑이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호하거나 도와주거나 선행을 베풀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그렇게 대한다면, 그건 그를 단순한 대상으로만 여기고 자기 자신을 대단히 현명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를 인용하면서 파울로 코넬료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개시킨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우리는 영적인 체험에 보다 가까워진다. 참으로 깨달은 자, 사랑으로 뜨겁게 데워진 영혼은 모든 편견을 넘어 설 수 있다....... 구체적인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적인 길에 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천주교적 영성 개념을 사용해서 그가 말하는 영적인 체험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 자신이 말하는 대로는 “신은 그/그녀를 허락하는 곳이면 어지에든지 임한다”는 것이며, 작중의 천주교 신학생인 그의 강연의 말로는 마법의 순간, 즉 “모든 별들에 깃들인 힘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순간”이 있는데, 이 “마법의 순간은 우리가 변할 수 있도록 도우며, 꿈을 실현시키도록 우리를 멀리 떠내 보낸다”고 한다. 또한 그 신은 이 작 중 신학생의 입으로는 다음과 같이도 설명되고 있다:

네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녀가 지구상의 모든 종교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거야. 여신, 성모 마리아, 유대교의 셰키나, 어머니 대지, 이시스, 노예이자 주인인 여인의 모습으로. 그녀는 잊혀졌고, 금지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바꿔버렸지. 하지만 그녀를 위한 제의는 세기를 이어가며 계속되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살아 있어. 신의 다양한 면모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성의 면모야...... 모든 종교와 전통 속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어.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지. 나는 가톨릭 신자니까 그녀를 성모 마리아로 보는 거고.

이와 같이 코넬료가 말하는 영적인 것은 이렇게 여성적인 면모도 간직한 신적인 것에 대한 감응, 그와의 일치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현대인들이 천주교적 영성 개념으로부터 그들 나름대로 발전시켜 생각하고 있는 영성의 모습이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난감해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천주교적 영성 개념과 익숙히 연관된 영성 개념이나. 그로부터 현대에 발전되어 나온 새로운 영성 개념과는 다른 것을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말하는 “영성”이라는 말은 당신들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을 쉐이퍼 처럼 참된 영성이라고 표현하거나 청교도들처럼 성경적 영성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오늘날의 복잡한 영성의 혼란 상황 가운데서는 새로운 용어로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바를 그들이 추구하는 영성의 한 측면이나 한 방향으로 여기거나, 이것도 영성을 추구하는 한 방법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독교적 영성을 말하는 분들 가운데서도 여성을 추구하는 여러 방향이 있는 중에 우리는 이런 “기독교적 영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그야 말로 영성의 혼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계속 영성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영성”이라는 용어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일단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뒤로 한 채 우리가 성경적으로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묘사해 보기로 하자.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본지 편집위원)

크리스천투데이 2005-07-15 05:30
http://www.chtoday.co.kr/template/news_view.htm?code=pd&id=5117

댓글 '1'

남순화

2002.08.07 03:40:22

늘 성경을 열심으로 쓰시네요^*^~* 저는 새벽에 잠이 안오면 거의 성경을 쓰지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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