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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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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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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6/8(수)
내가…,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 26:53)고 호되게 꾸중하신 예수를 아는가? 겟세마네, 그 현장에서 그가 사랑하는 예수께서 로마 군병과 대제사장 집 하졸들에게 잡혀가게 되자 베드로가 칼을 뽑았다. 대제사장 집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다. 말고의 귀가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존엄한 질책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인류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한다. 듣고도, 배우고도 못 듣고 아니 배운 자들 처럼 행동한다.
몹쓸 놈들, 나쁜 자식들. 욕설을 들어도 싸다. 도무지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기독교가 예수의 겟세마네 비폭력 교훈을 외면해 오다가 이제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칼을 칼집에 집어 넣으라.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한다.
내가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능력이 없는 줄 아느냐? 힘이 있다고 힘을 다 쓰는 것이 아니다. 힘이 있다고 그 힘을 아무데서나 사용하면 되는가.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 지리요'(마 26:54).
십자가 죽음이 싫어서 천사를 동원하면 하나님의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대속죄의 죽음을 죽으리라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진리의 법칙이 있다. 무조건 위기를 모면하고 싶겠지. 베드로는 자기 칼이 남의 집 하인의 목이나 칠 수 있을 뿐 로마의 군사력 앞에서는 장난감일 뿐임을 알지 못했던가.
한국 천주교회가 황우석 교수에게 충고 한마디를 따끔하게 해 주었다. 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지 다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배아를 연구나 실험용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 삼고,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고, 인간생명을 파괴하는 비도덕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황우석 교수의 도덕성, 그는 과연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위대한 학자로 존경을 받을 것인가. 세속사에서는 그를 위대하다 할지 모르나 인간의 존엄을 파괴시킨 범죄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고 아무 것이나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원자핵무기의 등장은 인류가 막았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방관하고 있다.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의 헛손질은 예수의 꾸중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가 조심성 없이 휘두른 칼질은 그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었다.
언젠가는 크게 후회하고, 선택된 기회가 소멸되고 말 때쯤 땅을 치고 가슴을 두들기겠으나 그때는 늦을 것이다. 아무나 사용하여 남의 목을 치고 생명을 함부로 다루라고 칼이 기독교 신자의 손에 쥐어진 것 아니다.
철저하게, 이제라도, 2천년 뒤늦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기독교가 폭력과 결별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선택에서 제외되는 날이 올 것이다. 황우석의 배아복제 보다 몇 천배 더 죄악된 행위가 폭력임을 발견해야 한다. 기독교의 폭력즐김이 배아복제기술로까지 발전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함부로 다루지 마라. 그 칼 또 그 기술!
〈無然〉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50
내가…,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 26:53)고 호되게 꾸중하신 예수를 아는가? 겟세마네, 그 현장에서 그가 사랑하는 예수께서 로마 군병과 대제사장 집 하졸들에게 잡혀가게 되자 베드로가 칼을 뽑았다. 대제사장 집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다. 말고의 귀가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존엄한 질책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인류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한다. 듣고도, 배우고도 못 듣고 아니 배운 자들 처럼 행동한다.
몹쓸 놈들, 나쁜 자식들. 욕설을 들어도 싸다. 도무지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기독교가 예수의 겟세마네 비폭력 교훈을 외면해 오다가 이제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칼을 칼집에 집어 넣으라.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한다.
내가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능력이 없는 줄 아느냐? 힘이 있다고 힘을 다 쓰는 것이 아니다. 힘이 있다고 그 힘을 아무데서나 사용하면 되는가.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 지리요'(마 26:54).
십자가 죽음이 싫어서 천사를 동원하면 하나님의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대속죄의 죽음을 죽으리라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진리의 법칙이 있다. 무조건 위기를 모면하고 싶겠지. 베드로는 자기 칼이 남의 집 하인의 목이나 칠 수 있을 뿐 로마의 군사력 앞에서는 장난감일 뿐임을 알지 못했던가.
한국 천주교회가 황우석 교수에게 충고 한마디를 따끔하게 해 주었다. 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지 다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배아를 연구나 실험용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 삼고,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고, 인간생명을 파괴하는 비도덕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황우석 교수의 도덕성, 그는 과연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위대한 학자로 존경을 받을 것인가. 세속사에서는 그를 위대하다 할지 모르나 인간의 존엄을 파괴시킨 범죄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고 아무 것이나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원자핵무기의 등장은 인류가 막았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방관하고 있다.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의 헛손질은 예수의 꾸중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가 조심성 없이 휘두른 칼질은 그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었다.
언젠가는 크게 후회하고, 선택된 기회가 소멸되고 말 때쯤 땅을 치고 가슴을 두들기겠으나 그때는 늦을 것이다. 아무나 사용하여 남의 목을 치고 생명을 함부로 다루라고 칼이 기독교 신자의 손에 쥐어진 것 아니다.
철저하게, 이제라도, 2천년 뒤늦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기독교가 폭력과 결별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선택에서 제외되는 날이 올 것이다. 황우석의 배아복제 보다 몇 천배 더 죄악된 행위가 폭력임을 발견해야 한다. 기독교의 폭력즐김이 배아복제기술로까지 발전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함부로 다루지 마라. 그 칼 또 그 기술!
〈無然〉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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