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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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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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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택목사의 민들레교회 이야기 제598호 2006.2.12
사랑하는 민들레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시방 24절기 가운데 첫째 절기인 입춘(立春)을 살면서 둘째 절기인 우수(雨水) 절기로 흐르고 있습니다. 우수(雨水)는 ‘빗물’입니다. 우수가 되면 온 땅에 이른 봄비 내리고 나무들은 눈 녹은 물을 활기차게 빨아올리며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 온 세상이 물기로 촉촉해 지는 계절입니다.
우수(雨水)는 참으로 위대한 절기입니다. 하느님이 빗물 되어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에 내리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의 기나긴 겨울잠을 깨우기 위하여 하느님이 빗물 되어 오시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민들레 식구 여러분!
아직 우리는 입춘 절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올 해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해마다 입춘 절기에는 입춘을 사십시오.
입춘 다음날인 지난 주일에 저는‘근신(勤愼)하고 깨어 맞이하는 봄’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입춘에 즈음하여 우리가 봄에 들었지만 우수, 경칩에 이르러 빗물에 풀리고 봄기운에 땅이 열려 봄이 약동할 때까지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면서 봄을 맞이하자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원수인 마귀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베드로전서 4장 8절)이 악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주님을 모시며 따르는 성도(聖徒)들은 항상 근신하고 깨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입춘 주일 다음 날 밤에 풀려가던 온 세상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인하여 순식간에 백설이 애애한 한겨울 풍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기온이 내려가 일주일 내내 산천은 허옇게 눈을 뒤집어 쓴 채 한겨울 풍경을 이어갔습니다.
이렇듯 입춘을 즈음하여 ‘근신하고 깨어 맞이하는 봄’ 이라는 말씀에 상응하는 한겨울 경치를 연출해 주신 나의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을 나는 내 평생 끝끝내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삼가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우러르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올 해는 사순절이 3월1일 ‘성회 수요일’에 시작됩니다. 예년에 비해 좀 늦습니다. 사순절 전 주일은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올해는 2월 26일)이고 우리 민들레교회의 생일입니다. 민들레교회는 태양력으로는 2월13일에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종로에 있는 파고다외국인학원의 방을 하나 빌려 첫 예배를 드린 것이 1983년 2월 13일이었는데 그 날이 우리의 설날이었고 교회력으로는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민들레교회주보’ 제1호에 이렇게 써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입니다. 해마다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이 울 교회의 창립기념주일이 되겠습니다.”(민들레교회 주보 제1호 ,1983년 2월 13일자)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봄은 봄으로 봄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입춘의 봄은 보는 봄이 아니라 듣는 봄입니다.
1975년 입춘 무렵에 나는 강원도 치악산 기슭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난생 처음 들었습니다.
목회 생활 5년 만에 어떤 일로 인해 크게 상심하여서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은 채 절망적인 기분으로 교회를 뛰쳐나와 무작정 일 저리 버스를 갈아타고 찾아들어 간 곳이 치악산 구룡사 기슭이었습니다. 거기 보이는 풍경은 눈이 한 자도 넘게 쌓여 있는 백설 애애한 산야에 매서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치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들만 벌리고 서 있는 한겨울이었습니다.
그런 풍경 속에서 얼어붙은 마음이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은 어느 날 대낮에 나는 산속에서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엇인가 두껍고 무거운 것이 깨져 나가는듯한 쩡-쩡- 거리는 큰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인적이 없는 빈산에서 홀로 그 소리를 듣고 이상한 공포를 느꼈지만 때가 바로 해가 가장 밝게 빛나는 대낮이었던지라 용기를 내어 소리를 따라 내려갔더니 여울에 이르렀습니다.
그 소리의 정체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두꺼운 얼음이 깨지는 소리였습니다. 밑바닥까지 깊이 얼어붙었던 여울의 얼음이 아무도 손대지 않았는데 쩡-쩡- 거리며 갈라져 나가고 있었고 그 틈새로 어느새 졸졸거리며 여울물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여겨보니 양지바른 곳에서는 푸른 옷을 입은 새 생명들이 어느새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를 새롭게 느꼈고, 또한 그 순간에 도무지 깨질것 같지 않았던 내 마음의 얼음덩이도 쩡-쩡- 거리며 깨져나갔습니다. 얼마나 복된 은총의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는 풍경,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 우리가 보는 계절은 아직 얼어붙은 한겨울이지만 하느님의 계절은 입춘에 이르러 겨울, 그 죽음의 깊은 잠, 무지막지한 절망의 계절, 바위덩이보다도 더 무거운 중압의 정신을 쩡-쩡- 거려 깨드리면서 새로운 생명의 계절을 움틔워 주십니다.
1975년 입춘 무렵, 치악산에서 나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봄의 신비를 맛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2006년 보의 새로운 봄 소식은 ‘보은 듣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시오!”
2006년 2월 7일 아침 6시, 에덴기도원 아침 기도 시간에 우리는 마가복음 9장 14-29절을 읽었습니다. 입춘 사흘 후 올겨울 들어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겨울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변화산에서 예수의 일행이 산에서 내려 오셨는데,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 와보니 제자들이 큰 군중에게 둘러 싸여 율법학자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하명 한 아이가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에게 데려 왔더니 제자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쿵 저렇쿵 끝에 예수가 더러운 악령을 꾸짖으시자 악령이 소리를 지으며 그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켜 놓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주문(呪文?)이 이렇습니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악령아, 들어라. 그 아이에게서 썩 나와 다시는 들어 가지 말아라.” (개역성경에는 -부문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로 되어 있다.)
그 아이의 아비는 자기 아들을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 제 아들”(개역은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로 번역함) 이라고 했는데 예수 선생님께서는 굳이 ‘말 못하고’에 ‘듣지 못하게 하는 악령’을 덧붙였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나는 내 작은 체험을 통해서 이 대목에 진리가 깃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아, 듣지 못하면 말할 수 없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한다는 건 그냥 지껄이는 거뿐 아무 의미도 없고 생명력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씀합니다.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서 10장 17절)
시인이 영감에 사로잡혀 노래합니다.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 그 이야기, 그 말소리 / 비록 들리지 않아도 /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시편 19편 2-4절)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말할 수 있습니다. 듣지 않고 말하는 건 이미 말이 아니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이의 아비에게 묻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 아이의 아비가 대답합니다.
“어렸을 때부터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ㅇㅇㅇ (이)여, 그대는 언제부터 듣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까? (ㅇㅇㅇ에 자기 이름을 넣어 불러볼 것).
내가 보니 그 때 그 자리에 지자고 율법학자고 군중이고 간에 말씀을 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그 아이가 게거품을 흘리며 딩굴도록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어찌 보면 그 아이는 믿음 없는 그 세대를 대신해서 그렇게 심한 발작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이 속에 들어가 있는 악령을 꾸짖으십니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악령아, 들어라. 그 아이에게서 썩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말아라!”
이 말씀이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아비에게는 “이제 들어라, 말하라!”로 들렸음 합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여,
이 봄에 영원한 봄을 여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귀 기울여 새롭게 들으십시오.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쫒아 낼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서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어야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새봄에 새로 듣는 그대를 통해서 새로운 봄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들어라, 말하라!” 삼라한 만상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봄소식을 속삭여 줍니다. (민)
사랑하는 민들레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시방 24절기 가운데 첫째 절기인 입춘(立春)을 살면서 둘째 절기인 우수(雨水) 절기로 흐르고 있습니다. 우수(雨水)는 ‘빗물’입니다. 우수가 되면 온 땅에 이른 봄비 내리고 나무들은 눈 녹은 물을 활기차게 빨아올리며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 온 세상이 물기로 촉촉해 지는 계절입니다.
우수(雨水)는 참으로 위대한 절기입니다. 하느님이 빗물 되어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에 내리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의 기나긴 겨울잠을 깨우기 위하여 하느님이 빗물 되어 오시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민들레 식구 여러분!
아직 우리는 입춘 절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올 해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해마다 입춘 절기에는 입춘을 사십시오.
입춘 다음날인 지난 주일에 저는‘근신(勤愼)하고 깨어 맞이하는 봄’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입춘에 즈음하여 우리가 봄에 들었지만 우수, 경칩에 이르러 빗물에 풀리고 봄기운에 땅이 열려 봄이 약동할 때까지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면서 봄을 맞이하자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원수인 마귀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베드로전서 4장 8절)이 악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주님을 모시며 따르는 성도(聖徒)들은 항상 근신하고 깨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입춘 주일 다음 날 밤에 풀려가던 온 세상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인하여 순식간에 백설이 애애한 한겨울 풍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기온이 내려가 일주일 내내 산천은 허옇게 눈을 뒤집어 쓴 채 한겨울 풍경을 이어갔습니다.
이렇듯 입춘을 즈음하여 ‘근신하고 깨어 맞이하는 봄’ 이라는 말씀에 상응하는 한겨울 경치를 연출해 주신 나의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을 나는 내 평생 끝끝내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삼가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우러르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올 해는 사순절이 3월1일 ‘성회 수요일’에 시작됩니다. 예년에 비해 좀 늦습니다. 사순절 전 주일은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올해는 2월 26일)이고 우리 민들레교회의 생일입니다. 민들레교회는 태양력으로는 2월13일에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종로에 있는 파고다외국인학원의 방을 하나 빌려 첫 예배를 드린 것이 1983년 2월 13일이었는데 그 날이 우리의 설날이었고 교회력으로는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민들레교회주보’ 제1호에 이렇게 써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입니다. 해마다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이 울 교회의 창립기념주일이 되겠습니다.”(민들레교회 주보 제1호 ,1983년 2월 13일자)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봄은 봄으로 봄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입춘의 봄은 보는 봄이 아니라 듣는 봄입니다.
1975년 입춘 무렵에 나는 강원도 치악산 기슭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난생 처음 들었습니다.
목회 생활 5년 만에 어떤 일로 인해 크게 상심하여서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은 채 절망적인 기분으로 교회를 뛰쳐나와 무작정 일 저리 버스를 갈아타고 찾아들어 간 곳이 치악산 구룡사 기슭이었습니다. 거기 보이는 풍경은 눈이 한 자도 넘게 쌓여 있는 백설 애애한 산야에 매서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치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들만 벌리고 서 있는 한겨울이었습니다.
그런 풍경 속에서 얼어붙은 마음이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은 어느 날 대낮에 나는 산속에서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엇인가 두껍고 무거운 것이 깨져 나가는듯한 쩡-쩡- 거리는 큰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인적이 없는 빈산에서 홀로 그 소리를 듣고 이상한 공포를 느꼈지만 때가 바로 해가 가장 밝게 빛나는 대낮이었던지라 용기를 내어 소리를 따라 내려갔더니 여울에 이르렀습니다.
그 소리의 정체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두꺼운 얼음이 깨지는 소리였습니다. 밑바닥까지 깊이 얼어붙었던 여울의 얼음이 아무도 손대지 않았는데 쩡-쩡- 거리며 갈라져 나가고 있었고 그 틈새로 어느새 졸졸거리며 여울물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여겨보니 양지바른 곳에서는 푸른 옷을 입은 새 생명들이 어느새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를 새롭게 느꼈고, 또한 그 순간에 도무지 깨질것 같지 않았던 내 마음의 얼음덩이도 쩡-쩡- 거리며 깨져나갔습니다. 얼마나 복된 은총의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는 풍경,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 우리가 보는 계절은 아직 얼어붙은 한겨울이지만 하느님의 계절은 입춘에 이르러 겨울, 그 죽음의 깊은 잠, 무지막지한 절망의 계절, 바위덩이보다도 더 무거운 중압의 정신을 쩡-쩡- 거려 깨드리면서 새로운 생명의 계절을 움틔워 주십니다.
1975년 입춘 무렵, 치악산에서 나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봄의 신비를 맛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2006년 보의 새로운 봄 소식은 ‘보은 듣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시오!”
2006년 2월 7일 아침 6시, 에덴기도원 아침 기도 시간에 우리는 마가복음 9장 14-29절을 읽었습니다. 입춘 사흘 후 올겨울 들어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겨울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변화산에서 예수의 일행이 산에서 내려 오셨는데,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 와보니 제자들이 큰 군중에게 둘러 싸여 율법학자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하명 한 아이가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에게 데려 왔더니 제자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쿵 저렇쿵 끝에 예수가 더러운 악령을 꾸짖으시자 악령이 소리를 지으며 그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켜 놓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주문(呪文?)이 이렇습니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악령아, 들어라. 그 아이에게서 썩 나와 다시는 들어 가지 말아라.” (개역성경에는 -부문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로 되어 있다.)
그 아이의 아비는 자기 아들을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 제 아들”(개역은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로 번역함) 이라고 했는데 예수 선생님께서는 굳이 ‘말 못하고’에 ‘듣지 못하게 하는 악령’을 덧붙였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나는 내 작은 체험을 통해서 이 대목에 진리가 깃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아, 듣지 못하면 말할 수 없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한다는 건 그냥 지껄이는 거뿐 아무 의미도 없고 생명력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씀합니다.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서 10장 17절)
시인이 영감에 사로잡혀 노래합니다.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 그 이야기, 그 말소리 / 비록 들리지 않아도 /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시편 19편 2-4절)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말할 수 있습니다. 듣지 않고 말하는 건 이미 말이 아니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이의 아비에게 묻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 아이의 아비가 대답합니다.
“어렸을 때부터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ㅇㅇㅇ (이)여, 그대는 언제부터 듣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까? (ㅇㅇㅇ에 자기 이름을 넣어 불러볼 것).
내가 보니 그 때 그 자리에 지자고 율법학자고 군중이고 간에 말씀을 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그 아이가 게거품을 흘리며 딩굴도록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어찌 보면 그 아이는 믿음 없는 그 세대를 대신해서 그렇게 심한 발작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이 속에 들어가 있는 악령을 꾸짖으십니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악령아, 들어라. 그 아이에게서 썩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말아라!”
이 말씀이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아비에게는 “이제 들어라, 말하라!”로 들렸음 합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여,
이 봄에 영원한 봄을 여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귀 기울여 새롭게 들으십시오.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쫒아 낼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서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어야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새봄에 새로 듣는 그대를 통해서 새로운 봄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들어라, 말하라!” 삼라한 만상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봄소식을 속삭여 줍니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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