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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통로가 되십시오

마태복음 이한규 목사............... 조회 수 943 추천 수 0 2014.12.29 23: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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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0:40-42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온라인 새벽기도(1456) 2014.9.22 

기적의 통로가 되십시오

(마10:40-42)  


어느 날, 한 여류 수필가가 한 달 동안 외국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와 보니까 서재 한쪽 벽에는 온통 자신의 사진이 붙여져 있었고 달력에는 자신의 귀국 날짜에 붉은 펜으로 하트 표시가 된 상태에서 그 밑에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아내 돌아오는 날’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목욕탕에서 물을 크게 틀고 울다 웃다 하며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그가 정말 제 남편인가요?”

 그녀는 남편의 변화를 믿기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술을 좋아했고 허무주의에 빠져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였기에 이혼을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가정법원으로 향하던 발길을 교회로 바꿔 그 문제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기도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늘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자신도 남편 못지않은 가해자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불쌍히 보이면서 남편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얼마 후, 남편은 술을 끊었고 그들은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 용납하는 사이로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자기 곁에 있는 사람도 잘 영접해야 합니다. 부부나 교우는 한때 서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로 만나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교제가 천국 갈 때까지 잘 지속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큰 성공입니다. 어떤 경로가 되었는지 서로 알고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속에서 이뤄진 일입니다.

 가끔 보면 어떤 분은 일은 많이 이뤘는데 그분의 장례식에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일은 많이 했어도 영접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하면 사람도 잘 영접하고 용납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큰 잘못도 용납하고 품어주셨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타인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주님을 영접하고 이웃을 잘 영접하면 주님의 임재를 더욱 확실히 체험할 것입니다.

< 영접해야 할 대상 >

 본문은 영접의 축복을 잘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영접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1. 하나님

 본문 40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구절을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나를 보내는 이’는 바로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복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축복입니다. 다른 축복의 조건은 부족해도 하나님을 기쁘게 영접하는 마음은 가장 우선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생활에서 너무 다른 것을 바라지 말고 그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겠다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옛날에 한 성자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아무개야! 무엇을 해줄까?” 그가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정말 만족합니다.” 가장 복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을 사모하는 믿음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면 그 신앙에는 결코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표시 중의 하나가 예배하는 태도입니다. 먼저 예배 시간에 늦지 않도록 힘쓰십시오. 정말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이고 자신이 존중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대개 먼저 와서 기다리게 됩니다. 또한 예배드릴 때 옷차림도 단정해야 합니다. 누구를 만날 때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외모를 깔끔하게 꾸미는 것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중시하는 표시 중의 하나입니다.

 그처럼 예배 시간도 잘 지키고 예배할 때 단정한 모습을 하고 예배 태도도 좋게 가지면 하나님이 그 모습을 기쁘게 보실 것입니다. 사람을 영접할 때도 대충 가볍게 영접하면 영접 받는 사람도 기분이 안 좋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영접하면 영접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진심이 더 중요한 것이지만 형식도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1960-70년대 학교에서 가끔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교장의 특명이 떨어져 학생 전체가 환경 미화에 동원됩니다. 그러면 대청소를 하고 화단을 가꾸고 창문을 닦고 복도에 왁스까지 발라 윤기를 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교육감이 학교를 방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가끔 의문이 생깁니다. “교육감 한 사람의 방문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어떤 분은 고등학교 때 그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꼭 이래야 합니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것 아닙니까?” 그때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말도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른과 손님에 대한 예의란다. 잘 보이려는 것을 외식으로만 보지 말고 어른에 대한 예의로 보면 어떻겠니?” 그 선생님의 말이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정의감을 가질 때 무엇을 가장 잘 실수합니까? 생각의 정의만큼 태도의 정의가 따라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쪽 정의가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는 좋은 마음과 더불어 좋은 행동도 따라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의를 갖추는 것을 형식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의를 갖추는 것’과 ‘형식주의’를 잘 구분하고 신앙생활에서 예의도 갖추려고 할 때 신앙도 건강하게 잘 자랍니다.

2. 선지자

 예의를 강조하는 것은 예의를 받는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의를 갖추면 상대방도 기쁘지만 자신도 기쁨이 넘치게 되고 공동체도 건강이 넘치게 됩니다. 이탈리아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가 집에 오자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로마 황제에게 드리는 예우로 영접했습니다. 그런 겸손한 믿음을 통해 최초의 이방인 신자로서 자신의 가족까지 모두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의 종에게 예의를 갖추고 권위를 부여하면 더욱 은혜가 주어질 것이고 말씀을 전하는 자를 소중히 대하면 그 말씀도 더욱 은혜롭게 들릴 것입니다.

 본문 41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지자와 의인으로 보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선택된 사람을 뜻하고 ‘의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삶에 모범이 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결국 “선지자와 의인의 이름으로 선지자와 의인을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선지자와 의인을 하나님의 메신저와 롤 모델로서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선지자나 의인도 다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지가 뭔데.”라고 하지 않고 선지자와 의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선지자와 의인을 잘 영접하면 선지자와 의인과 같은 상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본문은 힘들게 사역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잘 대접하라는 실질적인 도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새 가장 힘들게 사역하는 사역자는 누구일까요? 선교지를 한번 방문해보면 “전방 선교사들이 정말 고생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요새 많은 전방 선교사님들이 후방의 후원이 줄어 고생합니다. 이런 때에 선교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힘써 참여하십시오. 식사할 때 너무 비싼 곳은 가급적 피하십시오. 너무 비싼 식사를 하면 맘이 오히려 불편해지고 맛도 가격에 비해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 식으로 절약한 비용을 선교지로 보내면 선교지에서는 요긴하게 잘 쓰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 대접은 평범하게 하고 선교사 후원은 비범하게 하십시오. 전방 선교사와 같이 힘들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힘써 돕는 것이 주님을 가장 잘 영접하는 것입니다.

3. 작은 자

 본문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를 ‘작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선지자나 의인이나 제자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누구보다 큰 자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핍박과 조롱과 무시를 당했기에 한편으로는 작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힘들게 사는 하나님의 일꾼을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지만 큰 의미에서 없는 자, 약한 자, 병자를 잘 영접하라는 말씀도 됩니다.

 작은 자를 잘 영접하는 것은 기적 집회에 참석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기적을 추구하는 자’보다 ‘기적의 통로가 되는 자’가 더욱 복된 자입니다. 주변에는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겪는 절망과 공포를 이해하고 그들을 기쁘게 영접할 때 진정한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박탈당한 채 어렵게 사는 작은 자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고 하되 특히 별로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더욱 힘써 도우십시오.

 선교가 무엇입니까? 인간적인 보상을 바라지 않고 상류에서 그냥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 뿌린 씨앗이 물을 따라 하류의 적절한 땅에 도달한 후에 거기서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해서 하류에 사는 많은 무명씨들이 그 열매를 수확해 먹게 하는 것이 바로 진짜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도울 때 자기 이름을 빛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돕는 사람의 이름이 빛나면 도움 받는 사람의 이름은 그만큼 깎이게 됩니다.

 북한이 왜 도움을 많이 받으면서도 고맙다는 말보다 거부감을 보일 때가 많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도울 때 너무 드러내서 자기들의 자존심을 너무 꺾는다는 것입니다. 쌀을 보내면서 쌀부대에 보내는 교회 이름을 써 놓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써 놓으니까 받고 싶어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용한 구제를 기뻐하십니다. 탈무드에는 받는 자가 주는 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구제가 참된 구제라고 했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귀한 손님처럼 잘 영접하고 대접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상급을 크게 받습니다. 자기 의사 표현도 못하는 중증장애인을 돌봐주는 봉사자들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이 중증장애인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볼 때가 가장 주님을 깊이 만나는 때라고 한결같이 고백합니다. 신기하게도 장애인의 몸을 만지면 오히려 성령님이 자신을 만지는 듯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마가복음 6장 56절을 보면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처럼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면 자신부터 정신의 불구를 극복하는 놀라운 치유를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치유를 원하면 갚을 길이 없는 작은 자를 귀한 손님처럼 영접하는 마음과 태도를 훈련하십시오.

 어느 날, 한 목회자가 갚을 길이 없는 한 어려운 여 집사를 힘써 도왔습니다. 그녀는 백혈병에 걸렸고 작은 셋방에서 월세로 살면서 주변에 돕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린 사실도 모르고 임신해 딸까지 뇌성마비 증상을 보였습니다. 그녀를 힘써 돌보면서 그 목회자도 남다른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눔의 꿈과 비전과 사역도 커졌고 마음을 치유하는 말씀의 능력도 커졌습니다. 갚을 것이 없는 작은 자들의 곁에 머물면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최선을 다해 나누면 신기하게도 예수님이 그의 곁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 기적의 통로가 되십시오 >

 무엇인가를 나눌 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냉수 한 그릇’도 중요합니다. 무더운 팔레스타인 땅에서 한 그릇의 냉수는 작은 것이지만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자에게 베푸는 작은 것은 주는 입장에서는 작은 것이라도 받는 입장에서는 아주 큰 것이 될 때가 많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란 헌신의 크기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냉수 한 그릇에 담긴 마음과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주는 삶을 실천하고 체질화시키면 하늘의 상급도 크지만 이 땅에서의 보상도 크게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결국 복을 받으려면 어떤 인간적인 수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기주의의 극복입니다. 남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자를 불쌍히 여기며 실제로 자기 호주머니를 비우는 삶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저 말로만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는 것은 정의 같지만 실제로는 정의가 아닙니다.

 어느 날, 정의감이 많은 한 교인이 용산역에 나갔다가 비참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노숙자가 즐비하고 노인들이 지쳐 앉아 있었고 빈 젖병을 빠는 갓난아기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그는 탄식했습니다. “하나님! 왜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가요? 왜 저런 장면을 그냥 보고만 계시면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나요?” 그때 갑자기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들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럼 내가 심심풀이로 너를 세상을 보낸 줄 아느냐? 네가 바로 내 대책이다.”

 “왜 세상이 불공평하냐?”고 따지기 전에 또한 “왜 정부는 대책이 없느냐?”고 따지기 전에 자기 호주머니부터 비우고 자기 손길과 발걸음에서부터 대책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를 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면서 즐겁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돕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진 것이 가장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때로는 ‘특별한 은사’로도 나타나지만 더욱 크게는 ‘인격의 열매’로도 나타나야 하고 가장 크게는 ‘나눔의 삶’으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작은 자를 잘 영접하고 힘써 도울 때 어떤 축복이 약속됩니까? 본문 42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손길을 잊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열심히 빼앗으며 살다가 결국 다 빼앗기는 삶과 열심히 베풀며 살다가 결국 더 얻게 되는 삶입니다. 후자의 삶을 추구하십시오. 작은 헌신을 통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이뤄질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날, 미국의 한 여성이 남편과 함께 결혼 11주년 기념으로 중미 섬으로 휴가를 갔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산소탱크 없이도 6-7분을 물속에서 있을 수 있는 유능한 다이버였습니다. 여행 다음 날, 남편은 해변의 바다 동굴을 살펴보겠다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해변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다로 들어간 남편이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약간 걱정되었지만 남편의 실력을 믿었습니다.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남편이 바다에서 나오지 않자 그녀는 공포에 젖게 되었습니다.

 근처의 안전요원을 불러 몇 시간 동안 바다를 수색했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익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곳에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급히 미국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부모가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호텔에서 혼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극도의 슬픔과 외로움과 상처를 안고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무섭습니다. 외롭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허전한 마음을 달랠 누군가를 보내주셔서 당신이 정말 살아계심을 보여주세요.”

 바로 그때 누군가 호텔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이 든 자메이카 청소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괜히 방해한 것은 아닌가요? 옆방에서 청소하는데 너무 슬프게 우는 소리가 들려서 와봤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녀가 자기 얘기를 하자 그 자메이카 여인은 그녀를 꼭 껴안았습니다. 그때 신기하게도 두려움과 외로움이 급히 덜어지며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순간적인 치유를 경험한 것입니다. 집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남국의 호텔에서 외롭고 두려운 마음이 덜어지면서 그때 그녀는 하나님이 거기에도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자메이카 여인은 큰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시간을 조금 내어 그녀를 살폈기에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의 상처에 치유의 기름을 부어주는 치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천국에 가서 비극도 없고 고통도 없고 질병도 없는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를 원하십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고 상처 입은 사람에게 치유의 기름을 발라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줄 때 하나님은 늘 그의 곁에 머물러주실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교제하고 축제의 삶을 누리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진짜 성령 충만한 삶은 주일예배를 드린 후 교회를 떠날 때부터 시작됩니다. 힘든 사람을 보았을 때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긍휼의 샘이 바로 진짜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는 성령의 기름입니다. 치유는 슬퍼하는 자를 껴안아주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주려는 사람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제 누군가 신음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무심코 지나치거나 돕는 손길을 미루지 마십시오. 긍휼한 마음으로 행동할 때 그로부터 놀라운 치유의 기름이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자신 안에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치유집회에서 치유의 종이란 사람이 내는 증폭된 마이크 소리를 통해 치유 받겠다고 하지 말고 먼저 누군가의 치유자가 되어주려고 하십시오. 치유는 소리칠 때 나타나기보다는 긍휼한 마음과 따뜻한 얼굴과 온순한 말을 통해 나타납니다. 온순한 혀는 치유를 가져다주는 생명나무입니다(잠 15:4). 그처럼 먼저 누군가의 치유의 통로가 되어주려고 할 때 신앙의 차원도 높어지고 진정한 치유의 역사도 나타날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치유의 능력과 가능성을 외면하고 엉뚱한 곳에서 치유의 능력을 구하지 마십시오. 작위적인 치유를 구하면 가장 치유를 받지 못합니다. 치유의 능력자란 사람이 내는 증폭된 마이크 소리보다 낙심한 사람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따뜻한 격려의 말 몇 마디가 더 중요합니다. “성도님! 이제 괜찮아질 겁니다. 지금까지 잘 하셨어요.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겁니다. 힘내세요.” 귀 있는 자는 그 말이 크게 들릴 것입니다. 그 몇 마디의 말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기적의 도구가 되고 누군가의 활력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지 얼마 되지 않아 아말렉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때 산 위에서 지켜보던 모세가 지팡이를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피곤해서 지팡이를 든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아론과 훌이 그 장면을 보고 그때 “하나님! 기적적인 능력과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 전쟁을 기적적으로 이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 대신에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우리가 기적의 통로가 되자!” 그래서 모세 옆에 서서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받쳐주는 기적의 통로가 되어 승리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의 격려가 필요한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의 팔을 붙잡아주고 그들에게 작은 힘을 보태어주면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살면서 “왜 내게 힘을 안 보태주지? 왜 나를 위로해주지 않지?”라고 도움을 요구하는 자세로 살지 말고 그저 말없이 누군가에게 힘을 보태주려고 하고 누군가를 위로해주려고 하십시오.

 기적을 구하지만 말고 아론과 훌처럼 누군가를 위한 기적의 통로가 되어주려고 하면서 삶에서 수시로 다가오는 기적의 통로가 되는 기회를 날리지 마십시오. 치유와 축복은 남을 돕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추구하는 자에게 기적을 주시기보다 누군가를 위한 기적의 통로가 되어주는 자에게 기적을 주실 때가 많고 응답에 집착하는 자에게 응답을 주시기보다 누군가를 위한 응답의 통로가 되어주는 자에게 응답을 주실 때가 많습니다.

 이제 수시로 다짐하십시오. “나는 기적의  통로가 되리라.” 기적을 추구하거나 기적을 취하려고만 하지 말고 누군가의 기적의 통로가 되어주려는 꿈과 비전과 마음을 가지면 그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가 나타나며 그의 기도는 어떤 기도보다 더욱 응답받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영접한 삶을 이웃을 대접하는 삶으로 승화시키고 특히 작은 자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짐으로 진정한 기적과 치유의 주인공이 되고 자신의 소명을 따라 최상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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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8 누가복음 멀티태스킹의 허점 눅2:22-40  강승호 목사  2014-12-26 589
11457 히브리서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자 히12:2  한태완 목사  2014-12-25 1692
11456 누가복음 성탄 예배 눅2:1-11  한태완 목사  2014-12-25 1541
11455 마태복음 아기 예수께 경배 마2:1-12  강승호 목사  2014-12-24 1436
11454 창세기 하나님의 의도를 따르자(송구영신예배) 창35:1-7  최장환 목사  2014-12-24 1927
11453 에배소서 내 생애 최고의 선물 엡2:8  한태완 목사  2014-12-24 1865
11452 역대상 주님의 은혜(성탄절) 대상1:1-34  최장환 목사  2014-12-23 1310
11451 시편 고정관념에서 나오라 시46:1-11  최장환 목사  2014-12-23 609
11450 시편 최후의 승자 시34:1-22  최장환 목사  2014-12-23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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