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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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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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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감정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관념과 차이가 있습니다. 동양사상에서는 사랑의 관념을 인 (仁) 이나 자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
맹자는 <측은(惻隱)의 마음이 인의 시작이다>라고 하여, 남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으로부터 사랑이 전개된다고 주장하였고 불교에서 말하는 자(慈)는 진실한 우정을 가리키고, 비(悲)는 불쌍히 여김과 인정이 많음을 뜻하며, 공자의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라는 가르침에서도 나오듯이, 남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지만, 남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위로하면, 자기가 남에게 품고 있던 차가운 마음도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사상에서는 사랑의 절대성을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공자나 맹자나 불교의 사랑에 대한 관념은 남을 자신과 같이 사랑을 할수 없음과 그 실천 의지와 연관하여 연약한 인간에게는 인이나 자비와 같은 감정의 발로로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요일 4:7) 또한 요한 일서 4:10 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사랑의 절대적인 입장에서는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냄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요일 5: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 주신 이 사랑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극치로 인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차원에서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차원도 아니요 이성적 논증으로 표현하기도 부족한 것으로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시링을 우리가 알기(느끼고 깨닫기 위해) 성경적인 지식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에게 직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알 수 있는 것일 것입니다. (요 5:2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존경과 무한한 감사를 보냄이 마땅하다고 보아야 겠지요.
그리스의 철학적인 사랑의 정의를 살펴 보면 '그리스어로 사랑은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라는 3 단어로 나타내지는데 이것은 사랑의 본질적인 세 위상을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희생을 상대에게 베푸는 사랑이고 필로스는 친구간의 우정적인 사랑이며, 에로스는 정애를 바탕으로 사랑의 결실을 일체를 이루는 정열적인 사랑인데,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대한 정의를 아가페적인 희생의 사랑에만 중점을 두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성경적인 근거로 볼때는 이 세가지 사랑의 종류를 하나님은 다 표현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의 차원에서 표현하는 방식과는 다른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으로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신 희생을 근본을 삼으셨습니다.
이 세가지의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면
첫째는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의 표현은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타인본위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서 일방적인 사랑으로서 상대의 반응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상대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아가페적인 사랑의 증거입니다.(요일 4:10) 이 사랑은 인간이 가질수 없는초월적인 사랑으로서 이미 이루어진 과거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필로스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친구간의 우정을 근거를 둔 사랑으로 예수께서 이사랑도 헌신과 희생을 요구 하고 있습니다.. (요 15:12-15)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표현하시고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가장 칭찬 받는 교회는 필라델비아 교회이인데 "필라 델비아"라는 말은 '형제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 일서에서는 형제 사랑에 대하여 모든 장을 메우는데 그만큼 교회에서는 형제 사랑이 강조되고 있고 이 사랑 역시 자기 헌신의 정신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친구 같이 동행하시며 고난과 어려움을 제공하는 세상과 함께 싸워 주시고 있습니다. 항상 위로와 능력을 성령을 통해 공급하시며 삶을 동반하십니다.
이 사랑은 현세와 현실적인 사랑인 것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셋째는 에로스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하나로 연합하고 결합하려는 갈망을 가지려는 사랑인데 인간의 차원에서의 이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사랑의 결실은 결혼을 통해서 결합하거나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사람에게는 감정의 발로로 통하여 나타나지만 이것은 목적을 위하여 나타나는 감정적인 현상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나타내는 에로스적인 사랑은 성경에서 이 표현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바로 "아가서" 인데 솔로몬이 사랑한 여인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에로스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낸 글입니다. 아가서에서 사랑의 목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은 (아 6: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 입니다.
"속하였다" 이 말은 서로의 결합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함으로 서로의 사랑이 결실을 맺고 완전하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겔 37:17)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보로 삼아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되는 온전한 연합(결합)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사랑은 궁극적인 사랑의 결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속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결국 천국안에 있는 자의 상태 입니다. 평안과 안식이 있는 곳 우리의 심령에 성령이 부어져 이루는 완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궁극적인 사랑은 인간적인 감정의 표현도 아니요 사랑의 행위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루워야 할 신앙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또 이 사랑은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지만 또 이루워 져야하는 소망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맹자는 <측은(惻隱)의 마음이 인의 시작이다>라고 하여, 남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으로부터 사랑이 전개된다고 주장하였고 불교에서 말하는 자(慈)는 진실한 우정을 가리키고, 비(悲)는 불쌍히 여김과 인정이 많음을 뜻하며, 공자의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라는 가르침에서도 나오듯이, 남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지만, 남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위로하면, 자기가 남에게 품고 있던 차가운 마음도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사상에서는 사랑의 절대성을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공자나 맹자나 불교의 사랑에 대한 관념은 남을 자신과 같이 사랑을 할수 없음과 그 실천 의지와 연관하여 연약한 인간에게는 인이나 자비와 같은 감정의 발로로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요일 4:7) 또한 요한 일서 4:10 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사랑의 절대적인 입장에서는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냄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요일 5: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 주신 이 사랑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극치로 인간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차원에서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차원도 아니요 이성적 논증으로 표현하기도 부족한 것으로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시링을 우리가 알기(느끼고 깨닫기 위해) 성경적인 지식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에게 직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알 수 있는 것일 것입니다. (요 5:2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존경과 무한한 감사를 보냄이 마땅하다고 보아야 겠지요.
그리스의 철학적인 사랑의 정의를 살펴 보면 '그리스어로 사랑은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라는 3 단어로 나타내지는데 이것은 사랑의 본질적인 세 위상을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희생을 상대에게 베푸는 사랑이고 필로스는 친구간의 우정적인 사랑이며, 에로스는 정애를 바탕으로 사랑의 결실을 일체를 이루는 정열적인 사랑인데,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대한 정의를 아가페적인 희생의 사랑에만 중점을 두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성경적인 근거로 볼때는 이 세가지 사랑의 종류를 하나님은 다 표현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의 차원에서 표현하는 방식과는 다른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으로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신 희생을 근본을 삼으셨습니다.
이 세가지의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면
첫째는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의 표현은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타인본위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서 일방적인 사랑으로서 상대의 반응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상대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아가페적인 사랑의 증거입니다.(요일 4:10) 이 사랑은 인간이 가질수 없는초월적인 사랑으로서 이미 이루어진 과거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필로스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친구간의 우정을 근거를 둔 사랑으로 예수께서 이사랑도 헌신과 희생을 요구 하고 있습니다.. (요 15:12-15)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표현하시고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가장 칭찬 받는 교회는 필라델비아 교회이인데 "필라 델비아"라는 말은 '형제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 일서에서는 형제 사랑에 대하여 모든 장을 메우는데 그만큼 교회에서는 형제 사랑이 강조되고 있고 이 사랑 역시 자기 헌신의 정신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친구 같이 동행하시며 고난과 어려움을 제공하는 세상과 함께 싸워 주시고 있습니다. 항상 위로와 능력을 성령을 통해 공급하시며 삶을 동반하십니다.
이 사랑은 현세와 현실적인 사랑인 것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셋째는 에로스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하나로 연합하고 결합하려는 갈망을 가지려는 사랑인데 인간의 차원에서의 이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사랑의 결실은 결혼을 통해서 결합하거나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사람에게는 감정의 발로로 통하여 나타나지만 이것은 목적을 위하여 나타나는 감정적인 현상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나타내는 에로스적인 사랑은 성경에서 이 표현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바로 "아가서" 인데 솔로몬이 사랑한 여인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에로스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낸 글입니다. 아가서에서 사랑의 목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은 (아 6: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 입니다.
"속하였다" 이 말은 서로의 결합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함으로 서로의 사랑이 결실을 맺고 완전하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겔 37:17)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보로 삼아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되는 온전한 연합(결합)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사랑은 궁극적인 사랑의 결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속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결국 천국안에 있는 자의 상태 입니다. 평안과 안식이 있는 곳 우리의 심령에 성령이 부어져 이루는 완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궁극적인 사랑은 인간적인 감정의 표현도 아니요 사랑의 행위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루워야 할 신앙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또 이 사랑은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지만 또 이루워 져야하는 소망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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